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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뉴한사랑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청한수호(金請坤)
▶산행일ː2020.08.04(화)
▶산행지ː엄천강(화산12곡)
▶코 스ː용유교-동신대-와룡대-새우섬-한오대-칠리탄-엄천교
▶난이도ː C+
▶누구랑ː뉴한사랑산악회
▶시 간ː10:39∼13:51(휴식.포함 03ː11분)
▶거 리ː약 10.20㎞
▶날 씨ː약간흐림(미세먼지 조금)
☞용유교(들머리)ː경남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 1437
☞엄천강(날머리)ː경남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404-2
① 龍游潭(용유담)
晴雷劈峽鳴(청뢰벽협명)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는 소리 협곡에 울리고
蒼崖萬木陰(창애만목음) 푸른 절벽에는 온갖 나무 우거져 있다.
爲問先賢跡(위문선현적) 선현의 발자취 물어봐도
豈許俗人尋(기허속인심) 어찌 속인에게 찾기를 허하겠는가?
涵泓不見底(함홍불견저) 넓고 깊은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고
龍宮隱若臨(용궁은약임) 용궁이 숨어 있는 듯하네.
時能興雲雨(시능흥운우) 때때로 비와 구름을 일으켜
沛澤慰民心(패택위민심) 그 은택으로 민심을 어루만지네.
② 水潛灘(수잠탄)
古迹驢巖血(고적려암혈) 옛날 마적도사와 당나귀바위의 핏자국을3)
野老至今說(야로지금설) 시골 노인은 아직도 이야기하네.
下上屬玉飛(하상촉옥비) 아래위로 해오라기 날고
出沒錦花列(출몰금화열) 아름다운 꽃무리 숨었다 드러났다 하네.
鐵杖何處拄(철장하처주) 쇠지팡이는 어디를 받쳤던가?
石局空留設(석국공류설) 바위에 새긴 바둑판만 헛되이 남아 있네.
俯看神魂懍(부간신혼름) 내려다보니 정신이 다 혼미하여
頻住行人轍(번주행인철) 자주 멈춰 서서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가네.
2) 용유담의 좁은 협곡을 벗어나면 계곡은 넓어지고 큰 돌들이 시내 가운데 흩어져 있어
물은 돌 사이로 숨은 듯 흐르고 돌은 물 사이에 잠겨 있는 듯하다. 수잠탄이다.
점필재의 시 『용유담 노래 네 절구를 짓다.(龍遊潭曲四絶)』에서 註를 달기를 “용유담은
바로 지난해에 비를 기도했던 곳인데, 그 아래에 수잠탄(水潛灘)이 있다.”고 하였다.
또《동국여지승람》에 “마적사(馬迹寺) : 지리산에 있다.
고승 마적(馬迹)이 살았다는 것으로 명칭을 하였다. 앞에는 유가대(瑜珈臺)가 있고,
밑에는 수잠탄(水潛灘)이 있으며 탄 위는 곧 용유담(龍遊潭)이다.”하였다.
3)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전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옛날 마적도사가 종이에 쇠도장을 찍어서 나귀에게 부쳐 보내면
그 나귀가 어디로인지 가서(엄천사로 갔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식료품과
생활 필수품을 등에 싣고 오게 된다. 그 나귀가 용유담 가에 와서 크게 울면
마적도사가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 나귀가 용유담을 건너오곤 하였다.
하루는 마적도사가 나귀를 보내놓고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용유담에서 용 아홉 마리가 놀다가 싸움을 시작하였다.
용이 싸우는 소리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장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장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와 자연에 도취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를 법도 하다. 나귀가 와서 울었는데도 마적도사는 용의 싸우는 소리, 폭포수
쏟아지는 소리에 나귀의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장기만 두고 있었다. 나귀는 강변에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서 죽었다고 한다.
