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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려가 냉소를 치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두 분 더 이상 싸우지 마시오. 지금 두 분은 모두 중독 되어 있으니 말이오.”
“무엇이?”
주여려가 경악의 외침소리를 터뜨리며 안색이 일변했다.
유령노조는 을씨년스럽게 웃었다.
“두 분은 무두 심독에 중독되었소. 으흐흐……그러나 두 분의 솜씨와
공력으로보아 더 싸우지 않고 독을 몸 밖으로 배출 시킬 일은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라생각되오. 그렇지 않으면 독이 퍼져서……”
유령노조는 잠시 말을 멈추고 흉측스러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정영과
주여려를번갈아 쓸어보았다. 그는 징그럽게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만일……만일에 그 독을 몸 밖으로 배출시키지 않으면 그 독이 퍼져서
그대로죽고 말 것이오.”
너무나 뜻밖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몸서리를 쳤다.
주여려는 유령노조의 악랄한 수단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는 얼음장같이
차가운어조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사실인가요?”
“만약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운기해보면 알 것 아니오?”
주여려는 급히 운기조식을 해보았다. 이게 웬일이란 말이냐. 내부가
찢어져나가는것처럼 통증이 오며 공력이 상실되어 가는 듯한 이 아픔을!
그녀는 어금니를 부드득 갈았다.
유령노조는 그녀의 분에 떠는 모습을 호쾌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야 알겠소?”
“정말 악랄하기 짝이 없는 수단이군요.”
“핫하하하……전주, 말투가 변했군. 그렇게 말하는 전주나 피차
매일반이아니오.”
“이 무형지독은 정말 무섭군요.”
“무슨 과찬의 말씀을. 이제 두 가지 보물을 내놓으시오.”
주여려는 머리가 남달리 총명했다. 그녀는 보물이 제아무리 눈이 어두워졌다
해도목숨까지 그 대가로 치루는 위인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굴린
후말했다.
“좋아요. 이 두 가지 물건을 다 돌려드리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검과 검보가 담겨져 있는 철합을
유령노조에게던졌다.
이때였다. 주여려가 두 가지 보물을 유령노조에게 던지는 바로 그 찰나에
인영이어른거리는가 싶더니 정영이 잽싸게 몸을 날려 보물을 잡으려 했다.
정영의 돌연한 용기백배한 이 행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정말 뜻밖이었다.
그는 지금 중독되어 있지 않은가.
헌데 어떻게 출수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유령노조도 크게 의아했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돌발한 사태인지라
유령노조가얼떨떨해 하는 사이 어느새 두 가지 보물은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채
정영의 손에잡혔다.
유령노조는 즉시 정신을 곤두세우고 냅다 대갈을 치며 자신이 앉아있던
의자를대동한 가운데 정영을 향해 짓쳐들었다.
정영은 유령노조의 사나운 1 장에 뒤로 여덟 걸음이나 후퇴 당했다. 그러나
황급히자세를 가다듬어 몸을 돌리고는 오른손을 힘껏 내뻗어 1 장을 공격했다.
유령노조가 1 장 밖으로 후퇴하여 외쳤다.
“그 보물을 이리 내놓으시오.”
“내가 무엇 때문에 어렵사리 얻은 보물을 돌려준단 말이오?”
“귀하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소? 귀하는 이미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하오.”
“걱정 마시오. 이 독쯤이야…… 어찌 소생을 다치게 한단 말이오.
어림없는얘기요.”
“중독된 현상을 느끼지 못한단 말이오?”
“전혀 느끼지 못하오. 왜 믿어지지 않소?”
유령노조는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가 전개한
무형지독은지금껏 한번도 빗나가지 않았었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더구나 집마전도 중독되었는데 정영이라고 제외될 수는
없지않은가 말이다.
헌데 저 또랑또랑 외쳐대는 것하며 출중한 동작, 어느 것으로 보더라도
목전의젊은이는 중독된 현상이 없는 것 같으니 어찌된 노릇인가!
