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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묵상글 들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희망없는 자의 슬픔이 아니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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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희망없는 자의 슬픔이 아니도록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난봄 저의 제자가 젊은 나이에 죽었을 때
저는 제 일생을 통틀어 제일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보다도 더 많이.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을 들으면서 그때 그렇게 슬펐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제자가 죽은 것은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희망하던 대로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라는 믿음은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나
얼마 전 제 동창 신부가 죽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슬픔은 믿음과 희망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죽은 것은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간 것이며
희귀 암으로 고통스러웠던 몇 년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통을 끝낸 것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울었던 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서러움이었습니다.
그의 삶이 서러웠습니다.
일찍 죽은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이 세상 고생만 하다가 죽은 것 같아서 서러웠던 것입니다.
아니, 고생만 하고 행복은 없었던 것 같아서 서러웠습니다.
그러니 이 서러움 안에는 저 세상에서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그 바람이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제 제자가 이 세상에서도 행복했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 제자에 대한 저의 사랑 때문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것은 저의 희망과 기쁨과 행복이
아직도 초월적이지 못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천국의 행복을 향한 희망이 이 세상 모든 고통과 불행을
뛰어넘게 할 정도의 희망이 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올해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때문인지
그 부끄러움이 더 큽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제 제자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지요.
생각해보십시오. 25년을 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고통은 제 제자보다 훨씬 컸지요.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고 일생이 고통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김대건 신부님이 불행하셨습니까?
김대건 신부님이 당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까요?
김대건 신부님이 남긴 글들과 행적을 보면 불행의 흔적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불행을 초월케 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리 고통이 커도 당신이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그 믿음이었고,
이 세상의 짧은 고통을 넘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대한 희망이었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통이 그렇게 서럽고 그래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체험이 없다는 표시요,
모든 고통을 초월케 하는 초월적 희망이 없다는 표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죽음을 슬퍼함이 아무리 사랑일지라도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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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을 내줄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게 여의치 않자 결국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 계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남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가지고 계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고은 시인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고 통찰한 것처럼 힘이 빠지고 내 것을 내려놓아야 '새로운' 눈을 뜨게 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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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와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고,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 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돌아가게 하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는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또한 원하시면 빠져나가십니다(요한 18,7-8).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혹 오늘 우리도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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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나자렛 선언, 하느님 클라쓰
오늘부터 연중시기를 마칠 때까지 평일 미사에서 루카 복음을 듣습니다.
마르코는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 하며 예수님 가르침의 대주제를 소개했었고, 이에 대해 마태오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하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루카는 같은 메시지를 나자렛 선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라는 암시가 나오고, 성령의 이끄심이 전제되어 있으며,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과 눈먼 이들과 억압받는 이들 등 사회 밑바닥 인생들을 들어 높이시는 일이 하느님께서 하실 역할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 가르침의 대주제를 복음사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우선 복음사가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르고,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 겸 지도하고 있는 신앙 공동체의 처지가 다르며, 결정적으로는 각 복음사가들을 이끄신 성령의 안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를 쓰는 데에도 감도하셨지만, 복음서들 전체 안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데에도 감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때를 강조했고, 마태오는 회개를 강조한 것이며, 루카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측면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선언은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 경륜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입니다.
이 계시는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해방의 이유를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신 진리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자렛 사람들은 이러한 ‘클라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화를 냈고 그것도 모자라서 예수님을 벼랑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의 어이없는 배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공생활 내내 예수님께서는 이 메시지의 맥락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나 백성 모두 알아듣지 못하고 배척했고, 그래도 그분은 당신이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고,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켜야 하는 메시아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이런 ‘클라쓰’로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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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대학교 교수인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서 노력하고 있는데, 아이들은 시간만 보내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때는 정말 다들 열심히 공부했는데….”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저는 일반 대학이 아니라 신학 대학에 들어갔기에 일반 대학교 분위기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때의 교수 신부님께서도 “너희들 지독하게 공부 안 한다.”라고 자주 말씀하셨거든요.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일반 대학생들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공부 안 한다고 자주 혼내셨습니다.
늘 자기 관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운전자들에게 자신의 운전실력이 어떤지를 질문하면 대부분 다른 운전자에 비해 실력이 뛰어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른 것을 보려 하고, 그 입장을 가지고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역시 나는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생각으로 그런 단죄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이 정답이었을까요? 큰 잘못이었고 후회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선포를 고향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이상합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찮은 목수의 아들인데, 무슨 하늘 나라를 선포하냐는 것이겠지요.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서 화만 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의 과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야기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자기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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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은 에상치 못한 일을 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의 탄생에는 세상을 바꿀 가능성이 수반된다(한나 아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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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우울증은 흔한 정신질환으로 마음의 감기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결코 간단한 병이 아닙니다.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어나게 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자살이라는 심각한 결과에 이를 수 있는 뇌질환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 아냐?”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 생각을 가지면 자연스럽게 우울감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고혈압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요인이 2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혈압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주 단순한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200가지가 넘는데, 하물며 우울증 같은 복잡한 병에는 얼마나 많은 요인이 있겠습니까?
