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정치' 하면 보통 생각나는 단어는 뭐가 있을까요?
일단 '자민당', '일당체제', '파벌정치', '우경화', '우익' 등의 단어들이 먼저 떠오를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 정치는 이 '자민당'이라는 거대정당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물론 잠깐잠깐 타 정당에 정권을 빼앗기긴 했지만, 자민당은 수십년 간 여당의 위치에 서서 현대국가 일본의 모습을 조각해 왔죠.
하지만, 과연 이 자민당이라는 이름의 일당 독주체제는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이었을까요? "원래 그런 것"이란 없는 법인데, 그렇다면 자민당은 어떤 과정과 사건을 거쳐 만들어진 걸까요?
아무래도 그 기원은 패전 후 10년이 지난 1955년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의 전후(戰後)정치체제는 이를 본따 '55년 체제'라고도 불리곤 하죠. 이 해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 모든 것은 사진의 두 남자, '하토야마 이치로'(좌)와 '요시다 시게루'(우)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패전 이후 들어선 맥아더 막부GHQ 미군정은 일본을 무장해제시키는 한편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로 만들기 위해 새 헌법을 만들고 총선을 실시합니다. 동시에 군국주의자들과 제국주의 부역자들을 공직에서 추방시키는 조치도 과감히 실행하죠. 1946년 4월 신헌법 초안(맥아더 헌법)이 반포되고, 원래의 '제국의회'는 '참의원(상원)'과 '중의원(하원)'의 양원제 의회로 개편됩니다.
1945년까지의 '제국의회'는 군부의 추천을 받은 소위 '익찬회 의원'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패전이 임박하자 제국의회 내에서 도조 히데키 등 강경파들에 반하는 우파 의원들은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재빨리 정치세력을 결성해, 패전 후인 11월 '자유당'을 결성합니다.

(하토야마와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
이윽고 치러진 총선에서 하토야마의 자유당은 제1당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의 과거 경력에 상당한 껄끄러움을 느끼던 GHQ는 나치당과의 커넥션 여부를 구실로 하토야마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최대정당인 자유당은 순식간에 수장을 잃은 격이 되었죠.
여기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요시다 시게루입니다. 절친한 사이이자 최측근이던 요시다가 하토야마의 대타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요시다는 태평양전쟁기에 일본의 군국주의 행보를 비판한 바가 있기에 미군정과의 관계도 훨씬 양호한 편이었습니다. 이렇게 '요시다 내각'이 출범합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을 민주 평화국가로 만들려던 미국의 계획은 대폭 수정되어, 일본열도는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진영의 보루의 역할을 요구받았기 때문이죠. 가열차게 진행되던 민주개혁의 기조는 이른바 '역코스(逆-course)'라는 반-개혁의 바람을 타게 되었습니다.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우익 정치가들이 속속들이 복귀했고, 때마침 터진 한국전쟁 특수와 더불어 '재무장'에 대한 목소리도 다시금 높아졌죠.
그리고 물론 하토야마 이치로도 추방령이 해제되어 정계에 복귀합니다.

(요시다와 하토야마의 악수) 내 자리 내놔 새퀴야
1951년 정계로 돌아온 하토야마는 요시다에게 총재직 복귀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미 권좌에 오른 요시다가 퇴물 하토야마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죠. 이에 빡친 하토야마는 자신이 만든 정당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민주당'에 들어갑니다.
당시 요시다 내각은 미국의 보호 하에 점진적 성장을 노리는 정책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일 터지는 부패스캔들과 '국가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우익세력의 성토 아래 요시다는 점점 인기를 잃어갔습니다. 한국전쟁 특수로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자 배때기가 부른 우익들은 재무장과 자주외교를 요구했고, 하토야마는 이러한 분위기를 정확히 캐치해 요시다계의 자유당에 대항합니다. 군대 보유를 금지하고 전쟁을 완전배제한 '평화헌법'을 개정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말이죠.
그렇게 1955년 총선이 치러지고, 선거 결과 민주당은 185석을 얻어 1당의 자리에 올라섭니다. 자유당은 114석을 얻는 데 그치고 말았죠. 그러나 개헌이라는 공약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사회당이 개헌저지선(156석)을 훌쩍 넘겨 162석을 얻었기 때문이죠.