유령노조의 안색이 푸르락붉으락 갈피를 못 잡았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더 시험해 보자.”
유령노조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몸을 날려 정영에게로 맹공격을
가했다.유령노조가 연달아 2 장을 출수하자 정영도 질세라 2 장을 격출했다.
한편 관숙금이 왕세열의 혈맥을 한동안 안마해 주었지만 왕세열은
여간해서좋아지지 않았다. 시종 차도가 없는 것이다.
관숙금은 선진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조식을 취했다.
옥면협은 그것을 보자 즉시 우청을 밀어제치고 왕세열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왕세열의 몇군데 혈도를 안마해준 후 그 자리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우청은 옥면협의 초점을 잃은 채 멍한 표정을 살피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아니 아버님, 왜 그러십니까?”
“어쩌면, 아니 거의 살아나기가 힘들 것 같구나.”
“네에? 그럼 그는……”
모든 사람들은 경악의 외침을 터뜨렸다.
옥면협은 침중한 어조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는 이미 삼음절맥(三陰切脈)이 막혀 있소. 천하의 성약이 아니면 어렵겠소.”
“어떤 성약이어야 하죠?”
“그건……그건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구나.”
“얼마나……얼마나 살 수 있습니까?”
“단 사흘뿐이다.”
“네에? 사흘이라고요. 설사 그 기약을 찾으러 나선다 해도 사흘이 훨씬 걸릴
텐데아아,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렇다.”
그의 이 체념적인 말에 모든 사람들은 안색이 일변했다.
삼음절맥은 사람의 사맥(死脈)이며 일단 한번 격중당하면 살아나는 사람이
없었다.만약 천하 영약을 쓴다면 별 문제겠지만.
이들이 절망한 가운데 비통해하고 있을 때 돌연 정영과 유령노조의
인영이허공으로부터 분분히 떨어져 내렸다.
유령노조의 입에서 선혈이 한 모금 왈칵 토해져 나왔다.
“귀하의 무공에 정말 감탄했소. 노부는 이만 실례하겠소.”
그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신형을 솟구쳐 달려 나갔다. 부문주와 매괴혈신도
그의뒤를 바짝 따라갔다. 뒤를 이어 주여려와 두 호법도 가버렸다.
바로 그때였다.
왈칵왈칵!
피를 토하는 소리가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가 하면 비명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왔다.예닐곱 명의 무림고수들이 쓰러지며 그들의 칠공에서 시커먼 피가 마구
쏟아져나오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장내에 독이 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인영이 득실거리며 혼잡했다. 모든 달마원 사람들이 밖으로 달려 나왔다.
마치한바탕의 가공할 일을 당한 것 같았다.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어버린 달마원.
달마원은 순식간에 사지가 되어 버렸다. 처참한 시체만이 여기저기 뒹굴 뿐
한사람의 인영도 보이지 않았다.
달마원을 물러난 사람들은 으스스 몸서리를 쳤다.
이때 또 다시 음산한 소리가 들려왔다.
왈칵 왈칵 왈칵……
피를 토하는 비참한 절규가 터지며 또 다섯 명이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이자들은 모두 공력이 약한데다가 조급히 요상하느라 즉시 독을 배출시키지
못했기때문에 죽은 것이다.
차마 두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혈겁이었다.
쓰러져서 죽은 사람은 모두 전신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중독되었을까 자리에 앉아서 요상을 하고 있었다.
일시 이곳에는 한 가닥의 무서운 음영이 도사리고 있었다.
장내에는 어떤 사람은 일어서 있었고 어떤 자들은 안색이 질린 채
앉아있기도했다.
장생자가 시선을 돌리며 침중하게 입을 열었다.
“누가 중독되었소?”
“접니다.”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바로 제등객, 우청, 지옥마화 그리고
한흑의노인이었다.
