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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지 보강과 치열한 전초진지전
제 1 절 작전 개요
유엔군과 공산군은 '51.11.27일 일시적이나마 잠정 군사분계선에 대한 문제가 일단 매듭(현 접촉선 기준)을 짓게되자, 이를 변경하는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양측은 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진하면서 수색정찰과 소규모 국지 공격을 통하여 접촉을 유지학게 되었다. 이러한 전선의 소강상태는 대체로 '52. 봄까지 지속된다.
양측은 교착된 상태에서 전투보다 진지강화와 부대정비에 전력하였으며 , 전초 엄호 부대사이의 빈번한 탐색전과 소규모 전초진지 전투를 통하여 상호 접촉을 유지하였다.
공산군의 전투정찰대는 흔히 소대 내지 중대 규모로, 드물게는 대대규모로 편성하여 공중으로부터의 관측과 폭격을 피할 수 있는 야간에 한국군 및 유엔군의 방어선에 대한 수색과 정찰을 실시하였다.
반면 유엔군은 통상 중대 내지 대대 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 대개의 경우 주간에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한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 주저항선에 배치된 전방연대는 공산군의 야간침투를 저지하기 위하여 국지경계부대를 운용하였다. 1952년 초 전개된 대표적인 전초진지전은 두매리 부근 전투, 사천강 부근 전투, 크리스마스고지 부근 전투, 557고지 전투, 662고지 전투, 호도 전투 등이다.
1952년 초 동부전선의 문등리 지구와 서부전선 고랑포 지구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그리고 정찰전이 주로 전개되었고, 이외에는 별로 특기할 격전이 없었다.
적은 지상전 소강과 아울러 아군진지에 삐라 포탄의 발사를 시작했으며, 52년에 들어서 유엔군이 세균전을 실시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이 허위 선전은 '52년 3월에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대장은 적의 대공세는 적의 대패배로 끝날 것이며 유엔군은 언제든지 이를 격퇴할 수 있다고 언명한다. 공산군은 이 시기에 군사력을 대폭 강화시키고 있었다.
1952년 5월 12일,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괸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총사령관으로 전출되고 클라크 대장이 그를 후속하여 부임한다. 재한 유엔군 편성에도 변화가 있어, 미 제1기병사단이 홋카이도로 전출하고 미 제40, 45사간이 한국전에 투입퇴고 한국군 장교단의 도미 유학과 우수한 신병훈련이 강화 되었다.
한편 육군본부는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전방 사단 2개 사단(수도사, 제8사)을 차출하여 '51.11.25일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에 백선엽 소장이 임명된다. 백야사는 앞에서 이미 언급되었지만 '51.12.2~'52.4.14일까지 4단계 작전을 실시하고 전방으로 이동하여 제2군단의 재창설되어 중서부 전선에 투입 되었다.
제 2 절 방어진지 보강
1. 공산군의 방어진지 보강
잠정 휴전선의 결정은 휴전회담 개시 이래의 국부적이면서도 격렬했던 진지쟁탈전을 일시 중짓켰으며 전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전투다운 전투는 없고 소규모 탐색전이나 포격전이 계속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군이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며 이후의 아군 작전은 진지를 강화하고 그 전진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공세방어를 취하게 된다.
공산군은 휴전협상 기간협상 기간을 끌면서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곡자 노력했고, 그들의 진지는 날이 갈수록 강화되ㅣ었다. 적은 유엔군의 사기를 꺼고 일부 빼앗긴 진지도 탈환하면서 군사력을 과시하며 휴전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한다는 전략이었다.
공산군은 이전까지 폭우과 같은 유엔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야간에만 진지공사를 진행했으나, 잠정 휴전기간이 설정된 이후에는 밤낮으로 진지공사에 매진하였다. 그들은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어 제2차세계대전시 프랑스의 마지노선이나 독일의 서부방벽을 능가할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적은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고지의 후사면을 이용한 땅굴과 참호를 파고 전 병력을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일부지역은 후방 40km의 지역까지 지하보루를 형성하였으며 이런 진지는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연결되었다.
중국 공간사에 의하면 1952년까지 갱도 7,789개, 길이 198.7km를 구축하였고 엄체호 75만개, 융개 및 무개 참호 길이 3,420km를 작업 완료하였으며 북한군이 판 갱도는 총 1,730개 88.3km 였고 각종 엄ㅁ체호가 3만여 개 참호길이 260km였다고기록하고 있다.
한 예로서 북한군은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했을 때에 진지내에 1개 소대가 동시에 집결하여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가지 마련하였고, 그들은 통상 고지를 점령하면 즉시 참호를 파기 시작한다. 그들은 야포, 전차를 땅속에 은폐시켰다가 사격시에 땅굴 입구를 끌어내어 사용하고 있었다.
2.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진지 보강
유엔군은 이른바 적극방어의 개념을 바탕으로하여 지속적인 제한목표 공격으로 압력을 유지하고 적에게 전투력의 소모와 출혈을 강요하면서 적의 공격기도를 분쇄하려 했다.
유엔군은 방어진지를 공산군보다는 견고하지 못하였지만 제1차세계대전시의 참호에 가까운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유엔군은 화력의 우세를 십분발휘하도록 주저항선을 주로 고지 전방의 전사면에 설치하고 있었다.
