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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그리스도교 영성] (11) 「햄릿」 : 불확실성과 섭리
‘죽느냐 사느냐’ 삶의 갈등 내려놓고 마주한 ‘하느님의 섭리’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에서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가 그의 나약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은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과 복수의 윤리적 측면의 정당성에 대한 확신을 찾지 못한 햄릿은 복수를 계속 지연시킨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고조시키는 불확실성은 비극의 중요한 역동성이다.
드라마는 햄릿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은 동생인 클로디어스에게 암살당했다고 알려주면서 시작된다. 당시 영국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개신교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연옥의 불 속에 갇혀’ 지내고 있는 유령은 가톨릭 신앙을 암시한다. 마틴 루터가 공부하였던 위텐버그로 유학을 다녀온 햄릿은 신교도 시각에서 이 유령의 진실성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놀랍게도 개신교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반응도 보인다. “그대가 그렇게 의심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그대를 햄릿으로, 왕으로, 아버지로, 덴마크 왕으로 부르겠다.”
마침내 유령과의 대화를 마치고, 호레이쇼가 왔을 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천지간에는 자네의 학문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들이 있다네.” 아버지의 죽음과 유령에 대하여 주인공은 구교의 가르침과 신교의 가르침 사이에서 불확실성을 겪게 된다.
선왕의 죽음에 뭔가 수상쩍은 면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유령의 존재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분석하고, 의심할수록 불확실성의 고통은 더해간다. 그 유명한 ‘죽느냐 사느냐’의 독백이 주인공의 자살에 대한 충동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불확실성에 대한 고민이 자살과 죽음에 대한 영역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서도 죽지 못하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 겪을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 어떤 나그네도 돌아오지 못한 곳, 그 미지의 나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은 복수 자체에 대한 윤리적 정당성의 불확실성과도 맞닥뜨리게 된다. 경당에서 홀로 기도하고 있는 클로디어스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지만, 칼을 거둔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동안 죽게 되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문화의 전통적이며 정당한 복수와 자비를 강조하는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윤리적 모호성은 복수를 지연시킨다.
중세 시대 전통적 복수극은 안정되게 확립된 도덕 질서가 있었다. 복수의 명분과 정의는 명확하였다. 가족의 복수라는 상황에서, 질문과 의심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그러한 명확성을 붕괴시키고 있다.
제5막 1장에서 햄릿은 묘지를 거닐다가 무덤을 파고 있던 인부들이 던진 해골 하나를 발견한다. 해골의 주인은 그가 어릴 때 궁정에서 일하던 광대 요릭이다. 자신이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키스했던 그 입술이 달렸었던’ 자리를 쳐다보며 ‘구역질이 날 것 같다’고 말한다. ‘천 번도 넘게’ 자신을 ‘등에 태워주었던’ 요릭의 해골 앞에서 주인공은 깨달음을 얻는다.
“호레이쇼, 아는가? 알렉산더 대왕도 무덤 속에선 이 꼴일까? 우리가 죽어 흙이 되면 무슨 천한 용도에 쓰일지 상상 좀 해봐! 알렉산더 대왕의 고귀한 흙을 추적해 보면 술통 마개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나?” 주인공은 모든 사람은 죽어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깨닫는다. 여러 작가가 언급한 “죽음은 위대한 평등자다”라는 말처럼, 아름다움도, 지식도, 권력도, 재산도, 모두 궁극적으로 동일한 물질적 종말을 맞이한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한스 홀바인의 명작 <대사들>이라는 그림은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묘사한다. 과학기술, 음악, 화려한 의상, 다양한 학문을 지닌, 유학을 다녀온 르네상스 인물인 햄릿도 인간의 “이성은 고결하고 그 능력은 무궁무진하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홀바인의 그림 한구석에는 굴절된 해골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다.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다.
중세 시대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를 추구했던 르네상스의 또 다른 정신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성찰이었다. 재의 수요일에 드리는 기도처럼, 결국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확실성과 싸우며, 요릭의 해골을 보며 죽음의 냉엄한 진리를 대면한 주인공은 허무주의나 체념주의에 빠지지 않고, 신의 섭리에 의탁한다.
죽음의 통찰이 자신을 괴롭히던 불확실성을 해결해 주지는 않았다. 여전히 복수에 대한 불확실성이 주인공을 사로잡고 있다. 그 유령(가톨릭 신앙)이 진실일까? 복수는 정당화(그리스도교의 자비) 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나 자신이 지옥 불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계속되는 질문과 의심은 햄릿의 행동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인간이 죽음의 진리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흔한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태10,29 참조)는 성경 말씀처럼, 햄릿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고 엄숙히 말한다.