장생자는 그들에게 단약 한 알씩을 건네주었다.
“어서 이 약을 먹고 요상해 보시오.”
그들은 재빨리 약을 받아 입에 넣은 후 자리에 앉아 독을 배출시켰다.
이 무렵 정영은 왕세열의 쓰러져 있는 곳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가망이 없는 것 같네.”
“그게 사실입니까? 왜죠?”
“그는 주여려에게 삼음절맥을 찍혔다네. 성약이 아니면 살아날 수가 없네.”
한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정영에게는 중독된 현상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점이었다.모든 사람들은 크게 놀라운 표정으로 정영을 바라보았다.
장생자가 웃었다.
“정 젊은이, 정말 중독되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그럴 리가……자넨 초인도 아닌데 어찌 그럴 수가……”
“저는 어렸을 때 우연히 괴이한 약초를 먹은 후로 어떠한 독도 제겐 침범할
수없습니다.”
“그랬었군!”
이때 옥면협이 끼어들었다.
“오늘 정 소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 했다네.
노부는대표로 정 소협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네.”
“대수롭지 않은 일이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생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지옥마화는 현의검모과 우청에게 이곳을 떠나겠다고 했다. 우청이 대뜸
입을열었다.
“뭐가 그리 급한가요? 왕세열이 어떻게 되는지 보고 가셔야지 그냥
가시겠다는말씀이신가요?”
“보고가야……”
지옥마화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애처로운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건 왜죠?”
“다만 슬픔만 더할 뿐이에요.”
“그래도 걱정되지 않나요?”
그렇다. 그녀가 어찌 왕세열이 걱정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그녀가 가장 관심깊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왕세열
그분이아닌가 말이다.
그녀는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지옥마화는 무겁게 돌아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정영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노 선배님, 왕세열은 정말로 가망이 없습니까?”
“그렇다.”
관숙금이 눈물을 머금고 물었다.
“깨어날 수도 없습니까?”
“깨어나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자, 그를 깨어나도록 하자. 얘기가
많을게다.”
그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쌍장에다 운공하여 여러 대혈을 찍었다.
그러고는천천히 진원을 밀어냈다.
약 반 시진쯤이 지났을까?
왕세열의 얼굴에 차츰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떠 시선을 쓸었다.
그러나눈에 드러난 것은 희미한 인영 뿐 아무 것도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몽롱한 의식 가운데서도 왕소협! 하고 부르는 외침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을수 있었다.
순간 그의 뇌리 속에 번쩍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내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드디어 그의 입이 벌려졌다.
“전……전……죽지 않았습니까?”
관숙금이 얼른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그래요. 왕 소협, 죽지……않았어요. 당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거예요.”
왕세열은 그제야 모든 일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주여려는?”
“갔어요.”
“신검과 검보는?”
정영이 급히 말했다.
“여기 있소.”
정영은 신검과 검보가 담겨진 철합을 왕세열에게 건네주었다.
왕세열은 정영을 처음 보는지라 의아한 시선을 들었다.
“귀하는 뉘시오?”
“소생은 정영이라 하오.”
옥면협이 말한다.
“오늘 다행히 정 소협 덕분에 모든 일이 좋게 끝났구나. 그렇지만
않았다면휴우……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경과를 왕세열에게 말해 주었다. 왕세열은 그 말을 듣자 감겨한
빛이역력했다.
“정형께서 신물을 이렇게 다시 찾아주시다니 왕세열은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모르오. 그리고 태극진군과 팽북문 두 선배님께서 정형이 계신 곳에 있다고
하던데?난 다 알고 있소. 나는 삼음절맥에 찍혀 있다는 것도 그리고 사흘 만에
죽을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소. 생과 사는 아무렇지도 않소만 나는……나는
얘기하지않으면 안 될 일이 있소.”
관숙금이 다시 말을 받았다.
“말씀해 보세요.”