주저항선에는 개인호와 기관총 등 화기진지를 구축하고 교통호로 연결하였으며 중요지형부근에는 벙커형태의 전방지휘소와 관측소를 설치하였다.진지와 벙커는 잘 위장하였으며 각종 장애물로 보강하였다.
주저항선 전방에는 완추요과를 갖게끔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초를 두었으며, 반면 주저항선 후방에 에비참호를 구축하지 않아 종심이 얇았다.
3. 1952년 초 전선의 상황
'52년 초 전선 상황은 유엔 당국이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동안 적의 게속적인 증원으로 쌍방의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됨으로서 대규모 작전의 실현가능성이 희박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상전투는 지난해에 비해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고 다만 진지쟁탈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지난해 회복한 한강유역을 포함한 전선일대를 확고부동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아군으로서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피한 것은 전년의 경험에서 얻은 것과같이 전면적 공격이 공격이 중요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면 극히 제한된 지상전투를 계속하는 동시에 타방으로는 공중폭격 또는 함포사격으로서 적의 후방을 자주 공격하여 적의 군사기능을 마비시키는 작전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적도 그간 공군력을 증강하여 백 대 이상의 제트기가 왕왕 편대하여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아군 전투기와 B-29에 대하여 도전해 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엔군의 공군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하여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점점 심하여 병력, 병기 등의 소모, 건물 철도 차량 교량 비행장 함선 등의 파괴로 피해가 막대해졌다. 이에 공산군은 여전히 침략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야음을 이용한 전선으로의 보급을 계속하며 우리의 간극을 노리고 결국 소모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미 제8군은 '52. 1월 중에 미 제1군단 포병들이 중포와 전차를 고지 정상에 추진하고 경사면에 구축된 적의 축성진지를 사격하는 동안 국군 제1군단 예하의 제11사단을 제5사단으로 교체하고, 한편 국군 제6사단(미 제9군단 배속)의 진지를 국군 제3사단으로인수케 하였으며, 미 제45사단에 이어 미 제8군에 배속되어 전선에 배치된 미 제40사단으로 미 제24사단의 진지를 인수케 하는 등 부대교대를 실시하였다.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는 '52.2.2일 "빅 스틱"이라 명명된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유엔군사령관에게 건의 한다. 즉 4월 5일에 실시하기로 곟획된 이 작전의 ㅇ요지는 미 제1군단의 정면을 북쪽 에성강선으로 추진하고, 미 제1해병사단으로 동해안에 상륙양공을 실시한다느 것이었다. 그는 예상ㄷ되는 아군 손실 1만 1,000명으로 인해 승인되지 않을 경우에대비하여 "홈 커밍" 계획을 다시 22일 제출한다. 그러나 아군 작전은 안전과 경게에 필요한 정찰 및 역습만 실시한다는 이유로 유엔군사령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 제8군은 2월초 이 계획과는 무관하게 타성에 젖은 수색정찰의 반복실시를 극복하고자 "클램 업"이란 유인작전을 실시하였다. 이 작전은 아군이 전선에서 일체의 접적활동을 중지하고 철수한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유인한 후 반격으로 포획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전선의 양상은 교착상태에서 전초진지 주위의 주요고지를 목표로 쟁탈전이 전개되어 연대급 이하의 병력으로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한편 메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는 4월 1일 제한된 진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2개의 계확안을 작성한다.
먼저 "촙스틱 6 계획"은 증강되ㅏㄴ 국구 ㄴ1개사단으로 미 제9군단 정면에서 평강가지 진격하여 미 제9군단 전선을 금성-평강선까지 정리한다는 것이고, "촙스틱 16계획"안은 국군 제1군단으로 남강하구(고성)가지 진격케하여 그 당면의 전선을 남강선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엔군 사령고나 리지웨이는 촙스틱6은 방어선으로서의 지형이불리하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촙스틱16은 미군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하 승인한다 하지만 이도 4월 28일 그간 공전을 거듭하던 휴전회담이 일부타결되면서 협상 분위기를 저해할 작전은 피한다는 이유로 무기한 연기된다.
그러나 '52.4~5월 동안 회담은 공전을 되풀이하였다. 이에 제8군사령관은 촙스틱 6과 비슷한 계획을 6우러 16일 작성, 한국군으로 하여금 평강 북쪽의 새로운 진지선으로 진격케 핝다는 계획을 유엔사에 제출하였으나 휴전협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가각된다.
결국 양측은 전초진지와 주진지를 강화한다는 면에서 전초거점 쟁탈전이 국지적으로 끊임없는 혈전으로 벌어졌다.
유엔군의 전초진지 중 불모고지. 백마고지.포크찹고지.수도고지.크리스마스고지.저격능선.단장의 능선.피의능선.해안분지 북쪽 일대. 고성의 351고지는 절대 확보되어야 할 중요지형이었다.
제 3 절 치열한 전초진지 쟁탈전
1. 양측의 탐색전 전개 양상
유엔군의 수색정찰은 적의 방어진지나 활동을 탐색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실시하여쓰며, 전투정찰은 매복, 습격 등의 활동으로 적의 포로를 획득하는데 주목적을 두고 운용되었다.
공산군도 마찬가지로 정찰전을 전개하였다. 교착된 전선에서의 정찰활동은 주로 야간에 전개되었다.
