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대통령
秘話 발굴 프란체스카 내 남편 李承晩은 이런 사람이었다
권총·극약 지니고 잠자리에… 6代 독자인 李박사로부터 『아들 낳지 못했다』고 구박받기도…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보여준 超人的 절약생활… 『저렇게 살려면 우리는 대통령 안 한다』 (경무대 사람들)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 리. 가난한 망명정객의 비서였으며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그녀에 대한 평은 그리 후하지 못하다. 그녀의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알뜰한 면모까지 몰락한 자유당 정권에 대한 가혹한 평가 속에 함께 묻혀버렸다. 초대 퍼스트 레이디가 바라봤던 건국 대통령은 '정치를 하기에 너무 정직한 사람'이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장 큰 관심은 대통령의 건강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후 22년간 지극히 한국적인 할머니로 살다 간 프란체스카의 증언 등을 통해 李承晩 建國 대통령을 만나본다.
자동차 경주 선수와 결혼했다가 이혼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雩南(우남) 李承晩(이승만) 박사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여사. 유능하고 헌신적이며 알뜰하다는 평가에서, 人(인)의 장막으로 대통령의 눈과 귀를 막아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장본인이라는 평가까지 그녀에 대한 世評(세평)은 극단을 오간다. 자신의 대학원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책을 낸 고승현(단국대 대학원 정외과 졸업)씨는 책 서두에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사실 그리 인기 있는 영부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문화와 풍습이 다른 나라의 영부인으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오해와 편견에 둘러싸여 살았다. 한때는 외신에서 '한국의 마리 앙트와네트'로 표현할 정도로 권력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여인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프란체스카 여사는 여러 가지 소문들 속에서 국민의 비난을 받는 영부인이었다.' 2001년 3월을 사는 사람들은 프란체스카를 어떻게 평가할까. 비난도 찬사도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그녀가 떠난 지 겨우 9년이 지났으나 사람들은 최초의 퍼스트 레이디 프란체스카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서울 이화장을 방문하여 李承晩 대통령의 아들 李仁秀(이인수) 박사 (정치학·前 명지대 교수)와 며느리 曺惠子(조혜자) 씨를 만나 프란체스카 여사에 관해 새로운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했을 때 曺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에 대해 국민들은 아는 게 없어요. 뭐든지 다 새롭다고 보면 돼요'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교외인 서스도르프에서 1900년 6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루돌프 도너는 철물무역을 하면서 소다水를 개발하여 청량음료 공장을 경영했다. 딸 셋 가운데 막내인 프란체스카가 수학과 외국어에 재능을 발휘하자 아버지는 家業(가업)을 물려주기 위해 상업학교에 진학시켰다. 어릴 때 남자처럼 키우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잘라주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상업학교 졸업 후 농산물중앙근무소에서 근무하다가 스코틀랜드로 유학, 그곳에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획득했다. 독일어와 불어에 능통한데다 속기와 타자 특기도 보유했다. 그녀는 20세에 자동차 경기선수 헬무트 뵈링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이혼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결혼 반지 값도 신부 부담 그녀는 1933년 2월 21일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여행을 하다가 제네바의 드 루시 호텔 식당에서 李承晩 박사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에서 국제회의가 있어 호텔 식당마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李박사는 불어로 감사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으며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본 아페티』(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한 후 음식을 먹었다. 절인 배추와 소시지 하나, 감자 두 개의 간소한 식사를 하는 기품 있는 동양신사에게 호감을 느낀 프란체스카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를 물었다. 신사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프란체스카가 여행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코리아』였던 것이다. 그녀가 '코리아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하고 화제를 꺼내자 李박사는 몹시 반가워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다음날 신문에 李承晩 박사에 관한 기사가 실리자 프란체스카는 그 기사를 오려 호텔 안내 데스크에 맡겼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차를 마시게 되었다. 李박사가 어려운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프란체스카는 봉사를 자청, 몇 건의 서류를 타이핑해 주었다. 계속 돕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으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귀국을 서두르는 바람에 그녀는 예정을 앞당겨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 몰래 김치맛 나는 사워크라푸트 한 병을 호텔 고용인에 맡기고 떠났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뒤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의 감시를 피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회사를 수신처로 제네바에 있는 李박사와 서신을 교환했다. 그해 7월 7일 모스크바 가는 길에 비자를 받으러 빈에 왔던 李박사는 프란체스카와 재회했다. 李박사는 그날 프란체스카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고 일기에 그날의 만남을 '비엔나 연사'(戀事, the Vienna Affair)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은 많은 어려움과 반대를 물리치고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李박사는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프란체스카의 어머니는 '나이가 지긋한 동양신사라 아무 탈이 없을 줄 알고 합석했는데 내 귀한 막내딸을 그토록 멀리 시집 보내게 되다니'라며 애석해 했다. 후일 프란체스카는 며느리 曺惠子씨에게 '친정 어머니나 언니들이 알았으면 기절했을 일이지만 실은 내 결혼 반지 값은 신부인 내가 지불했다'고 일러주었다. 결혼비용도 모두 프란체스카가 부담했다. 李박사로부터 받은 선물은 녹두알만한 제주도産 진주알 한 개가 전부였다.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李承晩: 아내에게 '부엌일은 못 돕는다' 선언 李承晩 박사는 1875년 황해도에서 6代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양녕대군 16세손으로 아버지 李敬善(이경선)씨는 譜學(보학)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였으며 살림은 넉넉지 못했다. 李承晩은 열다섯 살 때 부모가 간택한 동갑나기 朴承善(박승선)씨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홉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후일 두 사람은 이혼했다. 李承晩은 소년기에 科擧(과거) 등과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하였다. 1894년 터진 淸日(청일)전쟁 와중에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2월 주변의 권유로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이후 미국에 유학하여 조지워싱턴大(학사)와 하버드大(석사), 프린스턴大(박사)에서 국제정치학과 神學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李承晩은 한국인으로서 박사학위 최초 소유자가 됐다. 그래서 대통령 시절에도 李박사로 불렸다. 李承晩 박사는 1910년에서 1912년까지 2년간을 제외하고 광복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생활하였다. 아들 李仁秀 박사는 '東京제대 출신들과 일제 치하를 겪은 사람들이 일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과 달리 일제를 거치지 않은 李박사는 우리나라의 눈으로 세계를 보았다'고 평가했다. 『李承晩의 삶과 꿈』의 저자 연세대 국제대학원 柳永益(유영익) 석좌교수는 '李承晩은 보기 드문 언론인 출신 학자형 정치가'라며 '同시대의 다른 독립운동가 혹은 외국의 최고지도자에 비해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평생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했다'고 기술했다. 이와 함께 '배재학당 시절부터 西向路線(서향노선), 즉 개혁 노선을 밟았다'고 평했다. 조선시대 서당공부로 시작해 미국에 유학, 박사학위를 딴 李承晩은 개혁적이면서 보수적인 면모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양반가의 6대 독자였던 李박사는 결혼하자마자 프란체스카에게 '한국의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아내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일러주었다. 프란체스카도 친정에서 '정숙한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부엌일을 도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 남편의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李박사는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칭찬하거나 아내가 남편 자랑을 하면 바보 취급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남편을 칭찬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일체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아내의 도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李박사는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말과 함께 '안사람은 그저 보이기나 할 따름,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고 아내에게 강조했고 프란체스카도 이 말을 지키려고 애쓰면서 살았다. 며느리를 '바지부인'이라 놀리기도… 李박사가 '여자는 치마를 입는 것이 아름답고 건강에도 좋다'고 말해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바지를 입지 않았다. 그녀는 후일 며느리에게도 되도록 치마를 입으라고 당부했는데 어쩌다 며느리가 바지를 입으면 '바지부인'이라고 놀렸다. 李박사는 유머와 기지가 있는 명랑한 여성을 좋아하면서도 말없이 조용한 여성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대통령이 되어서 동양에서 제일 먼저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초대 내각에서 여성장관을 탄생시켰다.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도 여성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李承晩 박사가 서양 여성과 결혼하자 독립운동 동지들과 동포들의 실망이 컸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에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사랑하는 가족과 동포들의 축복을 받지 못한 채 결혼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남다른 고충과 애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고생을 안 해본 나는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 결혼 후 가장 서글펐던 것은 하와이 동포들이 李承晩 박사를 초청하면서 '혼자만 오시라'는 전보를 보냈을 때였다. 