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부자가 ‘엘부림’이라는 간판을 건 것은 2년 전, 하지만 박수양 사장은 지금의 자리에서 50m 떨어진 곳에서 ‘부림양복점’이라는 이름으로 35년 간 양복을 만들어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양복 일이었고, 특유의 성실함과 손재주 덕분에 그는 업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었다. 기능경기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받았고, 한국맞춤양복기술협회 부회장,2005년에는 독일 세계총회 한국대표 심사위원도 지냈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그도 다양한 디자인,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고객을 흡수하는 기성복 업체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복점을 찾는 사람은 계속 줄었다. 맞춤 양복의 전성기던 1970~80년대만 해도 청량리, 답십리, 전농동 일대에 무려 130여 개가 밀집해 있던 양복점들은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지금은 엘부림을 포함해 겨우 3개 매장만이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박 사장은 “주변 가게들이 자꾸 없어지는 걸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양복 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만큼 대단합니다. 한때 세계 기능올림픽에서 무려 12연패한 기록도 있어요. 한국이 출전만 하면 모든 상을 싹쓸이하니, 한때 양복 부문을 아예 경기 종목에서 없애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사양길에 들어선 원인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특히 젊은 고객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인가가 숙제였지요. 예전에는 결혼하면 부모님이 양복점으로 예비 신랑을 데리고 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양복을 맞추었는데,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를 백화점으로 모시고 가는 세상이잖아요. 젊은 고객을 공략하면 중장년층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은 오직 기술뿐, 마케팅 능력도, 양복점을 키울 자본도 없었다. 몇 년 전부터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맞춤 양복 체인업체들이 등장해 저렴한 가격, 젊은 감각으로 시장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무렵, 뜻밖에도 둘째 아들 승필 씨가 아버지의 일을 돕겠다고 나섰다. 연세대 영문과에 재학 중이던 아들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영어교사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40년간 이어온 아버지의 기술이 그대로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웠다”는 아들의 말은 더없는 힘이었다.
연세대 영문과 졸업한 아들이 아버지 뒤이어
“1년에 한 번씩 유럽에서 열리는 남성복 패션쇼를 참관하러 가는데, 넓은 세상도 보여주고, 통역도 시킬 겸 승필이를 많이 데리고 다녔어요. 그중에는 세계적인 브랜드들이 탄생한 장소를 견학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아르마니, 제냐 같은 세계적인 남성복 브랜드들이 사실은 아주 작은 가내 수공업에서 시작해 몇 대를 이어오며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던 것 같아요.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기술은 충분하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더라고요.”
이렇게 두 사람은 부자가 아닌 동업자이자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제자가 되었다. 젊은 고객을 타깃으로 한 만큼 ‘부림양복점’이 아닌 새로운 상호가 필요했다. 35년간 동고동락해온 ‘부림’이라는 상호를 버리기가 못내 아쉬웠던 박 사장은 고심 끝에 ‘엘부림’으로 변신시켰다.
무엇보다 ‘명품 양복의 대중화’를 콘셉트로 명품의 중요한 조건인 아름다운 라인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등 부분이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에스 라인(S-line) 패턴을 직접 개발한 것. 고객들 사이에서 “몸에 착 감긴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는 평이 이어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양복 한 벌을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은 보통 보름, 가격대는 29만 원에서부터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것까지 다양하다. 셔츠 역시 맞춤 제작하고 있으며, 함께 코디할 수 있는 타이, 커프스 버튼 등도 갖추고 있다.
한 번 방문만으로도 주문, 가봉, 납품이 가능하도록 올인원 시스템을 도입해 매장을 여러 번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앴다. 기술과 감각을 모두 갖춘 엘부림은 곧 입소문을 탔다. 방송가에서 일하는 스타일리스트들이 하나 둘 찾아오면서 연예인, 방송인, 아나운서들도 단골이 되었다.
지난해 학교를 졸업한 승필 씨가 본격적으로 양복점 일에 뛰어들면서 고객은 더 늘었다.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승필 씨는 트렌드를 읽기 위해 해외 패션 사이트, 협회에서 나오는 책자들을 꼼꼼히 모니터링한다. 방송이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고 생각해 평소에는 보지 않던 드라마도 열심히 시청한다. 이런 노력 덕분에 중장년층 위주이던 고객층은 자연스럽게 20~30대로 바뀌었다. 박 사장은 “아들의 젊은 감각 덕분”이라며 승필 씨에게 그 공을 돌렸고, 아들은 “세계 명품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아버지의 재단, 바느질 솜씨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열정”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영어교사의 꿈을 포기한 것에 후회는 없는지 묻자 승필 씨는 “양복점 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며, “엘부림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들겠다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한다.
“전 세계에 매장을 두고 있는 일본 브랜드 유니클로도 도쿄의 작은 양복점에서 시작했다고 해요. 창업자인 야나이 타다시 회장의 책을 읽었는데 가격은 저렴하되, 품질과 신용을 중시하는 경영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싸면서도 품질이 좋다면 이건 굉장한 경쟁력이잖아요.”
아들의 말을 들으며 박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일이 내 대(代)에서 끝난다고 생각해 무척 아쉬웠는데 정말 고맙다”며, “요즘은 기술 전수도 조금씩 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에서 경영학과 의류학을 복수전공한 큰 아들은 지금 의류회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경영과 관련해 어려운 것들은 큰아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꼭 성공해 가업을 잇는 문화가 약한 우리나라에서 또 하나의 모범 사례를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