따라서 부대는 적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하여 진지주변에 철조망, 지뢰. 조명장비. 부비츄랩. 네이팜통. 백린 등을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강화하고, 병사들은 국지경계를 강화를 강화하였다.
어떤 지역에서는 정찰대와 작은 충돌로 전투가 확대되어 쌍방가에 수 시간 동안 포사격이 전개되고 병력은 유개호 진지안에서 보호를 받다가 포격전이 끝나면 밖으로 나와 진지와 통신선을 보수하는 활동을 반복하였다.
공산군 정찰대는 소대 내지 중대규모로(드물게는 대대규모) 편성하여 유엔군 방어선에 대한 정찰을 실시했다. 중공군 제12군은 '51년 말부터 '52년 1월 하순가지 정찰활동을 총 805회 실시하여, 일일 평균 12개 반이 출동했다.
이에 비해 국군과 유엔군은 통상 중대 내지 대대 규모의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공산군 진지에 대한 위력수색과 교란을 목적으로 국부적인 공격을 실시하였으며, 어느날의 경우는 하루에 68회를 실시하기도 했으나 한달 동안 247회에 불과 했다.
이와같이 양측은 정찰전으로 포로를 획득하고 적정파악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교착된 전선에서 해이해질 수 있는 장병들을 긴장시키는 한편 귀중한 전투경험과 훈련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나. 소규모 전초진지전의 전개
1) 동계전투
가) 두매리 부근 전투('51.12.28~'52.1.8일) : 앞장 '51년 동계전투에서 기록됨
(1) 전투 개요
이 전투는 '51.12.28일부터 다음 해 1월 8일까지 문산 정면의 임진강 북쪽 두매리 부근에서 국군 제1사단(사단장 박임항 준장)과 중공군 제68군 예하 제188사단이 전개한 전형적인 전초진지 쟁탈전이다. 당시 제1사단은 주저항선을 임진강북안의 사천-백학산-사미천을 연하는 선으로 추진하여 좌전방에 제11연대를, 우전방 두매리 남쪽에 제 12연대를 배치하고 제15연대(-)를 예비로확보하고 있었다.
(2) 전투경과
평촌
개성 하리 사시리
*122
*철모고지 *89
*두매리고지
*무명고지
*대덕산 237 *104 12-1대 = 15-2대
11연대 = 12연대
*백학산 229
국군 제1사단의 제12연대는 중앙으로, '51.10월 29일 주저항선을 제임스타운선으로 추진, 배속된 제15연대 제2대대를 우일선, 중앙에 제1대대와 좌일선에 제2대대를 각각 배치하였다
한편 연대와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제188사단 에하 제523연대는 12월 28일 저녁 무렵 에비대를 투입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해 왔다. 16시를 기해 적은 제5중대가 확보하고 있던 철모고지 전방 300M지점에서 신호탄을 신호탄을 쏘아 올림과 동시에 104고지와 두매리 고지 부근을 향해 600여 발의 박격포탄을 집중하였다.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장은 적의 기도가 차기 작전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12월 29일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피탈된 전진기지를 탈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2대대는 목표A(140)와 B를 탈취하고, 제1대대는 서쪽에서 견제 임무를, 제15-2대대는 동쪽에서 견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51. 12월 30일, 제5중대는 07시에 두매리 고지에 대한 역습을 개시하였다. 적의 집중사격으로 진출이 돈좌되기도 했지만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14시에 목표를 점령하고 즉시 대대에 증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증원병력이 오기도 전에 적은 전차포 직사포탄 100여 발을 집중하며 좌우능선으로 역습을 재개하여 결국 중대는 다시 104고지 후사면으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이 두매리 고지는 확보시 적진 후방 깊숙이 감제와 관측이 가능하여 구화리-개성 간의 주 보급로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대내 적의 감제고지인 대덕산 동측에 대한 고립이 가능하고, 차후 공격 발판으로 사단의 주진지 전방에 대한 적의 수색활동을 제한할 수 있는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사단장 박임항 준장은 해가 바뀐 '52.1.3일 1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제12연대로 하여금 기필코 목표 A,B를 확보하라 명령한다. 이에 제12연대장 정영홍 대령은 제2대대를 대신하여 이번에는 제3대대를 공격제대로 한 작전지시를 하달하였다
'52. 1. 3일 08시를 기해 105MM야포 18문, 155MM야포 6문, 4.2" 박격포 8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두매리 고지일대를 집중포격하고, 이어 전폭기 4대가 엄호 폭격을 실시하는 가운데 제3대대가 적진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진 30M까지 진격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좌전방의 제10중대 제1소대의 김학명 중사 외 5명의 특공대원이 적의 화기진지를 격파하는데 성공하면서 중대 주력이 돌진하여 적 47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며 13시 10분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2개 중대 규모의 적 역습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52.1.5일 제15연대는 제1대대를 좌전방으로, 제3대대를 우전방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3대대의 진격은 초반은 순조로웠으나, 고지 중턱에 이르러 급경사와 3면의 적으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아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대대는 목표고지 배후에 포격을 집중하도록 요청하여 적을 제압하고, 제11중대는격전 끝에89고지를 확보하고 두매리 고질로 공격을 계속하였다. 반면 제9중대는 제2소대의 특공대가 돌격로를 개척하면서 적진으로 돌입하여 마침내 목표고지를 탈환하였다. 또한 제10중대는 신속히 무명고지로 방향을 전환하여 122고지를점령한데 이어 148고지마저 탈취하였다.
