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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서안사건직후 장개석은 이전의 이른바 "선안내후양외"(우선 안을 공고히 하고 후에 외적에 대항한다)라는 정책을 버리고 드디어 중국을 하나로 뭉쳐 일본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은 만주국을 발판으로 대규모 육군을 파병하여 점차 남하하고 있었다. 또한 한편으로 상해에 파견된 해군이 제 2전선을 열어 양자강과 수도 남경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중국의 상황은 매우 위급했고 장개석은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해 활로를 열어야 했다.
그가 보기에 상해 파견군은 북중국에 전개하고 있던 일본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하였다. 북지나에서 일본이 본격적으로 남해해 오기전에 우선 상해의 일본군을 구축한다면 남경에 대한 위협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중국 인민과 중국군의 사기를 드높일 수 있었다. 게다가 상해에서 남경에 이르는 일대에는 대규모의 중앙군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들은 북중국의 군벌연합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원, 장비면에서 잘 장비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독일 군사 고문단에 의해 훈련된 총통직속의 최정예 사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같은 시각 일본 정부도 상해는 제 1차 상해사변이후 정전협정을 통해 상해일대에 중국측의 군대주둔이 금지되고 방어시설 구축이 불가능해짐으로서 공략하기가 편리한 곳으로 보여졌고 또 상해는 장개석의 수도 남경과 가깝기 때문에 곧장 남경까지 공략해 전쟁을 조기에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측은 충돌하여 제 2차 상해사변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상해에는 일본 해군 제 3함대가 주둔하여 상해일대의 양자강을 경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군휘하의 "상해특별육전대"라고 불리는, 해군만의 육상전투 전문부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며 병력은 약 2500명이었다. 일본군외에도 공동조계에 영국군 2600명, 미군 2800명, 프랑스군 2000명, 이탈리아군 800명등이 주둔하여 상해는 조계를 중심으로 "국제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장개석의 군대가 상해주변지역에 주둔을 시작하면서 양측의 분위기는 점차 악화되었고 1937년 7월 24일을 시작으로 일본은 상해침공의 명분을 쌓기위한 공작에 돌입했다. "虹橋空港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군 해병대 측은 사병 한명이 실종되었다며 24일 국민정부에 항의했고 이틀 후 국민정부 측은 실종된 사병을 수색, 일본 영사관에 넘겼다. 이 일이 어렵게 되자 일본군 해병대는 재차 공작을 수행하였다. 8월 9일 大山勇夫 중위가 해군 1명을 거느리고 중국군용비행장에 차를 몰고 들어가려 하자 중국군이 응사 모두 이들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의 홍교공항이랍니다.
이 사건이 동경에 전해지자 해군은 육전대증파를 결정하고 항공공격의 준비도 시작했다. 동시에 육군에 대해서도 증원을 요구했다. 육군은 처음에는 거절했다. 평진방면의 전투가 우선이었고 이 방면이 정리되면 휴전교섭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류민보호를 명분으로 2개사단을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이것이 8월 10일의 일이었다. 이 군대는 상해파견군이라 명명되어 8월말에 순조롭게 상해에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에서 장개석이 선수를 쳤다.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일본식으로 말하자면 대본영)을 구성하고 장개석을 주석으로 작전, 지휘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15일에는 전국에 총동원령이 선포되고 중국공산군 총사령관 주덕은 장개석의 지휘하로 들어감을 선언하면서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명명되었다. 그 규모는 3개사단(제 115, 120, 129사단) 약 4만명정도였다.
장개석은 처음으로 전 중국군을 통일지휘하게 되어 일본과 전쟁을 하는 대의명분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롭게 군사행동을 하고 작전지역의 민중공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서 중국측의 항일능력과 세력은 완전히 통합되었다.
당시 중국군은 5개 전구 약 350개 보병 사단(1개 사단은 정원은 1만. 실제는 6000~8000명) 300만명에 달했다. 그외에도 독립여단과 수백만에 달하는 지방 민병대가 있었다. 공군은 약 500여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미제 커티스 복엽기, 소련제 I-15, I-16, 영국제, 프랑스제, 이탈리아제등등 각국에서 원조받은 항공기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구식 복엽기였다.(그중에서 SB쌍발폭격기는 가장 위협적으로 39년 10월 키쿠키앙 비행장 폭격에서 한번에 100대이상의 일본기들을 지상에서 박살내었다.)
광동지방을 기반으로 한 중앙군이 약 30만정도였는데 이들은 황포군관학교출신으로 지휘되었으며 장개석과 남경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았다. 그중에서도 총통직속의 8개사단(제 3, 6, 9, 14, 36, 87, 88, 예비사단) 8만가량의 친위대는 중국군 최정예부대로 독일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되었으며 기관총과 자동소총, 박격포로 무장하여 중국군에서는 그나마 근대전에 걸맞는 부대였으며 질적으로도 일본군과 대등했다. 이들이 보유한 독일제 37mm 대전차포는 일본군 전차의 천적이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북벌과정에서 이해관계에 의해 뭉쳐지거나 투항으로 국민군에 흡수된 군벌 군대였다. 대표적인 것이 장학량의 동북군, 염석산의 산서군, 이종인 백숭희의 광서군, 류상의 사천군, 용운의 운남군등이었다.
