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와 살아가는 여자들에겐 금기시되는 단어가 있다...
엄마..
이 단어가 내뱉어지면 일단 그 무리중의 십중팔구는 눈물바다를 이룬다. 남자들의 경우 내 주변에선 엄마 보고싶다곤 말해도 울진않더라.
이옥남 할머니.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으신 분이다. 지금까지 살아계시다면 백 번의 사계를 맞으셨을텐데 그러하셨는지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러하길 바래볼 수밖에.
이영훈 작사작곡의 '소녀'를 하루종일 들으며 감성이 터진 날 이 책을 집어들었다. 두터운 책표지를 들추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리곤 한동안 눈물을 조용히 주르르 흘러냈다. 이미 감성이 터진데다, 표지를 넘기면 나타나는 줄공책에 써진 할머니의 삐뚤빼뚤한 일기와 그 뒤 몇장을 넘기면 나오는 편집자의 '누군가의 딸로 태어나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걸어온 길' 이라는 대목에서 폭발한 듯하다. 엄마라는 말에..
1922년 강원도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아홉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글은 안 가르쳐주고 일만 시키는 아버지와 구박하는 새엄마와 살다열입곱살에 시집갔다. 남편은 술에 바람에 바깥으로 돌고 시어머니는 모질게 구박했지만 열심히 일해 딸 둘 아들 둘을 정성으로 길러냈다. 어려서부터 아궁이앞에서 부지깽이로 연습하며 독학으로 깨친 한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모자 -남편과 시어머니- 의 타박에 엄두를 못내다 두 분 다 저세상 가시고 혼자된 1987년부터 도라지팔아 산 공책에 쓰기 시작해 30년동안 일기를 썼다. 이 책은 할머니의 그 일기들을 모아 엮은 것이다. 예쁘게 글씨를 쓰고 싶어 연습삼아 써내려간 일기가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풍성한 이야기가 됐다. 어느누가 30년동안 일기를 쓸 수 있을까? 국민(초등)학교시절 일기상을 줄곧 받았던 나의 일기장은 1년에 공책 다섯권 쯤 되었다. 그치만 중학교 가서부터는 더이상 일기를 쓰지 않아 그게 다였다.
할머니의 손주분도 오랜 세월 일기쓰는 할머니가 자랑스러웠나보다. 할머니의 일기쓰기를 소문을 내 양철북출판사에서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했다. 1판 1쇄 출판 5주만에 4쇄를 발행했다. 이 책이 많이 판매되었다는건 아직도 세상의 정이 훈훈하다는 증거. 먼 타국 뉴질랜드 도서관에서 이 책을 구입해 준 것도 정말 너무나 고맙다. 내겐 그어떤 수준높고 멋드러진 책들보다 단연 으뜸이다.
봄
1988년 3월 11일.
67년동안 무엇하나 쌓아 온 것 없고 남은 것은 얼굴 주름살과 슬픔밖에 없다.
2002년 3월 20일
딸이 왔네. 정말 반가웠지. 그런데 금방 가니 꿈에 본 것 같구나.
2007년 3월 26일 맑음
감자농사. 잘 되면 고맙고 안되도 할 수 없는거고.
여름
1996년 7월 8일 흐림
날씨는 잔뜩 흐리고 건너 밭에 가서 듬성듬성한 도라지를 캤다.
2003년 8월 24일 비
친구 할매 양동욱은 그새 저세상으로 가고 없네. 하룻밤새 친구 한명 떠나가고 이제는 정말 나하나 외로이 홀로 다니게 되었네.
가을
1997년 9월 29일
생각할수록 분함을 이길 수 없네. 어느 누가 알아줄까.
2006년 10월 31일 맑음
이제 거두미는 다 끝나고 전봇대 밑에 시퍼런 콩만 남았다.
겨울
1999년 1월 22일
몽실이 책 다 읽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다 읽고 나니 허전하다.
2003년 2월 23일 비
양양군청에 가서 성금 십만원 내고..대구 지하철 화재난 데 보내달라고..
삼십년의 봄여름가을겨울 할머니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데 그중 나의 심금을 울린 일기들을 추려봤다. 산사태 물난리 화재 등갖가지 사고에도 마음 아파하며 기부하시는 분. 남흉만 보는 세빠뜨와 측량비 이십만원 안내면 길을 다닐 수 없다는 방오달이를 엄청 싫어하시는 분. 나물값을 오천원이나 후려치는 장사치를 보고 저래야 저도 이문이 남겠지라며 긍정적 사고를 하시는 분. 바로 그 분이 이옥남할머니시다.
할머니는 에필로그에서 '전에는 뻐꾸기 울기 전에 깨모를 부어야 기름이 잘 난다고 했는데 이제는 날씨가 바뀌어서 뻐꾸기가 울고도 한참 더 있다가 깨모를 붓는다고 합니다. 콩도 전에는 소만에 심었는데 지금은 하지가 다 되어서 심고. 모든 것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벌써 나와 동갑은 먼저 가고 나 혼자 남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사는건지 걱정이 된답니다' 라고 하신다.
아니에요, 옥남할머니. 더 오래 사셔야 해요. 오래 사는건 걱정이 아니라 축복받은 거에요! 걱정일랑 털어 버리시고 더 즐기셨길 바래본다.
♡ 늘 도서관 관계자분들과 한글도서목록을 수고로이 올려주시는 평상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
1년에 52권 일곱번째 읽은책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2021년 2월 9일 불요일에
첫댓글 님에 이끌려, 읽어보고 싶어라
신청하게 도서관 번호 좀요
영어 알파벳은 한글표기와 차이가 나서요
https://discover.aucklandlibraries.govt.nz/iii/mobile/record/C__Rb3581646?lang=e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