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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7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열왕 10,1-10
복 음 : 마르 7,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22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에서의 흥미로운 조사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가 신호에 걸릴 때,
외국인 노동자가 서 있는 차의 앞 유리를 재빨리 닦습니다.
그때 운전자는 그들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네곤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이 가장 많이 걷히는 도시는 잘 사는 도시 밀라노인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나폴리인가라는 비교 실험을 한 것입니다.
어디일까요? 당연히 부유한 도시인 밀라노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폴리였다고 합니다.
새 성전을 지은 신부님께서는 본당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봉헌을 해서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봉헌금을 살펴보니 돈 많은 사람의 봉헌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의 봉헌들이 모여서
이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해서, 또 여유가 없어서 봉헌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습니다.
예전에 만났던 한 자매님도 기억납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신학생을 위해 써달라면서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분은 생활 보호 대상자였습니다.
신학생들을 후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여유가 없어서 기도로만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꽤 많이 받은 합의금으로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한 뒤에
성소자를 위해 써달라며 모두 가지고 와서 봉헌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멋진 모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마음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자기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사람을 깨끗하게도 하고 더럽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준수만을 생각합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맞았을까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올바르게 보이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한 마음 역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위선의 마음은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예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마르 7,14-15)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예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예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 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16)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온전한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제 안을 선으로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마음의 작동원리를 알면 무슨 죄에서든 벗어날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들만 우리를 더럽힐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오염의 원천이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있을 때 성수가 계속 더러워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원인을 밖에서 찾았습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수가 항아리에서 줄어 들자 그 안에 박으로 만든 바가지가 엎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가지에서 옻칠이 벗겨지며 성수를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나를 더럽히는 것은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람에게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서 욕망이 시작됩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구는 머리가 아닌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악의도 그렇고 불륜을 저지르거나 남의 것을 탐내고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그렇습니다.
위 여러 우리를 더럽히는 죄들은 ‘내가 ~을 하고 싶다’에 다 들어갑니다.
그러니 나의 마음에서 모든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단순해집니다.
모든 죄의 원인인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마음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요? 마음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 45화에 최면으로 금연을 하게 된 사례가 나옵니다.
이남현 씨는 담배를 17년 정도 피웠습니다.
지금은 도저히 담배를 끊을 수 없었는데 최면으로 금연 성공 5년 차가 됩니다.
편안히 눈을 감고 왼쪽 손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안에 담배 피울 때의 장소, 느낌, 상황들을 다 담습니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담습니다.
싫어하는 사람, 무서운 것, 혐오스러운 것들을 담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오른손에 있는 이미지를 왼손에 있는 이미지에 마구 섞어 비벼줍니다.
내가 싫어하는 이미지가 담배 속으로 다 스며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이 부정적인 이미지와 섞인 담배의 이미지를 가슴속으로 깊게 밀어 넣어줍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 효과가 더욱 좋다고 합니다.
이남현 씨는 마음의 작동 원리를 이용하여 금연을 한 사례입니다.
마음은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동안 마음이 담배가 행복한 것이라 믿고 바라고 사랑해 왔습니다.
머리는 그저 마음을 따를 뿐입니다. 머리로 아무리 담배에서 벗어나려 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바로 마음이 담배가 행복이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바라지도 사랑하지도 않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남현 씨는 최면으로 그렇게 담배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미함으로써
담배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마음이 믿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계속 가슴에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러니 담배를 만났을 때 이전보다 덜 사랑하게 되고 그러면 끊기가 쉬워집니다.
마음의 작동 원리만 알면 못 할 게 없는 것입니다.
최면이어도 담배를 끊으면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앤서니 라빈스의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에서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앨라배마에서 자란 한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약 15년 전, 학교의 7학년(한국의 중학교 1학년) 불량배가 싸움을 걸어오더니
주먹으로 때려 그를 기절시켰습니다.
이 소년은 정신을 차린 뒤, 그 불량배를 죽이겠다며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그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22구경 권총을 집어 들고 그 불량배를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그 불량배가 사정권에 들어왔고, 소년이 권총을 쏘기만 하면
그 불량배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지금 방아쇠를 당기면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러고는 마음속에 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운명이 판가름 날 그 짧은 순간에
자신이 감옥에 가는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뚜렷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감옥에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고통은 복수를 하겠다는 기대감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결국 그는 목표물을 바꿔 나무에 총을 쐈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훗날 미식축구와 야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보 잭슨(Bo Jackson)입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 장면을 묘사하면서,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감옥을 연상함으로써
받는 고통이 복수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소년을 죽이는 만족감보다
의심의 여지 없이 훨씬 더 강력했다고 토로했습니다.
마음의 초점을 바꾸고 고통과 기쁨 중에서 하나를 결정함으로써
이 소년은 미래가 없을 뻔했던 삶 대신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성공적인
운동선수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마음은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희망하게 되고
그것을 사랑하여 그렇게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마음을 바꾸려면 행복의 기준을 바꿔야 합니다.
행복의 기준은 정체성에서 옵니다.