이렇게 나귀가 죽어서 바위가 되었는데 그 바위가 곧 나귀바위이다. 마적도사는 장기에
몰두하다 나귀가 죽는 줄도 몰랐다고 화를 내며 장기판을 부수어 버렸다.
그 장기판 부서진 조각이라는 돌들이 지금도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출처 : 함양군청 홈페이지)
<세진대(洗塵臺), 일명 "마적바위"와 마적송>
마적송은 함양군 휴천면 지리산 기슭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리산 둘레길인 세동마을에서 송대마을로 가는 중간쯤에 있는 소나무인데요,
높이 약 20m, 둘레 2.6m에 4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진 잘 생긴 소나무예요.
마적송이 가진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함양군에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죠.
마적송이 특별한 데에는 긴 역사를 품은 나무라는 점도 있지만, 마적송이 거대한
바위(세진대,일명 마적바위)에 뿌리를 두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돌에서 나고 자란 나무라니요?
그런데도 400년 이상 살았다고요? 정말 신기하게도 마적송은 다른 기름진 땅에서
나고 자란 소나무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울창하고 생기가 넘칩니다.
마적송 아래에는 수십 명이 앉아서 놀아도 좋을 법한 평평하고 거대한 바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적송의 높은 키 때문에 나무 아래로 큰 그늘이 지는데, 이 덕분에 둘레길을
지나는 등산객, 관광객들이 마적송 근처에서 식사를 하거나 잠시 쉬어갈 수 있어요.
마적송 주변이 ‘소나무 쉼터’라고도 불린다는데,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그런데 이 마적송에는 몇 가지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래 전 ‘마적도사’라는 도사가
한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적송이라는 겁니다. 다른 전설로는 마적도사가
이 근처에서 살면서 바위에서 장기도 두고 쉬다가 나무 아래에서 득도했다고 합니다.
두 전설 모두 재미나지 않나요?
참고로 마적바위는 다른 이름으로 ‘세진대(洗塵臺)’라고 부릅니다. 티끌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평평한 돌이라는 뜻이에요. 세진대 위에 앉아 잠시 쉬어가면 몸과 마음속에
묵혀있던 근심걱정이나 더러움이 모두 사라질 것 같아요~
마적송의 바깥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나무 아래에서 바라보면 용유담이라는
송전마을의 또 다른 관광명소와 멋진 계곡이 보이는데요, 다른 쪽으로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마을과 국도가 한 눈에 보인답니다! 참으로 운치 있고 멋진 경관이죠?(퍼온글임)
③ 屛潭(병담)
永言臺下水(영언대하수) 영언대5) 아래의 강물은
逶迤漸向東(위이점향동) 구불구불 동쪽으로 나아가고
危巖層屛削(위암층병삭) 날카로운 바위는 층층이 쌓여 깎아지른 병풍 같고
噴波細雨懞(분파세우몽) 그 사이로 물결은 가랑비처럼 뿌옇게 뿜어져 나오네.
傲雪松長碧(오설송장벽) 눈을 맞고도 소나무는 늘 푸르고
垂露花自紅(수로화자홍) 이슬이 내려도 꽃은 붉게 피었네.
咫尺先人墓(지척선인묘) 지척에 있는 조상의 묘에서
陰隲願無窮(음즐원무궁) 음덕이 무궁하기를.
4) 지금 동네사람들이 말하는 병풍소를 일컫는 것 같다. 현지답사 결과
그곳이 그 일대 계곡에서는 병풍소라는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5) 병담 위 수십 길 되는 큰 바위 위에 약간의 축대를 쌓고 영언대(永言臺)라 이름하였다는
말이 강용하의 영언대기(記)에 나온다. 이 외에도 그가 풍치가 뛰어난 바위 위에 축대를
보완하고 이름을 붙여 음영소요한 곳으로는 아래의 와룡대(臥龍臺)와 또 모화대(慕華臺)가 있다.
