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간 안동 김씨 즉 장동 김씨는 金璠(1479-1544)의 아들 金生海가 성종의 아들 景明君 李枕의 사위가 됨으로써 장동 김씨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김생해의 셋째 아들 김극효는 좌의정 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다. 金尙容과 金尙憲은 좌의정의 외손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자신들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김상용은 1590년에, 김상헌은 1596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는 등 평범한 벼슬아치였던 이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인 仙源 金尙容(1561-1637)은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여 원주로 내려가 우거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병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로대신으로서 강화도로 왕족을 시종하던 留都宰臣의 자리에 있던 김상용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하고 만다.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충렬사는 바로 김상용의 신발 한 짝이 이때 날아와 발견된 자리라고 한다.
김상용의 아우 淸陰 金尙憲(1570-1652)은 윤근수와 성혼의 문인으로 병자호란때 예조판서로서 굴욕적인 국서를 찢고 마침내 청에 끌려가서 옥고를 치른 주전론자로 북벌을 외치던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존경을 받았으며 대의명분의 상징으로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고 한미한 집안 안동 김씨를 일약 명문의 반열로 발신시키는 계기가 된 인물이다. 그는 백부 金大孝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무자하여 형 김상관의 아들 金光燦을 양자로 들였다.
김상헌의 양자가 된 金光燦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손서가 되었는데, 계축옥사로 김제남 가문이 화를 당하자, 김광찬은 김수항을 비롯한 3남 5녀를 생산한 부인 연안 김씨와 강제이혼을 당하고, 새로 부인을 얻어 김수징을 비롯한 4남 1녀를 더 두었다. 그 후 인조반정으로 김제남 가문이 복권되자, 첫 부인 연안 김씨 또한 김광찬의 본부인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고, 두 번째 부인 김수징의 생모는 본의 아니게 후실이 되어버리고 그 자녀들도 억울하게 서출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기막힌 가족사라 하겠다.
김광찬의 장남 谷雲 金壽增(1624-1701)은 공조참판을 끝으로 춘천 화악산 기슭 곡운구곡에 은거하여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유유자적하며 두 동생보다 오래 살았다.
둘째 金壽興(1626-1690)은 큰아버지 김광혁의 양자로 들어가 1648년 사마시에 급제, 도승지와 호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오른다.
셋째 金壽恒(1629-1689)은 18세때 진사시에 장원으로, 23세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오르니 영의정에 오른 형과 함께 형제가 현직 정승을 지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탄핵을 받은 김수항은 진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약을 받게 되고, 장기로 유배되었던 형 김수흥 역시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안동 김씨로서는 두 번째로 만나는 시련이었다.
그들의 할아버지 김상용과 김상헌이 외적을 상대로 고초를 겪었지만 김수흥과 김수항은 당파싸움에 휘말려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을 앞둔 김수항은 자식들에게 “科宦은 자제하고 忠節과 文翰의 전통을 계승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김수항은 아들 6형제 이른바 ‘6昌’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아들 6형제의 이름이다. 항렬이 ‘昌’자에다 다시 한글 ‘ㅂ’ 받침을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남 창협, 3남 창흡, 4남 창업, 5남 창즙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벼슬을 하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자적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요절한 6남 창립을 제외하고 저마다 문집 하나씩을 내었으니 가문의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반면 장남 金昌集(1648-1722)은 아버지의 유훈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이전 남인들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이 복권되고 1717년 김창집은 영의정에 오르고 노론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721년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자는 움직임이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노론에서 주창되고 결국 연잉군이 왕세제로 봉해진다. 노론은 여기에서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까지 주장하기에 이르고 결국 대리청정이 결정까지 되었으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던 소론 조태구가 궁궐에 들어가 경종을 만났고, 경종은 결국 소론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소론 김일경의 상소에 따라 대리청정을 주도한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 이른바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일파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창집은 거제도로, 그 아들 김제겸은 울산으로 귀양을 갔다.
1722년 목호룡이 노론 명가의 자식들이 숙종 말년에 세자(경종)를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함에 따라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과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가 죽임을 당하고, 이어 소론의 조태구와 최석항의 주청에 따라 김창집과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 일파 173명이 화를 입게 되니 이것이 申壬士禍이다.
신임사화로 김창집은 아들 제겸을 비롯 손자인 성행과 탄행까지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는 등 3대가 사사되었고, 破家邸澤의 처분까지 받았으니, 철저하게 역적으로 처리됨으로써 안동 김씨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이 되었다. 이것이 안동 김씨로서는 세 번째 당하는 시련이 된다.
이후로 한동안 안동 김씨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그렇다고 가문이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2尙 3壽를 거쳐 6昌으로 번성한 가계는 수많은 후손으로 이어졌고 다양한 인재를 배출했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즉위했다.
김창집의 아들 金濟謙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넷째인 金達行의 둘째 아들이 金履中이고, 김이중의 아들이 바로 金祖淳(1764-1831)이었다. 증조부 김제겸과 고조부 김창집이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모두 복권되었으며, 김조순은 그들이 죽은 뒤에 태어났기에 어엿한 노론 명문가의 자손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1785년 김조순은 21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는 원래 이름 ‘洛淳’을 ‘祖淳’으로 바꾸어 내리고, ‘楓皐’라는 호까지 지어 주었다. 1778년 정조는 조정의 반대를 무릎 쓰고 金昌集을 영조의 묘정에 배향했다. 김창집은 연잉군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하다 처형까지 당했으니 연잉군의 손자인 정조로서는 안동 김씨 일문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남달랐던 것이다.
첫댓글 장동김씨들의 가계도를 잘 설명해 주셨네요. 잘 보고 갑니다.
일반인들은 장동김씨하면 잘 모르고 선생님같은 분들은 장동김이 안동김의 별칭인것을 알지요
좋은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