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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듣는다 = 순종하다 = 복종하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듣는다”라는 단어(샤마)에 귀로만 “듣는다”(hear)라는 뜻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다는 의미는 귀로 들어서 말씀에 따라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한자어로는 “순종” 또는 “복종”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그 말 그대로 행하는 것, 행동하는 것, 그것이 듣는다는 뜻입니다
“너 엄마 말 안 들어?”, “너 엄마 말 안 들어?”,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 아이는 이미 엄마 말을 귀로는 다 들었고 머리로는 다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 엄마 말 안 들어?”, 이것은 어떠한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왜 엄마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느냐?” 그런 뜻이 이 말에 있습니다. 듣는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뜻이고, 같은 의미로는 복종한다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말에 “복종하다”(obey), “순종하다”라는 뜻이 포함되었는데, “복종(服從)”이라는 한자어는 “의복(衣服)을 입고 좇는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자”라고 하시면 말을 잘 듣고서 옷을 입고 좇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명령을 그대로 따라서 좇는 것”이 복종입니다.
“순종(順從)”은 “순하게 좇는다”라는 뜻이며, 독(毒)하지 않은 것인데, “독”은 “건강이나 생명에 해가 되는 성분”인데 마음도 독하면 안 됩니다. 마음이 독하면, 손해(損害)를 보고 해(害)를 보고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마음이 독하면, 자기 자신을 해치게 되고 다른 사람들도 해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시면 안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고집대로 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겠으며 이것이 바로 “듣는다”, “복종하다”, “순종하다”가 뜻하는 바입니다.
아들이 둘이어도 소중하지만, 하나뿐이라면 얼마나 소중할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이 하나뿐이었고 그것도 100살에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을 바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그의 말씀에 복종한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는 명령은 가장 복종하기 힘든 명령이었는데, 아브라함은 가장 복종하기 힘든 명령에 복종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복종한 것입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seed) 안에서 복을 받게 되었으니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복종하였기(obey) 때문입니다(창 22:18).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 안에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고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 안에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2천 년이 지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자손은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1.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순종의 선조”입니다.
창세기 26장 4~5절에 “내가 너의 씨를 하늘의 별들과 같이 많게 하고 너의 씨에 이 땅들을 주고 너의 씨 안에 땅의 모든 민족이 복을 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였고(obeyed my voice) 나의 책무와 계명들과 법규들과 율법들을 지켰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님 안에 복을 받을 수 있으며 진짜 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 안에 있는 것 외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이삭을 번제로 올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한 까닭에(창 22:2), 그 결과로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그의 씨 안에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순종이라는 열매로 열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순종입니다.
믿음이 진위를 판별할 때 열매를 맺느냐의 여부로 알게 됩니다. 누군가의 삶에서 순종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순종의 열매가 맺히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믿음이 살아 있는 참믿음이며 순종의 열매가 없는 믿음 즉 행실(行實)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므로 순종하지 않는 죽은 믿음으로써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땅의 모든 민족이 이삭의 씨 안에(by)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유는 아브라함이 야훼의 음성에 들었으며(obeyed) 그의 책무와 계명들과 법규들과 율법들을 지킨 결과입니다(창 26:4~5). 그가 하나님의 율법들을 지켰으므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2. 파울은 믿음의 순종을 위해 사도의 신분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1장 5절에 “그를 통해 우리가 모든 민족에 믿음의 순종 안으로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신분을 받았노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5절의 “그”(whom)는 4절에 나온 “예수 크리스트”를 가리킨 대명사로, “그로 말미암아(Through)”는 “예수 크리스트를 통하여서”입니다.
예수 크리스트를 통하여 그는 받았습니다(received). 그를 통하여 그는 은혜와 사도의 신분(apostleship)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그는 은혜를 받았는데 사도의 신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받은 “은혜”는 “사도의 신분”이요 ‘사도의 신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시로 가는 파울에게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나셨고, 주 예수님께서 파울을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보내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5절 가운데에 보면 “믿음의 순종 안으로”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어 개역 성경에는 “믿어 순종케 하나니”로 번역되었습니다.
파울의 사도 직분의 목적은 “믿음의 순종”입니다.
“~ 안으로”라는 말은 “to bring about”, “for”, “to”라고 번역되었는데 신학이 어려운 이유는 단어 하나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 성경들이 같은 전치사를 번역하면서도 다르게 번역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일단은 “~을 위해(for)”라고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여 보이는데 “~을 위해”는 목표나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입니다.
