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2월 8일 <오마이뉴스>에 실린 유창선 칼럼 '문국현, 이제 사퇴의 용단 내려야'에 대한 반론입니다. <편집자주> |
‘문국현은 메시아 같아요!’
문국현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고 얼마 후, 어느 기자가 필자에게 한 말이다. 평소 매우 논리적이던 기자의 말에 놀라서, 이 양반이 '오버'하네 하며 그 다음 설명은 듣지도 않았다. 필자도 문 후보를 지지하는 격정적인 글을 써서 많은 사람들을 놀랜 적이 있었기에 그냥 흘려 들었다. 그런데도 그 말은 뇌리에 남아 있었다.
‘메시아, 메시아….’
문국현은 메시아인가
그런데 또 한편의 글이 그것도 매우 긴 글 하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날아들었다. 프랑스 유학파들의 글이 항상 그렇듯이 조금 어렵지만 애써서 읽어볼 만하다. 원글의 아주 일부지만 다소 길게 인용해 보기로 한다.
‘문국현은 좌인가 우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노동인가 자본인가? 사람들이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물음은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는 둘 모두이면서 둘 모두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또 물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 중간인가? 하지만 이 질문 역시 그에게는 엉뚱한 질문이다. 그는 이미 이 이분법적인 사고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이분법이 형성된 시기 이전의 사람이며 그 분열의 이분법을 녹여 상생의 통합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중략)
문국현은 상징이다. 그는 남들이 또다른 남들의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타락을 정당화할 때,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도 ‘잘’ 살아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다. 우리가 잊고 있었지만 혹은 잊으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나름대로 안정되었지만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가난하지만 긍지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가 이 ‘아직도’ 정직한 사람들의 깃발을 들고 사람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위가 아니라 옆과 아래를 보라고. 나 혼자 도망치는 것이 해결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그는 양심의 거울이 되어 우리 모두의 앞에 선다. 그는 자본에게 합리적일 것을 요구한다. 노동에게 근면할 것을 요구한다. 지도자에게 겸손을 요구하고 국민에게 신뢰를 요구한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 안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요구한다. 가난이 참을 수 없게 되는 때는 모두가 가난한 때가 아니라 부정한 자가 부유해질 때이다. 뛰어난 자가 겸손해할 때 그가 존경받는 것이다.
도덕은 낡았다. 성서도 낡았고 불경도 낡았고 모든 상식은 낡았다. 그러나 이 평범한 도덕과 상식은 자본과 노동의 분리 이전에도,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존재했었고, 지금도 우리의 눈앞에 있다. 그것 위에 쌓인 먼지의 무게만큼 도덕은 진리이다. 그것이 겪은 역사만큼 도덕은 진리이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것은 가장 새로운 것이다. 물론 몇 가지의 혁신을 덧붙인다면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혁신은 공동체의 윤리를 자본주의 논리와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상생의 시작이다. (중략)
나는 문국현을 모른다. 어쩌면 문국현은 다른 경영자들보다 조금 더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일 수도 있다. 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도덕적인 듯 가장한 사람일 수도 있다. 아직 구체적으로 정책화되지도 않은 몇 마디 이야기로, 몇 꼭지 기사로 무엇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나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이 글을 나흘에 걸쳐 쓰고 있다. 내가 그를 통해서 문득 보게 된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오늘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정신의 지향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 그것이 내 목표였다.
만일 문국현이 지향하는 방향이 그 지점이 아니라면 그는 그 지점으로 가야 한다. 이후 낡은 문국현이 그 지점을 벗어나면 새로운 문국현이 나와 그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문국현의 뒤를 따라야 한다. 하지만 먼저 윤리회복의 양심선언이라는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 길고 험난할 것이다. 장기적이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름으로 그의 뒤를 따른다하더라도, 그것이 자본이거나 노동이거나, 부유함이거나 가난함이거나, 높거나 낮거나, 이 싸움은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개인적인, 나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나아닌 나와 함께 살면서 나 아닌 나를 받아들이는 싸움이다. 내가 나 아닌 나가 되는 싸움이다. 윤리와 도덕의 싸움이다. 이 싸움은 칼을 들고 싸우는 싸움이 아니라 모범으로 이끄는 싸움이다. 강제가 아니라 권유로 함께 하는 싸움이다. 싸움 끝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되는 싸움이다. 계속 열려있고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하는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칼을 드는 자, 그것이 아무리 ‘정의’의 이름이더라도, 먼저 망하리라. (디시인사이드, ‘파리유학생이 3일간 분석한 문국현의 힘’ 중에서)
그의 글은 감동이었지만, 필자는 왠지 모르게 처절함이 느껴졌다. 특히 ‘낡은 문국현이 그 지점을 벗어나면 새로운 문국현이 나와 그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한다’는 구절에서 이미 문국현은 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의 바람을 상징하는 메시아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먼저 나서려 하지 않는 길을 나서는 사람, 그래서 그가 나타남으로 인해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 우리 사고의 틀을 깨는 바로 그가 문국현이 아니던가? 아, 그 기자가 의도한 것이 이것이었던가?
필자의 블로그 이름을 바꿨다. ‘상생의 메시아, 문국현’. 지나가던 블로거가 비웃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못할까?
문국현 정책의 의미를 아시나요?
필자는 문국현 후보의 정책을 많이 아는 사람 중 하나다. 지난 여름 신나게 문국현 솔루션의 의미를 공부하던 때가 있었다. 필자가 지난 10년간 한국경제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허전했던 그 빈틈을 문국현 솔루션이 메워주고 있었다. 기업인 출신답게 과감하게 제시한 해법은 필자의 학문적 논의의 한계를 쉽게 뛰어넘고 있었다.