그러나 적은 13시 30분경 집중포격을 실시한 후 2개 중대 규모로 중군고개와 148고지 , 두매리고지에 대해 역습을 실시하여 중과부족으로 다시 철수하게 ㄷ된다.
다음날인 '52.1.6일, 연대장은 제1대대에 두매리고지 탈환을 명령하여 05시에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여 3시간 후 고지 중턱까지 진출했으나 혈전만을 거듭하였다.
제15연대장은 그동안 3차례의 탈환전에서 적이 많은 타격을 입었음에도 저항하는 것은 역습부대의 대량 투입과 화력의 증강에 있다고 판단하고 대포병 화력을 강하하면서 제3대대에 탈환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단장은 다시 제15연대 제3대대와, 제12연대 제3대대를 투입하여 일거에 무명고지와 두매리고지를 탈환하도록 하였으나, 탈환하면 다시 역습을 받아 고지를 빼앗기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3) 전투 결과
사단은 미 제1군단의 명령에 의해 '52. 1.8일 전투를 종료하는 한편 예하의 제15연대를 임진강 남안의 원진지로 복귀시키고, 제12연대는 104고지를 중심으로한 새로은 전진진지에 견고한 축성공사와 함께 위력수색을 지시하였다. 반면 에 적은 대덕산을 중심으로 주진지를 계속보강하면서 두매리고지 전면에 지뢰지대를 설치하였다.
결국 국군 제1사단은 '52. 12. 28~'52.1.8까지 결국 두매리를 상실하였지만 기간 중에 적 사살 1,611명, 포로 4명의 성과를 올렸고 국군은 전사 129명, 부상 585명, 실종 2명의 손실을 입었다.
나) 크리스마스고지 전투('51.12.25~'52.2.13) : 앞장의 동게전투 참조
어은산1277
문등리
1213
390 B 984
수색 A 크리스마스고지 내동
1090
988 1220
백석산
(1) 전투 개요
크리스마스고지 전투는 1951년 12월 25일을 전후하여 어은산 일대의 중공군 제204사단이 백석산 북방의 국군 제7사단의 최북단 전초진지인 1090(북)고지 부근의 무명고지에 대해 공격을 감행함으로서 전개된 전투로서 후일 크리스마스전투라 명명되었다. 이 고지는 어은산과 백석산을 연하는 종격실 능선상의 고지들인데, 피아가 현 주저항선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의지의 충돌로서 쟁탈전이 반복되었다.
당시 적은 중공군 제63군 예하 제204사단 제612연ㄷ대로서 어은산을 주축으로 890-1218-984고지를 연한 선에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1090고지를 기습과 강습을 병행하여 점령 확보함으로서 그들의 주진지 일대에 데한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 공세이전에 대비하려 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1951년 11월 중순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여 이곳에 투입된 후 이미 중공군 제204사단과 일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한 바 있다. 사단은 이 고지가 지형적으로 감제가 가능한 군사 및 전술상으로 주요한 전초진지이므로 이를 결사적으로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2) 전투 경과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강력한 눈보라로 인해 시계가 제한된 가운데 17시 40분경 20여 명의 적 정찰대가 무명고지 B일대의 진전을 탐색하다가 제1대대 전초소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들이 물러간 다음 400여발의 포탄이 고지에 작열하면서 곧이어 1개 대대규모의 적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기도는 1090고지를 기습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한 대대장은 1090(남)고지의 예비중대를 1090고지(북)으로 추진하여 종심을 강화시키는 한편, 자대화력으로 제3중대를 지원하며 날이 밝기까지 무명고지 A를 고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제3중대는 적의 수차에 걸친 파상공격을 1시간여를 견디게 되자 적은 B고지 쪽으로 자진 철수하였다.
대대는 어둠을 이용하여 4회에 걸쳐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적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09시경 다시 제1중대를 제3중대를 초월하여 공격을 감행 드디어 B고지를 15시 30분에 장악하였다. 다시 어둠이 갈리며 19시 35분에 적이 370여 발의 포탄 사격에 이어 집중공격을 가하여서 중대는 2시간 만에 A고지로 철수한다.
다음날인 12월 27일, 대대장은 제1중대와 제3중대에 합동으로 공격토록하여 11시에 목표에 대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공격을 감행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일단 A고지로 철수하였다. 대대장은 야포를 이용하여 B고지 북쪽 1218고지의 적 박격포진지를 제압하고 적의 증원을 차단하며 다시 강공으로 목표 B를 탈환하였다.
그러나 다시 적은 18시 30분에 2개 중대 규모의 증원부대로 기습을 감행해와 결국 다시 A고지로 철수한다. 다음날 28일, 대대는 다시 06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백병전 끝에 09시 50분에 고지 정상을 탈환하였다. 군단장과 사단장이 격려차 연대 지휘소를 방문한 11시 45분에 다시 적이 기습을 감행해 왔으나 아군 3개 포병대대의 화력집중에 적은 격퇴되었다.
(3) 전투 결과
12월 28일 06시 연대는 우일선의 진지교대를 단행하고 예비인 대전차공격대대를 육덕곡으로부터 미네소타선으로 추진하여 중앙일선의 제2대대 진지를 인수하게 하였다. 제1대대는 제2대대에 1090(남)고지를 인계하고 연대지휘소 부근으로 집결하였다.