독립운동 동지들이 '서양 부인을 데리고 오면 모든 동포들이 돌아설 테니 꼭 혼자만 오라'는 전보를 두 번씩이나 보냈을 때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한 친정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다'고 책에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李承晩 박사는 하와이에 아내와 동행했고 예상과 달리 부두에는 동포들이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다. 李박사와 결혼한 서양 여자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동포들은 두 사람을 초대하거나 김치를 보내주기도 했다. 당당한 무국적자의 위엄에 압도당하다 신혼 초에 李承晩 박사 부부는 미국의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동포들을 방문했다. 연세대 柳永益 교수는 '李承晩 박사가 단순한 사랑이라기보다 독립운동 정치가로서 자기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을 오래 찾던 끝에 동반자 기준에 알맞은 여성을 찾은 것'이라고 분석하면서 '프란체스카는 망명정객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1940년에 李박사가 태평양전쟁을 예고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 (Japan Inside Out)을 출판할 때 프란체스카는 세 번이나 그 원고를 타이핑하는 바람에 손끝이 터지고 짓물렀다. 비서 역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의 역할도 만만치 않았다. 언제나 3등 열차나 3등 선실만 골라서 타고 다니는 남편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관해 불평을 말하는 일이 없었다. 신혼 초에 두 사람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못 할 때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한 끼의 식사에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남편이 측은해 목이 메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책에 기록하고 있다. 미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하던 시절, 식비를 아끼기 위해 바나나와 날달걀로 끼니를 때웠다. 날달걀 먹는 것을 이상스럽게 생각하는 서양사람들이 많아 껍질을 종이에 싸서 버려야 했다. 워싱턴에 살 때 부부는 이웃집 고용인들의 눈에 띄지 않게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눈을 치운 적도 있다. 주변에서 주인이 직접 눈을 치우는 집이 없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눈을 치웠던 것이다. 李박사는 독립운동 시절 미국 시민권이 없어 곤란을 겪곤 했다. 美국무성에 근무하던 시플리 여사는 非공식 여권을 만들 때마다 신경 쓸 일이 많다며 프란체스카에게 '남편이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권했다. 프란체스카가 시민권 얘기를 꺼내자 李박사는 '한국이 곧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결혼을 하러 빈에서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고충을 겪어야 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에 '당당한 무국적자의 위엄과 민족적 자부심에 압도당했다'고 기술했다.
난폭 운전자 신혼시절 윤치영(뒤에 내무장관·서울시장·공화당 의장)씨 내외가 방문해 프란체스카에게 한복을 선사하였는데 그녀는 한눈에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李박사가 한복을 입은 모습을 몹시 흐뭇하게 생각하자 그녀는 그날 이후 생애 대부분을 한복 차림으로 지냈다. 그녀는 한국 음식을 배우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李박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남궁염씨의 부인 조엔 남궁씨에게 김치 담그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와 국 끓이는 법 등 한국요리법을 배우면서 한국의 예의범절과 명절 풍습도 익혔다. 얼마 안 가 프란체스카는 한국음식 솜씨로 방문객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동포 유학생들에게 김치를 담가 나눠주기도 했다. 시어머니가 새우젓 국물로 간을 맞추어 달걀찌개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프란체스카는 달걀 프라이보다는 달걀찌개나 두부찌개에 새우젓 국물을 넣고 끓이는 때가 많았다.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남편의 생일날 프란체스카는 미역국, 잡채, 콩나물, 물김치와 함께 쌀밥을 차려 남편을 감격시켰다. 李承晩 박사는 30여 년간 독립운동을 하면서 건강을 돌보거나 제때 식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결혼 후에도 『내 짐은 내가 정리할 테니 염려말라』고 할 정도로 독신생활에 익숙해 있었다. 독신생활을 할 때 사과 한 개로 하루를 지내기도 했으며 심지어 생일날 굶은 적도 있다. 프란체스카는 나이 많은 남편의 건강을 염려해 식생활에 각별히 신경을 썼으며 남편 입맛에 맞게 가급적 한식을 준비했다. 결혼 후 프란체스카는 미처 알지 못했던 남편의 면모에 놀라곤 했다. 특히 李박사의 운전습관은 그녀를 경악하게 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李박사는 이곳저곳 강연과 방송출연, 인터뷰 등으로 대단히 바빴다. 李박사는 약속시간에 맞추느라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프란체스카는 그때마다 가슴 졸여야 했다. 어느 날 격렬하게 차를 몰자 두 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따라왔다. 李박사는 더욱 속력을 내며 달렸고 경찰은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따라왔다. 제시간에 도착해 프레스클럽에서 강연을 하자 따라온 기동경찰들은 강연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자 경찰들은 강연내용에 감동해 박수를 치다가 프란체스카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기동경찰 20년에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유일한 교통위반자는 당신 남편 한 사람뿐이오. 더 일찍 천당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시키시오』 프란체스카는 결국 운전을 배워 운전기사 역할을 맡았다. 독립운동 시절 차가 너무 낡아 고급 호텔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골목에서 내려 李박사는 호텔로 들어가고 프란체스카는 차에서 기다리곤 했다. 경무대를 수리하지 마라 프란체스카는 광복된 조국에 돌아온 뒤 첫 거처인 돈암장의 마당을 함께 청소하던 때와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 첫 월급을 받아왔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피력했다. 첫 월급을 건넬 때 李박사는 아내에게 「安貧樂業」(안빈낙업)이라는 글씨를 써주면서 『어려운 나라 실정과 자기 분수에 맞게 생활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미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12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그 일은 힘들지 않았다. 돈암장에서 마포장, 이화장을 거쳐 대통령 관저 경무대의 주인이 된 李대통령은 스스로가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프란체스카는 후일 기자들로부터 『퍼스트 레이디가 될 줄 알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기자가 돌아가고 난 다음 프란체스카 여사는 며느리에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암담한 시절에 무슨 퍼스트 레이디냐』고 말했다고 한다. 경무대는 일본식과 미국식이 뒤섞인 불편하고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일본인 총독 미나미가 지은 이 건물에는 역대 조선 총독들이 살았으며 李대통령이 입주하기 전에 미군 하지 장군이 살았다. 일본식인 다다미방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李대통령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경무대를 개조하지 않았다. 목욕탕의 욕조가 너무 좁아 욕조 한편을 파내 다리를 뻗을 수 있게 했을 뿐이다. 李대통령은 『나라 일 보는 사람이 자기 집을 고치다 보면 그런 데서 부정부패가 싹트게 된다』며 이화장은 물론 경무대도 손대지 못하게 하였다. 대통령이 진해에 내려가 있는 동안 경무대의 베란다 수리를 했다가 혼이 난 직원들은 다시는 대통령의 허락 없이 경무대를 수리할 수 없었다. 경무대 공보실장을 지낸 吳在璟(오재경·前 공보부 장관)씨는 어느 날 밤 경무대 갔다가 이층에서 내려오는 대통령 부부를 보고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2층에서 가운을 입고 내려오시는데 어느 양로원에서 온 것 같았어요. 커튼 하나도 바꾸지 않고 일본 시대 쓰던 그대로였죠. 경무대를 하나도 수리하지 않고 사용할 정도였어요』 李대통령은 사람이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화장이나 경무대 정원의 나무들도 손수 剪枝(전지)하며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의 손은 하나님이 일하라고 주셨다면서 남자 손이 고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경무대 입구의 다발 소나무가 시들시들 병들자 외국 귀빈들에게 향기롭지 못한 냄새를 맡게 하더라도 나무를 살리기 위해 별 수 없다면서 땅을 깊이 파고 인분을 주었다. 李대통령은 해외순방을 할 때도 경비 절감을 위해 대개의 경우 프란체스카 여사를 대동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6·25 비망록 집필 오랜 독립운동을 끝내고 국내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가 싶던 즈음 느닷없이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프란체스카는 매일 비망록을 기록했다. 비망록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공산군은 6월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 나는 이날 상오 9시에 치과에 갔고 대통령은 9시30분에 경회루로 낚시를 나갔다」 6월27일 새벽 2시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과 李起鵬(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씨가 李대통령에게 南下(남하)를 권유했을 때 『서울을 사수해야 해. 나는 안 떠나겠네』 하며 화난 걸음으로 침실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이어 따라 들어간 프란체스카가 『어려운 때 국가원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수원으로 잠시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시면 어떨까요?』하고 간곡히 말했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질렀다. 그때 경무대 경찰 간부가 청량리까지 적군이 들어왔다는 긴급보고를 했고 申장관이 『잠깐만 수원까지 내려가 주시면 훨씬 유리하게 싸울 수 있고 꼭 서울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다시금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간다는 긴급보고가 이어지자 대통령 일행은 새벽 3시 30분 경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경무대 금고를 다 털었을 때 5만원밖에 없어 그 돈을 가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5만원은 요즘 화폐가치로 따졌을 때 2만원 남짓한 돈이다. 6·25 전쟁이 나자 피난을 떠난 李대통령이 녹음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문을 발표한 것 때문에 후일 많은 비판을 받았다. 대전에 도착했을 때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는 이철원 공보처장의 건의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고심 끝에 서울 중앙방송국과의 전화 통화를 녹음해 6월27일 방송되었던 것이다. 대구까지 내려갔던 李대통령은 「내 평생 최대의 판단착오」라며 다시 서울로 올라오다가 전세가 악화되어 또다시 남하해야 했다. 프란체스카는 1983년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몸이 힘든 것보다 외롭고 서러운 시간들이 많았어요. 