8월 12일에 중국군 2개사단이 상해북정거장에 도착해 공동조계밖 사천로에서 일본 상해파견군 본대와 대치하였다. 매일 1,2개 사단이 계속 도착함으로서 총 5만에 달하는 병력이 집결하였다.(최종적으로 60~70만명이 집결)
13일 중국군은 일본군 본대 북측의 팔자교근방에서 공격을 시작해 그것을 시작으로 도처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14일 중국공군은 제 3함대에 대해 공습하여 기함 출운을 비롯해 일본 함정들을 폭격했다. 명중탄은 거의 없었으며 한발이 빗나가 프랑스조계내의 대세계라는 호텔 부근에 떨어져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5일 오전 3시 일본 해군항공대 폭격기 20대가 남경상공을 날아 비행장을 폭격했다. 이는 1천km이상의 장거리를 비행하여 수도 남경을 폭격함으로서 일본 항공능력을 과시한 것이었다.
같은 날,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발진한 14기의 폭격기가 남창비행장을 폭격했고 왕복 거리 1400km의 장거리였다. 폭격기는 96식 육상공격기였다. 이런 장거리 폭격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그 예가 없는 것이었다.
8월 30일까지 남경을 중심으로 상해에서 소주, 항주, 통구, 남창, 구강, 서주, 한구등을 지속적으로 폭격했다. 해군은 중국 공군의 암호를 거의 해석해 중국공군의 비행기가 집중되는 장소, 시간에 맞추어 공격했다. 이 공폭으로 남경정부는 오지로 이전할 준비를 시작했다.
지상에서는 약 5000명으로 증강된 해군 육전대가 중국군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고 있었다. 중국군은 일본 육군이 상륙하기전에 이들을 일소하려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약 5만명에 달하는 중국군이 5000명의 육전대를 포위해 유리하게 전투를 이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총통친위대인 정예 제88사단이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육전대에게는 대구경중포가 없었으나 그 점에서는 중국군도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무기는 기관총, 박격포, 속사포, 경포등이었다. 대신 육전대는 중국군에게는 없는 전차와 장갑차를 가지고 있었고 제 3함대의 항공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압도적인 열세에서도 진지를 사수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카가, 류죠우, 호쇼등 대형공모도 증원되어 15일부터 공습을 시작했다. 중국공군의 전투기들도 발진하여 이들과 대항해 혈전을 벌였다. 그들은 중과부적으로 대부분이 격추당했으나 일본측의 피해도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한편, 일본 상해파견군은 제 3사단, 제 11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전차, 중포, 공성용 중포, 고사포, 항공부대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령관은 마쓰이 이와네대장이었다.
수송에는 전함 나가토, 무츠 2척, 중순양함 6척, 경순양함 4척이 동원되었다. 통상적으로는 수송함이 수송하고 구축함이 호위하나 고전중인 육전대를 한시라도 빨리 구원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편성된 것이었다.
이들은 상해북방 오송해안가에 상륙했는데 상해정전협정으로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였으나 1, 2년전에 진지를 구축해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륙은 8월 23일부터 도착한 차례로 시작했으나 군함에서 상륙용 주정에 탑승할 때부터 중국측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물론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맹렬함은 일본군으로서도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송에 상륙한 제 3사단은 17일동안 고작 3km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1일 100미터에서 600 미터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제 11사단 선견대는 상륙 5일간 6km를 전진하여 주요 지점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이후 1개월이 걸려도 그 이상을 전진하지 못할 정도였다. 11사단 44연대는 육탄공격을 감행했고 폭파 결사대까지 보내 27일 만에 주요 지점을 점령할 수 있었다. 12연대는 10일간 병력 3400명에서 900명으로 감소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에 깜짝 놀랐다. 그것은 완전히 예상밖이었다. 참모본부는 더 많은 증원을 요청했다.
9월 10일에는 대만군에서 1개 연대가 급히 증원되었고 본국에서 3개사단이 동원되었다.(제 9사단, 제 101사단, 제 13사단) 제 101사단과 제 13사단은 30대후반의 예비역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특설사단이라 불리었는데 높은 연령대로 제대로 된 훈련도 없었고 지휘관도 현역출신은 거의 없어 동경의 참모본부입장에서도 도저히 전력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새로 편성된 3개 사단이 수송되는 동안 일본군의 고전은 갈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중국군은 매일 1, 2개 사단 규모(1개 사단은 1만정도)의 병력이 계속 증원되었고 장개석 직속의 도이치식 훈련을 받은 정예부대도 건재했다. 증원부대는 광동, 광서, 호남, 사천, 강서등의 각성에서 차례로 도착했다. 전장에는 도처에 설치된 대형의 크리크가 일본군의 진전을 방해했다. 일본군이 필사적으로 공격해 하나의 클리크를 점령하면 다른 크리크가 그것을 공격해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크리크는 폭 5미터에서 큰 것은 200미터에 달했고 그것은 하천, 가교등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전은 하고 있었으나 제공,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측 것이었다. 양자강 해안가는 일본 전함의 사정거리내였다. 그들의 지원사격으로 일격에 600명이 전사했다.