왕세열은 정기 잃은 눈으로 사람들을 주욱 쓸어보고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관 낭자와 나는 비록 부부로 이미 지정되어 있지만 나를 사랑하고 있는
여자들,그리고 빚진 여자들이 너무 많소. 누구보다 진 낭자에게 말이오.”
여기까지지 말한 그는 목이 메인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지옥마화는 하염없이 눈물을 뿌렸다. 자신이 사랑하는 왕세열이 자기를
그토록생각하고 있었다니. 왕세열이 진실로 그토록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니
어찌감격스러운 일이 아니리.
그녀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는 계속 감동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진정아픔의 눈물이기도 하리라.
그녀는 설령 그 때문에 자신을 몽땅 희생하였다 해도 자신의 희생으로
말미암마왕세열의 완전한 사랑을 얻게만 된다면 행복하다 생각했다.
그것이 참사랑인가 보다.
사랑이란 그렇게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면서도 훈훈히 행복해 할 수 있는
것인가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그 사랑을 확인받을 때는 지금의
그녀처럼그렇게 감격에 목이 메이는 가 보다.
그녀는 애절하게 물었다.
“왕 소협! 난…… 괜찮아요.”
왕세열은 간절한 눈빛으로 지옥마화를 바라보았다.
“아니오. 난 당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빚을 지었소. 난 당신을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요. 한데 당신에게 보상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용서하구려.”
지옥마화는 비오 듯 눈물만을 흘릴 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지금의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무어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왕세열이 고통스러운 말문을 다시 열었다.
“진 낭자! 꼭……내세에 당신의 은혜를 갚겠소. 진 낭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사람은 당신이라는 것을 부디 알아주시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아오?”
“알……알고 있어요. 알다마다요. 으흐흑……”
그녀는 피눈물을 흘렸다. 간장이 녹아날 듯 슬피 울었다.
왕세열은 비통한 마음을 억제하며 말했다.
“이해만 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오. 당신이
이해만해 준다면……진 낭자! 이제 가보시오.”
지옥마화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당신을 두고 이대로 떠나라는 말인가요?”
“그럼 당신은 내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단 말이오?”
“당신……당신은 죽지 않을 거예요.”
왕세열은 씁쓸히 웃었다. 그리고 남숙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남 낭자……”
“왕 소협……”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쏟았다.
왕세열은 남숙령이 자신에게 향한 진정한 사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죽기 전에 그녀의 순결을 자기에게 받쳤던 것이다.
왕세열은 몹시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남 낭자, 당신은 나의 첫째아내이오. 당신은 나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나에게받쳤소. 애당초 난 죽을 사람이었는데 지금 또 다시 곧 죽을 사람이
되었구료.”
“당신은 죽지 않을 거예요.”
“난 내가 곧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동안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것을 주며 희생했소. 정말 면목이 없구려. 아! 그리고 당신의 뱃속에
아기가……”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직이 한마디 대답했다.
“네, 그래요.”
“잘 키워 주겠소?”
“염려 마세요. 정성껏 훌륭하게 키우겠어요.”
왕세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죽어가는 마당에 있어 그가 걱정하며 마음에
걸리는일은 바로 이것이었다.
왕세열은 죽기 전에 모든 일을 다 정리해 놓으려는 듯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방방에게로 돌렸다.
“방방, 당신과 얘기할 수 있겠소?”
비마방 대방주 방방은 왕세열의 부름에 약간 의외라는 듯 차가운 얼굴에 한
가닥야릇한 빛이 스쳐갔다. 이어 그녀는 천천히 왕세열의 앞으로 다가와서 착
가라앉은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와 무슨 할 얘기가 있지요?”
왕세열은 얼굴이 몇 번 실룩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낭자, 영존과 가친께서는 생사를 나눈 다정한 사이셨소. 우리가 어릴
적부터혼인을 맺었지만 나는……물론 나도 그 혼인을 부인하고 싶은 것이 아니요.
