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해에 벌어진 홍산전투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기세는 눈꼽 만큼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1377년은 대 왜구 전쟁에서 고려가 이전까지 겪었던 시련들 중에서도 너무나 심대한 시련을 당했던 시기였다. 끝을 모를 정도로 불 붙었던 왜구의 기세는 이제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다.
1월, 왜구는 합포의 회원창(會原倉)을 공격하여 고려군의 식량까지 약탈했다. 당시는 고려군 역시 극도의 군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었는데, 여러 주군에서 거둔 쌀을 품미(品米)라 하여 보관했는데 이것이 약탈 당한 것이다. 고려군은 왜구에게 식량까지 삥 뜯기는 판이었다.
2월에는 왜구가 신평현(新平縣)을 공격했는데, 양광도 도순무사 홍인계(洪仁桂)가 이를 무찔렀다. 그러나 이후 왜구가 현재의
천안시인 경양(慶陽)을 공격하고 평택현을 공격하자, 양광도 부원수 인해(印海)는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3월에는 왜구가 착량(窄梁)을 공격해서
군함 50여척을 모두 불태워 고려군의 함선들이 불타는 빛 때문에 밤이 낮 같을 지경이었고,
죽은 병사만 1,000여명을 넘었다. 이때 책임자였던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는 화살을 맞았으나 간신히 도주에 성공했다. 최영은 일전에 손광유에게 "착량 강어귀에서 군대 위세만 보일 뿐, 절대로 바다로 나가서는 안 된다." 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손광유가 잠시 군대를 이끌고 착량을 벗어났는데, 그렇다면 재빨리 복귀해야 함에도
술에 잔뜩 취하여 곯아떨어진 사이에 왜구의 기습을 받아 군대가 개박살이 나버렸던 것이다.
여기도 원균, 저기도 원균 물론 패전은 손광유의 잘못된 지휘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최영의 당부에서 보이듯이
고려 수군은 왜구에게 완전히 제해권을 빼앗겨, 바다로 나가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해주(海州)의 수미사(須彌寺)라는 절이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이 된다라는 논리로 문수도량(文殊道場)이라는 행사를 열고 수미사에서 액막이를 함으로써 왜구를 막으려고 했다.
여하간 왜구는 기세를 이어 강화도를 침공했는데, 만호 김지서(金之瑞), 부사 곽언룡(郭彦龍)은 마리산(摩利山)으로 도망을 갔고 왜구는 김지서의 부인을 납치했고, 왜구에게
강간 당하지 않으려던
처녀 세 명이 강에 빠져 자살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는 출정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제가 문학으로 나라를 빛낼 수도 없으며, 고관의 후예라서 호의호식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늘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생각해 왔으니 바라옵건대 군사를 지휘해 강화에 들어가서 왜적을 격퇴하게 허락하소서." ─고려사 나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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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은 나세의 뜻을 장하게 여기고 대궐에서 기르는 말 두 필을 내려주었으며, 그 휘하 장수들에게 열 필을 나누어 주었다. 나세는 조사민, 이원계(李元桂)·강영,·박수년 등과 함께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섰으며, 최영은 도통사(都統使)로써 승천부에 주둔하여 방비하고 있었다. 또한
이인임,
경복흥(慶復興)의 지휘아래 이성계, 임견미, 변안열, 양백연 등을 두어 적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각 지역에서는 급하게 병사를 징발했다.
그러자 왜구는 강화도에서 물러나더니 수안현(守安縣), 통진현(通津縣), 동성현(童城縣) 등을 침략해 지나가는 모든 곳을 황폐화 시켰다. 심지어 왜구들은 이렇게 소리칠 정도였다.
"막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으니 이 땅은 참으로 낙토(樂土) 구나!"
이 당시 최영, 경복흥, 이인임은 모두 현재 충청북도
공주시 부근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최영은 갑자기 "왜구가 이토록 마음껏 활개치니 원수된 몸으로써 면목이 없다."