모든 사람들은 심지어 각하마저도 제가 제 목숨이 아까워 피난가자고 말한 것으로 오해를 하더군요. 그땐 정말 서럽고 외로웠지요. 언제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차를 탈 때면 대통령에게 날아오는 총탄을 막을 요량으로 오종종한 자세를 취하곤 했다. 까닭을 모르는 대통령은 그녀에게 『목숨이 그리도 아까우냐』는 핀잔을 주곤 했다. 대구에 피난갔을 때 曺在千(조재천) 경북지사 관저에 머물렀다. 대통령 부부와 정부각료 국회의원 등 70여 명이 함께 지냈다. 수발을 드느라 曺지사 부인이 유산을 하기까지 했다. 李대통령은 부인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아침에 사과와 토마토, 날달걀을 먹고 모시옷에도 풀을 먹이지 않고 그냥 입었다. 일선장병 위문을 가거나 피난민 수용소를 갔다가 때를 놓쳐 굶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를 대비해 프란체스카는 李대통령 호주머니 속에 잣을 넣어주어 시장기를 면하게 했다. 경북지사 관저에 있을 때 서울시장 李起鵬(이기붕)씨 내외가 잣 한 봉지를 구해왔다. 李대통령이 답례를 하기 위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대구거리에 나갔다. 참외 1000원어치를 사면서 참외장수에게 『덤으로 하나 더 주시오』하고 참외를 집으려고 하자 참외장수가 『싸게 드렸는데 덤까지 가져가면 순사가 잡아가요』하면서 대통령의 손에서 참외를 빼앗았다. 밖에서 돌아온 대통령은 아내에게 『참외 한 개 더 얻으려다 순사에게 잡혀갈 뻔했어』 하면서 허허 웃었다. 거적을 둘러 임시로 만든 화장실에 익숙지 않아 프란체스카는 간혹 대통령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전쟁 중에 물이 부족해 빨래도 물사정을 봐가며 해야 했다. 홀로 내려온 정부요인들과 비서관, 경호원들은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 되어 군복을 얻어 입었고 빨래도 손수 했다. 남자들이 해놓은 때가 덜 빠진 빨래를 보면서 프란체스카는 가슴아파했다. 특히 팬티는 해지기 직전의 천조각에 불과했다. 프란체스카는 노블 참사관이 갖다준 침대시트로 팬티를 여러 장 만들어서 직원들 숙소에 갖다 놓도록 했다. 지원물품 모두 전선으로 보내 대통령 부부는 모기에 물린데다 땀띠까지 나서 고생이 심했다. 워커 장군에게 땀띠연고를 부탁하자 다른 상비약과 영양제 한 박스까지 보내왔다. 이 약상자를 본 대통령은 아내에게 한마디 의논도 없이 보고를 하러 들어온 申性模 국방장관에게 『일선의 우리 아이들에게 갖다 주라』고 건네주었다. 李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을 「우리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워커 장군이 보낸 약에다가 오스트리아 처가에서 보내온 비타민까지 몽땅 들려보냈다. 프란체스카가 申장관에게 땀띠연고 하나만 놓고 가라는 사인을 보냈으나 李박사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申장관은 즉시 떠나야 했다. 전쟁 중에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디 프레세」紙 특파원 편에 보내온 비타민이었다. 언니는 어머니가 틈만 나면 딸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일과이며, 한국의 자유와 평화회복을 위해 친척과 이웃은 물론 단골 가게 아주머니들까지도 합세하여 금식기도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알렸다. 대통령은 부상당한 군인들을 위해 자신이 사용하던 삼베 홑이불까지 싸보냈다. 대통령 부부는 밤새워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거적 위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병들의 형편을 알리고 구호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오스트리아 친정에서 보낸 구호품을 필두로 속속 금품이 도착하였다. 李대통령은 식료품이 많이 들어오면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을 데리고 가서 군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양노인을 시켜 계속 쌀값을 체크하면서 전쟁 중의 물가동향을 주시했다. 남편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 프란체스카도 언니의 편지를 받으면 혼자서 눈시울을 적시곤 했다. 시집온 후 17년 동안 한번도 뵙지 못한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였으나 어머니는 한국전쟁 기간에 세상을 떠났다. 대통령 부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여비도 없는데다 한시라도 대통령의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9·28서울 수복으로 경무대로 돌아왔을 때 대통령 집무실에 고급양복 웃저고리와 양말, 소련제 양주 등이 널려 있었고 바닥은 온통 대변투성이였다. 어디서 약탈해 왔는지 세탁기 10여 대, 양복장 일곱 개도 있었다. 대강당 바닥에는 말똥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화장은 침대 하나만 남겨놓고 몽땅 털어가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李대통령은 공산군을 『敵(적)이라기보다는 강도집단』이라고 표현했다. 그해 겨울, 이화여대 金活蘭(김활란) 박사가 워커 장군의 동상기금으로 써달라며 교수들의 월급을 모아 경무대를 방문했다. 난로도 안 피우고 온몸을 담요로 감싼 채 일하는 李대통령을 보며 金活蘭 박사는 눈물을 글썽였다. 金活蘭 박사가 『연세도 있으시니 난로 정도는 피우고 일하시라』고 권고하자 대통령은 『다리 밑에서 떨고 있는 수많은 피난민 동포들을 생각하면 이것도 과분하다』면서 『찬 손을 따뜻하게 해줄 테니 내게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란체스카가 『내 허락 없이는 안 된다』고 농담하여 오랜만에 대통령 부부는 파안대소를 했다고 한다. 권총과 극약을 갖고 다니다 전쟁 중에 맞은 크리스마스 때 프란체스카 여사는 작은 초를 켜놓고 한국음식을 준비하였다. 두 언니가 보낸 선물과 미국 친지들로부터 온 선물을 식탁에 쌓아놓았다. 대통령이 크리스마스 저녁 단 한순간만이라도 비참한 전쟁의 비극을 잊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1·4 후퇴 때 프란체스카는 손과 발에 동상이 걸려 한동안 고생했다. 중요한 기밀서신을 타이핑해야 했던 아내가 몹시 괴로워하자 대통령은 마늘껍질과 대를 삶은 물을 미지근하게 식혀서 손발을 담그도록 했다. 프란체스카는 그런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잠자코 남편의 뜻을 따랐다. 당시 부산 임시관저에 미국 무초 대사와 미국 장군들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에게 부탁하면 동상치료 연고를 쉽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李대통령은 외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신세 지는 일을 몹시 싫어했다. 결국 李대통령이 가르쳐 준 민간요법으로 동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생일을 맞았을 때 李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더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프란체스카는 그때를 가장 잊혀지지 않는 생일날이라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전쟁 중에 李대통령은 「죽음이 결코 두려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나는 자유와 민주제단에 생명을 바치려니와 나의 존경하는 민주국민들도 끝까지 싸워 남북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다만 後嗣(후사) 없이 죽는 게 先塋(선영)에 죄지은 불효자일 뿐이다」라는 유서를 써서 갖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後嗣 없는 불효자」란 대목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느껴야 했다. 李박사는 화가 나면 가끔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라고 소리를 쳐 아내를 울렸다고 한다. 李대통령은 모제르 권총 한 자루를 머리맡에 두고 『이것은 공산당 서너 놈을 쏜 뒤에 우리 둘을 천당으로 보내줄 티켓』이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잠자리 들기 전에 프란체스카가 『우리 두 사람 티켓은 잘 간수했어요?』 하면 『잘 있지』 하며 크게 웃곤 했다. 두 사람은 극약도 몸에 지니고 다녔다. 프란체스카는 전란을 겪는 동안 여러 차례 죽음과 마주했지만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평안함을 느꼈던 적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데다 원할 때 죽을 수 있는 극약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그토록 비장하고 심각한 순간에 경무대 뒤뜰의 김치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김치 걱정을 했다고 6·25 비망록에 기록했다. 어느 날 李대통령은 한밤중 침대에 엎드려 『하나님, 이 미력한 늙은이에게 보다 큰 능력을 허락하시어 고통받는 내 민족을 올바로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한 후 손가락을 후후 불며 한밤중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했다. 부관이 『지금 취침 중이니 나중에 전화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우리 국민이 다 죽어가는데 무슨 소리냐』며 손끝을 후후 불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었을 때 각 손톱들 사이마다 꼬챙이를 끼우는 고문을 당해 그때부터 손가락을 부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한국 여성들의 정조관념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대단히 강직하였으며 國益(국익)과 관계하여 사람을 대했다』고 평가했다. 전쟁 중에 美軍政(미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이 어느 잡지 인터뷰에서 『억만금을 준다 해도 李承晩 같은 한국지도자를 상대해야 했던 軍政은 다시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고 말할 정도였으나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과는 대단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밴플리트, 콜터 장군을 비롯한 유엔군 장성들과 미국 대사들은 대부분 대통령을 친아버지처럼 따랐으며, 프란체스카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내왕이 있었다. 아들 李仁秀 박사는 李대통령이 미국 고위층들을 부하 다루듯 했다고 말했다. 전쟁 중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李대통령은 화가 나거나 고민이 있으면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러면 프란체스카도 함께 침식을 금했다. 1990년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역사의 잘잘못을 따질 능력은 없지만 6·25에 대해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꿋꿋한 줏대와 배짱으로 전쟁을 치렀다는 점이다. 참상을 겪으면서도 남의 것을 훔치는 국민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여성의 정조관념도 대단해 서울의 어느 처녀는 유엔군 흑인병사가 껴안자 수치심을 못 이겨 한강에 투신자살까지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李承晩 대통령이 판단을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전쟁 발발 이틀 후인 27일 새벽 서울을 버리고 남하한 것이다. 국민들이 미처 피할 겨를 없이 정부가 피란 결정을 내려 희생자가 늘어났고 이후 이렇다 할 저항 없이 계속 밀리게 한 요인이 되었다』고 피력했다. 프란체스카는 또 『3選 개헌 파동을 겪었지만 그때 내가 3선 개헌의지를 적극 만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연세가 많은지라 주변의 아부를 물리치지 못했고 나 자신도 대통령에게 항상 여자는 보일 듯 말듯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3선 개헌에 내심 반대하면서도 막지 못했다. 3선 개헌만 없었더라면 대통령의 인생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며 4·19 때 꽃다운 젊은 생명들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남편 건강이 최고의 과제 전쟁이 끝나고 프란체스카는 알뜰한 경무대의 안주인으로 되돌아왔다. 남편의 건강을 돌보면서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비서관을 지낸 안희경씨는 프란체스카의 역할을 이렇게 말했다. 『비서가 몇 명 있었지만 국제적으로 오는 편지나 신문을 분석하는 일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여사가 직접 타이프를 쳤습니다. 