④ 臥龍臺(와룡대)
兩賢可居地(양현가거지) 두 현인(*정여창, 김일손)이 살 만한 땅7)이라고 하여
高名此其表(고명차기표) 높이 이름난 곳은 바로 여기를 가리키네.
門前臥龍石(문전와룡석) 문앞의 와룡석은
千載知者小(천재지자소) 천년 동안 아는 이 드물었고
神物擅地靈(신물천지령) 신령한 물건이 땅의 영기를 독차지하여
林壑自窈窕(임학자요조) 숲과 골짜기는 얌전하네.
三千古道恨(삼천고도한) 삼천 년 옛 道가 한스러워
夕陽問啼鳥(석양문제조) 저물녘 우는 새에게 물어본다.
6) 문정동 문하마을 앞 냇가에 있다. 강용하가 이름 붙였다.
지리다방〈호진이랑옥자〉님의『와룡대』 글을 참조하시라.
7) 1489, 김일손 <속두류록> 「산이 북쪽에서 우뚝 솟아 세 봉우리가 솟았는데, 그 아래 수십
호의 민가가 있어 마을 이름은 탄촌(炭村)이고, 앞으로 큰 내를 임해 있다. 백욱(*정여창)은,
“여기가 살만한 곳이다.”하므로, 나는 “문필봉(文筆峯)이 앞에 있어 더욱 좋다.”하였다.」
⑤ 楊花臺(양화대)8)
東麓復西馳(동록부서치) 동쪽 산기슭에 있던 해가 다시 서쪽으로 달려
蒼壁多夕暉(창벽다석휘) 푸른 절벽 가득 석양이 비치네.
弱柳身全倒(약류신전도) 연약한 버드나무는 물위로 몸을 뒤집고
奇巖勢欲飛(기암세욕비) 기암은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솟아 있네.
浮沙占有年(부사점유년) 저기 뜬모래 같은 신세가 (지금은) 몇년 동안 한 자리에 붙어 있지만
去來正無依(거래정무의) 가고 옴에 진실로 의지할 곳이 없도다.
幾與薇山子(기여미산자) 미산자9)와는 얼마나 함께 할 수 있을까?
觀魚樂天機(관어낙천기) 고기 노는 모습 구경하며 천명을 즐기리라.
8) 와룡대를 지나 동으로 흐르던 엄천강이 북으로 꺾이면서 장재동의 물과 합쳐
깊은 소(沼)를 이루었고 넓은 바위벽이 서쪽으로 향하여 서 있고 강가에는 흰 모래가
펼쳐져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새우섬 바로 위쪽이다.
절벽에 석양이 비친다 하였으니 여기가 맞을 것이다.
지형상 버드나무는 건너편 대(臺)가 아닌 물 이쪽 언덕에 있었을 것이다.
9) 薇山子(미산자)는 정환주(鄭煥周 1833-1899)를 가리키는 듯하다. 호가 미산이며, 본관은
하동이고, 함양에 살았다. 강용하와는 동문수학한 절친한 벗으로 서로 많은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문집 《미산유고》를 남겼다. 그 역시 동일한 운(韻)을 사용하여 『화산십이곡』을 지었다.
⑥ 鰲嶼(오서)10)
三神海外沒(삼신해외몰) 삼신산은 바다 밖에 잠겨 있고
有嶼可藏屋(유서가장옥) 여기 섬 하나 있어 숨어 살 만한데
年來頗窘甚(년래파군심) 갈수록 자못 궁색함이 심해져
詩成未卜築(시성미복축) 시는 이루어도 집은 짓지 못했네.
種蔗秋味熟(종자추미숙) (이곳에) 사탕수수를 심어 가을에는 익은 것을 맛보았고
種栗團如玉(종율단여옥) 밤을 심었더니 둥글기가 옥 같다.
山空月明多(산공월명다) 빈산에 달은 매우 밝고
活畵共君讀(활화공군독)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그대와 함께 독서하고파.
