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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 위에 뛰어나리니
강남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한 고등학생이 뛰어내렸습니다.
그가 엄마에게 남긴 유서는 단 네 마디, “이젠 됐어?” 였습니다.
그 학생은 외고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올렸던 우수한 학생이었습니다.
엄마로부터 그러다간 경쟁에서 뒤쳐지고 살아남을 수 없다고 학업에 내몰렸습니다.
엄마의 원대로 뛰어난 성적을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뛰어내렸습니다.
“이제 됐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눈길을 끄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사 2:4)
정말 이런 날이 올까요?
정말 꿈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될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오히려 농민들의 보습과 낫을 모아 군인들의 칼과 창을 만들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개인의 삶을 보아도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에서 이기자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조차도 부부가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가장 날선 검을 준비해 경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아들을 독려했던 그 엄마와 그 아들은,
그렇게 열심히 만든 검으로 스스로를 가장 아프게 찌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왜 이 땅에 온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온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보낸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누군가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경쟁일까요?
정말 삶은 경쟁이며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는 것일까요?
칼과 창을 녹여 농사짓는 보습과 낫으로 만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일까요?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누가 그랬습니까?
사탄이 아담과 이브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창 3:5)
바로 이 사탄의 말에서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경쟁.
거기에 돌입하자,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은 ‘뼈중의 뼈’인 이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버립니다.
드디어 너 죽고 나 살자는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후 사람들은 죄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사탄이 원하는 바입니다.
사탄에게 휘둘리며 살아갈 때 두 마음이 생깁니다.
첫째, “나는 내 마음대로 할거야.”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교만이고 방종이며, 무례입니다.
사탄에게 조정 당하며, 죄에게 휘둘리며 사는 전형적인 태도입니다.
둘째는 빛의 자녀라 하면서 여전히 옛 방식대로, 세상방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울을 속이고 약한 자들을 교묘히 억압하며,
여전히 서로 불신하며 눈치를 보며, 속마음을 숨기고, 세를 모으고 분열을 조장하며,
남을 조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마저 움직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
하나님의 성전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너는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상치 않게 하리라는 사탄의 최종 유혹입니다.
가장 나쁜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삶은 경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겠다는 생각 자체를 버리셔야 합니다.
그 생각 자체가 파괴의 영 사탄의 교묘한 간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둘러봐라, 경쟁 아닌 곳이 있는가,
경쟁 하지 말라는 말은 경쟁에서 지라는 말이냐?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보다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누고 누리고 이끌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배워서 남 주냐?”는 말이 있습니다.
네, 배워서 남을 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살고 행복해집니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합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사 2:2)
동유럽은 오랜 동안 소련의 지배를 받으며 공산국가로 살았습니다.
당시 동유럽 국민들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억압적인 체제 밑에서
숨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습니다.
공산 정부는 국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군사 독재 체제 아래서 그런 공포감을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사태가 이 정도니 반정부 인사들은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극비리에 만났고, 암호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을 해도 발각되어 동료들이 잡혀갔고, 그래서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이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찾겠다는 비밀 활동으로 인해
오히려 그 자유와 존엄성을 잃게 되고 불안과 공포는 가중되며,
이것이 바로 공산정권이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전략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단합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는 터놓고 공중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실명으로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였고, 심지어는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명기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심한 고문과 문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자유로운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행동에 옮겼습니다.
개방적인 사회를 원하면, 이미 그런 민주 개방 사회가 온 것처럼 행동하였습니다.
어떤 결과, 어떤 처벌이 나오든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정직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현상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공산 정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은 점점 더 담대하게 진리와 정의를 말하고 행동하였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지만,
자유와 정의는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확산되어,
마침내 동유럽에서 그 막강하던 모든 공산 정권이 자체 붕괴되어 버렸습니다.
동유럽에서 발원한 자유의 기운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세계 곳곳으로 확산되어 억압당하는 반독재 지식인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리처드 스틸은 남아프리카 감옥에서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데서 오는 힘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향하여 악쓰며 명령하고 있을 때, 나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위협과 폭력으로 나를 깔아뭉개려는 동안,
나는 그들 훨씬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동원하여 나를 위협하였지만 결코 자기들 손아귀에 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자유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나를 어찌할 힘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체제나 이념보다도 존엄하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사람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어떤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미리 산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존재도 없던 자유와 존엄성의 산이 권력과 억압의 산을 무너뜨리며 우뚝 서버린 것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그 새로운 길을 보여 준 것입니다.
‘말일’ 곧 ‘마지막 날’이라는 뜻입니다.
또 지구 종말의 날을 연상하셔서는 안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말세’, ‘말일’,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 등을
지구 종말의 날로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생각했다간 이단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말일, 즉 마지막 날이란,
내 뜻대로만 행하던 것과 서로 이기기 위해 경쟁하던 것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던 것이
끝나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방법이 무용하게 되는 날, 역시 하나님의 방법이 옳았음을 알게 되는 날입니다.
바로 그 날 여호와의 산이 우뚝 서서 모든 산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뭘까요?
흔히 전도 봉사 헌금 기도와 말씀공부에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종교행위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종교행위로 복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은 무서운 폭군으로, 목사는 빨간 모자 쓴 교관으로,
교인들은 진흙 밭을 빡빡 기는 훈련병으로, 이 아름다운 세상은 살벌한 전투장으로 전락합니다.
자, 이사야 선지자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道)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여호와 산에 오르자,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하나님의 도를 배우자.
“어라, 교회에서 성경공부 열심히 하자는 말이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저 교회당에 가득 모아놓고 종교 행위에 몰두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길로 행하자”입니다.
“지고한 묵종”(supreme acquiescence)이란 것이 있습니다.
‘묵종’, 토를 달지 않고 말없이 무조건 따른다는 뜻입니다.
‘지고한 묵종’이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무조건 따르겠으며 그 어떤 이의도 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백 세 때 얻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니,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 아들을 죽여 불에 태워 바치라뇨?” 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짐을 꾸리고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모리아 산까지는 삼일 밤낮의 긴 여정.
길을 가는 동안 이삭이 묻습니다.
“왜 하나님께 바칠 제물은 가지고 가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아브라함의 마음을 통렬하게 찌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 길을 갑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 돌로 제단을 쌓고 나무를 모아 제단 위에 쌓습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을 줄로 꽁꽁 묶고, 그 나무 위에 눕힙니다.
당황해하는 이삭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의 눈을 차마 볼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높이 쳐들어 아들의 가슴을 겨눕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이 이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약속으로 끝납니다.
지고한 묵종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독자獨子라도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한 그 마음만이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을 누리며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행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세’asah인데, ‘행하고 듣다’는 뜻입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듣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듣기도 전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약속으로
신앙이 지식에 선행함을 밝히는 말입니다.
27살 임윤아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선천성 대사 효소 결핍증(페닐케톤뇨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습니다.
뇌세포가 점점 손상되어 발달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으로
손을 움직여 반복적인 작업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 15시간 이상 그림을 그립니다.
그 결과 그녀만의 독창적인 아름다운 미술세계를 창조했습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내 몸이 유난히 떨리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날개가 돋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8-9)
매일 하나님의 도를 배웁니다.
지고한 묵종으로 행하기로 합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마저 박차고 높은 창공으로 오를 영혼의 날개가 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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