라고 탄식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데 다른 원수인 석문성(石文成)은 "여기 노래 잘하는 기생이 왔나."''' 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등, 여러가지로 개판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화도에서 수도를 위협하는 적을 막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찰나에, 남부지방에서 가히 절망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경상도 원수 우인열이 보고하길, "왜적이 대마도로보터 바다를 뒤덮고 와, 돛대 돛대가 서로 이어질 지경이며, 이미 군사를 나누어 요해처를 지키게 했으나 적의 형세가 너무나 장대하고 방어할 곳이 많아 한 도의 군사로서는 역부족입니다. 조전원수를 보내주십시오." ─ 고려사절요 1377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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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적을 막기 위해서만도 여러 재상들이 모두 모일 정도였는데, 저
대마도에서 동남해의 바다를 뒤덮을 듯한 왜구의 대함대가 구름같이 몰려와
경상도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우인열(禹仁烈)은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당시 고려 수뇌부는 강화도 부근에서 개경을 노리는 왜구만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런 사태가 발생하자 우왕자왕하며 어찌 할 바를 모르며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병력의 차이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우인열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계속해서 교전을 벌이며 시간을 버는 일 밖에 없었다. 4월, 드디어 왜구의 군세는 현재의
울산인 울주에 도달했다. 우인열은 이곳에서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벌였고, 이후 밀양까지 밀려나 다시 교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해 전객부령(典客副令) 최방우(崔方雨) 등이 전사했다. 황산강(黃山江)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朴?)가 적을 쳐 소규모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경상남도 창녕군 부근인 영산(靈山)에서는 왜구가 험한 곳에 자리를 잡아 버텨 우인열과 부원수
배극렴(裵克廉)이 적과 싸웠으나 전황이 좋지 못했고, 또한 경상북도
경주시 쪽에서도 고려군과 왜군이 겨루어 양쪽 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사이 울주, 양주, 밀성 등은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서 강화도의 전역에서도 왜구의 군세가 움직여 서강 부근으로 이동했기에, 변안열과 최영이 이를 무찔러야 했다. 이 양면 공격 때문에 고려군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우인열은 3월부터 5월이 될때까지 치열하게 왜구와 소규모 교전을 계속해서 벌이며 최대한 버티고 있었다. 이는 우인열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적의 전리품을 노획할때마다 이를 항상 공평하게 공이 있는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병사들이 죽음을 무릎쓰고 열심히 싸운 부분이 컸다. 태산신역(太山新驛)에서는 기병을 이용해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적의 병사가 너무 강력하고 숫자가 많아 우인열도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또한 왜구가 밀성 등지에서
보리 등을 마음껏 빼앗아가고 있어 피해도 커졌는데, 안동조전원수(安東助戰元帥)
왕빈(王賓)이 이를 공격해 성과를 올렸으나 피해는 끊임없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 무렵 거의 한달이나 걸려 간신히 사태를 파악하고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고려 조정에서는 드디어 우인열의 경상도군에게 지원병을 보내었다. 그 군대의 사령관은 다름 아닌
화령 부윤 이성계. 이성계는 삼사우사(三司右使) 김득제(金得齊),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림(李琳), 밀직부사(密直副使)
유만수(柳曼殊) 등과 함께 조전원수가 되어 경상도 출진했다. 당시 경상도에서는 우인열이 끊임없이 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는데, 정찰병의 보고로는
"적의 배가 바닷섬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겠다." 라는 보고가 올라왔고, 그때까지 이성계가 도착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이성계의 군사는 정예병으로 이름이 높아 각 고을에서는 가움이 비를 기다리듯 이성계의 군사를 기다렸던 것이다.
한편, 우인열의 비보(飛報) 등을 받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이성계는
지리산 부근에서 왜구가 마주쳤다. 경상도 바다를 통해 내륙으로 진군한 왜구가 지리산까지 이른 것이다. 양 군대는 불과 2백 보 정도의 거리에서 진을 쳤다. 그때
왜구 중 한 명이 엉덩이를 두들기며 도발을 일삼자 이성계는 곧 화살을 쏘아 이를 맞추어 버리고는, 경악한 왜구들에게 즉시 공세를 가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자 왜구는 산으로 도망쳐 깎아지른 듯한 지형을 이용해 칼과 창을 고슴도치 처럼 내밀고
우주방어를 취했다.
이때 이성계는 정찰 목적으로 비장 한 사람을 보내 상황을 보게 했는데, 이 비장은 돌아와서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는 보고를 했다. 기병대가 많은 이성계의 군대로서는 이런 지형에서 싸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자 이성계는 훗날의 조선
정종(定宗)인
이방과(李芳果)를 재차 보내 다시 정찰하게 했다. 그러나 이방과 역시 돌아와서는 비장처럼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그럼 내가 직접 가서 보겠다. 너희들은 내가 혹시 적에게 진격하면 곧바로 뒤를 따라라." 라고 말하고는, 직접 적의 진영을 살피며 지세를 한번 보고는 무슨 틈을 찾았는지
다짜고자 말도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고 이성계의 군사들 역시 바로 그 뒤를 따라 달려들었다. 그러자 왜구는
탱크에 치인듯 막대한 타격을 입고 밀려나더니, 결국 산의 낭떠러지에서 밀려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수두룩 했다.