개는 네 발로 걷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고 사람은 두 발로 걷는 게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두 발로 걷는 개도 있고 네발로 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망은 자신이 누구냐고 믿는 정체성에서 그 정체성에 있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바라는 마음입니다.
욕망으로 사람이 타락하기도 하고 거룩해지기도 합니다.
피조물은 좋은 것을 욕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창조자와 하나가 되었다고 믿을 때 죄가 아닌 사랑이 행복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마치 아이였다가 갑자기 부모가 된 사람처럼.
보 잭슨은 감옥에 있는 것보다 밖에 있는 것이 더 행복이라고 여겼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늘나라에 사는 존재라고 믿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5절) 하시며
금기 식품은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시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배속으로 들어가서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라고 하셨다(마태 15,11.17 참조).
주님께서는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19절) 밝히셨다.
그런데 레위 11장에 보면 부정한 음식물의 종류가 나오고 있다.
그것은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신앙처럼 지켜오는
먹지 말아야 할 음식 중에 대표적인 것이 돼지고기가 있다.
2마카 6장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페파네스는 유대교를 근절시키려고
유다인들로 하여금 돼지고기를 먹게 하였고,
그것을 안 먹는 유다인들은 왕명을 거스른 죄로 수백 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역사적인 사건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런 유다인들에게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깜짝 놀랄 말이었다.
즉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사람이 부정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내왔고
죽어가면서도 지켜온 그들의 율법을 무시하는 듯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본뜻은 무엇인가?
물건, 음식이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측면에서 볼 때
부정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다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데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이라는 창고 안에 무엇을 쌓아 놓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내어놓으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악한 생각들이란 마귀가 나에게 불어넣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귀는 우리의 나쁜 생각에 힘을 보태고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귀가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그렇게 행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느냐에
믿음의 근본 의미가 있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물건이나 음식이 아니라 사람 자신에서 나오는 생각과 행위이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이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에 담아야 할 것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 “보시니 참 좋더라.” 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사람이 그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히고, 안 더럽히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사실 좋고 나쁨은 사람들이 서로 비교하여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더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말합니다.
좋게 창조된 것이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을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쓰면 더럽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안에 품은 욕망은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을 밖으로 표출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자주 확인해야 합니다.
정작 문제는 외적인 것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는데,
외적인 것에 연연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내면을 깨끗이 정돈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짱’ ‘몸짱’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외면을 중시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는 성형수술을 하고 겉모양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아붓습니다.
반면, 속을 가꾸는 데에는 소홀히 해서 내면을 황폐하게 버려둡니다.
심지어 ‘감정에 충실하자.’ ‘솔직한 것이 좋지 않으냐?’ 하면서
자신의 악한 생각을 합리화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주저하지 않기도 합니다.
죄에 대해서 많이 무뎌졌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16,7).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집회42,20).
그러니 내면을 더 깨끗하게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의 행동에 있어서는 활달하며
당신의 대화에 있어서는 조리를 지키며
당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방황하지 말고
당신의 영혼에 있어서는 내적인 분란과 외적인 혼란을 없애고
실생활에 있어서는 여가가 없을 정도로 분주한 생활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고 당신을 갈기갈기 찢고 당신을 저주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이러한 것들이 순결하고 현명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머물려고 하는
당신의 영혼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빈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그릇이 되고,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됩니다.
그 그릇의 쓰레기를 버리고 예쁜 꽃을 심으면 예쁜 화분이 됩니다.
담기는 것에 따라서 그릇의 이름이 달라집니다.
우리 마음에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진정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들어
당신의 숨, 당신의 영, 얼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잘 지키고 가꾸며,
하느님의 좋은 작품인 만물 안에서 기쁨과 평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안에 담겨있던 것입니다.
평상시에 좋은 것을 잘 담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니면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도 不淨함과 淨함에 대한 논쟁이 계속된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잣대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제자들의 부정함을 트집 잡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29,13)를 인용하여
그들이 율법만큼 중요시하는 조상의 전통을
‘사람의 계명’(7절), ‘사람의 전통’(8절)이라고 단언하셨다.
즉 사람들이 만들어 낸 관습에 불과한 것을
율사들은 하느님의 계명인 양 내세운 것을 질타한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만든 조상의 전통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행동이
율법상 정결을 깨뜨린 부정함의 행동이 아닌 셈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바리사이와 율사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불러 모아 놓고 정결에 관한 율법을 다시 세워주시는 대목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더럽히고 진정 하느님 앞에 不淨함이 되는 것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이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15절)
이 말씀으로 신약의 새로운 “정함”과 “부정함”의 율법이 세워졌다.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느 것도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이것으로 구약에 불결하다 하여 금기한 음식들은(레위 11장; 신명 14,3-21) 모두 폐기된 셈이다.
사실 유다인들에게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들, 淨한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비늘과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외에 다른 동물들은
거의 부정한 것이어서 식용이 금지되었다.