중국군의 사기는 여전히 왕성했지만 일본군에 대항할 중포도 없었다. 중국군은 필사적으로 육탄으로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점차 진격에 나섰다. 9월말 일본군은 크리크를모두 제압했고 중국군은 주력을 대양진 부근에 집결시켰다.
대양진은 상해시가지에서 4킬로 서북에 있었고 인구 4만정도의 마을이었다. 남경-상해를 잇는 철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처음부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지였다.
상해파견군은 이 대양진에 포진한 중국군에 대한 공략을 시작했다. 제 9, 11, 13사단과 대만 파견군이 참가하였다. 이 중에는 155mm이상의 대구경 중포부대도 있었다.
이런 중포를 120문이나 동원하였고 탄약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포격은 콘크리트 요새를 차례로 파괴하였다. 또한 육해군 항공대를 총동원해 3일간 맹폭격을 가했고 이것은 상해전을 통틀어 최대 규모였다.
10월 23일부터 총공격을 시작해 25일에는 제압했다. 중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소주선까지 퇴각해 남안에 포진했다. 한편, 그동안 8개월 반이나 포위되어 있던 육전대도 처음으로 공격에 나서 북정거장의 중국군을 공격했다. 해군 항공대의 지원아래 북정거장, 도서관, 철로관리국등 주요 건물들을 점령했다. 중국군은 "800장사"라는 결사대를 편성해 4일간 혈전을 벌인후 장개석의 명령으로 조계로 후퇴했다. 조계내에서는 일본군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중국군이 일본군의 맹공을 받아 대양진을 방어하고 있을때, 제 10군은 소주천 남안을 따라 상해전선을 향하고 있었다. 상해 남방 항주만에 상륙해 중국군의 배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제 10군은 제 6사단, 제 11사단과 독립산포병 제 2연대, 중포 제 6여단, 제 1, 제 2 후비보병단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병력은 1개사단당 15,000~2만으로 총병력은 약 8만에 달하는 것이었다.
참모본부는 제 10군을 항주만에 상륙시키는 한편, 상해에도 제 16사단을 증파하였다. 제 16사단은 11월 13일 상해복방 75km의 백유구에 상륙했다.
항주만 상륙지점인 금산위에는 중국군의 견고한 진지는 없었다. 11월 5일 제 10군은 해안가를 따라 손쉽게 상륙하였다. 그들은 상륙과 함께 "일군 100만명 항주만북안에 상륙!"이라는 애드벌룬을 띄워 중국군을 위압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상해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중국군은 포위될 것을 두려워한 11월 9일 장개석의 명령에 따라 후퇴를 시작했다.
약 3개월에 걸친 상해전은 중국군의 후퇴로 종결되었다. 장개석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제공권과 화력의 크나큰 차이로 인해 엄청난 상처만을 남긴채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한번 후퇴하기 시작한 중국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채 도주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인파의 물결을 막은 것은 중앙군 소속의 독전대였다. 기관총이 총열이 벌겋게 달구어질때까지 불을 뿜었고 아군의 총탄에 적어도 1만이상이 쓰러졌다. 그래도 후퇴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고 결국 남경의 방위조차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상해전 기간중 일본군의 피해는 11월 8일까지 전사자 9115명, 부상 31257명 계 40672명이었다. 중국군의 피해는 총 85개 사단이 동원되어 사상자 33만 3500여명을 냈다. 게다가 장개석 직속의 정예부대를 비롯한 중앙군의 60%를 잃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상해를 잃은 것은 수도 남경을 찌르는 큰 위협이 되었고 같은 시기 화북에서도 전선이 점차 확대되어 남하해 오는 일본군 북지나방면군에 대항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중국군이 북상하고 있었다.
[출처] 중일전쟁의 막을 연 상해전투|작성자 욱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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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입고도 일본군 윗대가리 하나 못죽였는데, 윤봉길 혼자 폭탄으로 해치워버리니 중국민 입장에선 정말 허탈했겠네요.
그래서 장개석이 "중국의 백만대군이 못 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고 극찬하기도 했죠. 그리고 홍구 공원 의거 사건으로 인해서 장개석은 상해 임시정부에 대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습니다. 독립 운동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사람이라면 그래서 전 단연 윤봉길 의사를 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