신의 섭리에 맡긴다는 것은, 삶의 통제권을 신에게 드리는 것이다. 햄릿이 불확실성으로 고통받았던 핵심적인 이유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유령을 만난 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이다. 비록 여전히 불확실성은 남아있지만, 주도권을 신에게 넘김으로써, 불확실성이라는 불안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가브리엘 천사의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며, ‘곰곰이 생각’하고 질문한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이를 갖는다는 말인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가족은 죄인이라고 낙인찍힐 것이다.
천사의 설명이 자신의 목숨과 가족의 명예가 위태로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Let it be)를 바랍니다”라며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면서 불확실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 뜻대로 될 것이니, 그냥 그대로 두면 된다는 체념적 수동의 삶이 아니다. 비록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결과를 통제할 수 없지만, 신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행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레어티스와의 결투가 위험할 수 있으니 피하라’는 호레이쇼의 충고에 햄릿은 멈추지 않는다. 확실성이 없이는 행동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불확실성의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의 행위에 나선다. 이제 햄릿에게 ‘순리를 따르는’ 것은 바로 때가 왔을 때,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마리아도 천사의 소식에 순명한 후, 그냥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았다. 제일 먼저 ‘서둘러’ 산악 지방으로 올라가 엘리사벳을 만난다.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예수의 탄생,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 카나의 혼인잔치, 십자가 아래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등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감옥에 갇히지 않고, 적극적인 헌신, 식별, 용기의 삶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영성의 샘] 성모성월, 성모님의 군단
“바오로, 엄마랑 묵주기도하고, 까떼나 바치자.”
어머니로 인해 우리 집안에는 천주교 신앙이 전해졌고 자녀들과 아버지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 어머니와 친한 성당 분들은 대부분 레지오 단원이셨기에, 레지오 마리애와 관련된 물품은 성당에서나 집안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바오로 신부. 너 혼자라도 가 봐. 마음이 움직일 때 떠나 봐.’
교구 사목국장 소임을 받고 레지아 담당사제가 되어 힘겹게(?) 레지오 공부와 강의를 이어가며,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레지오 마리애와 프랭크 더프의 발자취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아주 멀고 낯선 곳, 성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분. 하지만 마음의 발걸음은 이미 그곳과 그분을 향하고 있었다.
주님 신앙과 레지오 신심을 전해주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사진과 도서로만 접했지만 훌륭한 평신도라고 강의하던 프랭크 더프를 떠올리며, 홀로, 무 일정으로, 묵주알을 굴리며 아일랜드로 떠났다. 무작정은 아니었기에 아일랜드에서 어떤 이끄심이 있으실 거라 믿으며. 늦은 밤, 한국에서 오랜 기간 선교 사제로 사셨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은퇴 신부님들이 처음 보는 한국 신부를 위해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셨고, 이분들이 알려주신 현지 한국 유학생의 도움으로 아일랜드 일정이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잘 알지 못했던 녹(Knock) 지역의 성모 발현 성지에서 은총의 전구자이신 성모님이 주님 자녀들에게 전해주고자 하신 메시지를 생각하며, 프랭크 더프와의 만남을 준비하였다. 프랭크 더프의 생가와 무덤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꾸준했던 신앙생활과 레지오 신심의 목적도 떠올려보며 시복 청원 기도를 보태었다.
신앙과 신심의 목적을 되새겨보기
프랭크 더프의 처녀작은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Can we be Saints?)였다. 그는 이 저서에서 성인이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자신의 일상 의무를 특별히 잘 이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일상에서부터 기도, 공부, 사랑 실천(사회복지, 선교 등)을 당부하며, 레지오 교본 곳곳에 이런 내용을 넣었다. 특히 교본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의 목적이기도 하면서 레지오 신심의 목적인 개인 성화를 통한 하느님의 영광을 강조하면서, 교회의 지도에 따라 주님 구원 사업에 기도와 활동으로 협력하여 목적을 이루어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마리아의 영성은 프랭크 더프와 레지오 마리애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성인의 영성은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인간도 봉헌의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인은 세례성사의 서약 갱신의 삶을 살아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봉헌’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런 삶과 봉헌을 위해 마리아를 통한 성모 신심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인의 대표 저서인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의 제목도 사실은 책의 분실과 발견 과정에서 표지가 사라지게 되어 이렇게 불렸지만, 원제목을 이 저서 227항의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한 준비와 봉헌”으로 보고 있는 이유이다.
개인 성화와 주님 영광을 위한 삶
“신부님은 왜 머나먼 한국까지 가셔서 당신의 인생을 봉헌하셨나요?”
“예수님을 사랑해서요~. 성모님이 도와주셔서요~.”
