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전부였던 만민중앙교회를 떠나며
교회가 나를 길렀다
나는 만민중앙교회라는 사이비에서 21년을 보냈다. 내 유년기 시절은 거기에서 보낸 기억뿐이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교회가 나를 길렀다’ 사이비도 교회라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뱃속에서부터 의도치 않게(?) 부모를 따라 교회에 갔다.
그곳의 교리, 어쩌면 사상까지도 뼛속까지 침투해 나를 흔들었다. 나는 하얀 도화지였고 그들은 나를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색을 입히고 말려서 굳혔다. 흔히 뭐 빼면 시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나는 교회 빼면 시체인 아이였다. 주변 친구들도 “너는 교회 안 다니면 뭐 하고 살래?” 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교회 아니면 나는 없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내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놀아도 교회 앞마당에서 놀았고, 일년 중 제일 기다려지는 때가 교회 수련회, 아니면 교회에서 열리는 성탄 행사였다.
젖먹이일 때 기억은 나지 않아도 유년기를 보냈던 ‘만민선교원’ 친구들과 김치를 담갔던 기억이 난다. 빨간 김치를 쭉쭉 찢어 먹으며 얼마나 즐거워했었는지. ‘만민중앙교회’라고 크게 써진 글자가 붙은 앨범 속 사진을 보며 어렴풋이 그 시절을 기억할 뿐이다. 그곳에 나의 역사가 있다.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기 좋아하는 엄마는 그곳에 삶의 장면들을 모아놓았다. 손수건이며 단물이며 수건이며, 그곳을 떠오르게 하는 물건은 다 버렸어도 사진 속에 있는 나는 계속해서 그곳을 떠올리게 된다. ‘만민중앙교회’ 앨범에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사진도 있다.
그곳엔 오랜 시간 함께한 엄마와 아빠의 ‘만민동기’들도 있다. 지금도 누군갈 콕 찍어 보여주면 금방 이름을 댄다. 그들은 나름 행복해 보인다. 나도 얼마나 그곳을 친숙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기억이 난다. 가끔은, 혹은 자주 행복했던 기억까지도.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행복이라면 모든 걸 주고도 바꾸었을 거라는 친구의 말과 오랫동안 그곳에 몸담았던 일들이 정신적으로 힘들게 했다.
내면까지 변질되어 버리다
내 주변인 대부분은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다. 그곳에 올인한 부모님 덕에 나도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내 핸드폰 배경
화면도 이재록의 사진이었다. 비밀번호도 ‘빨리 영으로 들어가자’라는 의미에서 8200이었다. 이재록의 설교는 먹기에도 좋고 입에도 달콤한 부드러운 카스테라처럼 녹아들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야단을 치시거나 이야기를 하실 때면 이재록의 설교 내용을 인용하며 훈계했다. 젓가락질하는 법부터 반찬 올리는 것까지 ‘육체의 결여’라면서 통제당했던 우리는 정신과 육신이 모두 묶인 마리오네트처럼 삐걱거렸다. 그 속에서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이재록은 우리가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때쯤 이재록은 은근슬쩍 거기에 숟가락 몇 개를 더 얹었다. 요한계시록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때 성령이 강림할 것이며... 등. 자기가 성령이라는 얘기였다. 그 이야기는 1990년대 후반부터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십계명으로 시작했다가 엉뚱하게도 이희진 목사가 대언을 받게 되었다는 걸로 끝나는 그런 황당무계한 일들이 반복되었다. 인간은 10개 중 9개만 맞으면 나머지 하나는 당연히 맞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머지 하나가 계속 문제가 되었다.
교회 중심에 이희진, 이희선 목사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교회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대언말씀이니 환상이니 하는 일들 말이다. 이재록은 눈먼 짐승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 일에 편승해 우리를 훈계하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의 끝에는 이재록 자신을 성령이라며 신도를 세뇌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내려와 이희진 목사에게 대언의 말씀을 주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사 중 하나라는 루시엘 천사장을 봤다고 했다.
그런 일들이 신도들 사이에선 재미있는 뉴스거리였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이재록의 기도를 받고 나았다는 증언이 속출했다. 베드로처럼 옷깃만 닿아도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주입받았던 우리는 치료받지 못한 문제, 해결 받지 못한 문제가 생기면 남모르게 숨기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대단하신 하나님의 종을 이 마지막 때 눈앞에 두고 있는데 내 손가락에 난 종기 하나 기도로 태우지 못한 게 굉장한 부끄러움이었다
소설 『1984』처럼 사람들을 감시하게 되면서 오해가 쌓이고, 관계가 어려워졌듯이 우리도 서로를 예의주시하며 감시했다. 교회에서 만나면 권능으로 치료받았다는 이야기, 이재록의 꿈을 꾸는 영광(?)을 누렸다는 이야기로 꽃을 피워도 마음속으론 누가 은혜롭지 않은가 살펴보고 윗선에 보고했다.
나는 학교에 갔다 오면 책가방부터 내려놓고 이재록이 쓴 책을 읽었다. 평생에 걸쳐 읽은 책이라곤 이재록의 책밖에 없는 친구도 있었다. 우리 삶의 깊은 곳까지 침투한 이단 사상은 한 사람의 내면까지 변질시켰다.
탈퇴의 아픔을 온전히 내려놓았다
그곳을 나온 지 어언 2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 시시껄렁한 이야기지만 내 인생을 쥐고 흔드는 질문이다. 내가 살면서 들었던 말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재록이 여신도들을 성 폭행해서 재판에 끌려갔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잠시 멍하니 의자에 앉아 만민중앙교회 본당 앞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속에서 분열과 소란이 나를 감쌌다. 그것은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고 흔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빨간 약을 먹고 주저앉은 지금의 내 모습은 어이없게도 껍데기만 남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서 발버둥 치던 시간이 있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편견, 그리고 왜곡된 시선이 내 삶에 꼬리표처럼 쫓아다닐까 봐 난 여전히 맥을 못춘다. 나를 소개하는 자리에 가거나 새롭게 알게 된 친구와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될 때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든다.
나를 소개할 거리라곤 만민중앙교회에 다녔던 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머리만 큰 어린아이 같아서. 나는 평생을 만민에 저당 잡히고 산 아이가 될까 봐 겁이 난다. 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이렇게라도 이야기하면 그곳에 있는 내가 닳아 없어지는 것 같다.
친구들은 “이만하면 되었다, 이제 그만 얘기할 때도 되지 않았냐”는 농담을 건넨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곳에서의 아픔이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얘기해야 한다는 핑계로 나는 다시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화두로 던진다.
고유빈 (가명)의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