다만 나왕세열은 당신의 매사 그런 방식하에서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알아두시오.”
그녀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왕세열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당신 나름의 수단과 목적이 있겠지만 당신 행위는 나를 비통하게
했소.”
“뭘 말인가요?”
“당신은 무서운 수단으로 무림에 풍파를 일으켰소. 이제 또 화산 설산
점창삼파까지도 당신의 문하로……”
그녀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왕세열을 주시했다.
“그것은 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바로 그것이란 말이오. 나는 당신의 그런 방식하에서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요.나에게도 자존심이 있소. 부디 이제는 잘못을 뉘우쳐 주시오.”
“잘못을 뉘우치라고요?”
“그렇소. 당신의 수단은 너무 악랄했소. 이젠 무림의 복지를 위해 힘써야 할
때가왔다고 생각하오. 만일 그렇지 않았을 땐 당신을 멸망시킬 사람이 반드시
있을거요.”
“이직도 할말이 남았나요?”
“없소. 그만 가보시오.”
방방은 왕세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은나찰에게 시선을 던진 후 함께
날아사라져 버렸다.
왕세열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천천히 관숙금에게 향했다.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바라볼 뿐 망설이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 할듯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관 낭자, 이제 가 보시오.”
관숙금의 얼굴에 비애의 빛이 가득했다.
“아니에요. 전 가지 않겠어요.”
“난 곧 죽을 사람이니 모두들 가시오. 어서들 날 그대로 두고 가보란 말이오.”
그의 음성은 애원에 가까웠다.
정녕 그렇다. 그는 진정코 그녀들이 자기를 버려두고 가 주기를 원했다.
왕세열은그녀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죽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피차간에고통만을 가증시켜 줄뿐이었다.
한데 그 누구 하나 발길을 옮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왕세열은 한 동안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망막에
비쳐지는것은 오직 어둠뿐이었다.
눈을 감은 채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정녕 나의 마지막인가?’
일세의 풍운아 왕세열.
그의 의식은 그렇게……그렇게 조용히 멀어져갔다.
[연재] 무인향(武人鄕) 6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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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김도연(kdy28) 조회수: 19
등록일: 2003-02-20 20:26:55 본문크기: 7912 bytes
66
왕세열은 옥면협을 향해 간곡히 부탁했다.
“사백, 이 물건을 다시 제자리로 갖다 놓으십시오.”
옥면협도 어쩔 도리가 없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신검을 받아 품속에 간직했다.
“아니야, 그러는 게 아니다.”
장생자의 이 말에 모두들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옥면협이 의혹어린 시선을 굴리며 물었다.
“선배님,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장생자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영사께서는 일대의 신인이시니 오늘의 일을 알지 못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배검지사(배검지사)가 일어날 리 만무하니 이 가운데는
틀림없이내막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럼 선배님의 생각은……”
“먼저 철합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야 한다. 만약 이 철합 속에 든 것이
다만겁보뿐이라면 구태여 철합 속에 넣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가. 이 철합 속에는
다른것이……”
이 말에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 장생자의 말은 일리있는 말이었다.
검보 하나만 들어있다면 왜 철합 속에 넣어두었겠는가!
이 철합 속에는 해약이 들어있으리만 것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옥면협은 철합을 꺼내 재빨리 뚜껑을 열었다.
철합, 안에는 노랗게 바랜 책자와 편지 한 장이 단정히 놓여 있었다.
옥면협은 접혀있는 편지를 꺼냈다.
< 왕세열에게
묵혈마종씀>
옥면협이 소리내어 읽었다.
“정말로 편지였군요.”
“편지!”
여기저기서 경악의 외침 소리가 퍼져나왔다.
옥면협은 편지를 왕세열에게 주었다. 편지를 손에든 왕세열의 손끝이
떨리고있었다.