李대통령도 직접 타이프를 쳤어요. 외교문서는 두 분이 처리했지요』 연세대 柳永益 교수는 프란체스카를 「최상급의 비서이며 정치적 동반자」라고 표현했다. 아들 李仁秀 박사는 광복 후 미군정 때와 6·25 전쟁시 유엔군을 맞을 때와 보낼 때, 해외 원조를 받을 때 퍼스트레이디가 백인이라는 것이 국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결혼 직후부터 李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란체스카 여사의 최대 관심사는 대통령의 건강이었다. 李承晩 박사는 74세 때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주치의가 따로 없었을 정도로 건강했다. 혹독한 전쟁을 거치고도 정정했으며 82세 때 북한산 에 올라가서 휘호를 쓸 정도로 건강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이 병원과 의사 신세를 진 적이 별로 없다고 「대통령의 건강」에서 회고했다. 李대통령은 독립운동 시절 병이 나도 대개의 경우 약을 먹지 않고 혼자 앓다가 일어났다. 돈도 없었지만 원체 약을 좋아하지 않아 감기가 들면 맹물을 끓여 마시거나 콩나물국, 북어국을 먹었으며 약보다 재래식 요법으로 병을 이겨냈다.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자신이 장수한 원인을 『과식을 피했으며 여유가 있을 때라도 비싼 고기류를 못 사오게 해서 동물성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모든 성인병이 자동적으로 예방되었고 아내인 나도 덕을 보게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대통령과 요리사 老人의 우정 경무대에서 고기류는 명절과 축일, 손님을 대접할 때만 등장할 뿐 평소에는 물김치, 콩나물, 두부, 김, 된장찌개, 콩자반, 생선구이 같은 것을 준비했다. 李대통령은 워낙 식성이 좋아 가리는 음식이 없었고 콩 종류와 나물 종류는 무엇이나 좋아했다. 특히 산채와 죽순, 봄나물, 냉이국을 좋아했고 한식은 무엇이나 좋아했다. 간식으로는 약과와 튀각, 약식을 좋아했다. 李대통령은 특히 북어를 재료로 한 음식을 좋아해 북어국, 북어찜과 북어무침은 경무대 단골메뉴였다. 북어머리는 물론 껍질까지도 버리는 일이 없었다. 새벽에 경무대 주방장인 양학준 노인과 함께 구수한 북어국물을 마시며 행복해 하기도 했다. 李대통령은 아랫사람들을 격의없이 대했는데 경무대 요리사 양학준 노인을 특별히 아끼고 그가 만든 음식을 좋아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양노인이 술을 자주 마시고 냉장고의 식료품을 마구 꺼내 경무대 직원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양노인이 술이 취해서 『소금 조금, 간장 조금』 하면서 프란체스카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가정부가 걱정이 되어 『사모님에게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러느냐』고 하자 양노인은 『내 빽이 대통령인데 깍쟁이 사모님이 어쩌겠어요』라며 큰소리 쳤다. 그 소리를 들은 프란체스카가 깍쟁이가 무슨 뜻이냐고 남편에게 묻자 李대통령은 『살림 잘하는 알뜰한 부인네를 칭찬하는 말』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어느 날은 양노인이 술에 취해 성경책을 베고 잠이 든 적이 있었다. 李대통령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사람이야. 술을 마시고도 성경을 보다니』 그러면서 성경책 대신 상보를 접어 머리에 받쳐주었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 손님들에게 커피보다는 건강에 좋은 국산차를 대접했다. 여름에는 시원한 오미자차, 겨울에는 따끈한 모과차와 유자차를 내놓았다. 율무를 볶아서 율무차를 만들거나 결명자를 콩과 함께 볶아서 차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머리를 많이 쓰는 남편을 위해 밀눈을 살짝 볶아서 밀눈차를 만들어 대접했다. 모과차와 유자차는 특히 외국 귀빈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에게 모과차 만드는 법과 불고기 양념하는 법을 배워갔다. 경무대에서 외국 귀빈을 접대할 때 콩나물 잡채와 닭찜을 주로 했다. 죽순, 밤, 잣, 은행, 표고, 대추를 넣은 닭찜은 늘 외국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불고기, 신선로, 구절판 같은 특별메뉴도 가끔 선보였지만 한일관보다 반찬이 못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검소했다. 제철에 나는 과일과 채소, 무 시래기 나물, 된장 시래기 국, 추어탕, 비지찌개, 냉콩국은 대통령이 즐겨 찾던 건강영양식이었다. 여름에는 밀기울과 함께 빻은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를 자주 해 먹었다. 된장떡과 비지찌개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만들면 『우리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그 맛이 아니야』 하면서도 맛있게 먹었다. 李대통령은 간식으로 누룽지를 좋아했다. 80세가 넘은 후에도 딱딱한 누룽지를 먹을 정도로 치아가 좋았다. 李대통령은 아내에게 어머니가 담근 동치미와 김치를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늘 자랑했다. 경무대에서 대통령은 어려서 먹던 오디, 머루, 다래, 칡뿌리, 메뚜기 볶음 같은 음식을 가끔 찾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친분이 두터웠던 청량리 위생병원의 조지 루 박사 내외로부터 건강식과 식이요법에 대한 좋은 책을 많이 얻고 조언도 많이 받았다. 대통령은 보약을 싫어해 보약은 잘 먹지 않았다. 80 넘어서도 영어단어 공부 李대통령은 90세로 장수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술했다. 『웃음을 잃지 않았고 질투나 노여움, 분노의 감정을 갖지 않았다. 남편은 유머가 풍부해 늘 주변을 즐겁게 하였으며 모함하고 중상하는 자들에게도 늘 관대했다. 나에게도 항상 용서하고 잊어버리라고 타일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진 것이 건강을 가져왔다. 「독립 미치광이 노인」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확고한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굽히는 일 없이 일했다. 늘 젊은이처럼 활기에 차서 일했다. 그는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견지했다. 80이 넘은 후에도 새로운 영어단어를 손바닥에 써가지고 외우기도 했다. 남편이 건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족의 소원인 남북통일을 기어이 이룩해야겠다는 굳건한 의지와 신념을 갖고 불철주야 일하며 노력한 데 있다. 할 일 없이 처져 있는 노인들과 달리 목표를 갖고 살았기 때문이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질 때 사람은 노력하게 되고 마음과 몸의 건강도 지켜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흙을 밟으며 흙냄새를 맡아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며 항상 우리나라의 나무와 흙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일평생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을 계속한 것도 건강의 비결이다』 프란체스카는 허욕 없이 편안한 마음가짐과 절도 있고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함께 남편이 균형있는 식사, 과식을 피한 것, 적당한 운동을 했다는 점을 장수비결로 들었다. 아울러 모유를 먹고 자란데다 어머니가 만든 무공해 건강식만 먹으며 성장했기 때문에 7년간의 옥중생활을 견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李承晩 대통령은 스스로의 건강 비법을 『마음을 편안히 갖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많은 사교모임에 나갔지만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았다. 경무대 파티 때도 술을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초청받은 사람들은 미리 술을 마시고 오곤 했다. 李대통령은 스트레스를 장작 패는 일로 해소했으며 평소 맨손체조와 테니스를 즐겼다. 저녁 때면 부부는 꼭 산책을 했다. 한번은 경무대 뒷산을 올라가는데 경호관이 계속 따라오자 『이 사람아, 여기는 공산당이 없는 데야. 李경사는 연애도 안 해봤나』고 말해 그제야 되돌아간 적도 있다. 프란체스카는 李대통령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고 그것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받았다. 1990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李박사의 건강을 이유로 외출과 방문객 접견들을 삼가케 한 것이 항간의 人의 장막, 경무대 안주인이라는 구설수에 오르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후진국의 족벌체제를 가장 싫어한 李대통령은 친척들을 정부요직에 기용하거나 특별배려를 해준 적이 없다. 그것 때문에 프란체스카는 대통령과 만남을 막고 있다는 원망을 듣기도 했다. 당시 경무대에서 李대통령을 보필했던 사람들도 프란체스카가 정치에 관여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前 공보부 장관 吳在璟씨는 『3년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프란체스카 여사가 어떠한 면에도 정치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공동의 작업을 내조하는 입장에서 잘 지켜왔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당 시절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안희경씨는 『박마리아와 모 비서관, 프란체스카 여사 셋이서 人의 장막을 짜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했다』며 『정치적, 공적으로 개입을 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 하나 못 낳아주는 마누라 경무대 내실 생활은 대체로 평안했으나 자녀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李承晩 대통령은 남 못지않은 애처가였지만 『아들 하나 못 낳아주는 마누라』라고 말해 아내를 가슴 아프게 했다. 프란체스카는 「6·25 비망록」이나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건강」 곳곳에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한 회한을 피력했다. 전쟁 중에 부산에서 오후 늦게 민정시찰을 나간 대통령은 부산역 근방에서 8명의 자녀와 함께 피난가는 피난민을 만났다. 대통령은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등 관심을 보였다. 그 사람이 구미에 사는 사촌형 집에 간다고 하자 프란체스카가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많은 식구를 환영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럴 때는 자녀가 많은 부모들이 힘들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李대통령은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지 않는다』는 아프리카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참으로 그는 행운아야』하고 부러운 듯 말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듣고 그녀의 마음이 몹시 아팠다. 어느 날 경무대에서 일하던 우부인이라는 여인이 안방을 청소하면서 「개골개골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하면서 무심코 흥얼거리자 李대통령이 듣고 『그 복 많은 개구리는 팔자도 좋구먼』하고 말해 경무대 식구들이 무안해 한 적도 있었다. 李대통령은 경무대에서 비서들에게 『내가 외국 부인을 맞은 것이 여러분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 때가 많아. 하지만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며 돈 없이 고생할 적에 나를 잘 보살펴 주고 도와준 사람이야. 저 사람도 우리 못지않게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있어. 너무 멀리 시집온 저 사람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고 불쌍해. 모르는 것이 많으니 잘 좀 도와줘. 슬하에 자식이 없으니 쓸쓸하고 외로울 거야』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전쟁 중에 아내에게 『지금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한국 장병들은 모두가 우리의 아들들이야. 당신은 걱정해야 할 아들들이 많아』하고 말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좋은 것이 있으면 동포에게 다 줘버리고 늘 주고 싶어하는 대통령과 달리 나는 대통령에게 필요하거나 우리 살림에 긴요한 것은 간직하고 싶어하며 무척 아끼는 편이라서 대통령의 뜻대로 모든 것을 다 내줄 수는 없었다. 