“믿음의 순종”이 한국어 개역 성경에 “믿어 순종”이라고 번역되었으나 “믿음의 순종(obedience of faith)”이 더욱더 정확하고 바른 번역입니다.
한국어 성경은 이것을 “믿는다”와 “순종하다”라는 동사로 번역하지만, 원어 및 영어로는 “믿음”(faith)의 “순종”(obedience)이라는 명사입니다.
“순종”(휘파코에)은 “순종”, “복종”(obedience)을 의미합니다. “말을 듣는다”, “순종하다”라는 동사(휘파쿠오)에서 나왔으며, 누군가의 아래서(휘포) 듣는(아쿠오) 것이 곧 “순종”입니다. 70인역은 “듣는다”라는 히브리어(샤마)의 번역에 자주 씁니다(창 22: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결과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명예가 그들을 덮게 되었습니다(창 22:18, 렘 3:25). “순종”은 구약성경부터 반복적으로 강조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복종하지 않아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시면 안 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시면 안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고집대로 하는 일이 없어야만 하겠으며 이것이 바로 “듣는다”, “복종하다”, “순종하다”가 뜻하는 바입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창 3:17). 아담은 그의 아내의 말을 듣느라고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에서 빗나간 것이 “죄”입니다.
그 반대로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에 복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고 맹세하셨습니다(창 22:16-17).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씨(seed) 안에서 복을 받게 되었으니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복종하였기(obey) 때문입니다(창 22:18).
그 바람들과 바다조차 예수님께 말을 듣고 복종하게 됩니다(마 8:27). 더러운 영들(spirits)조차 예수님께 말을 듣고 복종하였습니다(막 1:27). 자연들과 더러운 영들(spirits)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왕이신 예수님께 거역하고 반역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그 제사장들의 많은 군중도 그 믿음에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행 6:7). 이전의 삶과 달리 예수님께 말을 듣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나의 인생의 왕으로 살았음을 회개하고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해결과 인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땅의 모든 민족이 그의 씨(seed) 안에서 복을 줌을 받았나니,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obey) 결과입니다(창 22:18, 창 26:5).
“믿음의 순종”은 믿음이 산출하는 순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믿음을 가져오는 순종이나 믿음의 결과인 순종을 뜻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순종”은 ‘믿음으로 구성된 순종’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중심 원리로 삼는 순종’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믿음 자체는 순종이며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임을 뜻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기가 생각한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의미하는 궁극적인 요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죄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는 삶을 영위하지 아니할 때, 여러분은 술주정뱅이나 간음한 자나 도둑질한 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사람의 원죄는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것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고,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던 것이 원죄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것이면, “의”는 듣는 것입니다. “죄”가 “불순종”이면, “의”는 “순종”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머리로 인정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 의미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파울은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멸망과 심판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믿어야 하는 이유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나 건강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믿음”과 “순종”을 반대 개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문에서 확인되듯이 “믿음”과 “순종”은 밀접하게 연결된 용어들입니다.
이것은 믿는다고 말하는 입술의 고백만으로 참믿음이 성립될 수 없고, “순종”이 있어야 참믿음이라는 것을 암시하여 줍니다(요 3:36).
파울이 “순종”이라는 말을 쓰는 것의 반이 로마서에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서가 “믿음”만이 아니라 “순종”을 강조하고 있음을 증명하며 “오직 믿음”만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면 로마서를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파울은 로마서에 처음부터 “믿음의 순종”에 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순종 없는 믿음이 가능한 것인지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믿음의 순종”이라고 하였는데, “of”는 동격(同格)을 뜻하기도 합니다. 사도 파울은 “믿음의 순종”을 위해(for) 사도 신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나의 주로 믿어야 합니다.
죄는 불순종인 반면 믿음은 순종이며 죄와 믿음은 반대되는 뜻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말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복 받기 위해서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예전에는 이러한 식의 전도가 통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어떻습니까? ‘나는 예수 안 믿고 교회 안 다녀도 너보다 잘 살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복 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철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죄를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예수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에서 “~의”는 보충적인 해설이거나 동격의 표현입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순종”이든지 “믿음”이기도 한 “순종”입니다.
“순종”이 따르지 아니하는 “믿음”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복음을 믿는 것은 사실상 “믿음의 순종”을 뜻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없고 “순종”이 없는 “믿음”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의탁과 복종의 전체 개념을 드러냅니다. 믿는다고 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언제나 “순종”입니다.