이 무렵 전선의 상황은 동해안의 남강하구에서 서해안의 임진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평온을 유지했으나, 상기 지역의 무명고지에 대한 격전으 펼친 까닭에 이 고지를 크리스마스고지라 명명하게 되었다.
전투기간 중 제7-3-1대대는 적 172명 사살, 포로 5명이었고, 아군은 22명 전사에 109명 부상 21명 실종이었다.
이 무렵 포로 획득을 위해 중동부 전선의 미 제2사단에 배속된 네덜란드 대대는 공산군 전초기지인 평강 남방 10KM 별고지(430)를 공격하였고,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콜롬비아 대대도 김화지구 적 전초진지(400고지)를 기습하여 그들의 방어시설을 파괴하였다.
2) '52. 춘계 고지 쟁탈전
미 제8군사령관은 '52. 4월 1일 제한된 진격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계획으로 먼저 "촙 수틱 6"은 증강된 국군 제1개 사단을 미 제9군단 정면에서 평강까지 진격하여 현 제9군단 전선을 금성-평강선으로 하는 것이고, "촙 스틱 16"은 국군 제1군단으로 남강하구까지(고성)진격케 하여 전선을 남강선으로 한다는 계획이었으나 당시 휴전회담 성사와 맞물려 실행되지 못했다.
따라서 '52년 봄의 상황도 '51년 말과 같이 제한된 전초진지 상에서의 전투가 간헐적으로 벌어졌다.
1952년 4월 전선 상황도
신계
이천
북1군
사리원 시변리 575고지 국12
중39군 중42군 평강 금성 ↓ 중12군 662고지 북3군
중15군 ● ↓ 중68군 북2군 국11
미45사 ● ●x-머스고지
국9 미7 미40 국6 수도사 국3 국7 미25 국8
금천 중64군 국1사 김화 미10군=국1군
중65군 중63군 국2군=미10군
영1사 철원 화천 양구
개성 ● 고랑포 동두천 미9군=국2군 인제
● 두매리고지 포천 춘천
사천강 문산 미1해병 미1군=미9군 가평
부근전초진지
가) 사천강 부근 전투('52.4.1~5)
판문점 4km 미 해병 5연대
한 해병 1연대
전초소대(2/1)
사천강
개성 5km
*288덕물산 장단(1중대(-1)) 문산 6km
*천덕산 203 *28
*군장잔 213
'52년도에 접어들어 국군 과 유엔군은 휴전회담의 진전에 따라 수도 서울의 방위에 역점을 두고 군사적 보완책으로 전 전선에 걸쳐 부대를 재배치하는 한편 부대의 인원, 장비의 개편작업에 착수하였다.
따라서 중동부 펀치볼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국군 제1해병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함께 3월 17일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여 임진강-사천강 및 한강하류와 서해안 일원의 주저항선을 인수하여 서울에 이르는 적의 주접근로인 개성-서울가도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 제1연대는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로부터 사천강 일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제3대대를 좌, 제1대대를 우, 제2대대를 예비로 좌인접은 미 제1장갑수륙 양용차대대와, 우인접은 미 제5해병연대와 연대하였다.
이때 적은 중공군 제65군 제195사단으로 사천강 서쪽의 덕물산-천덕산-군장산 등 주요고지를 점하여 강 동안의 아군의 전초기지를 감제하고 있었다.
1952. 4. 1일 22:00시에 2개 대대규모의 적이 사천강을 건너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일시적으로 전초선이 무너지기도 했지만 적시적이 예비대 투입으로 역습을 하여 실지를 회복하였고 적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갔다.
4월 5일에는 우리 해병이 적 전초기지를 기습하여 12명을 사살하는 등 전초선의 주도권을 확보하였다.
작전기간 중 적 사살 121명, 아군 전사 53명이었다.
이후에도 피아간에 기습전을 반복되었으며, 5월 18일에는 미 제45사단에 배속된 필리핀 제19대대전투단도 연천 북방 아스널,이리고지상에서 연대규모의 중공군 공격을 백병전으로 맞서 고지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나) 575고지 전투('52.4.16~17)
금성 1km
*495
*573
율사리 쌍령등
*414
율곡 *575 제7-6중대
방평리 *549 제7-2중대
*649 제7-수색중대
*690
*770 교암산
2연대 7연대 *765 제7-7중대
금성천 6사 = 수도사
이에 앞서 국군 제6사단은 양구부근에서 부대정비와 교육훈련을 실시하였다.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였다.
[국군 제6사단의 전투경로]
국군 제6사단은 '51.5월 중공군 5월공세시 용문산전투를 승리한 후 캔사스선으로 진격하여6월초에 화천-백암산의 어민선으로 진출한다. '51. 6.13~8.30가지 수리봉-제안산에서 어민선을 방어하다 '51. 8.30~11.18까지 백암산-등대리-여문리(금청천 노메드선)-949고지(미조리선)으로 진격하여 '52.1.9일까지 용호동-949고지에서 미조리선을 방어한다. '52. 1. 9에 미 제9군단에서 육본직할로 배속전환, 작전지역을 국군 제3사단에 인계한 후 양구로 이동하여 '52.3.20까지 12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받는다. 이후 '52.3.23일 다시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교암산-봉화산지역으로 이동하여 미 제40사단과 교대한후 '52.3.30~'53.3.4일까지 575고지. A.B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실시한다
이 전투는 국군 제6사단이, 사천강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중동부 전선에서 치른 전초전투다. 제6사단은 1952. 3. 28일 제2, 제7연대를 좌우 전방으로 하여 미 제40사단이 방어하던 금성천 북방의 봉화산(477)-사천리-계암-442-교암산(770)-765-690 고지를 연하는 미조리선상의 주저항선을 인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죽동에 확보, 전선을방어하였다.