이렇게 지리산까지 몰려온 왜구들을 이성계가 무지막지한 전술로 날려버렸을때, 황산강에서는 김해 부사 박위가 왜구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당시 왜선 50여척이 김해의 남포(南浦) 부근에서 순풍을 타고 낙동강 하구를 30km 거슬러 올라가 밀성을 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정보를 얻었던 박위는 30여척의 함선으로 복병을 놓아 기습함으로써 이 왜구들을 대부분 섬멸했다.
또한 배극렴은 적의 괴수인 패가대(覇家臺) 만호(萬戶)라는 자와 싸웠는데, 패가대는 큰 쇠투구를 쓰고 손발까지 덮은 갑옷으로 무장하고는 보병을 좌, 우익으로 나눠 달려들었다. 이 왜구들은 기세 좋게 달려들다 진흙탕 때문에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 틈에 배극렴은 공격을 가하여 패가대를 죽이고 왜구들을 몰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상도에서 간신히 사태가 진정될 무렵, 또다른 전선인 강화도 부근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의 고을들을 털어버렸는데 이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던것. 당시 왜구는 22척의 함선이었으나 고려군의 함선을 노획하여 50여척을 넘었는데, 이 50여척의 함선을 앞에 세우고 다니자 이를 고려군으로 오인하여 백성들이 피하지 않았다가 학살당하는 허장성세의 계략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왜구들은 천안과
안성시까지 진격했는데, 양광도 원수였던
왕안덕(王安德)은 적의 기세가 두려워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다가 부원수 인해, 양천 원수 홍인규(洪仁圭) 등을 불러 적을 요격하려고 했으나 적은 작전을 눈치채고 이동을 했다. 이에 왕안덕은 어쩔 수 없이 적에게 달려들었으나 이기지 못하고 왕안덕 자신도 부상을 입고 몰았다.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수원 부사였던 박승직(朴承直)은 왕안덕, 인해, 홍인규 등 세명의 원수가 온다는 소식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밭을 매는 자들에게 "원수들이 온다고 하는데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 물었고, 이에 밭 매던 사람들은 "적이 이미 물러나 원수들이 쫓고 있다." 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승직은 안성의 관사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것이 속임수였다! 사실 밭 매던 사람들은
변장한 왜구로 이에 속은 박승직이 안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왜구가 쏟아져 나왔고 박승직은 혼자 간신히 이를 돌파할 수 있었으나 대다수 병졸들은 왜구에게 학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박승직의 군대는 전멸하고, 왕안덕의 군대도 패전하자 수원, 양성, 안성 부근의 고을들은
사람을 찾아 볼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만다. 그런데 왕안덕의 패배는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경황 없는 와중에 고려군은 왜구의 포로 한 사람을 잡을 수 있었는데, 왜구에게 실토를 들어보자 무시무시한 음모가 튀어나온것. 강화도의 왜구들이 양광도를 친 이유는 "양광도를 쳐서 최영을 양광도로 끌어내고, 그 사이에 비어있는 개경을 급습하려는 것." 이라는 경악스러운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음모가 밝혀졌다고 해도, 당장 양광도가 쑥대밭이 되고 있는데 지원군을 안 보낼 수도 없었다. 조정에서는 성사(贊成事) 양백연과 평리(評理) 변안열, 임견미 등을 파견하려고 했는데, 그때 최인철이 개경으로 와 "신이 왕안덕 등을 독려해서 왜구를 무찔렀다." 는 거짓 보고를 올려 군대의 파병은 취소되었다.
이러는 상황에서 백여명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왜구 부대가 남양(南陽), 안성, 종덕(宗德) 등을 휩쓸었으며, 이미 왜구 소굴이 되어가고 있었던 강화도에서는 다시 50여척의 왜구 함선이 나타나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수자리를 서던 고려 병사 천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나세가 양백연과 함께 전함 50여척을 이끌고 나서 싸워 이들을 쫓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강화도는 여전한 위협으로
봉화가 꺼질 줄 을 몰랐으며, 덩달아 개경 역시 계속해서 비상사태가 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이후 다시 왜구가 강화도에 쳐들어와 살육과 약탈을 했다.
6월, 왜구는 신주(信州), 옹진(甕津), 문화(文化) 등을 공격했는데, 나세와
심덕부(沈德符), 조인벽(趙仁璧) 등은 열심히 싸웠지만 적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 패배하고 말았다.
같은 시기
전라남도 역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순천에서 정지는 왜구와 교전하여 소규모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이에 서해도의 안주가 왜구에게 공격 당했으며, 장택현 역시 공격 당했다. 그 사이에
제주도 역시 왜구에 공격 당했는데,
무려 함선 2백여척이 나타난 것이다. 또한 영강(永康)ㆍ장연(長淵)ㆍ풍주(?州)ㆍ안악(安岳)ㆍ함종(咸從)ㆍ삼화(三和)ㆍ강서(江西) 역시 공격을 당했다.
