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명 도마 안중근 장군의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다.
그가 일본의 4차례 내각 총리대신이자 조선 통감이었던 이또히로부미를 총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민족의 원혼을 어찌 달랠 수 있었겠는가?
또한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일본 국왕생일 축하 행사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중국 日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군사 참의관 등 일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 군인으로,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일본 국왕생일 축하 행사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1932년 5월, 사망하였다.
게다가 시게미츠 마모루 シゲミツ マモル(1887~1957)〕 "항복 문서 조인한 日 외무대신" 1945년 9월2일 미국 해군의 미주리함 갑판에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조인하였다. 악몽과 같던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외교관 출신의 시게미쓰 마모루가 일본 대표로 배에 올랐다. 서명을 마치고 굳은 표정으로 하선하는 시게미쓰의 모습이 전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저는 모습이 공교롭게도 상처 입은 일본 제국주의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게미쓰가 다리를 잃은 것은 1932년 중국의 훙커우 공원에서였다.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에 당한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사의 한 순간에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본의 항복하는 장면에서 조차 한국인 애국자의 장엄한 흔적이 보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하얼빈 역에서 대기하던 안중근은 이토히로부미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권총 4발을 쏜다.
그리고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추가로 쐈다.
-도마 안중근 안중근 安重根 (1879~1910)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 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으며,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어 떠나가오."
-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1932)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 관동군 사령관· 육군 대신· 군사 참의관 등 일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한 군인으로,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일본 국왕생일 축하 행사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1932년 5월, 사망하였다.
4월 29일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왕 생일 기념식 및 상해사변 전승축하연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 윤봉길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 파견하여 훙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를 지휘하였다.
시라카와는 1932년 4월 29일에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행해진 일본왕 생일 축하 행사 당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지휘로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그 밖에 상하이의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제3함대 사령장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상하이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등도 큰 부상을 입었다.
특히 일본 항복 조인식에 외부상으로 서명했던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었고, 노무라는 외눈이 되었다. 중상을 입은 시라카와는 무려 12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1932년 5월 26일,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윤봉길의 의거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여러 명 부상을 입었다.
중국은 조선이 침략자 이또,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 중국의 원수를 처단하자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의 전쟁에 1백만이나 되는 자국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