호주머니는 항상 비어있고 빈 주먹을 쥐고 있으면서도 자기 가족과 자기 걱정을 할 줄 모르는 대통령은 아내라는 부양가족 하나가 생긴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였던, 어느 면으로는 한심스런 家長(가장)이었다. 그러한 대통령에게 가족이 아내 한 사람이라는 것이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고 슬하에 자손을 못 둔 내가 남몰래 자위했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양자 강석을 맞아 웃음꽃 그러던 중 李起鵬씨의 아들 康石(강석)을 양자로 맞은 후에 집안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대통령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그 애가 오면 함께 먹을 테니 아껴두라』고 말할 정도로 양아들을 사랑했다.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康石과 관련된 부분을 이렇게 썼다. 『康石이 집에 들르면 식탁에서도 이것저것 권해서 잘 먹는 것을 보면 무척 기뻐하고 대견해 했다. 그 애가 현관문에 들어서면 반기면서 빨리 먹을 것을 챙겨오라고 재촉하거나 어쩌다가 목욕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등을 밀어주겠다면서 목욕탕 문을 두드리며 장난을 하기도 했다. 康石이가 양자로 왔을 때 침실 옆방을 내주면서 떨어진 다다미쪽을 대통령이 손수 수리를 했고 감기가 들까 봐 문풍지를 부지런히 발라주었다』 경무대 내실에서 일했던 方在玉씨는 康石이가 깍듯하고 반듯한 청년이었다며 「귀하신 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경무대 이층의 낡고 초라한 방에서 지냈다고 일러주었다. 겨울에는 李대통령이 손수 창호지를 오려서 문풍지를 발라주었지만 돈이 든다며 도배도 안 해주고 침대나 家具도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을 쏟았던 아들이 자결하고 자유당 정권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들의 자결 소식은 프란체스카가 그토록 지키려고 애썼던 대통령의 건강을 영원히 빼앗아 가고 말았다. 李대통령은 아들의 자결 소식을 접하고 실어증까지 겹쳐 유창한 영어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통령직을 사임해야겠다는 결심이 이미 서 있었을 때 그토록 사랑했던 양자 康石이 경무대 안에서 자기 권총으로 부모와 동생을 쏘고 함께 자결했다는 비보를 들었을 때 노인의 슬픔과 충격이 너무나 깊었다. 자살 소식을 듣고 李대통령은 심한 안면경련을 일으키며 눈이 충혈되더니 『이 불쌍한 늙은이를 버리고 죽다니』라며 비통해 하면서 『아들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주제에 살아서 무엇 하나』 하며 한탄했다. 주위에 있던 경호원에게 프란체스카가 『젊은 애가 권총을 가지고 다니면 잘 감시해야지 무엇들을 했느냐』 나무라자 李대통령은 『아들 하나 못 지킨 여편네가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꾸중했다. 野人으로 돌아온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뒤 이화장까지 걸어가겠다고 하자 경황 중에도 대통령이 경무대 뒷산을 산책할 때 신던 헌신발을 신게 하였다. 그리고 주방으로 내려가 대통령의 수저와 젓가락, 그리고 아침마다 식탁에서 읽던 성경과 반쯤 남은 작은 찻병을 핸드백에 넣고 따라나섰다. 걸어서 梨花莊까지 가려고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李대통령은 하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화장 생활은 경무대 생활에 비해 시간적으로 좀더 여유가 있어 자유로웠고 경무대의 낡은 다다미방 침실에 비해 온돌방의 아늑함이 대통령의 마음을 위안해 주는 것 같았다. 梨花莊에 다시 돌아온 李대통령은 밤중이나 새벽이나 민족의 살길을 밝혀달라고 기도했다. 프란체스카는 『그토록 나라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노인의 가슴속에 깊이 응어리진 슬픔과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한 채 쓰러졌을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운 심경을 책에다 토로했다. 한때 콜터 장군 부부가 마땅히 지낼 곳이 없다 하여 이화장의 방을 빌려주었으나 콜터 부인이 냉동창고라고 혹평을 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했을 정도로 이화장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화장에서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대통령은 여전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틈나는 대로 정원의 나무들을 손질하고 이화장의 창틀과 문짝들도 직접 손질하였다. 아내를 위해 은방울꽃을 심어 가꾸기도 했다. 조카뻘 되는 이갑수씨 내외가 이화장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 일본 사람들을 끌어들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고 하던데…』 하면서 무척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탈출한 후 그들의 노예 근성을 뽑아버리기 위해 광야에서 얼마나 애썼는가를 대통령은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이화장으로 옮겨온 후 친척들이 음식을 해서 자주 찾아왔다. 일요일에는 정동교회에 가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후일 프란체스카는 하야 직후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야겠다고 버티던 대통령을 억지로 차에 태웠던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며 이렇게 기술했다. 『세월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고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해준다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질 듯 아플 때가 있다』 돌아오지 못한 하와이行 이화장 생활은 별 불편이 없었지만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로 가서 한두 주일 쉬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는 측근의 제의가 있었다. 1960년 5월 하와이 동지회장 崔伯烈(최백렬)씨로부터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휴양을 하실 수 있도록 체류비와 여비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5월29일 대통령 부부는 하와이로 떠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늦어도 한 달 후에는 돌아올 테니 집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 길로 李承晩 대통령은 살아서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짐은 전부 네 개였는데 옷을 담은 트렁크 두 개와 마실 것과 점심, 약품을 담은 가방 하나, 타자기 가방이 전부였다. 프란체스카는 「대통령의 건강」에서 『하와이로 갈 때 일본 언론이 보물을 많이 챙겨간 것처럼 보도해 물심양면으로 고생이 많았다』고 기록했다. 하와이에 도착한 대통령 내외는 조경사업을 하는 윌버트 최씨의 별장에서 기거하며 옛 동지들과 제자들의 방문을 받기도 하고 동포들의 초대에 응하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한인기독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대통령은 한결 즐거워했고 건강도 좋아지는 듯싶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귀국하려 하였으나 하와이에 있는 인사들은 국내 사정을 염두에 두고 더 요양을 하라며 만류했다. 윌버트 최씨와 옛 동지들이 호놀룰루市 마키키街에 집을 마련해 주고 생계도 보살펴 주었다. 대통령은 넓지 않은 마당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고 나무 손질을 하며 시름을 달랬다. 프란체스카는 종일 쉴새없이 집안 일을 하며 남편을 돌보았다. 李대통령은 다행히 무슨 음식이든 잘 먹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의 체중이 늘지 않도록 각별히 보살폈고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여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의사가 김치는 짜기 때문에 고혈압에 해롭다고 해서 김치를 조금씩 내놓자 李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김치가 건강에 나쁠 게 뭐람. 나같은 한국인은 김치를 못 먹으면 혈압이 더 오른단 말야』 1961년 설날 프란체스카는 떡국을 끓였고 친지들과 교포들이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세배를 하였다. 해를 넘기면서 대통령의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날로 더하고 나라에 대한 걱정도 커졌다. 자나깨나 나라 걱정 李대통령은 6代 독자인 자신 때문에 고생하신 아버지와 임종을 하지 못한 어머니 얘기를 종종하면서 先塋(선영)을 돌볼 아들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두 사람은 의논 끝에 養子(양자)를 맞이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李淳鎔(이순용)씨에게 부탁했다. 李대통령은 『내가 이런 처지에 있는데 나에게 누가 아들을 줄 사람이 있겠는가』 걱정하면서 李淳鎔씨를 한국에 보냈다. 李淳鎔씨는 정부의 오해를 받아 한때 연금을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전주 李씨 양녕대군파 종친회로부터 李仁秀씨를 추천받았다. 李대통령은 아들이 온다는 소식에 매일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살폈고, 아내에게 『그 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물었다. 1961년 12월13일 두 노인은 집안 테라스에서 養子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아들 仁秀씨가 마당으로 들어서자 李대통령은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흔들었다. 仁秀씨는 층계를 올라와 큰절을 하였다. 대통령은 仁秀씨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프란체스카는 두 사람이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부자간같이 다정하였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아들 仁秀씨를 맞으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무슨 말이든 반대하지 말고 순응하면서 기분 좋게 해드려라. 사실이라 하더라도 걱정끼치는 말은 하지 말아라. 고민하게 되면 건강에 나쁘잖니.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잘될 거 없으니까 속상한 말 말아라. 너도 늙으면 마찬가지다』 李대통령은 아들에게 궁금하던 고국 소식을 물었다. 李仁秀씨는 『많은 사람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 잘되어 갈 겁니다. 염려마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李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잘되어 간다니 다행이야. 그런데 너는 남이 잘된다 잘된다 하는 소리 아예 믿지 마라. 이렇게 절단이 난 걸. 그렇게 우리나라 일이 쉬운 게 아니야』 李仁秀씨가 오던 날 친지들과 제자들이 김치를 비롯한 갖가지 한국음식을 마련해왔다. 오랜만에 대통령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던 날이었다. 보행이 불편해진 李대통령은 아들에게 많은 위안을 받았다. 李仁秀씨는 아침마다 예의를 갖춰 문안인사를 드렸는데 李대통령은 그 일을 무척 기뻐하였다. 귀국 여비 아낀다고 이발도 안 해 설거지를 할 때 프란체스카가 그릇을 씻으면 그것을 받아서 李대통령이 선반에 올렸는데 아들 仁秀가 하와이에 오고 나서부터 그 일을 대신 맡았다. 『어느 날 어머니와 그릇을 씻는데 날더러 「康石아 이거 올려놔라」 하시는 거예요. 나를 康石이로 착각하신 거죠. 머리 속에 康石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많았던 것 같아요』 매일 평온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李대통령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늘 마음이 불편했다. 아내에게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떡해. 모두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李대통령은 그즈음 자다가 벌떡 일어나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다. 아들 仁秀에게 부디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황해도 평산의 先塋을 꼭 찾아 자자손손 돌보도록 하라고 자주 당부했다. 