10) 새우섬을 가리킨다. 오대(鰲臺) 또는 鰲嶼(오서 *서(嶼)는 섬)는 신선이 사는 별부를 뜻한다.
자라 오(鰲)字가 쓰이는 것은 다음의 신화로 인해서이다. 《열자(列子)》 “발해 동쪽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에 다섯 개의 산이 있다. 언제나 조류에 따라 위아래로
표류하므로 천제(天帝)가 다섯 개의 산이 서쪽으로 흘러가 신선이 사는 곳을 잃을까 걱정하여
15마리의 자라[鰲]를 시켜 번갈아 가며 머리로 떠받치도록 하였다.”
*〈꼭대〉님의 문화유적명소/「지리산 자락 士禍의 흔적 2. 한남군」편을 참조하시라.
한오대(漢鰲臺)란 큼직막한 각자
한남의 한漢과 오서의 오鰲를 따서 이름지은 것으로 보인다.
漢鰲臺契案序(한오대계안서) 한오대 계모임 문서에 쓴 서문을 보면
조선말의 향촌 지식층이 한남군을 어떻게 평가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⑦ 漢南津(한남진)11)
王孫春草岸(왕손춘초안) 왕손이 머물렀던 강언덕에 봄풀은 돋아나고
空有鷓鴣遊(공유자고유) 허공엔 자고새가 무리지어 날고 있을 뿐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거마(車馬)의 시끄러움 없으니
人境自淸幽(인경자청유) 사람 사는 세상임에도 맑고 그윽하네.
月隱孤舟虛(월은고주허) 달은 숨고 외로운 배는 비었는데
風悲萬竹稠(풍비만죽조) 빽빽한 대숲에 바람소리만 슬프구나.
誰傳六宗英(수전육종영) 누가 여섯 종친12)의 이름을 전하여
竝垂於綢繆(병수어주무) 빈틈없이 후세에 길이 남게 할까?
11) 마을 노인분들이 마을 앞 한남교 부근에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12) 육종영(六宗英) : 1791년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향된 왕실 종친 6명/
안평대군·금성대군·화의군 영(瓔)·한남군 어(棜)·영풍군 천(瑔)·판중추원사 이양(李穰)
⑨ 師良浦(사량포)16)
師良門弟賢(사량문제현) 스승은 훌륭했고 제자들은 어질었던
世遠我心傷(원세아심상) 그런 세상이 멀어져 나는 마음 상하네.
嗟嗟懷襄界(차차회양계) 아, 홍수에 뒤덮여 있는 세상
孰能障瀾狂(숙능장란광) 누가 저 미친 물결을 막을 수 있을까?
沙暖鷺熟夢(사난로숙몽) 모래가 따뜻하여 백로는 깊은 꿈에 빠졌고
山明木生光(산명본생광) 산색은 밝고 나무는 빛나네.
何日良師遇(하일양사우) 어느날 좋은 스승을 만나
庶幾吾道張(서기오도장) 나의 道를 신장시킬 수 있었으면….
16) 그 音으로 미루어 볼 때 사량포는 운서보 아래의 사랑소(沼)가 틀림없어 보인다.
건너편에 바위가 강쪽으로 약간 튀어나오고 작은 모래톱이 있는 곳
⑧ 獨立亭(독립정)13)
湖上獨立亭(호상독립정) 호수 위의 독립정
嘉名誰所始(가명수소시) 아름다운 그 이름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나?
明則有禮樂(명즉유예악) 밝은 시절에 예악을 베풀던 곳이
幽則有神鬼(유즉유신귀) 어두운 시절엔 귀신들의 차지가 되었구나.
求馬先買骨(구마선매골) 천리마를 구하려면 먼저 말뼈를 사야 하고14)
獲禽恥遇詭(획금치우궤) 짐승을 잡을 때도 속임수를 부끄러워해야 하리.15)
千載從容子(천재종용자) 천년 동안 조용하던 곳에 (독립정을 세웠으나)
空有舊橋圮(공유구교비) 무너진 옛 다리만 부질없이 남아 있네.
