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화는 스크린샷이 날라가버리고 오토세이브 파일 로드해서 다시 찍은거라
양과 질에서 많이 떨어집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5년 간의 휴전 기간이 끝났다.
그 동안 시암은 국내 발전에 힘을 쏟으며 주변 국가에 시비를 걸어 지역 맹주로서의 위치를 재확인시켰다.
그러나 빼앗긴 섬에도 봄은 오는가, 이를 갈며 군사를 기르고 있던 일본은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시암에 선전포고하였다.
일본은 의기양양하게 십만 대군을 끌고 세토 내해로 진격해왔다.
그러나 이 원숭이들은 지난 전쟁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시암군은 5만에도 못미치는 병력밖에 없는데다 국제 시장에서 밀려 보급도 여의치 않았지만
시암 해군과 저번 전쟁의 두 영웅 제독은 굳건히 바다를 지켜내었고
일본군은 단 한명도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도리어 급습해온 시암의 2만 병력에 밀려 시코쿠(모리오카 지역 섬) 지방을 빼앗기고 패퇴하였다.
그러나 국제 시장에서 양털조차 구하지 못해, 병사들은 보급도 제대로 못받고 전선에 내몰렸다.
그 결과 일본군와 전면으로 맞붙으면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은 도망치기에 바빠 백전백패.
이에 라마 3세는 시암 본토 주둔군 만오천을 동원하여 주변 국가를 침공하였다.
위신을 쌓아 국제시장에서 구매 우선권을 쥐기 위함이었다.
또, 양털이나 소총 등의 실수요가 가끔씩 공급보다 적어짐을 확인하고, 적자가 나더라도 구매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재고를 많이 쌓아놓을 것을 지시하였다.
대왕의 조치로 오랜만에 보급 걱정 없이 싸울 수 있게 된 시암군은 다시 제대로 된 전투에 나섰다.
해군이 해상봉쇄를 풀어 적 육군을 유인하면 아군은 압도적 수와 우수한 전략으로 적을 격파하고
그 사이에 다시 해군이 해상을 봉쇄하여 적의 응원군 및 도주를 방지하는 전략이었다.
일본군은 초기 십만대군으로 공격해왔으나 시암 측에서 해상전략으로 나오자, 시암 육군을 얕본 것인지 추가 병력은 뽑지 않았다.
시암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십만대군은 금새 만명으로 줄어들었고, 시암의 5만 대군은 드디어 세토 내해를 건너 본토 결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만명과 수도 에도를 지키던 오천 병사는 한껏 기세오른 시암 군 앞에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전 병력이 몰살당하고 대책없이 국토가 유린당하는 것을 지켜봐야하는 처지에 놓였다.
비록 천황의 호소에 '덴노 헤이까 반자이! 본토결전으로 서양 코쟁이 귀신시암군 몰아내자!'를 외치며 이곳저곳에서 봉기하여 몇번인가 시암군을 물리치기도 했지만
시암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하자 이내 전부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가끔 일본 막부의 지배력이 남아있는 지역에서는 급조된 군대가 출몰하여 시암군을 공격하려 들기도 했지만
전투 경험이 풍부한 시암군에게 접근조차 못하고 패퇴하기 일쑤였다.
한편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국민의 개혁 요구는 거세지고
대왕 스스로도 서구 국가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시암의 정체(政體)를 개혁해야함을 실감하고 있었기에
프러시아의 모델을 본받아 국정 권한의 일부를 귀족원에 양도하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국왕임을 각인시키고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귀족들을 동원하여 루아 프라방을 침공하였다.
단 한 개의 여단도 갖고 있지 않던 루아 프라방은 한번 저항도 못하고 전 국토를 점령당했고
전쟁의 세도 가늠치 못하고 무조건 평화를 외치던 국왕은 라마 대왕 앞에 이르러 아홉번 절하고 세번 머리를 찧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장기화되는 대일전에 의문을 품고 있던 국민들에게 바다 건너가 아닌 본토에서의 승리는 확신을 가져다주었고
국민들은 대왕의 화려한 개선 행렬을 보며 환호하였다.