저도 잘 몰랐습니다. 얼마 전에 1,000페이지가 넘는 우울증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모습처럼, 남을 자기 기준에 맞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한 노력을 통해 이해의 시작이 이루어집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분이 참 많습니다. 이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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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속담처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원전 500년경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부처, 공자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서양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집착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원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인의예지’의 원리입니다. ‘왜?’라는 질문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 왜라는 질문에 부처는 깨달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공자는 인생의 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름을 남긴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그분들 중에 세종대왕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을 창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묘비명’을 남기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모든 삶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사탄으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사탄에게 절하면 세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하느님을 시험하면 안 된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면 안 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서 이렇게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선포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이들은 듣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걷게 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처럼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한 사람 때문에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고난과 모욕을 참아내셨습니다.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과 재능 그리고 업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능력, 재능, 업적과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고,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면 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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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 부활의 희망 -
눈 만 열리면 곳곳에 보이는 희망의 별들입니다. 인터넷을 열어보니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프카니스탄을 위해 기도와 단식을 요청하다”란 기사가 교황님 홈페이지에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교황님 역시 이 시대 희망의 별입니다. 또 오마이뉴스에 “여든 살에도 하루 4시간 작업, 건강의 비결은 대패질-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0호 최태순 악기장; 혼 불어 넣은 현악기, 모두의 심금을 울리다”라는 기사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 희망의 별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무형 문화재 희망의 별들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새벽 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이 눈에 띄었습니다. 희망의 별, 주님의 별이라 칭하고 싶습니다. 문득 예전 24년전 써놓고 애송했던 별이란 시가 별처럼 떠올랐습니다. 당신의 별이 되고 싶은 심정에서 쓴 시입니다. 당신은 주님은 물론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지칭합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어제는 보이는 삶의 필수 요소 ‘의식주-옷밥집’을 넘어 보이지는 않는 궁극의 ‘의식주-그리스도의 옷, 그리스도 말씀의 밥, 하느님의 집’에 대한 묵상의 강론을 나눴고, 어느 자매님과 이에 대해 나눈 카톡 메시지 전문을 나눕니다.
-“신부님!
저는 20대에서 30대 초반까지 의상실을 경영했고, 45세 10월부터 60세 초반까지 음식점을 경영했어요. 61세부터 현재까지 주거 임대를 하고 있습니다. 의식주 순서대로 제 주어진 삶을 가고 있는데 음식 만드는 일이 가장 즐거움이고 보람 되는 것 같습니다. 신부님 강론 말씀으로 힘을 얻어 일어나 열정적으로! 수도원길, 하늘길, 희망의 길에 서 있습니다.”
제 강론이 자매님에겐 주님의 별, 희망의 별이 됐음이 분명합니다. 이 아름다운 자매님 역시 주님의 별, 희망의 별처럼 생각됩니다. 즉시 하느님의 집, 아름다운 수도원 성전과 더불어 보낸 답글입니다.
“수도원 성전, 하느님의 집 선물합니다!
그렇네요! ‘의-식-주’ 삶의 여정이었네요! 이제부터 진짜 그리스도를 입고, 그리스도 말씀의 밥을 잡수시고, 하느님 집에서 평화로이 사세요! 내 몸담고 살아가는 집이 바로 하느님의 집이랍니다.”
주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참으로 진짜 궁극의 영원한 희망, 희망의 별입니다. 바로 오늘 공생애 출발점의 시점에서 회당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이사야서 말씀을 인용하며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모습은 그대로 희망의 주님, 희망의 별처럼 느껴집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시킨 말씀처럼 예수님의 오도송悟道頌과도 같고 출사표出師表와도 같은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우리 또한 모두 주님의 종이 되어 당신의 희망에 참여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이사61,1-2)
얼마나 좋습니까! 무지와 허무에 눈먼, 노예살이하는 사람들에게 답이 되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영원한 희망의 별, 구원의 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이런 주님을 만나 참으로 자유로워지는 우리들이요, 우리 또한 주님의 별, 희망의 별, 구원의 별,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과 함께 세상에 파견되니 새삼 힘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말씀을 든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이요 구원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그러나 우리와 달리 복음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그대로 이들은 물론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참으로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무지가 주님을 아는데 얼마나 결정적 장애가 되는지 깨닫습니다. 하여 주님의 은혜는 당신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었던 이방인들인 엘리야 때 사렙타의 과부같은, 엘리사 때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을 예고하였고 그 결과 우리가 주님의 혜택惠澤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주님의 길을, 주님을 따라 희망의 별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을 막지 못함은 이어지는 내용이 웅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회개는 커녕 화가 잔뜩 난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표표漂漂히, 유유悠悠히 미련없이 떠나시니 이 또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이 또한 세상 한 복판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게 될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격려가, 힘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궁극의 참 희망이십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자는 결코 절망의 유혹에, 수렁에, 심연에 빠지지 않습니다. 유유히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마지막 죽음에서도 자유롭습니다. 바로 주님 부활의 희망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 당신의 재림에서 부활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세상의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죽음에 슬퍼하지 말라 하시며 다음 같은 격려 말씀을 주십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 가실 것입니다.---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살아서는 ‘주님 안에서’. 죽어 부활하여서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게 될 우리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도 우리의 용기를 더욱 북돋우며 부활하신 주님께 희망을 두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15,14.17-20)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주님 희망의 별들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부활의 희망을 깊이 심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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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끝까지 희망하라는 메시지를 듣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루카 4,18)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그분의 온 생애를 요약합니다. 예수님의 강생은 성부 하느님께서 보내시고 성령께서 움직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전체그림입니다.