사단은 제2군단으로 좌익으로서 좌로는 미 제9군단 예하의 미 제40사단, 우로는 수도사단과 연결을 유지하고 사단장 백인엽 소장은 575고지를 포함한 전초진지 보강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단 정면의 적은 중공군 제12군 예하 제31사단 일부와 제35사단 일부였다. 병력은 6,000명 수준이고 제32포병사단 제406포뵹연대의 직접지원을 받고 있었다.
575고지는 주저항선인 765-690고지 선에서 북으로 돌출된 요충으로서 율사리-쌍령등 일대를 감제하여 적의 수색활동을 제어하고 정확한 포격을 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52. 4월16일 적의 교란사격이 시작되었다. 2개 중대의 적이 침투를 개시했다. 국6-7연대장은 제27포병대대, 미 제300포병대대, 81mm박격포, 4.2" 박격포로 맞서며 일시적 진내진입을 허용했지만 적의 진출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사살했지만 아군도 소대장 2명을 포함하여 24명의 전사자와 74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다) 662고지 전투
*627 금강천
*무명산
*439 북한강 천리
*679
*674
어운리 *572 *550 무명고지 *662 수색중대/23
10중대/23
북한강 *748
*629 *949 *973
22연대 23연대 2대대 1대대 23연 18연 18-3대대
이 전투는 1952년 초에 중동부전선 949고지 전방에서 제3사단이 클램 업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 중에 중공군과 치른 전초진지 전투다
[국군 제3사단의 전투경로]
제3사단은 중공군 2월공세시 횡성에서 제천으 거쳐 주포리로 철수(국군 제2군단에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전환), 다시 유엔군의 재반격작전간 미 제10군단에서 국군 제3군단으로 배속전환('51.3.6)하여 강림-안흥-봉화산으로 진격, '51.3.10~4.21까지 평창-하진부리-유천리(아이다호선)-광천리-서림(카이로선)-한계령-인제로 진격, '51.4.24~4.26에 중공군 춘계1차공세를 받고 현리 한석산 방어, 다시 중공군 제차춘계공세('51.5월공세)시 현리전투에서 국군 제9사단과같이 무력화되어 평창선으로 철수. 제3군단 해체로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되어 '51.7.6일까지 다시 북평-강릉-양양-간성-거진으로 이동. '511.9.13 양양으로 이동, '51.9.24~10.18까지 4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 '51.10.19에 양구 임담리로 이동하여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국군 제5사단의 가칠봉 전투 인수. '51.10.27~10.31 가칠봉 전방 1052고지 및 1211고지 공격, '51.11.23일~'52. 1.7까지 양구로 이동/부대정비및 교육, '52.1.7~1.11 양구에서 미 제9군단지역으로 이동하여 국군 제6사단의 금성천 지역 인수, '52.3.18 백야전사배속 다시 '52.4.5 국군 제2군단에 배속(백야전사가 승격), '52.4.9 석장리-932-949-739고지선 주저항선 배치, '52.9.28~10.3일 748고지(피의고지)와 572고지(독수리고지)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53.1.1~4.12까지 필승.텍사스.오봉 능선에서 전초진지 쟁탈전, '53.4.13~4.19 작전지역을 국군 제5사단에 인계하고 화천상리-연천-동송로 이동(미 제8군예비), '53.6.10~6.15 제22연대 제5사단 증원, '53.6.15 제22연대 복귀, 제5사단.제8사단 작전지역 일부 인수(금성천.등대리) '53.6.25~7.3 529고지 전투(관망산). '53.7.13~7.15 금성천 여문리 부근전투
국군 제3사단(백남권 준장)은 '52. 1. 12일부터 국군 제6사단의 작전임무를 인수, 미 제9군단의 우익으로 게리선상의 949고지를 중심으로 북한강으로부터 석장리간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방어하고 있었다.
제23연대는 사단 중앙연대로써 949고지-739고지를 연하여 주저항선을 확보하고 제3대대 9, 10중대로 사단 전투지대에서 가장 중요한 접근로상의 무명고지(550)와 662고지에 전초진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정면의 적은 중공 제12군 제35사단 제104연대와 제68군 제203사단 제607, 609연대로써 자패리-북한강 돌출부-679-674-송정-암리를 연하는 선에 거점을 형성하고 있었다.
국3-23연대는 적을 유인하여 타격을 주고 포로를 획득하기 위해 2월 10일 04:00시 제9중대는 완전철수를 가장하면서 연대 수색중대 및 제10중대에 662-무명고지의 전초진지를 인계하였다.
침묵을 지키던 적이 드디어 2월 15일 01:50분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662고지의 수색중대 전초기지를, 적을 유인 격멸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전초기지가 다음날 새벽 피탈되고 말았다.