이윽고 대일전도 종말을 맞았다.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점령당했음에도 무의미하게 본토결전을 외쳐댔었지만 아닌건 아닌걸 미련일뿐.
강화조약 조문을 두고 대신들 간에 의견이 갈렸다.
금이 매장되있는 오사카-고베 지역을 할양받아야한다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었지만,
간지판도를 위해 츄코쿠와 시코쿠(오카야마 지역)를 할양 받아야한다는 의견, 산업화에 대비하여 철이 풍부하게 나는 도호쿠(아오모리 지역)을 받자는 의견, 인구가 풍부한 나고야 일대를 할양받아 일본의 재기를 막고 국력을 키워야한다는 의견 등 많은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산업화 전에 식자율을 높이자는 의견이 승리, 나고야와 오사카 할양을 조건으로 휴전 조약을 맺었다.
긴 전쟁과 높은 세금 그리고 막대한 부채(원래 3~4만 됬었음)로 시암과 국민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나 할양받은 오사카 지역에서 시암 국내 전체 수입 2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이 나왔고
이 막대한 수입을 기반으로 시암은 빠르게 부채를 청산, 또 다시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어 전쟁 때문에 높은 세금에 시달리던 국민들을 위해 모든 세금을 탕감해주려 했으나 보수집권층의 반대로 무산되고
전 인민에 대한 1/3세와 관세 철폐를 조항으로 하는 타협안을 발표하였으니
이 또한 위대한 대왕의 덕이라 칭송하는 농부들의 노래가 끊이질 않았다.
바야흐로 큰 평화의 새 시대가 도래한 듯 하였다.
그러나 아직 시암에 위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끊임없이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영국이 있었다.
이에 대왕은 영국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인도 방면에 북로군정서, 말레이 반도의 5만 영국군을 막기 위해 남로군정서를 설치하고 육해군 보강을 명하였다.
일본을 털어먹으며 중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2대 맹주로 거듭나려는 시암과
동남아시아의 패권을 해체하여 대영제국의 이름 아래 복속시키려는 영국
말레이반도를 회복하려는 시암과 시암을 정벌하고 싶은 영국
어느 쪽의 인내심이 먼저 다할지, 누가 먼저 선전포고할지의 문제만이 남았을 뿐, 이 전쟁은 기정 사실이다.
It's Time to Fight!!!
첫댓글 오오 다음 편 기대만빵 +_+ 입니다!!
하지만... 다음 편이 올라올 수 있을까요'ㅁ'?
영국 뭔 수로 이기지 ㅠㅠ
말머리도 웁니다 뿌우
달았습니다
이겨라 뿌우~ 뿌우~ 뿌우~
감사합니다 ^^
영국 뭔수로 이김...
프랑스도 쳐바르는 군사력 가지고도 영국하고는 싸울 엄두가 잘 안남.. 실 역사상 이상으로 해군이 깡패고.. 툭하면 증기 구축함 백몇대 끌고와서 시위하는..
GG 쳤습니다.
영국군 방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습니다.
영국의 드랍물량은 1회당 3만정도 인데 이 물량을 보병 10연대씩 2~3개 포병 10연대 1개로 보병전열이 무너지면 포병을 빼고 다른 보병대를 투입한후 포병 재투입을 하는 차륜전을 벌이면 드랍물량은 쉽게 전멸합니다.
오히려 드랍하는 건 프랑스가 더 무지막지하더라고요.
그런데 시암이라면 영국령 인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
빅2에선 땅 거래 안되나요?
太人輩//시기에 따라 다른데.. 영국령인도는 초반에 병력이 많지 않더군요.
한줄기의_섬광//네
그리고 시암 인도랑 안 붙어 있습니다. 버마가 막고 있죠.
근데 버마가 영국 스피어라서 통과권 그냥 줌미다... 동맹맺어도 잉여잉여-ㅁ-;;
영국 의 대드립 ㄷㄷ
영국 개객끼 내 20년 플레이를 말아먹다니
문명화하면 저국기도 멋일어질지 기대중임
안생겨요 ㅇㅇ
국기가 아니라 국기 밖의 틀이 바뀌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