그날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 닥친 일들 역시 그분 공생활이 그대로 녹아있는 축소판과 같습니다. 그때 찾아 읽으셨던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소명이나, 일부는 그분을 좋게 말하며 받아들이고, 일부는 그분 출신을 트집 잡아 거부하는 모습들이 그렇습니다.
또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이방인과 죄인들이 먼저 구원된다는 예수님의 일침, 그로 인한 고향 사람들의 반격, 살해 위협,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모습까지 마치 예수님의 전 생애를 한 편의 파노라마로 편집한 것 같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나자렛 회당 사건을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신 직후에 배열해서 마치 하느님 구원 사업의 발대식과 같이 펼쳐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수난과 죽음, 부활이 뺄려야 뺄 수 없는 중심 요소로 자리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나자렛 주민들이 예수님을 내몰았던 "고을 밖"이 십자가형이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타와 겹칩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그들 손을 벗어나 고향을 떠나십니다.
고향 나자렛이니 안식일 회당에 성모님과 그분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을 확률이 크지요. 그들이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어디쯤 어떤 심정으로 있었을지, 그리고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도 놀란 가슴을 졸이며 얼마나 불안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인생에서 시련과 배척과 죽음의 고통을 피할 길 없는 우리 모두의 심경과 다르지 않았겠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1테살 4,14)
죽음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문과 두려움을 갖는 실존적 문제인데, 박해와 순교로 늘 죽음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초세기 신자들에게는 더 말할나위 없는 현안인 셈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가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편에 계신 예수님 생애 전체가 표징이고 희망입니다.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이 우리 구원의 여정을 지탱해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1테살 4,17)
죽음을 건너 부활로, 고통 이후에 영원한 행복으로, 희생을 너머 축복으로, 인내 뒤에 열매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앙의 여정은 당장의 실패처럼 보이는 어둠과 시련을 딛고 승리로 활짝 피어나는 빛의 길, 생명의 길, 부활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은 배척과 모욕, 수난과 죽음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결국 승리의 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나자렛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는 그분 생애의 골자를 보여주면서, 또 우리 삶의 구체적 순간마다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삶의 질곡을 거치면서 갈등과 실패, 질병과 이별, 무기력과 슬픔 등의 도전과 시련에 맞닥뜨리더라도, 오늘 말씀 속 예수님과 함께 그 어둠을 가로질러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환경적 한계와 스스로의 가난함을 십자가로 등짐 지고도, 영원한 승리인 "부활"이라는 눈부신 정점을 향해 힘 내어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격려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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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4,18)
희년을 선포하자!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하느님의 영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잡혀간 이들에게, 눈먼 이들에게, 억압받는 이들에게 희년, 곧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이유이며,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알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 고향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희년을 선포하자!'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사람이 된 사람들은 '축성 성유의 도유(기름바름)'를 통해 '주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은, 예수님처럼 너에게 희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너에게 기쁨과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입니다.
먼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나 자신과 나의 가족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면 희년 선포의 대상들이 보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을 사는 사회적 약자들, 아픈 이들, 독거노인들이 보입니다. 그들에게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기쁨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바라보면 지구촌 곳곳에서 힘들어 하는 이들이 보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의 고통이 보입니다. 그들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이번에 이프카니스탄 형제자매들을 기쁘게 받아 준 진천군 군민들의 사랑이 크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 못하는 자연의 피조물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자연의 피조물들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잘 살아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그들을 핍박한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들에게도 희년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코로나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희년 선포를 위해 땀 흘리는 하느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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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이전의 모습을 길게 소개한 뒤에, 세례와 광야에서의 유혹, 그리고 갈릴래아의 전교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회당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셨는데, 주로 나자렛과 카파르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갈릴래아는 이스라엘에서 비옥한 곡창지대이지만, 그곳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이어서 부자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고 상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수도가 아닌 이방인의 땅, 아픈 이들의 땅인 갈릴래아로 가시어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습니다”(루카 3,21-22). 또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 가시어”(4,1) 유혹을 이기시고, 그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어”(4,14)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4,18; 참조: 이사 61,1)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님께서는 기름부음 받은이, 곧 메시아가 되시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 빚 때문에 투옥되거나 잡혀서 유배 당한 이, 육체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둠 속에 있는 눈먼 이, 사회적으로 짓밟히고 억압받고 소외된 약한 이들, 고통에 울부짖는 이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이제 세례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아파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과 함께하고, 그들을 살리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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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께서는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지금 당신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명시한 이사 61,1을 읽기 위해 나자렛 회당에 오셨다.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시며 하신 첫 발언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서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하셨다.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하면서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난폭함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질투는 걷잡을 수가 없었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일생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정신, 주어진 시간, 가진 능력을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처럼은 다 못하더라도 우리의 처지에서 내 능력껏 찾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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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막아 설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이다.