13) 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게 흐르는 운서보(堡) 바로 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 전국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 재위 BC.311-279)이 천하의
현명한 인재를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곽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어떤 임금이 千金으로 천리마를 구하려 했지만 3년이 되도록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近臣이 자기가 구해 오겠다고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보내어 과연 석달 만에 천리마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죽은 말이었는데도 그 신하는 오백금이나 주고 사와 임금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임금은 크게 노하여 말하였습니다. “내가 구한 것은 산 말인데, 죽은 말을
그것도 오백금이나 주고 사왔단 말이냐?” 신하가 대답하였습니다. “죽은 말도 오백금이나 주고
사는데 하물며 산 말이야 어떻겠습니까? 천하가 반드시 대왕이 말을 살 줄 안다고 여기고 곧
좋은 말이 모여들 것입니다.” 과연 1년도 지나기 전에 천리마가 세 필이나 들어왔습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로 선비를 모으고 싶거든 저 곽외에게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제가 섬김을 받는다면
저보다 어진 이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어찌 천리를 멀다 하겠습니까?」
15) 「옛적에 조간자가 왕량으로 하여금 총애하는 신하 해(奚)와 함께 수레를 타고 사냥하게
하였는데,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고 해가 복명하기를 “천하에 형편없는
말몰이꾼이었습니다.”하였다. 혹자가 왕량에게 고하자 왕량이 다시 하겠다고 청하였다.
이번에는 하루아침에 열 마리의 짐승을 잡자 해가 복명하기를 “천하에 훌륭한
말몰이꾼이었습니다.”하니, 간자가 “내 그에게 오로지 너의 수레만을 몰도록 하겠다.”하고는
왕량에게 말하였다. 왕량이 응낙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를 위하여 법도에 맞게 수레를
몰았더니 종일토록 한 마리의 짐승도 잡지 못하였고, 그를 위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짐승을
만나게 하였더니 하루아침에 열 마리를 잡았습니다. … 나는 소인과 함께 수레를 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니 청컨대 사양하겠습니다.”하였다.」 (출전 《맹자》〈등문공 하〉편)
*주자의 주에 따르면 부정한 방법(詭遇)이란 짐승과 나란히 달리면서 쏘아 맞히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⑩ 七里灘(칠리탄)17)
高名灘七里(고명탄칠리) 높은 이름 칠리탄에는
知有處士宅(지유처사택) 처사가 사는 집이 있다는 것을 알겠네.
一條江通路(일조강통로) 강가엔 한 줄기 길이 통하고
四圍山立壁(사위산립벽) 사방엔 산이 벽처럼 서 있다.
古墟炊煙消(고허취연소) 옛 폐허에는 밥 짓는 연기 사라지고
野渡芳草碧(야도방초벽) 나루터엔 향기로운 풀만 짙다.
莫誇麒麟功(막과기린공) 기린각18)에 걸릴 만한 공적을 자랑 말라
潛德最先闢(잠덕최선벽) 드러내지 않은 덕이야말로 가장 먼저 사람의 마음을 연다오.
17)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의 벗 엄광(嚴光)은 황제의 초빙을 마다하고 절강성 부춘산에
은거하였다. 그 앞을 흐르는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후세에 엄천(嚴川)에도 엄광의 고사를 사모하여 동강, 엄뢰(嚴瀨), 칠리탄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이러한 지명은 다른 것(나머지 11개소)과 달리 특정지점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엄천 중에서도 일정 부분을 아우르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칠리탄은 현재의 엄천교 부근의 곧게 흐르는 강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18) 한(漢)나라 때 기린각을 짓고 공신들의 초상을 걸어 두었다 함.
그런 功보다 엄광의 덕망이 더 낫지 않느냐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