아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나라 걱정에 격정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李仁秀씨는 『아버님의 뜻을 받들어 애국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하며 위로했다. 李대통령의 향수병이 점점 깊어갔고 가족들은 곧 한국에 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1961년 성탄절에 교포 김학성씨가 초청해 준 만찬회에서 어린이들을 보고 『나는 곧 한국 간다』고 자랑삼아 얘기해 사람들이 모두 웃기도 했다. 還國(환국)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崔伯烈씨에게 『나를 20년간 여기다 붙잡아 둘 작정이냐, 나는 걸어서라도 떠날 테야』라며 신발을 찾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李대통령은 여비를 崔伯烈씨와 윌버트 최씨가 대주기로 했다고 누차 얘기해도 여비가 없어서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아껴야 한다며 이발을 하지 않아 프란체스카가 집에서 머리를 잘라주어야 했다. 시장에서 식품을 사올 때 봉지가 크면 『귀국할 여비를 쓴다』며 나무랐다. 李대통령이 물건을 구입하면 걱정을 많이 해서 일주일에 한 번만 식료품을 사러 갔다. 그때도 仁秀씨가 뒷문으로 짐을 갖고 들어가고 프란체스카가 작은 봉지를 들고 가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하와이에서도 프란체스카는 남편을 돌보면서 방문객들을 맞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편지와 답장을 보내는 등 비서역할을 충실히 했다. 헤리스 목사, 밴플리트 장군, 화이트 장군 등 많은 사람들이 李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갔다. 고국에서 김이나 마른반찬을 선물로 보내주는 사람들과 10달러 5달러 보내주는 美洲(미주) 동포들의 온정이 이어져 부부의 외로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 집안에서 200달러씩 생활비를 보내주었으며 커다란 종이상자 두 개분의 옷을 부쳐주었다. 그녀는 이 종이상자를 개조해 옷장으로 썼고 그 종이옷장은 지금 이화장 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귀국 不可 통보에 다시는 못 일어나 시간이 지나면 비행기 여행조차 불가능해진다는 李대통령 주치의의 판정에 따라 1962년 3월17일, 부부는 귀국을 결정했다. 출발 사흘 전부터 보행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으나 李대통령은 섭섭해 하는 교포들에게 『우리 모두 서울 가서 만나세』라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출발 당일 간단한 아침식사를 끝낸 뒤 외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을 때 金世源(김세원) 총영사가 찾아왔다.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총영사가 귀국을 만류하자 조용히 듣고 있던 李承晩 대통령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누가 정부 일을 하든지 정말 잘해가기 바라오』 그렇게 말하면서 휠체어에 몸을 기댄 李대통령은 다시는 혼자 일어서지 못했다. 프란체스카는 당시 심경을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피력했다. 『오직 내 나라 땅을 밟아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살고 있던 87세의 노인에게 정부의 귀국 만류 권고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답답하고 앞날이 막막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1962년 초 대통령이 트리풀러 육군병원으로부터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결과를 통보받았을 때 나는 아들 仁秀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다시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어나지 못하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에 주저앉게 된 그때처럼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암담한 때는 없었다』 李대통령 내외가 귀국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하와이 사회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동정을 표하고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마우나라니 요양원의 원장 존슨 여사는 대통령을 무료로 입원시켜 주면서 프란체스카에게 간호보조원의 직책을 맡겼다. 프란체스카는 李대통령의 병상을 지키며 병원 부속건물 방에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독립운동 뒷바라지할 때 곤궁해도 힘든 줄 몰랐으나 하야 후 하와이 요양원 시절에 물심양면으로 가장 어려웠다』고 「대통령의 건강」에 썼다. 병상에 누워서도 李대통령은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였다. 존슨 여사가 『소원이 무엇이지요』 하고 물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여비요』 하고 답했다. 환갑이 넘은 프란체스카에게 종일 환자를 돌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남편을 일으키거나 눕힐 때는 『하나 둘 셋』 하면서 힘을 주었는데 그때마다 李대통령은 넌지시 아내를 바라보며 힘을 덜 주려고 애썼다. 프란체스카는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때로 고달프고 괴로울 때는 대통령과 함께 한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아리랑이나 도라지 타령을 부르면서 위안할 때도 있었다』 병원음식에 질려버린 대통령을 위해 한국음식을 열거하며 노래를 지어 함께 부르기도 했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치국, 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 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李대통령은 자신을 위해 평생 희생하는 아내를 위해 아리랑을 改詞(개사)하여 불러주곤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오다가다가 만난 님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병상에서 李대통령은 입버릇처럼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 굴을 찾아간다는데…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말했다. 남편과 이별하고 오스트리아로 1965년 7월19일 0시35분 李承晩 대통령이 5년2개월의 망명생활 끝에 서거하자 프란체스카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후일 『그동안 참으로 힘들고 슬플 때도 많았지만 대통령을 간호하며 함께 지낸 날들이 지금은 행복하게 생각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고 회고했다. 1990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프란체스카는 『혁명정부에서 대통령의 귀국을 만류, 87세의 노인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게다가 朴正熙 대통령이 일국의 건국 대통령을 외국 병원의 무료병동에서 돌아가시게 한 것은 유감천만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李仁秀씨가 입양되기 1년 전에 작성된 유언장에는 「나의 동산, 부동산 모든 재산, 즉 그것이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의 아내 프란체스카 리에게 영구불변하게 상속한다」고 적혀 있었다. 李대통령의 재산은 헌납받은 이화장과 동산 3000여 점이 전부이다. 동산의 대부분은 이화장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李仁秀씨는 李承晩 대통령의 아들로 입적하면서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 명예회복을 위해 힘쓰겠다. 이화장을 기념관으로 꾸미겠다』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李仁秀씨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아버지를 한국으로 모시는 일이 시급하다는 생각에서 1963년부터 국내를 오가며 李承晩 대통령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힘든 일이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받아 1965년 1월에 국립묘지에 안장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지관을 데리고 가서 자리까지 결정했다. 李대통령은 그런 준비가 마무리된 그해 7월19일에 서거했다. 李仁秀 박사는 李承晩 대통령이 국민에게 남긴 유언을 소개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국민들께 남기는 유언이라고 하셨어요. 다시 나라를 잃고 침략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문화적 침략에 대비해 정체성을 해칠 노예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유해가 운구되고 이화장에 빈소가 마련되자 전국에서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장례식 때 엄청난 인파가 몰려와 참배를 하는 바람에 이화장 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프란체스카는 李대통령이 서거하자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몇 년간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던 것이다. 남편을 잃은 그녀는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언니 집에서 생활하다 몸을 추스리고 李대통령의 小祥(소상)과 大祥(대상) 때 한국을 다녀갔다. 아들 李仁秀씨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화장을 복원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오스트리아 생활은 오스트리아 초대 대사였던 柳陽洙(유양수)씨가 쓴 「대사의 일기장」에 기술되어 있다. 柳陽洙씨는 1967년 오스트리아에 부임하여 주요인사들을 예방하면서 李承晩 대통령이 독립투사였고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반공지도자라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게 되었다. 주요 인사들에 대한 예방이 끝나갈 무렵 柳대사는 프란체스카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그녀에게 연락하려면 시내에 있는 그의 친척을 경유해야 했다. 프란체스카로부터 대사관에 한 번 찾아오겠다는 연락이 왔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만났다. 그 자리에서 프란체스카는 『한국에 갔을 때 朴正熙 대통령이 여생을 한국에서 편안히 지내라고 말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육영수 여사의 우아한 모습과 친절을 잊을 수 없으며 남편의 묘를 훌륭하게 조성해 준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한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기 때문에 공산국가와의 왕래가 많으니 주의를 기울이라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는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묻는 柳대사에게 난처한 빛을 보였다. 고향 빈으로 돌아온 이후 북한 청년 두 명에게 가는 곳마다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간부인 친척이 한국인과 일체 접촉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고 말했다. 얘기를 끝낸 프란체스카는 초콜릿 상자를 선물로 놓고 일어섰다. 대사관 자동차로 시내까지 모시겠다고 했으나 한사코 사양하면서 전찻길까지 걸어갔다. 근거 없는 소문에 쓴웃음 1968년 1월21일 북한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은 오스트리아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사건 직후 가장 먼저 대사관에 전화를 건 사람은 프란체스카였다. 흥분된 어조로 朴대통령 신변에 이상이 없는지,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물었다. 10여 일 후 그녀는 1·21 사건에 관한 각종 기사를 스크랩해서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공산주의자에 대해 절대로 방심해서는 안 되며 이번 사건은 철저히 규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柳대사에게 대통령의 아내로서 많은 일을 겪어야 했고 때로 많은 고민도 했다고 술회했다. 