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 주교좌 성당 → 대안리 공소 → 용소막 성당 → 묘재
15Km 27.3Km 4.1Km
31. 원동 주교좌 성당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본당의 설립과 발전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그렇게 되면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져 서로 방문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그때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
(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 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였으며, 교우 총수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소에 있었기 때문에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면서 사목하였다.
이와 같이 공소를 순방하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1965년 3월에 춘천교구로부터 원주교구가 분리 · 설정됨에 따라
원동 본당은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고, 그 해 6월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양대석 신부는 최초의 본당 주보를 1966년 2월에 발행하였는데,
이 원동 본당의 주보는 오늘날 교구 주보인 “들빛”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1967년 2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재마련한 뒤
소화유치원 인가를 정식으로 받아 소성당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이영섭 신부가 재임하고 있을 때인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대회가 원동 본당에서 열리고,
또한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어
첫 기도회를 갖는 등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이곳에서 개최됨으로써
원동 본당은 197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한편 원동 성당은 건축사적으로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등록 문화재 제140호)와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32. 대안리 공소
“정오에 한강 지류(支流)를 건너 맞은 편 여인숙에서 점심을 들었다.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아침에 40리 길을 왔고, 오후에 갈 길은 가까운 30리이다.
10리쯤 남겨 두고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비가 내렸다.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신부 방이 딸려 있다.
축성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되었다. 미사를 드리고 35명에게 견진을 주었다.
성당 축성을 하기 위해 큰 잔칫상이 차려졌다”
(뮈텔 주교의 1910년 일기 중에서).
원주교구 대안리 공소(원주시 흥업면 대안 1리 659)의
초창기 역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1910년 11월에 공소 축복식을 가졌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공소가 설립된 연도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공소 신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口傳)에 따르면
대안리 공소는 1892년께 설립되었고,
지금의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세워졌다.
뮈텔 주교가 ‘진짜 성당’이라고 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성당이라고 할 만큼 훌륭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다.
원주교구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 본당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 시골 마을에 그토록 일찍 공소가 설립되었을까?
초기 한국 교회사에 밝은 사람이라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대안리 일대는 교우촌이었다.
신자가 많은 곳에 성당이 세워지기 마련이다.
박해 시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대안리 근처 덕가산에 숨어 살다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로 내려와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다.
건평 23평 규모의 공소 건물은 특이하게도 한옥 형태이다.
문화재청은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0호로 지정하면서
“1900년대 초에 지어진 목조 가구식 한옥 성당 건축물로,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다”고 그 선정 이유를 밝혔다.
공소 마당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건물의 완성도는 높지 않으나 지역 교회사적 측면에서 가치가 높으며,
건립 당시 원주 지역에 있던 공소 중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공소이다.
1900년대 한옥 공소의 희소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대안리 공소 최고령 신자인 김종현 베네딕토 할아버지는
“예전에는 공소를 빙 둘러싼 담이 있었고,
마당에는 사제가 타고 오는 말을 묶어두는 마구간이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대안리 공소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막사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처가 되기도 했다.
공소도 사람처럼 그동안 숱한 풍파를 겪었으며,
사람이 아프면 수술을 받듯 수차례 개보수 공사를 받았다.
2009년 9월 9일 원동 성당에서 흥업 성당이 분리 · 신설되면서
대안리 공소는 흥업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2010년 11월 12일 대안리 공소는 공소 축복 100주년을 맞아
원주 교구장 김지석 주교와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축하식을 갖고
공소 맞은편에 새로 건립한 교육관에 대한 축복식도 함께 가졌다.
33. 용소막 성당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설정된 100년이 넘은 성당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에서는 풍수원, 원주에 이어
세 번째로 1904년에 설정된 교회다.
병인박해 이후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로 교우촌이 형성된 이곳에는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선종하신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유물관이 설치되어 있다.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소막 성당은
당시의 성당 건립 방식이었던 로마네스크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성당과 좀 다른 모습은 성당의 앞부분에 종탑이 나와 있다는 것이다.
아마 당시 성당 건축에서 새로운 시도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그 일부가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黃屯)으로 내려와
거기서 얼마를 살다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오미(五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최씨와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893년부터 한두 집씩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 오기 시작하였으며,
1898년에는 이곳 신자들의 지도자인 최석완 바르나바와
그와 한 집안인 최 바오로도 용소막으로 이사하였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 해 오미에 살던 백씨네와 행주에 살던 선병로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었다.
용소막 성당의 개척자인 최석완은
1848년에 제천 청풍에서 태어나 18세 때 병인박해를 겪고,
1893년 풍수원 본당의 르메르(Le Merre, 李類斯, 1858~1928, 루이) 신부로 부터
전교 회장에 임명되어 각처를 다니며 전교하다가 1898년 용소막에 정착
5, 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용소막 성당에는 1988년 11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영보수녀회(聖母領報修女會)를 설립하고 성경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1915~1976,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성모영보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설치하였다.
성서학자인 선종완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경과 자료들이 풍성하게 전시되어 있다.
선종완 신부는 성경의 신·구교 공동 번역 주관자로
1955부터 1976년까지 신구약 성경을 번역해 냈다.
유물관에는 한글과 영어는 물론 라틴어 성경과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의 성경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을 순례할 때 수녀원에 들러 허락을 받고 유물관을 볼 것을 권한다.
▒ 선종완(宣鍾完) 신부
선종완(1915~1976, 라우렌시오) 신부는
성서학자이며, 성모영보수녀회 설립자다.
1915년 8월 8일 용소막에서 독자로 출생하였다.
가톨릭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선종할 때까지 후배 양성과 성서 연구에 몰두하였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구약 성경을 나누어 번역하였고,
1960년 3월 5일 3명의 수녀 지원자로 성모영보수녀회를 설립하였다.
1968년부터 8년간 신구약성경 공동 번역의 가톨릭 전문 위원으로
성경 번역 사업에 힘을 쏟아,
선종 전날 병상에서 원고 교정을 모두 마치는 정열을 보였다.
1976년 7월11일 간암으로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 중 선종,
과천 성모영보수녀원 내에 안장되었다.
▒ 성모 영보 수녀회(聖母領報修女會)
1960년 3월 25일 가톨릭대학 교수이면서 성서학자인 선종완 신부에 의해
경기도 소래에 창립된 수녀회다.
선종완 신부의 성경 번역을 돕던 몇 명의 처녀들이 입회함으로써 시작되어
한국인에 의해 한국에서 설립된 관상 수녀회이자 반봉쇄 수녀회로서
실제로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빈곤한 자를 돕고 근면한 생활로
노동의 존귀함을 드러내자는 것이 창립 정신이다.
1967년 6월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산골짜기에 그 터전을 이전하여
흙벽돌을 찍어 새수도원을 건설하였고 1969년에는 피정의 집을 마련하였다.
수녀회의 입회 자격으로는 다른 수녀회와 달리
국민학교 졸업 이상으로 학력을 한정하고 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실천’이라는 수도회 정신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며 말씀의 증거자로 살고있다.
- 한국의 성지 홈페이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