7월 무렵이 되자 고려는
가뭄 때문에 국가 재정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 이어져 풍주(豊州) 등이 공격 당했고, 상원수 박보로(朴普老) 등이 나가서 싸웠으나 조천옥(趙天玉) 등이 전사했다. 이때 우왕은 사신을 보내 각 지역의 산성을 수리하게 했다.
8월에는 왜구가 해주(海州) 등 황해남도 지역을 공격했는데, 나세 등이 전황이 불리하여 장수를 파견해 달라고 하자 이성계, 임견미, 유만수, 변안열 등과 함께 급히 파견되었다. 이 싸움에서 임견미와 변안열은 초전에 패배하여 물러났는데, 이성계는 직접 대우전(大羽箭)을 쏘며 싸움을 독려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임견미 등은 자신들이 패배한 사실은 숨기고 이 공적을 가로채려고 했다. 이성계는 그런 문제는 뒤로 하고 남은 적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는데, 적들이 험한 지역에 몸을 숨기고 섶을 싸아 버티고 있자 이성계는 신조(神照)라는 승려와 함께
갑자기 고기를 뜯으며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서 군대를 지휘해서 화공으로 적을 공격하게 했다. 섶에 불이 붙어 연기가 오르자 버티지 못한 왜구는 결국 험한 지역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이성계는
이를 안주 삼아 구경하면서 술을 마셨다. 불타는 왜구는 훌륭한 안주 공급원이죠. 급기야 발악으로 날린 왜구의 화살이
의자 앞에 놓인 술잔마저 깨부셨는데도 이성계는 여전히 앉아서 휘하의 김사훈(金思訓), 노현수(魯玄受), 이만중(李萬中) 등을 시켜 남은 왜구를 깡그리 소탕해버렸다.
그러지 9월에는 전라남도 영광, 전라북도 고창, 전라남도
함평군 지역 등이 공격 당했고,
황해북도 지역에도 왜구가 다시 돌아왔다. 또 경상남도 하동도 왜구에게 공격을 당했으며, 홍주(洪州)로 온 왜구들이 목사 지득청(池得淸)의 처를 죽였다. 이때 왕안덕은 노현(蘆峴)에서 왜구와 교전했으나 패배했으며, 다음날 적이 온수현(溫水縣)에 들어와 군영을 불태우자 밤에 교전이 벌어졌는데
사졸들이 놀라서 달아나는 바람에 전사자가 속출했다.10월에는 왜구가 40여척의 함선으로 하동군을 공격했으며, 충청남도 아산 부근이 왜구에게 공격을 당하자 왕안덕은 아주(牙州)에서 이를 격퇴했다. 현 전라북도
익산시인 함열현(咸悅縣) 역시 왜구에 공격을 당했다.
11월에는 왜구가 부여ㆍ정산(定山)ㆍ홍산 등으로 쳐들어왔고, 130여척의 왜선이 김해 등을 공격하자 배극렴이 나가서 싸웠으나 패전했다. 또한 현 경기도 김포시 부근등도 계속 공격을 당했다.
12월에는 마지막으로 순천에서 병마사 정지가 왜구를 격파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길고 긴 1377년의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이제 더 큰 위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운청산 주절주절 끌어 붙인다고 역사가 되는게 아닙니다. 개인의 개똥철학과 상상 속의 역사를 우기면서 타인과의 [소통] 자체를 배제하는 백운청산씨 같은 분들이 있어 이 나라의 역사인식이 쓰레기인 것이죠...^^; 기본적인 팩트조차 안맞는 헛소리는 그만 걷어 치우시길...ㅉㅉ
@춘자 성리학이 조선 망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것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는 생각 안합니만 댓글 달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춘자님 충언 명심하겠습니다.
@[♥]CARDCAPTOR SAKURA 넵 알겠습니다~
@Draka 무신정변의 예는 적절하지 못한거 같습니다.제 댓글 논지는 무속신앙이나 불교나 도교등 통치철학 유효했다는 말이 아니라 고구려때부터 유교가 정치원리이면서 불교와 도교등이 민중이나 식자들에 부수적인 역활이 했던것이고 조선에 정도전이는 그런 기능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무장나드 물론 한무제이후부터 나머지 백가들도 전문성이 높아지는것은 사실이겟죠.조선에 사화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나드님과 저와 생각이 다를겁니다.고구려 무덤들에 보면 보이는 사신도들이 우리 선조들의 오행사상에 영향이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중국에 사신들이 고구려에 오면 도리 안맞는 사당을 짓고 숭배한다는 걸로 봐선 비록 무속신앙이지만 중국못지 않은 오행사상이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무장나드 저는 역사가 일천하다고 여러번 말을 했습니다.민속학이나 고고학 또는 역사를 전공해야만 댓글을 달수 있는것은 아닐겁니다.댓글로 모르는게 있으면 가르쳐주는것이 맞는 것이지 사이비사학이라고 무시하고 말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저로써도 어쩔수 없는 일이죠.