“묵혈마종께서는 정말 일대의 신인이로구나. 나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것까지미리 알고 있었다니……”
그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한가닥 삶에 대한 욕망이 솟구쳐왔다. 어쩌면 이
편지속에서 해약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었다.
거기에는 가지런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보아라.
내가 이 편지를 읽을 때에는 이미 독수를 당했으리라 생각된다. 내가 영약을
한봉지 싸서 동봉하니 먹고서 내력으로 뚫으면 곧 회복하게 될 것이다.
너의 아버지와 우충은 비록 내 문하이긴 하지만 이 신검을 얻을 복이
없느니라.너야말로 신검의 진짜 주인이다. 너는 이 검초를 연성한 후 무림의 복된
일에기여하며 신검문(神劒門)일파를 창립하여라. 부디 무림 정의를 위해 힘써
주기바란다.
묵혈마종 남김>
편지를 읽은 왕세열은 크게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전 이제 살 수 있어요.”
“정말, 그게 사실?”
모든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왕세열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봉투를 뒤집어보았다. 그러자 빨간 종이로
싼무엇인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왕세열은 그 물건을 집어 들어올리며 옥면협에게 편지를 주었다. 편지를
본옥면협은 좋아 어찌할바를 몰랐다.
옥면협은 급히 서둘렀다.
“어서 약을 먹거라. 내가 요상해 주마.”
왕세열은 순순히 약을 받아 입속에 넣었다. 약은 씁쓸하니 떫었다.
왕세열이 약을 먹자 옥면협은 쌍장에다 운공하여 왕세열의 혈도를 찍었다.
그리고는한 가닥의 극강한 내력을 밀어냈다.
옥면협의 웅후한 공력은 약의 효력에 의하여 천천히 막혀버린 삼음절맥을 뚫었다.
왕세열은 다시 운기를 해 보았다. 그러자 재부의 삼음절맥이 시원스럽게
뚫려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시선을 쓸더니 갑자기 물었다.
“지옥마화 진낭자는?”
곁에 있던 우청이 얼른 대답했다.
“갔어요.”
왕세열의 얼굴에 순간으로 서운한 표정이 역력했다.
“가다니, 그게 정말이오.”
왕세열은 아쉬운 감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갑자기 그녀가 보고싶어졌다. 자기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 첫사랑의
여인을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니……”
장생자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험한 고비에 죽지 않았다는 것은 곧 큰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묵혈마종께서너더러 신자문을 창립하라고 하셨는데 노부가 맨 먼저 문하로
가입하겠다.”
왕세열은 크게 기뻐했다.
“노선배님, 정말이십니까?”
“나뿐만이 아니다. 아마 여기에 계시는 분들은 모두 원하고 있을 것이다.”
왕세열은 당황과 기쁨이 엇갈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가 당황한 것은 그가 과연 이 중대한 임무를 맡을 수 있을는지
걱정에서였고한편으로 기쁜 것은 이 많은 무림고수들이 모두 문하로
가입하겠다는데 기뻤던것이다.
왕세열은 희열에 찬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무정동에 가서 검초를 익혀야 겠습니다. 연성한 후 다시
문파를창립할 생각인데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장생자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찬성을 표해왔다.
“좋다. 그러게 하자. 그럼 우린 가보겠다.”
장생자는 현의검모과 여러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뒤이어 우청도
능파신자를만나러 떠났다. 제등개과 야편복도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장내는 고요했다. 사람을 떠나보낸 뒤에 남은 고적함은
가을날의공허함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만날 기약이 있든 없든 그리고 그 헤어짐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서로의
헤어짐속엔 싸한 외로움이 뒹굴고 있다.
남숙령과 관숙금 그리고 정영과 왕세열만이 남은 장내는 침묵이 흘렀다.
남숙령은 바라보는 왕세열은 시종 말이 없었다.
얼마의 조용함이 그대로인 채 흘러갔을까?
남숙령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왕소협, 우린 어떻게 하죠?”