“달릴 길을 다 달려 …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사도 20,24) 마치고 선교회 모원 묘지에 안장되셨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현지에서 뵈었던 신부님들의 얼굴과 대화가 떠오른다. 선교회 신부님들의 선교와 은퇴, 노화와 질병은 성화의 과정이었고, 평신도로서 프랭크 더프의 신앙생활과 레지오 마리애 창설과 전파도 성화의 연속이었으며, 그 결실이 우리나라에서 성모님의 군단을 통해 복음화로 이어져 주님께 영광이 되었다고 본다.
성화와 주님 영광의 삶은 주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다. 레지오 단원은 성화 은총에 깨어 지내며 주님 영광을 우선하기 위해 신앙적으로 신심적으로 성모님을 본보기로 기도하고 활동한다. 성모성월, 주님 백성이 주님 은총 안에서 성모님과 함께 기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기를 성모님의 군단과 함께 소망한다.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5) 시느도 교회 안에서 마리아와 함께 걷는 복음화의 길
1. 작은 만남 속에서 시작되는 복음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레지오 단원이 오랫동안 냉담 중인 교우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많이 망설였다고 합니다. 준비한 말도 있었고, 권해야 할 내용도 머릿속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그 교우를 만났을 때, 그분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하고 조용히 말을 건넸고, 상대방은 한참 동안 말없이 있다가 자기 사정을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그 만남에서 대단한 결심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곧바로 성당에 다시 나오겠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 레지오 단원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무엇을 해낸 것은 없지만, 주님께서 먼저 그 자리에 와 계셨구나.”어쩌면 복음화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화는 언제나 거창한 말이나 눈에 띄는 성과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 번의 방문, 한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는 마음, 외로운 이에게 건네는 짧은 안부, 그런 작은 만남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미 조용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도 복음화의 기쁨을 맛보게 되지요.
2024년 10월 세계주교시노드는 폐막되었지만, 시노드의 길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시노드의 과정은 각 지역 교회의 삶 안에서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사실 시노드의 여정이 여러 해 이어졌지만, 이를 피부로 체감하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시노드가 강조한 상호 경청이 정말 잘 이루어졌는지 선뜻 느끼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교회가 친교 안에서 서로 연결되고, 참여를 통해 모두가 자기 자리를 찾으며, 함께 받은 은총이 사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방향만큼은 분명합니다.
2. 시노드 교회와 복음화의 주체
시노드라는 흐름은 교회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복음화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때 교회는 ‘포교’라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포교는 신앙을 권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때로 일방향적 설득이나 외적 성과를 앞세우는 것처럼 들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이후 더 넓은 의미에서 ‘선교’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느님께 파견되어 세상 안에서 수행하는 사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이 바로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는 단지 누군가를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일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 스스로 먼저 복음에 맛 들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한 사람의 삶과 공동체, 사회와 문화 안에 스며들어 그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전 과정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노드 교회의 중요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화의 능동적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많은 평신도들은 자신을 교회의 중심적 주체라기보다 돌봄을 받는 대상이나 사목의 수혜자로 여겨 온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화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이미 그 사명 안에 부름받은 이들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복음화의 주체입니다. 시노드 교회란 바로 이 사실을 다시 회복하는 교회입니다.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함께 듣고, 함께 식별하고, 함께 복음을 살아내는 교회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시노드 교회의 출발점은 먼저 우리 자신이 복음화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게 됩니다. 마리아께서는 복음화가 무엇인지를 가장 먼저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복음화는 먼저 말하는 데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주님의 천사가 전한 말씀 앞에서 마리아께서는 두려움과 놀라움 속에서도 차분히 응답하셨고, 이 응답 안에서 이미 복음화의 첫걸음이 시작되었습니다.