@백운청산 뭐가 적절치 않은데요? 사화나 무신정변이나 정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똑같은데요? 오히려 성리학 체제의 조선이 고려보다 훨씬 피도 덜 흘렸고 안정도도 높았습니다.
정도전이 허용을 안 해요? 그래서 조선이 불교를 금했습니까? 왕실이 원찰 세우고 사대부들도 개인적으로 신앙하는 사례가 제법 있었습니다. 당장 조선 후기 사찰 상량문 보세요. 사대부들 시주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불교나 도교를 계속 언급하시는데 그 '부수적인 역할'이 뭔지 구체적으로 좀 예를 들어주시죠? 이랬을거다 저랬을거다 if놀이만 계속하지 마시고.
유교와 성리학을 까시다보니 잊으신 모양입니다만 그 불교와 도교도 우리 토착종교 아닙니다.
@백운청산 그리고 사이비는 당연히 무시해야 하는겁니다. 백운님은 병 나면 사이비 돌팔이 찾아가시나요? 말할 가치가 없으니 사이비라고 무시하는 겁니다.
게다가 지금 기본적인 팩트도 안 맞는 헛소리라고 누차 가르쳐드려도 귀 막고 같은 주장만 되풀이하시는 분은 백운님입니다. 불교사원=사찰=가람=도량이 다 같은 뜻인지 아닌지도 모르시잖습니까.
@백운청산 성리학자들을 무슨 이단심문관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조선시대 풍수지리나 도참사상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 성리학에서 나왔고 성리학이 나쁜겁니까?
고려는 성리학이 뿌리내리지 못해 긍정적이다? 어떤 점에서 긍정적이었는데요? 백성들 버리고 강화도 쳐박힌거?
이성계와 정도전이 '구체제'로 복귀했다? 어떤 체제요?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인 고려? 아니면 원 간섭기? 권문세족을 혁파한게 이성계와 정도전인데요?
성리학이 사대의 충성맹세를 강화했다? 이거 근거는 있는 얘기입니까?
다 틀렸다고 말씀드려도 '우리 민족의 뭔가가 있었을 것이다'라는 if만 끊임없이 반복하시는 중 아닙니까!
@백운청산 "댓글로 모르는게 있으면 가르쳐주는것이 맞는 것..."...-_-; 백날 가르쳐주면 뭐해요. 인간 녹음기처럼 개똥철학 역사를 반복하는데...
염치가 좀 있어보시죠...^^; 역사적 지식이 일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에요. 자신의 주장에 오류가 있으면 수정하고 좀더 생각해서 다른 의견을 게재하면 되는 겁니다. 근데 백운청산씨는 딴소리로 샜다가 나중에 같은 주장 반복하잖아요. "사이비사학이라고 무시하고 말할 가치가 없다"고 한적 없으요. 말장난 집어치우라는 거지...ㅉㅉ
@Draka 저도 병나면 병원으로 갑니다.사화는 이유야 어쨌든 합법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거고 무신정변이야 말그래도 무신들에 쿠테타를 사람이 죽어났가다고 해서 어떻게 동일선상에 놓습니까.
이성계랑 정도전이를 싫어하는 것과 조선을 존재를 부정하거나 인정 안하는게 아니잖습니까
@Draka 불교와 도교는 차제에 두더라도 일단 저는 고려말이 국력이 회복단계이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안했다면 더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과 draka님처럼 고려는 너무 부패해서 망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차이에서 이런 논쟁이 시작된것인데 이미 조선이 개국이 된상황에서 얘기를 하는건데 망해버린 고려하고 망하지 않고 조선이 개국했으면 하는 차이에서 만약이란 관점이 들어갈수 밖에 없었던거 아닌가요.구체제회귀란 그저 고려왕정이 발흥하는 상황입니다.조선이 개국하고 정치적인 형태만 변한거지 그게 개혁이 아니라고 봅니다.그리고 성리학이 사대와 관계가 전혀없다면 어떻게 청나라한테 2번을 당할수가 있습니까?
@백운청산 정치적 형태가 변한게 개혁이 아니면 뭐가 개혁입니까? 지금 말장난하나요?