어떤 이는 자신에게 정치에 관여했다고 말하지만 자신은 결코 李박사가 하는 일에 관여한 적이 없으며 간섭을 받을 李박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柳대사 그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자기의 유일한 임무는 대통령의 신변을 보살피는 일이었고 李박사가 건강하고 편안히 생활할 수 있도록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을 다했을 뿐 세상의 소문은 근거없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웃어넘긴다. 자신이 외국 태생이라는 입장 때문에 더욱 李박사에게 잘해드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남달리 언행도 조심했다는 것이다. 권력의 頂上에 있는 사람은 항상 고독한 법이지만 자기는 李박사의 따뜻한 애정으로 결코 외롭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여사의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남편 옆에 묻히는 게 소원 프란체스카와 만남을 자주 가지면서 柳대사는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빈틈없는 인상은 사라지고 내면에 따뜻한 정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죽으면 남편 옆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며 자나깨나 李박사 생각뿐이라고 했다. 柳대사는 언제라도 귀국할 결심이 서는 대로 한국에 돌아오라는 朴대통령의 간곡한 말씀이 있었다고 전하면서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한 예우나 생계 지원문제도 제도적으로 확정되었으며 李박사 내외의 재산문제도 잘 정리되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귀국할 때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후 프란체스카와 柳대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나서 식사를 나누었다. 柳대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화제는 대부분 李박사였고 국제정세와 한국정세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여사는 뉴스위크지나 타임지를 빼놓지 않고 읽고 있었다.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과거 자유당 시절의 정치이야기나 특정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舊정치인이나 현지 의원, 정부 요인들이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고 싶어했으나 김정렬 前 국방장관, 한국일보 기자였던 정광모씨 등 몇 사람만 만났다』 1969년부터 프란체스카의 귀국문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70년 5월14일로 출국날짜가 정해지자 그녀는 신변정리를 하느라 바빴다. 프란체스카는 柳대사에게 자기가 사용하던 가구를 기증하고 싶다며 집으로 초대했다. 넓은 마당을 끼고 있는 ㄷ자형의 단층집으로 큰언니의 딸 앨리스의 집이었다. 소파 침대 옷장 냉장고 책상 의자 등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조립식으로 소박했다. 柳대사는 이 물건들을 대사관으로 옮겨놓았다.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날 친척 20여 명이 비행장에 배웅을 나왔다. 프란체스카는 70세, 언니 베티는 73세였다. 프란체스카는 이후 이들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1970년 5월16일,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공항에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정부요인들과 김일환 윤치영씨 등 舊 자유당 정부인사들이 나와 그녀를 영접했다. 프란체스카의 귀국은 오스트리아에서도 신문과 라디오 TV를 통해 자세히 보도되었다. 이화장으로 돌아온 프란체스카 1970년에 귀국하여 1992년까지 프란체스카는 이화장에서 아들 李仁秀 부부와 함께 살았다. 이화장에서의 생활은 근검절약의 표본이 되고 있다. 1992년 3월19일에 프란체스카가 세상을 떠난 후 1993년 3월에 열린 추모 유품전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 알뜰함과 검소함에 깊은 감동을 느꼈다.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에서 위염으로 고생을 해 식사를 제대로 못했는데 귀국한 이후 거짓말처럼 나았고 체중도 불었다. 며느리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22년간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지냈다고 일러주었다. 다만 사망하기 3개월 전에 방안에서 넘어지면서 체력이 약화되어 약간의 치매 증세와 함께 누워 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살아 있는 동안 이화장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경무대 식구들을 비롯하여 자유당 시절 李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외국 대사와 옛 외국 관료, 미군 장성 출신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1988년 기념관을 조성해 이화장을 일반에게 공개하면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이화장을 찾았다. 첫날은 1만5000여명이 몰려 큰 혼잡을 이루었다. 해외동포 내외국인 등이 매일 수백 명씩 찾아왔다. 프란체스카는 창문을 열어놓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해주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린이 단체 관광객을 특히 반겼다. 이화장을 개방했을 때 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녀는 방문객에게 입장료를 못 받게 했다. 프란체스카는 이런저런 단체에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 많았으나 대부분의 경우 거절하고 이화장에서 조용하게 지냈다. 정동교회 예배 참석과 매주 금요일 동작동 국립묘지를 방문해 李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외출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동작동 국립묘지에 들어서는 프란체스카 일행을 보고 오스트리아인이 다가와 『당신은 오스트리아 사람이죠. 저도 오스트리아에서 왔습니다』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오스트리아에 태어났을 뿐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李仁秀씨는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한국적으로 살다 가신 분』이라고 했다. 『머리를 뒤로 쪽을 찌고 늘 한복을 입고 지내셨어요. 양식은 거의 안 드시고 한국음식만 드셨지요. 나라 걱정, 국민들 생각으로 하루해를 보내셨어요. 조금이라도 낭비하는 게 보이면 이산가족들이 낸 세금이라며 절약하라고 당부하셨지요. 무슨 물건이든 어머니는 그것을 영구적으로 아니 영원히 사용하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할 때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000달러를 넣어왔는데 우선 그 돈으로 틀니를 하러 가겠다고 말했다. 며느리 曺惠子씨가 왜 외국에 있는 동안 틀니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 할 때 단 1달러도 아까워 하셨는데 어떻게 몇천 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 메디컬센터 치과과장 최상열 박사가 만들어 준 틀니를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는 외국인이 방문할 때면 『한국에서 틀니를 하고 가라. 틀니는 한국이 최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틀니를 하라고 당부했다. 曺惠子씨는 오스트리아를 외가집이라고 말한다. 오스트리아 대사가 부임하면 언제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오스트리아 귀빈들이 한국에 오면 반드시 이화장에 다녀갔다고 한다. 프란체스카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 일은 계속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절약정신 프란체스카의 절약정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李仁秀씨가 양자로 하와이에 가면서 선물했던 국산 양산을 30년 가까이 사용하는 등 절약에 있어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것이 함께 생활한 사람들의 평이다. 1946년 장개석 총통이 한국을 방문할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간 사용했다. 1976년에 금성사에서 에어컨을 기증하자 프란체스카는 전력난이 심한데 에어컨을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 금성사에서 다시 작은 선풍기를 보냈는데 아주 더울 때 겨우 한두 번 트는 것이 고작이었다. 1917년에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입한 앨범에 옛날 사진을 떼고 손자들 사진을 붙이기도 했다. 40년간 아껴서 입은 검정예복을 며느리에게 물려주었다. 1958년에 최초로 생산된 국산 모직으로 만든 옷을 34년 동안이나 입었으며 1904년에 산 타자기로 남편의 독립운동과 한국 외교를 돕고 죽을 때까지 사용했다. 프란체스카의 옷은 어느 것 하나 깁지 않은 것이 없으며 속옷과 스타킹까지 기워 신었다. 손자들의 체육복을 몇 번이나 기운데다 아랫단을 여러 번 내는 바람에 손자들이 창피하다며 학교 가기 싫어했을 정도이다. 프란체스카는 가난하던 시절 경무대에서 알뜰하게 살던 것보다 더 알뜰하게 여생을 보냈다. 이화장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두부도 만들어 먹었다. 점심에는 감자가 주식이었고 저녁에는 국수를 들거나 현미, 보리 콩 등을 섞은 잡곡밥을 지어먹었다. 가뭄이 들었다는 TV뉴스가 나오면 손자들 목욕도 시키지 못하게 했다. 며느리에게 세세한 것까지 가계부에 적게 한 후 15일마다 검사했다. 검사할 때마다 『全국민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 근검 절약을 생활화해야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늘 겨울에 추위에 떨었던 것이 가슴 아프다고 회고했다. 『기름값을 아끼려고 겨울이면 비좁은 경비실로 옮겨서 생활하셨어요. 기름을 함부로 때는 것은 달러를 태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셨죠. 너무 추울 때면 저에게 72도 작전을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둘이서 껴안고 있으면 온도가 72도가 된다는 뜻이에요. 어머니와 가난해서 더 친해졌을 정도예요. 너무 추워서 1985년에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 이화장 본관 아래 이층집을 지었어요. 말년에 좀 따뜻하게 지내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머니는 정말 지독하게 절약하신 분이에요. 밥알 하나, 두부 한 모, 콩나물 하나 버리면 큰일이고 식사를 할 때 늘 접시가 깨끗했어요. 평생 돈 한번 마음놓고 써보지 못하고 가셨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죠』 22년 동안 미장원에 한번도 가지 않고 머리를 길러 쪽을 졌다. 세제는 반드시 정량만 사용하고 빨래한 물을 모아서 걸레를 빨았으며, 세탁기는 남북통일 되면 사용하라고 해서 曺惠子씨는 1985년이 되어서야 겨우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어느 해인가 독도사랑회에 프란체스카는 10만원을 기탁했다. 曺씨는 남들에게는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10억원만큼 큰돈이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영구 귀국한 뒤 22년 동안 한 번도 오스트리아에 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화도 하지 않았다. 李仁秀씨가 1972년에 미국 유학을 떠나 8년간 공부하는 동안 아들에게도 국제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전화를 못하게 하여 두세 번 정도 몰래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지척에 있는 가족을 못 만나는 이산가족들이 내는 세금으로 생활하면서 어떻게 전화를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어요. 남편도 8년 동안 딱 두 번 한국에 다녀갔어요. 生父(생부)가 돌아가셨을 때와 논문 작성을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였어요』 프란체스카 여사는 모든 연락을 편지로 했는데 항공우편 대신 가격이 훨씬 싼 배를 이용했다. 추석 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12월에 받아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생일카드도 생일 몇 달 전에 미리 발송했다. 