2월 16일 09:30분, 고지탈환을 위해 제3-9중대가 투입되어 백병전을 전개한 긑에 17:05분에 드디어 탈환하고 제23연대는 고지 주변에 3중의 철주망과 500여 개의 지뢰를 매설하였다.
결국 전체적으로 볼때 '51. 11~'52. 4월까지의 지상전에는 약간의 기습작전이 전개 되었으나, 쌍방이 점령하고 있는 방어진지는 큰 변동이 없었다.
라) 호도 전투
호도 전투
호도
월사리 반도 진풍면
호도전투는 국군 해병이 해안봉쇄를 위해 실시한 도서 방어 전투였다. 이 전투는 해병 도서부대 제7대대가 서해안 호도에서 1952. 3월 25일부터 29일까지 북한군 제6군단 예하 중대의 공격을 격퇴한 전투다.
북한군은 1952년 초, 아군의 대규모 상륙작전과 해안기습 활동에 대비하여 서해안 경비를 강화하였고 특히 석도와 인접한 장연.은율.송화.용강일대 해안지역에 사단 규모를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석도 대안인 서포리 반도, 월사리 반도에 2개 연대를 투입하여 점차 공세적 방어를 취하려 했다.
해병은 독립 제41, 제42중대에 이어 양도를 선점한 제43중대의 3개 도사 작전부대를 모체로 1952년 1월 15일 도서부대를 편선한다. 이 독립 제42. 제43중대를 제8대대로, 석도에 진주한 독립 제41중대를 제7대대로 각기 현지에서 증편하고 제9대대와 부대본부 및 직할 근무지원 중대를 신규 편성한다.
진해 신병훈련소에서 제9대대 편성을 완료하자, 제7, 제8대대를 제외한 이들 1,250명은 도서이동명령으로 '52.1.15일 이동을 개시하였다.
호도는 은율 앞바다 황해에 위치해 있는 작은 섬으로 2개의 고지대로 형성딘 무인도였다. 도서에 식수가 전무하여 용수는 전략 석도로부터 공급되었고 대안의 월사리 반도와는 450M 거리에 있었다.
적은 '52.1.30일을 기하여 연일 포격을 실시하고, 2월 3일에는 상륙을 기도하는 적선이 출현하여 함포지원으로 격퇴한다.
적은 '52. 3월 25일, 호도에 30발의 포격에 이어 160여 명이 4척의 목선에 분승하여 호도를 기습하기 시작한다. 일부 병력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도 하였다. 적은 주로 밤에 기습하고 아군은 낮에 적을 기습하는 과저잉 반복되는 과정에 아군 항공기의 지원하에 적을 물리친다. 하지만 호도가 지리적으로 불리하여 전원 석도로 4월초에 철수시킨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 39명이 발생하였고, 적 6명 사살에 포로 2명을 획득하였다.
4. 전초기지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결과
전초기지는 지금 모두가 북한군지역으로 출입이 곤란하다. 다만 참전용사 일부 증언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두매리지역은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 그 지역을 육안 관찰은 해보았다. 이 전초기지는 다음 휴전임박해서 또 격전의 현장이 되며 아군이 확보한 곳은 없다.
가. 사천강부근 전초진지 부근 : 나즈막한 산에 북한지역이 바로 눈에 잡히는 곳이다. 비록 비무장지대 안이라 해도 오히려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포탄 탄흔이 온통 갈려 있기에 어느 곳이 개인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일부 우리의 매복호가 있음) 분명 전투 유품은 널려 있다.
나. 두매리고지 부근 : 100m내외의 낮은 산들이다. 바라보이는 철모고지 등이 나무 하나 없이 맨몸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1사단의 기록은 이곳에서 129명이 전사하고 2명이 실종이라고 한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전초진지 전투간 기록을 잠깐 비교하면, 제7사단의 X-머스 고지('51.12.25-'52.2.13)전투는 전사 31명. 실종 218명, 제1사단의 두매리고지전투('51.12.28-'52.1.8)은 129명 전사. 2명 실종, 제6사단의 575고지전투('52.4.16-6.14)는 58명 전사, 제3사단의 662고지 전투('52.2)는 미수집 유해 31명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제 4 절 해. 공군의 적 후방지역 차단작전
1. 개요
국군과 유엔군은 지상작전이 교착상태에 빠져 회담을 진전시키지 못하자, 공군에게 현상 타개의 기대를 걸게 되었다. 제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 해공군은 적을 계속 강타하고 교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해군은 동서해역을 철통같이 봉쇄하는 한편 전후방 시섥에 대한 포격을 강화 하엿으며, 공군은 적 병참선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적의 전선 전력증강을 최대한 방해하였다.
후방차단 작전은 적 후방의 주요 보급시설과 교통망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여 적의 전선부대를 고립시키고 휴전협상의 조기타결을 촉진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차단작전은 공격지원보다는 오히려 적이 총공격을 하기 위해 탄약과 보급물자를 저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예방조치의 기본적인 방어작전이었다.
2. 작전 경과
가. 유엔공군
'51. 8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실시한 스트랭글(교살)작전은 전방의 적 주력보대를 후방 보급원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한 차단 폭격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주로 적의 주요 도로와 철로를 중심으로 교량. 제방.교차로.정거장. 차량.열차 등을 목표로 제5공군. 해군항공대.해병항공대를 포함한 국군과 유엔 항공기가 합동으로 대대적 폭격을 실시 했다.