고려가 회복단계? 본문 글 읽어보시긴 한겁니까? 왜구 토벌도, 요동 정벌도, 주력이 사병이란 말입니다. 고려군이 아니라 이성계군 최영군이라구요. 나중에는 왕이 신하에게 동맹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이게 제대로 된 나라입니까?
성리학이 사대와 관계가 아주 큰 덕분에 고려는 왕호에 忠자를 쓰고 원나라 입맛대로 왕이 교체당했군요. 아주 큰 것 배웠습니다. 이것도 성리학 탓이죠? 더해서 몽골한테 털린 고려는 봐줄 수 있어도 청한테 당한 조선은 못 봐주시는군요. 아주 공평한 관점이십니다.
@백운청산 '사화'라는 용어 자체가 정치적 숙청이라는 비합법성을 반영하는 겁니다. 특정 정치집단이 다른 집단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역모에 옭아 죽이는 것과 직접 칼을 들고 쳐죽이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나요?!...ㅎㅎㅎㅎㅎ 전자와 후자는 목적과 결과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겁니다. 다만 해당 사회의 정치적 성숙도와 통치체제의 발전성을 반영한다는 측면에서 후자의 대표적인 예인 '무신정변'은 오히려 관료집단 및 문벌귀족과 무인세력 간의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수준의 정치적 미성숙과 통치체제의 비효율을 반영하는 것이죠...^^; 무신정변의 결과로 고려는 기존의 정상적인 통치체제가 붕괴했지만, 조선의 경우는 통치세력 내에서의 투쟁이
@백운청산 설마 두번의 호란이 숭명배금 그거 하나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생각하신겁니까
@백운청산 일어나 '사화'가 여러차례 일어났지만 통치체제 자체가 붕괴한 적은 없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을 싫어한다는 "개인적 감정"이 역사를 인식하는데 강고하게 작용한다면, 그건 빨간색 썬글라스를 쓰고 온세상이 빨갱이라고 설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낄낄~
@Draka 아무래도 정도전이나 무인시대 같은 사극에서 고려백성들과 당시의 정치현실 고증을 ㅈ같이 한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개막장 고려를 이렇게 고평가하는 인식이 나올 수가 없지요...ㅋ
@백운청산 전 고려가 너무 부패해서 망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딱히 어떤 입장을 가질 필요도 없이 그냥 고려는 부패하고 통치력을 상실해서 망한겁니다. 그게 역사적 사실이에요.
고려가 망한 후 신진사대부들이 권문세족들을 혁파하고 개혁에 성공한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전근대 극강의 통치 효율과 행정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겁니다. 백운님은 대체 뭘 근거로 고려가 스스로 권문세족을 혁파할 수 있었을거라고 믿는겁니까? '만약~'과 '내 생각에는~'을 빼고 객관적인 근거를 대주세요.
@백운청산 조선의 개국과 함께 추진된 [과전법]만 살펴도 고려와 조선은 안드로메다급의 차이가 나고, 당시 백성들은 조선개국을 지상락원으로의 변화로 느꼈을 겁니다...^^; 조선의 개국은 '혁명'입니다.
그리고 계속 궁금한 건데 그 고려증흥의 징조가 뭔지 좀 보여주시겠어요?! <고려사>를 아무리 뒤벼봐도, 심지어 중국의 <명사>를 뒤벼도 그런 기운은 저~~~언혀 없는데 말이죠...ㅋ
@백운청산 모르면 가르쳐주는게 맞는데 모르면서 아는척 단정짓는건 어찌 가르쳐줄 수도 없습니다. 전부터 느낀거지만 님은 유교를 절대악으로 보고 계신거 같네요. 아니라고 말씀하셔도 유교를 까기위해 불교를 띄우고 도교를 띄우고 토속신앙까지 띄우시네요.
@유럽제패 토속신앙 등이 널리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어쩌면 국가의 '발전레벨' 자체가 낮은 상황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게지요...^^;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할수록, '민족국가'로 발전할수록 일정한 영역, 즉 국경 안에서 사는 구성원, 즉 인민이 문화적-역사적-사회적 동질감과 강한 유대감을 갖게되는 법... 그런 발전이 이루어지면 각 지역에 따로 놀던 문화와 종교 등이 하나로 통합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거...ㅎㅎ;;
본격 답정너=.=
@▦무장공비 시간나면 저도 글을 올려볼게요.역사가 일천해서 더 이상 글 안올리려고 했는데 사이비글이라도 괜찮다면 올려보겠습니다.
@백운청산 보고싶습니다.
저당시 민중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전국토가 전쟁터이니........