그냥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구원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는 “지정의(知情意)”라는 인격 전체가 함께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지적으로 동의할 뿐만 아니라 의지적인 순종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가지 않겠다고 대답하였어도 그 후에 뉘우치고 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가지 않겠다는 것이 잘못임을 알았으니 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는 가지 않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그냥 말만 바꾸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믿음의 순종”은 “믿음의 순종”으로 크리스트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순종”은 “순종”과 “믿음” 양쪽을 이해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데 참된 믿음은 주이신 예수님께 “믿음의 순종”으로 무릎 꿇는 것입니다.
“순종”은 늘 “믿음”을 포함하고 “믿음”은 늘 “순종”을 포함합니다.
“믿음의 순종”은 “순종으로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든지 예수님에 대한 순종을 동반합니다.
“믿음의 순종”은 “순종하는 믿음”으로, “믿음”과 “순종”은 같습니다. 로마서의 “믿음”은 곧 “순종”이요 “믿지 않음”은 곧 “불순종”입니다.
처음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크리스트께 순종할 것을 결단하는 것이며, 계속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크리스트께 계속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순종”이라는 말에 내포되는 있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예수 크리스트를 믿겠다고 말할 때 이런 순종의 결단이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예수 크리스트를 “주”로 받아들인 참된 신자가 아닙니다.
파울은 예수 크리스트를 통하여 모든 이방인 안에 믿음의 순종을 위해 사도 신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롬 1:5).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주권(lordship)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주(Lord)로 인정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그를 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주(主)로 인정한다는 의미는 그의 주권(主權)에 순종하는 것이며 입으로만 “주여”라고 부른다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니 입으로만 “주여”라고 부를 때 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 7:21). 참되 믿음은 순종이 동반되며, 순종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즉, 순종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크리스트께서는 그를 주로 인정하는 사람들만의 구주십니다.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구주가 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는 “믿음의 순종”을 말씀하며 “오직 믿음”만을 말씀하지 않는데 루터 이후 로마서는 “오직 믿음”만을 말씀하는 것으로 착각되곤 합니다.
파울의 전도는 청중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하나님의 메시지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이 순종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주권에 순종한다는 것을 뜻하며, 파울은 “믿음의 순종”이라는 말로 바로 이런 뜻을 의도하였을 것입니다.
“믿음의 순종”을 처음에 믿음을 받아들일 때로만 제한할 수 없는 것은 파울이 그들의 믿음의 순종을 위해 사도의 직분을 받은 모든 이방인에는 이미 믿음을 받아들였고 부름을 받은 “너희”도 포함되어 있는데(롬 1:6), 파울은 믿지 아니하는 이방인들 안에만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이미 믿는 자들인 “너희” 안에도 믿음의 순종을 위해 사도직을 받았으며 믿음의 시제는 회심한 때에 믿는다고 고백한 때 완성된 과거형이 아니며 현재 믿고 순종의 삶 속에 머물러 있는 “현재진행형”입니다(롬 1:16).
“믿는다”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쓰였습니다(요 1:12).
우리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믿음의 순종으로 복종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신앙고백으로 완성되지 아니하였으며 지금 현재 믿고 있는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렇다면 “믿음”과 관련되는 “칭의” 역시 과거에 믿는다고 고백한 때에 완성되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도 잘못일 것입니다. “믿음”이 현재 믿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면 믿음과 관련된 “칭의”도 현재진행형이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과거에 완성된 것이고 믿음에 의한 “칭의”도 과거에 완성된 것이라면, 성경의 여러 곳에 나오는 배반의 위험에 대한 말씀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포함해 배반에 대한 경고 구절들에 근거해 생각할 때, “믿음”은 과거에 말씀을 기쁨으로 받은 것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며(마 13:20), 지금 현재 믿고 있으며 끝까지 믿음에 머물러 있어야만 합니다. 성경의 종말론이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있듯이, “믿음”과 “칭의”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칭의”의 근거가 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저는 로마서 서두의 “믿음의 순종”(롬 1:5)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믿음”을 “순종”과 연관시킵니다. 믿음은 순종이며, 칭의는 순종으로 입증됩니다.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나 인격 속에 따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는 성화의 열매가 맺힙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칭의”는 “행위”와 무관하고 “믿음”과 관련되나, “믿음”은 “순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칭의만이 있고 성화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위로 상급 받는다고 복음을 오해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많은 목회자가 믿음과 행위를 이원화시켜 가르친 데에 있습니다. 행위가 없어도 믿기 때문에 상급은 못 받으나 구원은 받는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가 이렇게 복음을 오해한 까닭에 두려움 없이 비윤리적으로 살며 또 교인들에게도 이렇게 가르침으로써 한국 교회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원화는 이신칭의의 진리를 오해한 것에서 나온 것이며,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파울은 다른 이방인 중에서처럼 열매를 맺게 하려 한 것이며(롬 1:13), 이 열매는 개종의 열매라기보다 그 믿음 안에 전진의 열매를 말하며, 이 열매는 이미 개종한 자들에게 기대한 열매입니다.