“어떻하다니?”
왕세열은 언어를 잃어 버렸다.
그로서 어떻게 판단을 내릴 수 있으리오.
그의 머리는 무거웠다. 최저한 지금으로서는 그녀와 결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세열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내로 맞아 들일 것이오.”
남숙령은 암담한 신색을 띠며 나지막이 응답했다.
“허나 지금이 아니란 말이군요.”
순간 왕세열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덮여졌다.
“그러소. 이해해 주시오.”
남숙령은 어두어진 왕세열의 얼굴을 이윽히 마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해는 해요. 다만 언제까지고 저를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겠소.”
“그럼 전 가겠어요. 관낭자, 부탁해요.”
관숙금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걱정 마세요.”
“그럼 가겠어요.”
남숙령은 아픈 가슴을 안고 홀연히 떠나갔다. 그녀의 쓸쓸이 떠나는
뒷모습에서는마치 한 사람을 집요하게 사랑하는 어떤 서글픈 숙명이 뒤따르고 있는
듯느껴졌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깊이 사랑하고 있지만 주고받는 사랑이 아닌 일각의
기쁨도느낄 수 없는 그런 고독한 모습이었다.
사랑이란 그런거 였는지 모른다.
그래, 정녕 사랑은 피마르는 아픔이며 고통일는지 모른다.
설사 그 사랑이 용광로처럼 타올라 한줌의 재가 될지언정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없는 그것이 남녀 사이의 애정인가 보다. 그것이 참사랑인가 보다.
그녀는 한마디의 원망도 없었다.
안으로 안으로 새기며 떠나간 것이다.
오히려 떠나기 전에 부탁가지 하는 것이 아닌가.
관숙금은 긴 한숨을 불어내며 말했다.
“왕소협, 정말 불쌍한 여인이에요.”
왕세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보상할 것이오.”
이때 정영이 왕세열에게 다가갔다.
“왕형, 이만 실례하겠소.”
왕세열의 얼굴에 진심으로 섭섭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형, 오늘 정말 고마웠소.”
정영은 그의 고맙다는 치하에는 아랑곳없이 동문서답했다.
“태극진군과 마귀성검에게 가지 않겠소?”
왕세열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연검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을 것 같소. 그러니
미안하오만나를 대신하여 모든 사실을 얘기해 드리고 양해를 구해 주시오.”
정영은 쾌히 승낙했다.
“그럽시다. 그럼 안녕히……”
“정형, 안녕히 가시오.”
정영은 신형을 날려 소림사 밖으로 달려갔다.
왕세열과 관숙금 역시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재빨리 장문인 법해에게 사의를 표하고는 소림사를 나왔다.
그들이 소림사를 벗어나왔을 때 왕세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관낭자, 어디로 갈 생각이오?”
“전 다만 당신을 만나보러 왔던 것이니 이제 집에 가야겠어요.
그런데당신은요?”
왕세열은 호쾌하게 대답했다.
“난 무정동에 가서 검초를 연마해야 하오.”
두 사람은 무정동 가까이 이르러 천마산 밑에서 다시 만날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왕세열은 무정동에 들어오자 한차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대청에 자신 혼자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적막했다.
왕세열은 그곳에 기거하면서 계속 검초를 연마했다.
시간이 유수처럼 흘렀다.
일곱식의 검초는 왕세열으로 하여금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케 했다.
왕세열은 열심히 연마했다. 얼마동안을 아무 잡념없이 열심히 연마한 그는
이제나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가지며 무정동을 걸어나왔다.
그의 머릿속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아참, 그렇구나. 아버지 어머니를 죽게한 원수 주여려를
우선찾아가기로 하자.’
그는 혼자의 힘으로 직접 원수를 없앨 결심이었다.
그는 결정이 확고하게 내려지자 즉시 천마협으로 달렸다.
왕세열은 관숙금에게도 알리지 않고 천마협에 뛰어들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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