사실 정도전에 나오는 회진현 부곡사람들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아주 잘사는 수준입니다. 당시에는 그 정도 의복을 갖추기도 힘들었고, 무려 온돌로 방을 뜨숩게 달구고, 징발 나와서 뒤지니 곡식이 몇 자루나 나오고, 혈색들도 좋고... 원래는 넝마 삼베옷에 누렇게 부황이 든 빼빼마른 거지꼴에, 하루 한끼 먹기도 힘들어야 제대로 고증하는 거죠...-_-; 왜구도 사시사철 쳐들어와야 하고...
@★海東天子☆ 가능한 고증이 아니죠. 엑스트라랑 배우들 고문한다고 욕먹을 수준.^^;;
@bookmark 도지사 "화면이 더럽다"
@타마네 "증발할라고 마을에 들으가믄, 처음엔… 아들만 보입디다. 솔나무 껍질을 벳겨 먹었는지 아들 입술이 죄다 새~까맣티…. 마당 한가운데까증 들어가 봐도 어른들은 없어, 다들 방 안에 있지비…. 멀뚱한 피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니 배 꺼질까봐 드러눠서 천장만 보지않고 뭐이겠어. 방서 아들 애비를 끌어내믄… 헛간바닥에 떨어진 쌀 한 톨이라도 줏어서 수레바퀴에 실고서 그 마을어귀를 벗어날라 할때믄, 온 동네 아낙네들 아들 통곡소리가… 십리 밖까증 따라옴메…. 그러다 잠잠해즈믄… 무시기 생각이 드는 줄 아오…? 전장터로 끌려가는 저 애비와, 뒈 남겨진 저 아들중에, 언놈이 먼저 죽을까."
도지사님의 태클에도 고증에 성공!
@★海東天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367년에서 1369년에 이르기까지 아주 잠깐의 왜구침입이 없던것이 김용,김일 사신단 파견에 의한 효과라고 보는 의견도 있더군요 ㅎㅎ 그리고 수군재건에 대한 논의는 이미 공민왕 즉위 초 당시 부터 목은 이색이 '왜구로 인해 생활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활용하여 수군으로 싸우게 하자'는 건의를 한 예가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포왜사'들의 활동이 시작되기도 하구요(뭐 한심한 꼴을 보이는 사례도 많지만, 그 이후부터 왜구 포로들이 잡혀올라오기도 합니다) 국민대 홍영의 교수같은 경우는 포왜사들의 수군이 나중에 고려가 수군재편할 당시에 수군으로 흡수되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기도 하고.....
왜구가 바다를 통해서 쳐들어 오기때문에 고려가 수군에 '아예 손놓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죠. 물론 체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국 1370년대에 들어와서야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정지장군이 기용되기 전인 1372년에 고려가 제주도 목호 토벌을 할 정도로 병선 및 수군을 어느정도 확보를 하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정도의 것이 아니긴 합니다;; 뭐 시스템이 없어서 그걸 조정중이었던 것 만은 사실입니다만..........ㅜㅜ 어찌되었든 막장
아직도 왜구의 습성을 못버린 왜늠국....왜국을 정벌하여 세계에 민폐를 끼치는 그들의 악행을 근절합시다.
근데 궁금한게 왜구의 침략목적은 무엇인가요?
단순히 해적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만만치 않아 보여서 지휘체계도 있었을텐데. '도'정도를 점령해서 임진왜란 때처럼 행정을 했다는 이야기는 못본거같아서요. 땅을 먹는게 목적은 아닌거 같고. 단순한 약탈이 목적인건가요?
왜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약탈' 이었습니다. 그때문에 대응이 더 어려웠고 침입이 지속된 면도 있죠. 왜구가 영토적인 면에 욕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아기발도에게 '니들 고을 하나 점령해서 있는게 낫지 않는가" 하고 떠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거구요. 원구(元寇)의 복수설과 같은 정치적인 면에 중점을 두는 연구자들도 있기는 합니다만(왕의 초상화등을 약탈한 것 등을 근거로)그보다는, 큐슈내부의 내전으로 인한 식량 or 병량미 수급을 위한 약탈 집단(혹은 정규군)으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무엇보다 왜구가 '통일된 집단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대응이 곤란했던 점이 있기도 하고요;;
이 시대의 왜구를 '전기 왜구'라고 부르는데, 당시 일본도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지는 와중에 덴노가 두 명이 되는 '남북조시대'의 혼란기였고, 이에 주목해 세력이 밀리던 남조의 군대가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려/중국 화북지방 해안지대를 조직적으로 약탈했다는 가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군대 유지할 돈과 식량은 없는데 내전에서 버티려면 군대는 필요하니 필요한 돈과 식량을 털러 외국까지 쳐들어갔다는 이야기죠. 그러니 당연히 군대를 남겨놓아야 하는 점령 등은 기피할수밖에요.