그나마 그것도 주검에 닿으면 다 부정한 것이 되어 먹을 수 없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주식으로 삼았던 메뚜기(마태 3,4; 마르 1,6)는
식용으로 허용된 곤충(레위 11,22)이었다.
아무튼 예수께서는 모든 금기 식품을 단 한마디 말씀으로 폐기해 버리셨다.
자연 그대로의 모든 음식물이 명예를 회복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사람을 더럽히고 하느님 앞에 부정함이 되는 것인가?
그것은 ‘도리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15절)이다.
여기까지 바리사이들, 율사들, 그리고 군중이 들은 말씀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물러갔을까? 대변을 생각했을까?
진정으로 더럽히는 것에 대한 설명은 제자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어떤 음식이든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대변이 되어 배설되고 만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파고들어 사람을 더럽히는 부정한 것은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22절)
이는 곧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죄악의 목록이다.
온갖 정결규정을 동원하여 ‘껍데기’만 가지고 백성들의 정함과 부정함을 판단하던 율사들은
자신들이 내뱉은 말 때문에 도리어 부정하게 되고 말았다.
“정함”과 “부정함”에 대하여 예수께서 새롭게 세우신 규정은
남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이 볼 수 없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는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가장 먼저의 것은 말이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한마디의 말이라도 사랑과 깨끗함이 담긴 말이 되어야 하겠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기쁨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참에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에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지적 능력으로 아는 것이 있고,
진리나 진실처럼 지혜로 깨달아 아는 것이 있는데
제 생각에 깨닫는다는 말은 ‘깨다’와 ‘알다’가 합친 말입니다.
그러니까 1+1=2라는 것은
지적 능력만 있으면 되지 깨달아 알 것까지 없지만,
진리나 진실은 반드시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참과 거짓은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는데
거짓이 깨져야 참이 드러나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어리석음이 깨져야 지혜가 열리고 참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항상 자기가 어리석었고 바보였음을 깨닫고,
그래서 거짓을 참인 줄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마치 알이 깨지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자신이 크게 깨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처음부터 참만 알고 거짓은 아예 알지 못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리석음과 잘못된 앎이 있었기에
깨달음이란 새로운 앎도 나에게 있고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기뻐해야 합니까?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을 위해 앞서 슬픈 것이
솔로몬처럼 기쁘다가 나중에 슬퍼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처럼 젊어서는 어리석어 돈 많은 것이 행복인 줄 알다가
돈도 잃고 건강도 잃는 아픔과 슬픔을 겪게 되지만
그 덕에 늙어서 참 행복의 지혜를 깨달아 기쁘게 되는 것이 낫습니다.
내일 독서에서 보게 되듯이
솔로몬처럼 젊어서는 지혜롭게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 칭송받고 행복하다가
늘그막에 지혜의 눈이 멀어 슬프게 되는 것은 참 슬프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손이 깨끗한 것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이 더 낫다는 진리를 깨달으라고,
그래서 마음이 깨끗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진실한 생활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제 주일에 글을 올릴 수 없을 경우,
이메일로 글을 보내드리겠다고,
그러니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아주 많은 분이 이메일을 알려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카톡으로 보내달라고도 하시고,
어떤 분은 매일 보내달라고도 하시는데
저는 카톡을 할 줄 모르고,
매일 보내드리는 것은 너무 큰 수고가 필요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이점을 양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하느님 사랑이 가득합니다
창조된 존재들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로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어떤 경우는 더 좋은 선을 향하게 되고
어떤 경우는 더 악한 결과로 이끌게 됩니다.
솔로몬에게 다가온 스바여왕은
지혜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는 스바여왕을 바라보며
여왕이 가져온 금은보석을 노리고
누구는 정치적인 관계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지혜를 전해주었기에
스바여왕은 더욱 감동하였습니다.
이는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지금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따라서
어떤 때에는 천국이 되고
어떤 때에는 지옥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에 따라 다른 면이 보이고
내가 바라보는 희망에 따라 다르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옳습니다.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게 됩니다.
오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을 돌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세상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열매 맺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선 넘었다면서 선 밖에서 말하는 사람
김 찬미 수녀
오늘 복음에서 더럽다 나쁘다 악하다
하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저도 거북하다 나쁘다 진짜 나쁘다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때 특!
나는 다르다
나는 아니다 생각하며
거리를 두고 선을 긋습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에도 계속해서
나의 기준과 우리의 관습과 전통과
다르다고 논쟁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서로 멀어집니다.
이 와중에
예수님은 다시!! 가까이 부르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마르7,14)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과 다르면
갈라지고 서로 멀어지는 사람의 모습.
어쨌든 다시 가까이 부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지금의 내 모습과 예수님의 모습처럼
너무 보여서 부끄럽고 죄송한 복음 말씀입니다만,
벌레처럼 빛을 보면 숨고 싶은 나를 다시 가까이 부르셔서
(“들을 귀 있거든 들어라.” -마르7,16-)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이 가까이 계셔서 너무 다행이고 고맙습니다.
들은 사람답게
제 입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
사랑받은 사람답게
제 삶에서도 예수님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청해봅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