말씀은
순리이다.
그 누구도
말씀을
역행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말씀이다.
말씀이
우리의
감춰진
선입견을
읽어준다.
말씀도
진리도
고향에서만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환영을
받지 못해도
오늘 하루는
말씀이 있기에
생명의
말씀으로
소중하다.
선입견에
휘둘리지
않으시는
말씀의
주님이시다.
말씀은 언제나
말씀의 발자취를
남긴다.
말씀의 발자취는
이해와 긍정의
발자취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말씀이
선입견으로
가득한 이곳을
비추며
찾아왔다.
나의 뜻을
내려놓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복음이
되었다.
말씀으로
이끌어가시고
말씀으로
완성하시는
말씀의 오늘이다.
우리자신이
말씀으로
먼저 맑아져야 할
오늘 하루이다.
대자연은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간다.
계절과
계절 사이
사람과
마음 사이에
완성하시는
말씀이 있다.
말씀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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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1장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에 관한 예언을
읽으신 뒤에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늘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라고 선포하신 일입니다.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그 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루카 2,11).
예수님의 선포는, 이제 당신이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선언입니다.>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선포도 ‘기쁜 소식’(복음)이고, 구세주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겠다는 예수님의 선언도 ‘기쁜 소식’(복음)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라는 말은,
구세주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이고, 예수님은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외계층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층과 지배계층 사람들을 구원에서 배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의 복음’이고,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차별도 없고,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시고, 주로 그 지역에서
활동하신 것을, 소외계층 사람들만을 상대로 활동하신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생각은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을,
‘특정 계층만을 위한 복음’으로 가두어 놓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갈릴래아 지역에서 활동하신 것은, 그 곳이 이방인 선교를 위한
전초기지로 삼을만한 지역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이방인 선교’ 라는 말은, 전체 인류를 대상으로 한 선교활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이 남부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더 개방적이었던 것도 그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하신 이유에 포함될 것입니다.
(여기서 ‘개방적’이라는 말은,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다 지역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어서, 만일에 그곳에서 복음 선포 활동을 시작하셨다면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마리아의 노래’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0-53).”
이 노래는 아무도 소외되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음을
찬양하는 찬미가입니다.
이 찬미가를 겉으로만 보면, ‘교만한 자들, 통치자들, 부유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오해이고,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물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구원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 노래에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하느님은 찾지 않고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낸다면,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루카 4,22).”
이 말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있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압축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마태 13,54-57ㄱ; 마르 6,1-3).”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은총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복음을 듣고서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목수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에 놀라기만 했을 뿐입니다.
루카복음의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을 좋게 말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은총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말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있는,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복음(기쁜 소식)을 전해 주어도 기뻐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구세주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이 아닌,
다른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사람들에게, ‘사렙타의 과부’의 이야기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루카 4,25-27),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특권의식과 자만심을 버리고,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복음은,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은총’이 되지만,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자신에게 ‘죽음의 저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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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망각과 무관심과 안일함의 잠에서 깨어나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사명과 계획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이 대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그분은 유배생활에서 돌아왔지만 가련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비참한 상황을 회복하시러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희망 없이 소외된 이들을 위하여 파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어 활동하시는 ‘삶의 자리’는 가난과 소외가 드러난 ‘하느님 부재의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통치자들의 야욕과 탐욕으로 궁핍해지고 힘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유를 상실하고,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며, 짓눌리고 죽음에 처해지는 소외 상황에 눈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을 소외로부터 구해내며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상실과 소외로 비인간화가 드러나는 삶의 자리에 ‘희년’을 선포하러 오셨지요. 다시 말해 그분께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떳떳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구원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 당신의 오심과 현존으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 하십니다(4,21).
그런데 예수님의 선포와 활동을 믿었던 사람들은 곧바로 그분을 의심합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평범한 가난뱅이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믿지 않은 것이지요. 구원은 하느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나올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잔뜩 화가 나 예수님을 배척합니다(4,25-29).
예수님의 제자인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분을 믿는다면 그분의 사명을 나의 사명으로 삼아야겠지요. 그분과 동화되어 그분처럼 가난과 소외를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하느님 자비의 눈길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과 아픔이 있는 이들의 해방을 위해 투신하며, 주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데 집중해야겠지요.
아마도 세례를 받은 우리 대부분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드러나게 그리고 행동으로 그분을 배척하고 죽음으로 내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부인과 반대를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참 제자의 태도일까요?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유지하면서도, 예수님처럼 가난과 소외, 억압과 차별을 겪는 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요?
늘 잊어버리는 ‘망각의 병’이 문제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실천적 무신론자’ 같은 처신이 문제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억압 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소외와 존엄한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길에 적극 동참하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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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019년 9월 2일
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중심 도시라 할 수 있는 테살로니카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사도 바오로 입장에서는 이방도시인 것입니다.