파울은 이미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세상에 전파되는(롬 1:8)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원하였습니다(롬 1:15).
이것은 이미 믿는 자들에게 전파하는 것이기에 전도하는 전파가 아닌, 교회를 강화하기 위한 전파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회심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로 굳은 믿음에 서게 한다는 뜻입니다.
파울은 신자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발생시키고자 추구하였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처음에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에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믿은 자들도 삶에서 “믿음의 순종”으로 계속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왕명에 복종하는 신하로서, 주이신 예수님의 명에 복종하는 종으로서 항상 “믿음의 순종”의 삶을 사는 복된 구원영생교회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Moo, 『NICNT 로마서』, 91, n. 66.
2)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69.
3)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0.
4)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1.
5)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1.
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2.
7)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2.
8)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2.
9)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3-174.
10)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5.
11) Moo, 『NICNT 로마서』, 91, n. 67.
12) 백대영, 『로마서의 이신칭의와 믿음의 순종 이해』 (석사학위 논문, 백석대학교대학원, 2016), 12.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bbc0488aa7081221ffe0bdc3ef48d419&keyword=%EB%AF%BF%EC%9D%8C%EC%9D%98%20%EC%88%9C%EC%A2%85
13) Joseph A. Fitzmyer, 『앵커바이블 로마서』, 앵커바이블 성경주석, 김병모 옮김 (서울: CLC, 2015), 334.
14) John Piper, 『복음과 하나님의 의』, 주지현 옮김 (서울: 좋은 씨앗, 2014), 75.
15) Tom Holland, 『로마서 주석』, 최성호․정지영 옮김 (서울: CLC, 2016), 86.
16)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7.
17) Lloyd-Jones, 『로마서 강해 7』, 178-180.
18) Christopher Ash, 『티칭 로마서』, 전의우 옮김 (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18), 61-62.
19)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52. 『NICNT 로마서』, 93.
20) Fitzmyer, 『앵커바이블 로마서』, 334.
21) 최갑종, 『로마서 듣기』 (서울: 도서출판 대서, 2009), 117.
22) 장흥길, 『로마서』, 한국장로교총회창립 100주년기념 표준주석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38.
23) Anthony A. Hoekema, 『개혁주의 구원론』, 류호준 역 (서울: CLC, 1993), 39.
24) C. E. B.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Volume 1, Romans 1-8 (New York: T&T Clark Ltd, 2004), 66.
25) 현재분사 “pisteuvonti”를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현재(believes)로 번역하며 YLT는 현재진행형(is believing)으로 번역하였다.
26) 요 1:12의 “믿는”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를 ASV, NASB, KJV는 “believe”로, RSV, NIV는 “believed”로, YLT은 “believing”으로 번역한다. 필자는 현재나 현재진행형으로 번역한 것을 옳다고 본다.
27) Ash, 『티칭 로마서』, 59.
28) “uJpakohv pivstew"”라는 헬라어 문구를 한글 개역은 “믿어 순종”으로 번역하고, 공동번역은 “믿고 복종”으로 번역하였다. 논자는 이것을 이 논문에 “믿음의 순종”으로 직역하겠다.
29) 김정훈,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 『Pro Ecclesia』 제3권 제1호 (2004): 41.
30) 권성수, 『로마서 강해 로마서 1-8장』 (서울: 도서출판 횃불, 1995), 112. 이 책에 권성수는 순종과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상급 심판”이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에게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위로 상급 받는다고 복음을 오해하게 할 수 있다.
31) 약 2:24의 “믿음으로만”은 야고보서가 로마서 이후에 기록되었음을 보여준다. Ralph P. Martin, 『야고보서』, WBC 성경주석 48, 홍찬혁 옮김 (서울: 솔로몬, 2001), 89.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노라”라고 주장한 파울의 복음을 사람들이 오해하여서 야고보는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라고 주장한 것이다.
32) Glenn N. Davies, FAITH and OBEDIENCE in ROMANS: A Study in Romans 1-4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0), 27.
33) Johannes Munck, Paul and the salvation of mankin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59), 298. Davies, Faith and Obedience in Romans: A Study in Romans 1-4 (Sheffield Academic Press, 1990), 27에서 재인용.
34) 이한수,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137.
35) Garlington, Faith, Obedience and Perseverance,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