("보수 결집을 위해서는 하토야마 내각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고 발언한 민주당의 '미키 부키치' 총무회장)
1955년의 선거 결과로 분명해진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꾸준히 전체 유권자의 1/3 가량을 동원하는 좌파세력, 어느 당도 과반을 얻지 못하는 지지부진한 정치구도, 그리고 '물 건너간' 개헌. 역코스 개헌도, 정권교체도 불가능한 교착상태였죠.
이에 '보수 합동'의 요구가 거세게 불기 시작합니다. 일본경영자단체연맹(일경련) 등의 보수합동 요구, 사회당의 '당내 좌파 위주' 통합, 선거 때마다 늘어나는 사회당의 기세 등은 보수 양당 정치인들을 끊임없이 압박하는 요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시다 시게루가 내각 총사퇴를 선언하고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자 보수 통합을 막는 큰 장애물이 하나 없어지기까지 했죠.
이러한 요소들에 힘입어 1955년 11월 보수 양당의 지도자들은 '자유민주당 창당대회'를 열어 신보수정당의 지도부를 선출했고, 하토야마를 총재로 한 299석의 '자민당'이 거대여당으로 출범하게 됩니다.

보수-혁신계가 약 2:1의 비율로 세력을 나눠가져 기묘한 안정을 찾는, 이른바 '1과 1/2당 시스템'은 이때부터 일본 정치를 규정하는 하나의 확고한 체제로 자리잡습니다. 중간에 정권을 잃기도 하고, 자민당과 사회당이 연정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일본정치의 근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죠. 이 '55년 체제', '1 1/2당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일본의 현대정치를 배우는 첫걸음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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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공부하다가 지루해서 이렇게 역사게시판에 글이라도 올려볼까 해서 끄적이게 되었습니다. 반응 괜찮으면 전전/전후 일본정치사 글을 비정기적으로 연재해볼까 합니다. 기시 노부스케/고다마 요시오/고이즈미 준이치로 등 굵직굵직한 인물들, 록히드사건/아사마산장 사건 등 주요 사건들, 그리고 일본 사회당의 흥망사 등에 관해 소개하는 글이 될 것 같군요..!
부족한 글솜씨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ㅋ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앗.. 그런가요... 밑에 월남전 글 몇개 올라와있길래 여기 올리면 되는줄 알았네요 ㅜㅜ
@Pierre Bourdieu 전공 시간에 배운걸 몇 년만에 복습하는 듯 해서 잘 읽었습니다. 윗분 말씀대로 정치게시판이 맞는 것 같긴 한데, 이렇게 애매할 때는 운영진께서 적당히 옮겨주실 겁니다.
@WorldEnder 사실 고이즈미나 나카소네 이런글은 제가 봐도 정슈게가 어울리는 것 같긴 합니다 ㅋㅋㅋ
재밌네요. 다른 글들도 올려주세요!
정슈게는 이런 글을 더욱더 환영합니다. ^오^
평소부터 궁금하던 것이었는데 재미있네요. 계속 올려주신다니 기대하겠습니다. ㅋ
정슈게 공지 기준으로는 1945년 이후의 '시사성'을 뜨는 게시글인데 일본 정치사가 그러한 시사성을 띄는지는 의문스럽네요.
사회당의 리즈시절 쯧.
사회당 리즈는 저 직후인 60년대 언저리가 아닐까 합니다 ㅎㅎ.. 사회당 내 좌익 교조주의자들 대신 합리적 대중진보정당을 지향했던 에다 사부로 서기장 등등의 마스터플랜이 받아들여졌다면 어땠을지 궁금하군요 ㅜㅜ
@Pierre Bourdieu 대신 일본콩사탕을 지지하면 됩니다.반 요요기파같은 비타협주의자들 걸러내고 국제파란 이름의 친중파도 걸러진 클-린 공산당으로 오세요!?(도주)
@수화 사실 조만간 일본공산당이 빛을 볼거같긴 해요.. ㅋㅋㅋ 사민당은 관짝 들어간지 꽤됐고 결국 현재로서 좌파를 대표하는 정당은 공산당 뿐이니까요 ㅎㅎ
@Pierre Bourdieu 사실 대표를 넘어서서 유일한 정당수준
하일 코뮤니즘(소곤)
글이 무척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글 잘 쓰셨네요.서핑하다가 발견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