전반적으로 전선교착 이후 유엔군 공군작전은 근접항공지원보다 전략적 차단 폭격에 비중이 높아져, 그 예로 '51. 11월부터 1952년 4월까지의 기간중 월평균 출격횟수가 근접지원은 1,200회였고 차단작전은 9,000회에 이르렀다.
1952년도에 접어들면서 유엔 공군은 주요 철로에 대한 차단목표를 매 8시간마다 반복폭격하여 노반까지 완전히 파괴하려 하였다. 동년 2월에 공산군이 대공방어 대책을 마련하여 전선의 고사포를 철도엄호에 전용하자, 유엔 공군은 먼저 제트 전투기로 고사포를 제압한 후 폭격기로 공격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은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효과적이지 못해 공산군의 복구 시간을 차단하지 못햇다. 기상이 나빠 비행기의 출격이 급격히 감소하였다.
따라서 유엔 공군은 '52. 3월 해빙기에 전술적 변경을 시도하여 해군 전술에 기초한 세추레이트(집중폭격)작전으로 전환 하였다. 이 작전은 일정한 철로 구간에 24시간 동안 계속 폭격하여 적의 철로보급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52. 3. 25, 26일 양일간에 정주와 신안주 사이의 철로에 전폭기 307대, 전투기 161대, B-26기 8대가 운용되었다. 하지만 적은 6일만에 수리하였다.
또한 야간 작전과 불량한 기상조건에 폭격할 기술이 부족하고, 동시에 여러 곳을 공격할 가용 항공기가 부족하여 효율성이 떨어졌다.
나. 공산군 공군
한편 공산군은 공군기 운용이 점차 증가하여 유엔군 공군기를 공격하였다. 통상 60~80대의 Mig-15기가 수풍댐 근처를 편대 비행하다 미그회랑으로 진입하는 유엔군 전폭기를 일시에 대량으로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하였다.
1951. 1월까지는 주로 유엔공군의 F-86전폭기 1대에 Mig-15기 8~9대가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운용하였다. 특히 '51. 12월 F-86전폭기에 31대의 Mig-15기가 격추되자 '52. 1월 하순부터 적극공세로 전환하였다. 이 시기에 적 공군은 통상 청천강 북방까지 고 고도와 저 고도로 남하하면서 일부는 차단 비행중인 F-86전폭기에 도전하고 다른 편대는 폭격기에 공격을 가했다.
다. 국군 공군
이 무렵 국군 공군도 유엔공군을 지원하기 위해 강릉기지로 전진하여 '51. 12월 말부터 다음해 3월까지 원산-황주 지구의 차단작전에 참가하였다.
이 기간동안 우리 공군은 매일같이 출격하여 철도 327개소, 군용건물 405동, 포진지105개소, 보급품집적소 123개소, 탄약고 3개소, 벙커 94개소, 교량 15개소, 철로 6개소를 파괴하고, 반면 F-51기 3대가 격추었다.
특히 제1전투비행단 제10전투비행전대는 유엔 공군이 500회 이상 출격으로도 차단하지 못한 평양 부근의 승호철교를 파과하여 용맹을 떨쳤다. '52. 1. 15일 강릉기지를 이룩한 F-51전폭기 2개 편대 6대가 적 지상포화가 작렬하는 가운데 초 저고도 침투공격전술로 승호철교 2개 경간을 폭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라. 해군 차단 작전
해군도 공군의 차단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적지에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해군은 비행기가 악천후로 이륙하지 못할 경우에 적의 연안 철로에 5인치 함포사격을 가하였다.
순양함 세인트 파울과 3척의 구축함은 수시로 청진 일대에 8인치와 5인치 함포를 사격하였으며, 함재기들도 차단 폭격에 참여하여 철로 파괴능력이 탁월하여 3일 이상의 복구해야하는 효과가 있었다. '52. 1월 중에 에섹스호 등 3척의 항공모함은 철도공격에 전념하여 길이 1,500~5,000m의 지역에 집중포격을 가했다.
항모에서의 집중포격은점목표 정밀폭격이 아닌 중요시설을 중심으로 한 정밀 융단폭격이었으며 이로인해 해당지역의 복구는 10일이상 걸렸다.
이에 따라 공산군측은 각 7,700명의 기술자를 보유한 3개의 철도조직을 주야로 동원하여 철로수리에 전력을 다하였다. 북한은 정규병력 3개 여단과 철도수리를 위해 50만 명을 상시 철도에 배치시키고 10명 1개조로 6km마다 철로를 감시하게 하였다.
또한 철로 교각이 폭격을 받자 이동식 교각을 매일 밤 사용하면서 철로를 복구 및 활용하여 일정량의 보급품을 전서느로 내려보냈다. 그들은 유엔 공군기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해 터널 안에 탄약, 유류 등을 보관하다 밤에 일정구간 이동하는 방식으로 물자 및 장비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유엔 공군 및 해군의 이런 차단 작전으로 그들은 원활한 보급추진이 제한되고 병력이동이 쉽지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로인해 유엔군이 항상 전장주도권을 갖고 휴전협상에 임하게 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주간이동이 안되고 야간에 주로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기동하다 보니 몇 배의 고충이 따랐고 전투피로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