이 도시가 크고 문화적으로 상위권에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현실적이고 또 종교적으로는 그리스의 다신 사회이기에 사도 바오로에게는 선교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그들에게 부활사상은 생소하리만큼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1테살 4,14)
주님의 부활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주님에 대한 부활 뿐 아니라 그 분께서 약속하신 세상종말과 심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웅장하고도 상세한 설명은 복음의 핵심이면서도 이방 공동체에 새로움과 함께 확신에 찬 복음선포인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1테살 4,16-17)
주님께서 당신 고향이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고 희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소식’, ‘희년’을 알리는 예언서(이사 61,1-2)를 인용하시며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군중은 그분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4,22)라며 언짢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반응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4,24)
그리고 이어서 이방인 사렙 과부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기적과 나병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기적 이야기를 하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 암시하며 비판하십니다.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을 알고 화가 잔뜩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트리려 하지만 에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그곳을 떠나가십니다.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것도 별 생각 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 옛날의 기억에 예수님을 가두어 버립니다.
그들은 이사야 예언 말씀의 성취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로 풍기는 인상을 보고, 또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전체를 못 보고 한 부분을 봅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심리에 따라 남에 대한 판단이 더욱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억에 담아 둔 사람은 변할 줄 모릅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사람은 변하고 또 나름대로 성숙되어 갑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의 기억은 변할 줄 모르고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과 교훈의 말씀에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라는 지혜로운 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있는대로 볼 줄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오랜 수련의 덕목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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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사명의 본질은 이 세상 전체,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 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서 61장 1~2절)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1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 한 마디 강론 말씀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말씀, 권위로 가득한 간결한 강론에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름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도통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더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그분을 회당에서 내쫓았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벼랑 끝까지 끌고 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신성모독이며 반역입니까?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박수를 쳐도 부족할 터인데, 노골적인 살의로 그분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상적 번영, 물질적인 부와 정치적 권력, 이스라엘의 위대함과 관련된 공약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빵, 기적, 권세를 다시 한 번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이기적인 바램들과 교만한 허영심을 끝도 없이 충족시켜주시는 기적의 요술방망이 같은 분이 아님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 전체, 그리고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사명의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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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막연히’ 사는 사람은 죽음도 ‘막연해서’ 두렵다>
루카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을 선포하는 사건이 나자렛에서 일어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요셉이 메시아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교만을 지적하시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선포하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를 주님 뜻에 따르며 자신을 버린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말기 암 환자들을 많이 접한 경험을 책으로 쓴 김범석 의사가『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소개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분의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닌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김범석 선생을 찾아온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기대였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10년만 더’를 말했습니다. 물론 모른 척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인생의 귀중한 일부로 만들고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특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사로서 앞 환자의 예를 들어 그분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같은 소소한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숙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 그렇게 주저하다 추석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 두 사례 중 죽음을 덜 두려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하루하루 충실히 살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삶이 막연하니 죽음도 너무 막연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 삶이 해야 할 일로 채워지면 죽음도 해야 할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명확할 때 죽음도 명확해집니다.
어느 독특한 월터란 물리학 교수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물리 공식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교수는 물리학 수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월터 교수가 살짝 더 이상했습니다. 15kg 되는 추를 자신의 턱에 갖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운동에너지 보존법칙을 100% 확신해요. 나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조용히 해 주세요. 장난이 아닙니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힘드네요. 셋, 둘, 하나.”
추가 다시 돌아올 때 턱이나 목이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 물리학 법칙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에너지 법칙에 따라 추는 자신이 놓은 그 자리 이상 올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보는 사람도 짜릿합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주십니다. 당신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란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빡빡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삶의 일부인 죽음도 주님 뜻대로 받아들이면 행복으로 끝날 것을 알게 됩니다.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월터 교수처럼 하루하루가 짜릿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은 뭐 하며 살지?’라는 식으로 절대 하루를 막연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에서 많게는 여섯 가지 정도 정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정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며 먼저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항상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소명임을. 그리고 그 죽음 뒤에 가장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뜻에 나를 맡기고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뜻에 살짝 미치면 죽음까지 포함한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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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은 짙어집니다.
우리가 빛을 선택하면 어둠은 따라옵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선택은
그만큼의 포기를 의미하며
아무런 포기 없는 선택은 없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이는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행복이 예수님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삶의 의미를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나약함은
예수님을 통해 기쁨과 영광만 바라게 되고
그분을 닮아가기 위해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내 안에 이미 내가 가득 차 있는데
억지로 예수님을 모시려 하니 스스로 혼란스럽게 됩니다.