미8군사령관을 지낸 매구르더 장군에게 생일 몇 달 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도착했을 때 장군이 이미 사망한 일도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집에 선물이 들어오면 그냥 두었다가 선물 보낼 일이 있으면 그걸 다시 이용했다. 그녀는 틈만 나면 해진 옷을 기웠다. 경무대 시절 그녀는 천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헌 양말을 넣어 통통하게 만든 구두 속주머니를 만들어 미국 대사와 미국 상공회의소 부인들에게 선물했다. 구두 모양이 변하지 않도록 구두에 끼워놓으라는 당부와 함께 선물을 하면서 고아와 전쟁미망인들을 도와줄 물품을 요청했던 것이다. 재봉틀과 각종 악기를 지원받아 전쟁미망인과 고아원에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전쟁 중에 고아원을 찾아다니며 고아들의 머리를 깎아주었는데 나중에 고아 중에 한 명이 이화장을 찾아온 일도 있었다. 선물을 싼 끈도 모았다가 엮어서 찻잔 받침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알뜰한 유품들은 현재 이화장에 전시되어 있다. 아들 편애하는 한국 시어머니 曺惠子씨는 프란체스카를 완전한 한국 시어머니라고 말한다. 맛있는 반찬이 있으면 언제나 아들 앞으로 밀어주었으며 겨울이면 남편의 신발을 따뜻하게 해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마흔이 된 아들 仁秀를 미국으로 유학보내면서 속옷에 주머니를 달아 달러 몇 장을 다려서 넣어주었다. 1973년에 이화여대 金玉吉(김옥길) 총장이 가스레인지를 선물하자 『아들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말라』고 해 몇 년 동안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金玉吉 총장이 자주 찾아와 말벗이 되어주었는데, 曺씨는 어머니에게 金총장의 他界(타계)소식을 끝내 알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궁금해 할 때마다 『몸이 아파서 못 온다』고 둘러댔고 프란체스카는 『아프기에는 너무 아까운 나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근검절약하기로 소문난 프란체스카는 1974년 8월 朴正熙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본 뒤 『내가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아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고 당부했다. 프란체스카는 틈만 나면 며느리에게 유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대개 그것은 근검절약과 관계된 것이었다. 曺惠子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니 내핍생활을 해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사셨어요』 프란체스카는 말년을 평온하고 행복하게 보냈다. 건강도 좋아 귀국할 때보다 살이 찌고 안경을 안 끼고 책을 읽을 정도였다. 매일 코리아 헤럴드를 비롯한 영자신문과 한국 TV, AFKN을 시청했다. 어지간한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집안에서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81회 생일 때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녀는 당시 근황을 이렇게 말했다. 『고향에 있는 언니에게 가끔 카드가 와요. 언니를 생각할 때마다 더욱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것을 절감해요. 나이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은 게 바로 우리나라니까요. 늙어서도 축복받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저는 끝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의 가족제도야말로 세계 으뜸가는 자랑거리죠』 그녀는 또 「대통령의 건강」에 이화장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기술했다. 『하와이에서 외롭게 돌아가신 남편을 생각하면 내게 과분하게만 느껴진다.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가 老後에 한국에서 이토록 행복한 내 모습을 보신다면 그 당시 한국 노신사와의 결혼을 그토록 반대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특히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고 피력했다. 특히 첫 손자인 丙久(병구)의 출생소식을 빈에서 듣고 『당장 남편 산소에 달려가 우리도 손자가 생겼습니다 하고 힘껏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책에 기록했다. 프란체스카는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 특별히 족보의 돌림자인 「丙」를 따서 짓도록 당부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기록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셔서 너희들 자라는 모습을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셨겠니? 나 혼자 살아서 손자 재미 보는 것이 송구스런 느낌마저 든다. 왜 그토록 대통령이 아들을 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노후에 아들 며느리와 함께 살면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아들 부부와 두 손자와 성묘를 갈 때면 참으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손자며느리까지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曺惠子씨는 어머니가 딱 한 번 양아들 康石을 입에 올린 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쯤에 康石이 산소에 꽃 좀 갖다놓으라고 당부하시더군요. 한번도 康石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일평생 마음속에 품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날 이후로 다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가장 한국적인 할머니로 살다 가다 1990년 90회 생일 축하연이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소피텔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렸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생일잔치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국가유공자 가족들을 초청하는 자리로 대신한 축하연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장수 비결을 묻자 『무엇에든 감사하는 마음이 저의 생활관입니다. 그것이 바로 장수의 비결이지요』라고 답했다. 며느리 曺惠子씨는 시어머니를 이렇게 평했다. 『하루에 두 시간씩 산책하고 小食(소식)한 것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감자를 쪄서 간식을 자주 드셨어요. 명랑하고 유머가 있고 자기 자랑을 절대 하지 않으셨어요. 매사에 긍정적이고 밝게 웃으셨어요』 프란체스카는 살아생전에 손자들이 장가가는 것을 본 뒤에 죽고 싶다고 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992년 3월19일 타계했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죽거든 틀니를 반드시 끼워주고, 남편이 독립운동할 때 사용했던 태극기와 성경책을 관에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관뚜껑은 남편의 친필휘호인 南北統一(남북통일)로 덮어달라고 말했다. 프란체스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말을 늘 유언처럼 했다고 한다. 1992년 3월23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소원대로 국립묘지 남편의 옆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유언에 따라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정동제일교회서 영결식을 가진 뒤 경찰차 한 대가 선도한 장례행렬은 승용차와 버스 10대뿐이었다. 曺惠子씨는 시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꼭 필요할 때 와서 필요한 일을 하고 가셨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삶은 기독교 정신이 바탕이 되었어요. 성경말씀에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셨어요. 어떤 음식이든 맛없다고 말한 적이 없고 뭘 해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어요. 모든 것에 만족하고 살았어요. 언제나 사람들에게 아들과 며느리가 잘해줘서 잘 있다고 말씀하셨죠. 늘 즐거우셨기 때문에 외로울 틈이 없었어요』 가끔 언론에 의해 李承晩 대통령이 조명되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다가 1996년에 사단법인 건국대통령 李承晩박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1997년에는 이화장 史料(사료)를 연세대 국제대학원 柳永益 석좌교수에게 넘겨 분류와 연구를 부탁했다. 현재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현대한국학 연구소에서 李承晩 박사를 연구하고 있다. 李仁秀 박사는 건국사에 대한 연구자가 없으며 사람들이 현대사를 모르고 있다고 탄식한다. 『정권이기주의 때문에 역사가 이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정책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국민들은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관이 확립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 정권이 朴正熙 대통령 기념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李承晩 대통령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역사관으로 인해 광복 후 지금까지 과거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이어지고 있다는 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난 뒤 이화장을 찾는 이가 급격히 줄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아생전에 받았던 연금과 李仁秀 박사의 월급 대부분은 이화장을 보존하고 수리하는 데 들어갔다. 역대 대통령들도 이화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1978년에 비가 많이 새서 지붕이 무너져 내린 적이 있는데 당시 朴正熙 대통령이 돈을 보내서 고쳤다. 崔圭夏 대통령과 全斗煥 대통령이 퇴임 후 이화장을 찾았을 뿐 퍼스트 레이디 중에는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全斗煥 대통령은 백담사에 있는 동안에는 아들 재국씨를 이화장에 보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세배하게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연금이 끊어진 후 이화장을 꾸려나가는 일이 더욱 힘들어졌다. 지난해 재산세 700만원을 낸 데 이어 환경개선 부담금과 일부 국유지에 대한 사용료를 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기천만원이 넘는 액수라고 한다. 이화장에 대해서 종로구에서 지원하는 것은 자원봉사자 한 명에 대한 월급 25만원과 고장난 것을 수리해 주는 정도이다. 대통령 유족 연금도 끊어지고 李仁秀씨도 재직하던 명지대를 정년퇴직했다. 하지만 그는 힘들더라도 이화장을 끝까지 보존할 각오를 다지고 있다. 취재가 끝나고 며칠 후 曺惠子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어머니는 全세계에서 돈을 제일 조금 쓰고 세금 제일 아껴 쓰고 하늘나라 가신 분이에요. 아버님에 대한 평가에 연연해 하지 않으셨어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너무 빨리 잊혀지건 간에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나중에 역사가 평가할 거라고 말씀하셨지요. 아버님에 관해서 항상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정직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12년간 남편의 독립운동을 돕고, 12년간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살았으며, 22년간 남편 없는 땅에서 한국 할머니로 살아간 파란 눈의 여인 프란체스카. 자유당 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장석윤씨는 그녀를 『李박사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라고 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