누구나 문제는 알고 있었다. 한국의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현저하게 낮다는 점, 특히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도대체 생산성을 어떻게 높일 수 있단 말인가? 학자들은 굳이 애둘러 가려 했다.
문국현은 달랐다. ‘그것이 핵심 문제라면 그것을 돌파해야지 왜 답이 없는 곳에서 헤맵니까? 우리의 국력을 거기에 집중한다면 왜 안되겠습니까? 우리 노동자들이 무엇이 모자라 생산성이 떨어집니까? 그건 우리 경영자들의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문제이고, 우리 국가 지도자들의 문제이지요.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왜 안됩니까? 독일에서, 일본에서, 이태리에서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높은 생산성을 올리는데, 왜 우리만 안된다 하십니까?’
그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바뀐다. 대한민국은 새롭게 태어나 총체적 학습국가가 될 것이다. 문국현은 매년 복지에 20조원, 교육에 30조원, 평생학습에 4조원을 추가로 투입한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나온 공약 중에서 가장 황당한 공약이다. 현재 정부 재정규모가 240조원을 넘어섰고, 기존의 교육이나 복지 예산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이런 공약이 황당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총체적 학습국가로의 대한민국을 재창조하려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보편적 복지와 평생학습을 통해 노동자 개개인의 안정을 도모하고 생산성을 높이면, 이것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국가경쟁력을 높여 성장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창출한다.
세금이 늘어나서 재원이 늘어나고, 이것이 다시 복지와 교육, 평생학습 지원자금을 늘린다.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고도성장의 선순환 구조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국현이 꿈꾸는 ‘꿈의 공동체’를 실현하는 전략이다. 지금 문국현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문국현이 아니라 문국현의 가치다
그런 문국현이 나타났는데,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냉냉했다. 도대체 문국현의 가치가 무엇이고 정책이 무엇인지 알려고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유한킴벌리의 모델을 확대적용할 수 없다는 엉뚱한 민주노동당의 반론이 있었을 뿐이다. 물론 필자를 비롯하여 문국현을 돕고 있는 정책전문가들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탓이 있다. 단기 필마로 뛰어든 그기에 조직은 제대로 정비되지 못했고, 그래서 문국현의 가치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필자는 진보개혁을 지향하는 지식인들, 언론인들이 활발하게 가치논쟁을 벌여줄 것을 기대했다. 정비되지 못한 조직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대통령 후보 문국현과는 독립적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문국현이 아니라, 문국현이 내세운 가치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은 철저히 정치공학적이었다. 문국현 후보가 출마선언을 할 때부터 그들은 대통합신당과 단일화하라는 주문부터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진정성은 있었다. 모두 문국현 후보의 상품성을 인정했다. 대신 정치 신인이므로 당당하게 대통합신당에 들어와서 저 인기없는 정치인들을 물리치고, 그리고 부패정치인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정치인들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과거 5년간 국민들을 어떻게 대접했는지에 대해 책임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국현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의 온존이 중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문국현의 가치를 주목해 달라는 것은 과도한 요구였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들 역시 문국현의 정책이나 가치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겠지만, 많은 네티즌들의 글을 보면서 그들은 문국현이 가리키는 새로운 길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른바 지식인들은 정치공학으로만 문국현을 보고 있을 때, 그들은 가슴으로 문국현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마 필자가 그들과 동감할 수 있는 것은 필자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신용카드 사태 때, 서민들을 절망으로 이끌던 부동산 사태 때 서민들 모두 다 죽는다며 아우성치던 필자에게 정치인들이 보내던 동정의 눈빛을 기억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OECD자료를 보면서 상위10%의 소득을 하위 10%의 소득으로 나눈 비율이 28개국 중에서 28위였던 사실에 놀랐던 그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자리가 갖고 싶다는 절규를 들어라
지난 10년간 국민들이 진보개혁세력에게 어떤 대우를 해 주었고, 반면 진보개혁세력이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진보개혁세력이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명백하지 않은가? 자신들이 모든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 헌신짝처럼 국민을 취급했던 세력이, 이제 국민들의 안위를 운운하는 것은 오만 아닌가?
문국현의 퇴진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문국현의 가치는 더없이 소중하다. 문국현이 있든 없든 우리는 문국현의 길을 가야만 한다. 그것은 당위의 길이지 선택의 길이 아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자리가 갖고 싶다는 청년의 절규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이제 문국현의 퇴진을 요구하는 소리에서 지난 10년간 국민들이 왜 고통을 겪었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문국현의 정책과 정동영의 정책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단한 무식의 소치이다. 가치를 중시여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보개혁을 운운하지 마라.
이제 그들은 문국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따르기 때문이다. 정부가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비밀을 그가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에서 미국에서 선진 정부들이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복지재정, 교육재정, 평생학습재정 예산을 높이면 된다는 단순한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꿈의 공동체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국현이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문국현의 정책이 무엇인지 공부부터 하라. 진정한 진보개혁세력이라면 문국현의 가치를 논하라. 다시 파리 유학생의 글이 떠오른다. 우리 모두 ‘불세례’를 받아야 한다. |
첫댓글 그거 아세요? 가슴형 사람이 있다는 거 ?? 머리형 사람인 이명박이가 된다면 그의 머리 놀음대로 세상 돌아갑니다. 확신해요. 제가 가슴형이 아니라 머리형이라 알아요...ㅠ.ㅠ 울 남편 가슴형인데 ...어쨌든 가슴형이 국민을 보살피게 될 날이 오도록 하는데 함께 뛰겠습니다. 함께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