결국 그 사람의 선택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
예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은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이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혈연이나 학연이 아닌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하느님을 향해 살아야 합니다.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를 찾아온 예수님을 거부하고 밀어버릴 뿐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들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분을 내 안에 초대하여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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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오늘 복음은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편견과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은 왜 좋지 못한 것일까요? 여기에 사로잡히게 되면 아무리 좋은 게 있어도 그걸 이미 자기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인 고정된 틀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온전히 어떤 현상이나 본질을 바라볼 수가 없게 됩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색안경을 벗기 전에는 절대 본질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주관적인 성격이 좀 더 강합니다. 객관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게 개입될 여지가 적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직업이 가발을 만드는 사람과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죠. 이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로 ‘직업병’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걸 굳이 떠나서 이 두 사람의 시선이 가는 방향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어떨 것 같습니까?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시선이 주로 아래로 향할 수 있습니다. 가발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의 머리 스타일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예리하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두 사례가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면 누구나 수긍이 갈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보통 보면 자기가 보고자 하는 면만 보려고 하는 심리가 있는 것입니다. 직업병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직업으로 인해서 생긴 병이라는 것입니다. 직업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랜 시간을 함께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처럼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것도 이처럼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한번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보통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편견과 선입견도 또 하나 장담을 할 수가 없는 게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보는 모든 시선과 생각이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본다고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 알 수도 있고 또 착각과 실수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떤 사실을 바라볼 때 자신의 주관이 많이 개입돼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이 보편적으로 보면 많이 있는 경우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면 어떤가요? 예수님의 좋은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긴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시원찮습니다. 은총의 말씀을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게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오늘 복음에 보면 놀라워하는 반응을 하는데요 이 반응도 중의적인 의미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말씀 그 자체가 놀랍다는 뜻으로 놀라워할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어떻게 요셉의 아들인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런 아들의 입에서 저런 말을 할 수가 있는지 그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놀랍다는 의미도 있을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기존에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가졌던 편견과 선입견으로 예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문맥상 의미를 보면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을 예수님께서는 보시고 그들의 허를 찌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의 이야기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주십니다. 두 사람을 언급을 했는데 그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났던 것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씀입니다만 복음에 나오는 단편적인 사실과 정황만을 놓고 봤을 때 마을 사람들이 바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을 예수님께서 왜 언급하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되면 화를 낼 수가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사례인데 그걸 간파할 정도라면 말입니다. 만약 하나만 언급했다면 조금은 이해가 될 수가 없을 확률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두 개를 한꺼번에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의도는 그들이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그들에게 말씀하시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들이 은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믿음 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과부는 자신도 코가 석자인데도 불구하고 엘리야의 입장을 이해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단적인 예입니다.
나아만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엔 자존심을 내새웠지만 부하와 또 포로가 된 이방 처녀의 말에 귀를 기울인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일곱 번 강물로 씻어야 한다고 하는 대목에서 그것도 완전히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해서 나을 거라면 서너 번만 하면 되지 일곱 번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나아만 장군은 온전히 순종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병이 나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믿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든 생각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천날 만날 보고 들어도 자신의 믿음에 변화가 없는 신앙생활이 된다면 우리에게도 구원의 문이 배제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런 논리를 좀 더 확장해서 보면 부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교리는 다르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복음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경우 그들에게도 하느님은 구원의 손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교에도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자비도 되지만 우리가 말하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이 베푼 자비의 대상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 해당한다면 그들이 자비를 베푼 대상이 바로 그들은 단순히 일반 대중인 보살에게 자비를 베푼 것으로 알고 했을 일이지만, 우리의 교리를 좀 더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바로 예수님께 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보잘것없는 사람과 가장 작은이의 기준에 어떤 종교를 통해서 구분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복음에 존재하는 이유가 의미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제2 계명에 해당하는 대상이 바로 ‘누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어떤 특정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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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cpbc TV. 매일미사
https://youtu.be/V9tdH5MCmPE 30:29
2021. 8. 30.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연수 스테파노 신부 (예수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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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30.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제1독서 (1테살4,13-18)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15)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5절에는 주님의 '재림'이라는 말이 직접 나온다.
여기서 '재림'에 해당하는 '파루시안'(parusian)의 원형 '파루시아'(parusia)는 원래 임금이나 황제가 지방의 도시를 방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이런 방문에는 그 도시민들의 환영 행사가 있었고, 황제가 내리는 상에 대한 시상식이 수반되었다.
이러한 개념이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개념으로 차용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남아 있게 될 ~ 산 이들'에 해당하는 '호이 존테스 호이 헤릴레이포메노이'(hoi zontes hoi perilleipomenoi; who are still alive; who are left)는 현재분사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이 글이 쓰여질 그 당시에 땅에서 살고 있는 자들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여기서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은 사도 바오로와 그의 일행 및 테살로니카 신자들을 비롯해 그 당시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 된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본다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생존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게 되길 희망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가 당시의 그릇된 종말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생존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으로 믿고 이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만약 우리가 살아 있다면' 이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을 지칭하는 일반적 용어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모든 살아 있는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우리'라는 말을 썼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앞서지는' 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프타소멘'(pthasomen)의 원형 '프타노'(pthano)는 테살로니카 전서 2장 16절에 '~에 임하다', '~에 도착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단어지만, 본문에서는 '앞지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것과 그리스도와의 친교에 있어서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 못할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둘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극히 짧을 것이다.