그리고 이와 별개로 후기 왜구의 경우 주 공격대상부터 해적질의 목적까지 완전히 바뀐다고 보시면 됩니다.
@푸른숲 문제는 큐슈에서의 남조세력이 최전성기 였을때에도 왜구의 침입은 있었고, 당시 무로마치 막부나, 남조가 슈고들에게 관료주의적 지배권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무엇보가 당시 슈고는 물론이고 국인층에 이르기까지 남조와 북조 세력사이를 왔다갔다 하는게 일반적 모습이었고 같은 일족사이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는 아주 복잡한양상을 보입니다. 애시당초 남조의 카네요시 친왕의 직접적 군사적 근거라고 해봐야 키쿠치씨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뿐이었고, 그 키쿠치씨 또한 자신의 직계영지를 제외한 다른 영지의 장원에 대한 영향력은 미비했습니다. 그런상황에서 수직적인 지시하달-지시복종 체계
@배달민족 가 이루어질 수는 없었죠. 일본에 이런 수직적 위계질서 체계가 보이는 것은 노부나가-히데요시대에나가서야 이루어집니다;; 일본에서 온 사신이 '난신이 할거하고 있고 침구하는 것은 서쪽지방의 완악한 백성들이다' 라고 한 이 구절에서 난신과 완악한 백성들을 구분한 것이 그 시절의 모습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라는 것이 말그대로 정말 땅이나 퍼먹고 사는 일반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조나 북조에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 세력이었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는 악당(悪党)이란 집단이 전국각지에서 횡행하고 있었는데 이 세력들 중에는 성을 함락시킬 정도의 무장수준을 지닌
@배달민족 집단들도 있었습니다. 아지발도의 경우도 처음부터 왜구가 아니라 '왜구의 요청으로 온' 인물이었던 만큼 왜구 전체의 모습이 '통일적인 조직체계'를 가졌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남조가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상당히 있긴 한데 그런면에 있어서는 북조세력도 자유롭기는 힘들죠(예를 들면 피로인 송환에 가장 열을 보인 세력이 북조의 이마가와 료우슌인데, 그만큼 이 사람의 지배영역에서 왜구세력의 노예 유통망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때 이 사람이 왜구의 흑막이었단 주장이 제기되기도;;).
이게 고려말기여? 로마말기여?
정말 후덜덜한 인베이전이네요.
로마토탈워1 확장팩 이름 바바리안 인베이션 = 직역 번역은 "오랑캐 침략"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이 글이 파이어됐나 했더니.... 진짜 오늘 날에도 [조선을 망하게 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무지막지하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씹선비 유교]라는 가상의 적을 창조해서 쉐도우복싱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이 현실부정으로 가서 국뽕이 된게 환빠고, 비판작용 없이 그대로 순응한게 유교까 조선까인듯요.
조선의 유교와 오늘날의 유교가 안드로메다급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ㅄ들이 많지요...^^; 임금이라도 잘못하면 촌구석 선비도 상소문 들고 올라와서 대차게 까던 조선의 유교와- 오직 '충군애국'을 외치며 임금(천황)을 신격화하고 사무라이식 서열화를 강고하게 규정한 대일본 유교, 그리고 그 "황군의 후예"인 오늘날 쵸센인민들...ㅋ 백날 말하면 뭐합니까?! 지들 가슴속에 상상의 역사를 품고 개솔빼길 하는데...에효~~~
저 같은 쪼렙들은 이런 키배에서 내공 냠냠... 물론 백운청산 님 댓글은 읽지 않았습니다.
성리학이 딱히 조선을 망하게 하고 자주적이지 못한 우리나라를 만들었다는건 말이 안된다고 생각되네요. 성리학 때문에 오히려 민본정치가 강화되고 귀족들만의 정치가 아닌 전문적행정관료들이 정치를 하게 되잖아요.
뭐 적서차별이나 후기로 갈수록 남녀차별이 심해지기도 하지만 조선의 망운이 성리학때문은 절대 아닌것 같네요. 모화사상이 성리학 영향이라고 하셨지만 광해군때 북인들도 성리학자들...
조선사회가 망한 이유는 성리학때문이 아니라 부패한 훈구대신, 그리고 그들을 대체한 사림들의 권력쟁탈, 가장 문제가 많던 세도정치... 결국은 성리학때문이 아니라 성리학과 반대되는 행동만 하는 부패권력 쓰레기들 때문이겠죠...
정작 성리학만큼 개인의 인격 수양을 중요시하는 학문도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