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균형이 무너졌으니 야만의 시대 3차 세계대전이 멀지 않은듯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원전 425년의 작품 <아카르나이의 사람들>에서 세 명의 창녀때문에 페리클레스가 그리스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문명의 몰락을 가져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단 세 명의 창년 때문이라는 그의 주장은 하나의 희극처럼 들린다. 그러나 통치자의 어리석음이 시민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관점에서 보면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파네스에 의하면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단지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전쟁을 시작했다.
페리클레스의 허영심과 과시욕이 전쟁의 원인이다. 페리클레스는 아스파시아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어느 날 메가라 사람들이 자신이 운영하던 유곽의 창녀 셋을 납치했다고 페리클레스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페리클레스는 이 말을 듣고 곧 국민의회를 소집하여 메가라에 대한 무역 봉쇄 조치를 선포했다. 메가라는 결국 동맹국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무역 봉쇄를 해제하라고 최종 요청을 했지만 페리클레스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함으로써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원인에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서술은 물론 희극 장르에 맞춰져 있지만, 당시 아테네에 널리 퍼져 있던 인식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전쟁에 이르게 된 것은 결국 페리클레스의 정치적 결정 때문이었으며, 다른 결정을 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명의 창녀를 전쟁의 원인과 관련하여 지엽적인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치인의 감정적 욕구는 정치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또 다른 세계대전의 위험을 유발한 '세 명의 창녀'는 도대체 무엇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을 어느 정도 '인간적'으로, 즉 '이성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념이 바로 '정의로운 전쟁'이다. 전쟁의 도덕적 현실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쟁 선포의 이유가 정당해야 하며, 전쟁 수행의 수단이 정당해야 한다. 이렇게 전쟁은 두 번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
징키스칸이 잠든 유럽을 깨웠던 것처럼 푸틴의 우크라이나전쟁은 평화주의에 취해 있던 유럽을 깨웠다. 세계가, 특히 유라시아 대륙이 분열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은 전쟁과 평화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쟁의 수단은 폭력이고, 정치의 수단은 협상과 타협이다. 전쟁이 가져오는 잔혹한 폭력은 전쟁이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종종 은폐한다
칸트가 제시하는 영원한 평화의 세 가지 원리
1) 모든 국가는 민주적이어야 한다
2) 국제법은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체제에 기초해야 한다
3) 세계시민권은 보편적 환대에 국한되어야 한다
우크라이나전쟁을 바라보면 특히 두 가지 요소가 두드러진다. 유라시아와 지정학적 변동이 그것이다. 유라시아주의가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정치적 지도자들의 역사관 그리고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면, 우크라이나전쟁이 초래할 지정학적 변동은 21세기의 패권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다. 푸틴을 빼고 우크라이나전쟁을 생각할 수 없듯이 유라시아주의를 배제하고는 21세기 패권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알 수 없다
심장지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섬을 지배하고, 세계섬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러시아의 심장지대에 속하지 않는 우크라이나는 유라시아 전체에 대한 거대한 위험이다.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푸틴과 두긴이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동부를 위한 싸움을 획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리의 예측이 틀렸다는 것은 전쟁이 ‘우연히 그리고 갑자기’ 일어났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난 후에야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를 찾아 나서지만, 인간의 행위와 그것으로 이루어진 인류의 역사에서는 필연보다 우연이 훨씬 더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어떤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처럼, 전쟁을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다.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후에야 비로소 전쟁을 예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반복된다.
우크라이나전쟁은 많은 윤리적 질문을 제기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종종 딜레마에 빠진다. 평화와 전쟁, 법과 본성 사이의 긴장 관계가 딜레마를 초래한다. 평화를 추구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전쟁을 지지할 수 있는가? 전쟁이 현실인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의 조건을 만들 수 있는가? 평화를 만들기 위해 전쟁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논리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물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의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전쟁의 바깥에서는 손쉽게 평화를 주장할 수 있지만, 전쟁의 안에서는 생명에 관한 본질적 문제가 제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진우,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착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