본문을 통해 사도 바오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죽은 이들이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지, 신자들의 부활 순서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즉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주님 안에서 이미 죽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빠져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와같은 강한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16)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본절에서 '친히'라고 번역된 인칭 대명사 '아우토스'(autos)가 나와 '호 퀴리오스'(ho kyrios)라는 '주님'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재림 때에 이 땅에 오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분은 세상 마지막 날에 이 땅에 당신의 대리자를 보내지 않는다.
천사가 대신 오는 것도, 다른 어떤 피조물이 대신 오는 것이 아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오실 것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주님의 모습은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환희를, 그를 적대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을 더해 줄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인데, 여기서 '에서'로 번역된 단어 '아프'(ap)는 '아포'(apo)의 축약형이다.
이 단어는 기원이나 출발의 의미를 나타내난 전치사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물고 있던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실 것이라는 의미를 전해준다.
또한 여기 '하늘' 즉 '우라누'(uranu)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기 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처소, 자리를 나타내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그분은 부활 승천 후 하느님의 영광의 자리인 옥좌 오른편에서 온 세계를 통치하시다가(사도7,55; 로마8,34; 필리2,9-11)
이 세상에 대한 최종 심판의 날에 그 자리를 떠나 이 땅 가운데로 내려오실 것이다.
본문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로 번역된 단어 '카타베세타이'(katabesetai)는 테살로니카 전서 2장 19절, 3장 13절, 4장 15절에 나온 단어 '파루시아'(parusia)와 그 의미가 다른 단어로서 '위에서부터 아래 쪽으로 내려오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것은 영으로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체로 내려오는 '하강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리면'
먼저 '명령의 외침'으로 번역된 '켈류스마티'(kelleusmati)의 원형 '켈류스마'(kelleusma)는 기본적으로 '강요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명령', '호출', '외침'등의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전차를 모는 자가 말에서 내리는 명령, 사냥꾼이 사냥개에게 내리는 명령, 선장이 노잡이들에게 내리는 명령, 지휘관이 군인들에게 내리는 명령을 가리키는데, 각각의 경우가 다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주님 안에서 죽은 이들을 깨우는 주님 자신의 권위있는 명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요한5,25).
이 명령의 외침이 울릴 때 이미 죽었던 이들은 그 음성을 듣고 살아날 것이다.
'대천사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포네 아르캉겔루'(pone archanggellu)는 '대천사의 소리'로도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아르캉겔루'의 원형 '아르캉겔로스'(archanggellos)는 '우두머리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르코'(archo)와 '천사'를 의미하는 '앙겔로스'(anggellos)의 합성어로서 '우두머리 천사'를 뜻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 단어 앞에 관사가 없으므로, 여기의 대천사를 특정한 어느 한 존재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다 전통에서는 원래 대천사가 일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묵시8,2; 토빗12,15).
그들의 이름은 Michael, Uriel, Raphael, Raguel, Sariel, Gabriel, Remiel등이다.
'하느님의 나팔'에 해당하는 '살핑기 테우'(salpinggi theu)는 하느님께서 직접 나팔을 부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께 속한 나팔'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을 하느님의 산 아래로 모으고 하느님의 임재를 알릴 때(탈출19,13.16.19), 새 해가 시작됨을 알릴 때(레위23,24), 앗시리아와 이집트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거룩한 산에 돌아옴을 알릴 때(이사27,13), 심판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릴 때(요엘2,1) 나팔을 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하느님의 나팔 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옛 세상의 심판과 더불어 새 세계가 도래하는 시점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불러모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마태24,31).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땅에서 일어날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는 죽은 이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로 한정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신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한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힌 자들은 주님의 재림 때에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죽은 이들이 산 이들보다 먼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될 것을 사도 바오로는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살나아고'로 번역된 '아나스테손타이'(anastesonta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다(마르9,31; 루카18,33; 요한11,23; 사도13,34).
이것은 예수님 재림 때에 이미 죽은 이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때 성도는 썩은 것이 다시는 썩지 않을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는 죽음에 종속되지 않게 된다(1코린15,42-44; 52-52).
이것은 말씀 한 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다(로마4,17).
"그 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어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7)
본문은 소위 휴거(rapture)사상과 관련해서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예수님 재림 때에 살아있던 신자들의 몸이 홀연히 다른 몸으로 변화하여(1코린15,51.52)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다.
즉 관성의 법칙을 깨뜨리는 현상이 연출될 것이다.
여기서 '들려 올라가'로 번역된 '하르파게소메타'(harpagesometha)는 '하르파조'(harpazo)의 직설법 미래 수동태이다.
'하르파조'는 어떤 것을 돌연히 잡아채는 것, 강탈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마태11,12; 요한6,15; 10,12; 사도8,34; 2코린12,2).
여기에는 돌연성과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빼앗김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의에 의해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특히 이 단어는 사도 바오로가 환시 중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것을 묘사할 때도 쓰인 단어인데(2코린12,2.4), 본문에서는 종말에 신자들의 들려 올라감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다.
그때에는 신자들이 환상이 아닌 실제적 현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신자들이 들려 올라가 이르게 될 장소는 '구름 속'이다.