3. 마리아와 함께 걷는 복음화의 길
그러나 마리아께서는 말씀을 자신 안에만 간직한 채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루카 복음은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뒤 ‘서둘러’ 엘리사벳에게 가셨다고 전합니다. 이 장면은 복음화의 본질을 아주 아름답게 보여줍니다.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을 모시고 다른 이에게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 안에서 기쁨이 일어나며 성령께서 활동하셨습니다. 복음화란 결국 예수님을 모신 이가 다른 이에게 다가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께서는 첫 번째로 복음을 들으신 분이실 뿐 아니라, 첫 번째로 복음을 전하신 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화는 인간의 성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성령의 뜻에 민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마치 내 삶의 주도권을 잃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안에서 현존하시면서도 자신을 비우시어 우리가 주체로서 행동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마리아의 삶은 바로 이러한 순명의 자유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수태고지에서, 엘리사벳 방문에서,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그리고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실 때에도 마리아께서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이 점은 오늘 레지오 단원들의 삶에도 깊이 연결됩니다. 레지오 단원들 역시 시노드 교회 안에서 이 마리아의 길을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시노드 교회는 구조 개혁 이전에, 먼저 우리의 삶이 함께 걷는 삶이 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누군가를 혼자 두지 않고, 먼저 찾아가고, 함께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식별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여정 안에서 복음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기쁨이 됩니다. 시노드 교회란 바로 그 작은 만남들을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 성령의 발걸음을 함께 알아차리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와 함께,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모시고 서둘러 이웃에게 나아가며, 성령 안에서 복음화의 기쁨을 살아가는 참된 시노드 교회의 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묵주기도 학교] 매 단의 시작이며 중심인 기도
폼페이 성모 신심과 묵주기도의 의미
복자 바르톨로 롱고는 2025년 10월 19일 시성되어 보편 교회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묵주기도의 사도라 불리는 그는 폼페이의 성모상 앞에 엎드려 묵주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성모님의 묵주는 우리를 하느님께 묶어 주는 아름다운 사슬(까떼나)이며, 천사들과 결합시키는 사랑의 끈입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43항)
이 고백처럼 묵주는 단순한 기도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를 이어 주는 은총의 끈이며,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우리를 이끄는 영적 여정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기도의 길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우리가 지치고 힘들 때에도 묵주기도를 통해 우리를 감싸 안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과 더 깊이 결합하도록 이끌어주는 희망의 기도이며 신앙의 길입니다.
묵주기도의 본기도와 매 단의 구조
묵주기도는 일정한 리듬과 구조 안에서 바쳐집니다. 각 단은 ‘신비 선포와 침묵 묵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소리 기도로 이어집니다. 곧 매 단마다 ‘주님의 기도 한 번, 성모송 열 번, 영광송 한 번, 구원을 비는 기도 한 번’을 바칩니다. 이 가운데 첫 자리에 놓이는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성무일도를 대신하여 바치는 기도로 발전하였고,(「가톨릭교회교리서」, 2678항 참조) 또한 ‘주님의 기도’는 성무일도의 주요 시간경에 빠질 수 없는 교회의 가장 뛰어난 기도이므로, 묵주기도의 시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실제로 묵주기도에서 매 단을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는 그 단 전체의 방향을 정해 주는 중심 기도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도 “매 단의 시작에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그 무한한 가치로 인해 그리스도교 기도의 바탕이 되며 다른 모든 기도를 품위 있게 해줍니다.”(「마리아 공경」, 49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매 단의 첫 자리에 놓는 것은 묵주기도가 단순한 성모송의 반복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교회의 기도임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는 묵주기도 전체의 방향을 잡아 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매 단의 시작기도 - 묵상 기도와 소리 기도를 연결하는 사슬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유일한 것으로서 ‘주님의’ 기도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65항). 그러므로 가장 완전하고 뛰어난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 안에서 모든 신비를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는 중심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신비에 집중한 다음에,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들어 높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2항).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묵주기도는 단지 신비를 떠올리는 묵상에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신비에 머물며, 침묵 속에서 깊이 바라본 다음에는, 그 모든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들어 올리게 됩니다. 바로 그때 바치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묵주기도 안에서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인 자리를 차지하며, 신비 선포의 묵상과 소리 기도 사이를 이어 주는 연결점이 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기도’는 신비에 대한 묵상이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는 기도로 전환되는 자리입니다.
“아빠, 아버지”
묵주기도에서 ‘주님의 기도’는 묵주기도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게 하는 기도이며, 성모송과 신비 묵상을 교회의 기도 안에 하나로 묶어 주는 기도입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느님의 내밀한 친교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 32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시며 우리를 하느님께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 참조)고 전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몸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갈라 4,6 참조). 이처럼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과 맺는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바친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문을 암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나아가는 자녀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의 내 아버지’가 ‘하늘의 너희 아버지’로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57쪽).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
묵주기도는 성모 신심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의 기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묵주기도의 흐름 안에서 ‘주님의 기도’는 단지 매 단의 첫머리에 놓이는 형식적인 시작 기도가 아니라, 묵주기도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게 하고, 신비 묵상 전체를 교회의 기도 안에 머물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묵주기도의 구조는 분명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묵주기도는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아버지 하느님께 나아가는 삼위일체적이고 복음적인 기도입니다.
이 여정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기도’가 놓여 있습니다. ‘복음 전체의 요약’인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 안에서 집약되어 교회의 기도로 표현됩니다(「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110쪽). 그러므로 매 단의 첫머리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묵주기도 전체를 하느님 아버지께 향하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시작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