그러나 성경에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다니7,13; 마태24,30)표현이나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간다는 말은,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의 응결체인 구름을 말처럼 탄다거나 그런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구름은 기상 현상으로서의 구름이란 의미를 넘어서 초월적 실재에 대한 표상으로서 하느님의 영광에 둘러싸인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다(탈출40,34; 1열왕8,10).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 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 영광의 충만함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맞이할'(영접)로 번역된 '아판테신'(apantesin)의 원형 '아판테시스'(apantesis)는 본래 황제나 임금등의 중요한 방문자가 지방의 도시를 순방할 때 공개적으로 환영하거나 새로 부임한 관리를 공식적으로 영접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특히 종말론적 교훈을 주고 있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는 신랑을 맞으러 나가는 열 처녀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마태25,6).
따라서 본문에서 '아판테신'은 들려 올라간 신자들이 영원한 천국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맞이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들려 올라간 신자들이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장소는 '공중'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아예라'(aera)의 원형 '아예르'(aer)는 지구상의 대기권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특이한 것은 불순종의 세력들 가운데 역사하는 악한 영이 그곳에 대한 권세를 잡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에페2,2).
따라서 이것을 고려한다면,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은 재림 때에 사탄은 완전히 패배할 것이며, 주님의 성도들은 사탄의 영역을 깨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들려 올라가서 주님을 맞이한 모든 성도들이 누리게 될 종말론적 축복이다.
'내가 너희와 언제나 함께 있겠다'(마태28,20)는 주님의 약속은 종말에 이르러 완전하게 구현된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처럼 주님을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며(1코린13,12),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사랑으로 이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 중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고 할 것이다.
완전한 구원은 생명의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비록 죽음이 성도들에게서 생명을 영원히 앗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성도에게 있어서 죽음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죽음 이후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무리 길다 할지라도 들려 올라가 주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될 시간에 비하면 한 정점에 지나지 않는다.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고향방문記
(루카 4,16-21)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 성경, 곧 구약의 모든 말씀도 그리스도 예수 이야기인 것이다.(루가24,27.44 요한5,39외 다수)
그래서~
(사도28,23) 23 그들은 바오로와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바오로의 숙소로 찾아왔다. 바오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들어 *예수님에 관하여 그들을 설득하였다.
= 구약의 모든 말씀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 특히 이사야서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하느님의 은혜(은총)로 그리스도의 대속(십자가)을 통한 죄의 용서와 의로움, 곧 구원(하늘의 생명)을 거저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은혜의 말씀(계명)을 인간의 말 계명(법)으로 받아 인간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도록 가르치고 배워 많은 이들이 그 하늘의 용서와 의로움을 받지 못한 그 가난한 이가 되었다. 그래서 죄 의식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용서 그 해방을 모르고, 사람의 규정과 교리로 무거운 짐 같은 신앙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오늘 해방 시키라 하시는 것이다.
(1코린 2,1-7) 1 형제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의 뛰어난 언변과 지혜로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 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십자가의 복음은 유다인들에게는 걸림 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 인 것이고,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것이다.(1코린1,22-23)
3 그래서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성령께 의탁하여 깨달은 그 하느님의 지혜를 전한다는 것입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 인간의 지혜로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 그 해방의 기쁜 소식, 그 은총의 말씀을 못 들어 죄에 잡혀 가난한, 곧 구원의 진리 그 하느님의 은혜, 은총이신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눈 먼 이가 되는 것이다.
6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 성숙은 인간의 지혜가 구원의 어리석음 임을 아는, 깨닫는 것이다.(1코린1,21)
7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 많은 지도자들께서 세상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복음과 연결 시켜 말씀들 하시는데~ 그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잘못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세상의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사람의 도리이지 구원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 사람의 도리를 잘 지켜서 받는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곧 하늘(예수)의 대속의 죽음으로 받는 소금과 같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약속, 그 은혜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약속, 그 말씀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또 내일도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오늘 인간의 지혜의 길, 그 계명에서 하느님의 지혜의 길, 곧 십자가의 길, 그 복음으로 돌아오면 구원 또한 살아있는, 유효한 것입니다.
(히브4,1) 1 그러므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계속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아멘. ☞♡♡♡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안식일 금지법 제39. 호짜아흐(Hotza'ah) - 운반하기
율법은 안식일에 개인 영역에서 공공 영역으로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물건을 옮기기, 운반하기, 던지기, 밀기 등을 금지한다. 공공 영역의 한 장소에서 대략 2미터 이상 물건을 운반할 수 없다.
그러니 떨러뜨릴 수가 없지요~~ㅎ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복음(루카4,16~30)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1)
아마도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의 말씀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깊었으며, 내용도 풍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4장 21절과 18절, 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므로, 루카 복음사가는 21절로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21절에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플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드러내는 전문용어인 '플레로오'(pleroo)의 수동태 완료로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잡혔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로운 해가 도래하는 등의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 자유와 평화, 그리고 치유와 하느님의 의로운 통치를 동반하고 육화(강생)하신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이같은 일들은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예수님 재림때까지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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