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잘 처리하는 여성을 또순이라고 불렀다. 또순이는 1962년에 발표된 KBS 라디오 드라마 《행복의 탄생》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던 집안에 첫딸 ‘순이’에 이어 둘째도 딸이 태어나자 ‘또 순이냐?’하던 한탄이 이름으로 굳어져 또순이가 되었다는 설정이다. 드라마는 또순이가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사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지만, 여전히 검소하고 쾌활하게 살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드라마 《행복의 탄생》에서 주인공 또순이가 인기를 끌자 이듬해 박상호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때는 제목을 아예 《또순이》로 바꾸었다.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도금봉‧최남현‧정애란‧이대엽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출연하여 흥행에도 성공했다.
몇 년 전 가수 김흥국이 TV 연예오락 프로에 출연하여 기러기 아빠의 대명사로 시청자들의 동정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 기러기 아빠란 좋은 교육기회를 찾아 아이들과 아내를 외국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국내에 남아 돈을 벌어 보내는 가장을 이르는 말이다. 김흥국 외에도 유독 연예인 가운데 기러기 아빠가 많다. 내 고등학교 동기 중에도 아내와 두 딸을 미국으로 보낸 기러기 아빠가 있었는데, 1990년대에 매달 2천만 원씩 보내야 한다며 의사인데도 불구하고 매우 힘겨워했었다. 그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그는 결국 폐암에 걸려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떴다. 그런 희생을 감수해가면서라도 자녀를 꼭 외국으로 보낼 필요가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기러기 아빠의 어원은 1969년에 전파를 탄 라디오 드라마 《기러기 아빠》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드라마보다는 이미자가 부른 주제가 <기러기 아빠>(김중희 작사. 박춘석 작곡)가 더 생명력이 길었다. 드라마는 요즘 의미와 달리 돈을 벌기 위해 외국으로 떠난 아빠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아빠는 어디 갔나 / 어디서 살고 있나 / 아아아 아~아아~아 / 우리는 외로운 형제 / 길 잃은 기러기’라는 가사가 드라마의 내용을 집약하고 있다. <기러기 아빠>는 <동백 아가씨><섬마을 선생님>과 함께 이미자의 3대 히트곡이었다. 세 곡 모두 군사정권의 잣대에 의해 금지곡으로 묶였다가 1988년에야 해금되었다. 지난 5월 초 이미자가 25억 원을 탈세했다는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는데, 탈세가 혹 3대 히트곡이 장기간 금지곡으로 묶여 손해를 본 데 대한 보상심리에서 온 것은 아닐까?
인기 여배우 남정임‧문희‧윤정희 트로이카가 1960년대 후반의 스크린을 장악했다면,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는 단연 최은희(1926년생)와 김지미(1940년생)가 쌍벽을 이루며 스크린을 주도했다. 그 가운데서도 최은희의 인기가 단연 최고였다. 미모로 따지자면 한국 영화사상 김지미를 능가할 배우가 없지만 대중은 일편단심 최은희 편이었다. 김지미의 아름다움은 서구적이었고 최은희는 한국적이었는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중들은 한국적 미인상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기 위해 나이도 네 살이나 어린 것으로 속이는 등 영화계에서는 그녀를 두고 뒷담화가 무성했었다.
《로맨스 빠빠》에서 조연으로 데뷔한 최은희는 《쌀》《이 생명 다하도록》《상록수》 등에서 주연급으로 성장하더니, 신상옥이 감독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벙어리 삼용》《열녀문》《강화도령》 등 출연작마다 공전의 히트를 쳤다. 최은희는 1948년 촬영기사 김학송과 결혼했는데, 6‧25전쟁 중인 1950년 남편이 포탄을 맞아 한쪽 다리를 잃는 불구가 되자 1954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 중 배가 맞았던 신상옥 감독과 딴살림을 차렸다. 김학송은 두 사람을 간통죄로 고소했다가 이내 취하했다. 넉넉한 합의금이 오갔다는 설이 있었다. 김지미와 최은희의 대결은 《춘향전》에서 결정적으로 판가름 났다. 김지미는 《춘향전》 참패로 홍성기 감독과 이혼했고, 최은희는 《성춘향》의 대박으로 신상옥 감독과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김지미의 참패 요인을 요부 이미지 고착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1961년 김지미는 잇달아 《장희빈》과 《양귀비》에서 타이틀 롤을 맡아 인기를 끌었는데, 이때 요부 이미지가 고착되는 바람에 권선징악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대중들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배우로서는 최은희에게 참패했지만 현실에서는 당대 최고 미녀 평가에 변함이 없었으니, 최무룡‧나훈아 등 영화계와 가요계를 대표하는 최고 스타도 그녀의 매력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던 것이다. 김지미는 언젠가 TV에 출연하여 나훈아와 결혼하게 된 이유를 ‘차 안에서 정분이 났기 때문’이라고 해명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은 육체적인 갈증을 달래기 위해 결혼한 이 나라 카섹스계의 원조였던 것이다. ‘한국의 리즈 테일러’로 불리는 김지미는 겨우 네 번 결혼했다가 네 번 이혼했으며, 총 7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1991년에는 의사 이종구와 결혼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여장부’ 김지미가 배우자로 원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 같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김지미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아 우리나라 영화산업 발전과 원로 배우들의 복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며칠 전인 6월 29일에는 그녀의 영화 데뷔 6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영화인협회가 주관하는 <매혹의 배우, 김지미> 특별전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서 일시 귀국했다. 김지미는 1957년 열여덟 살의 나이로 명동에 나갔다가 김기영 감독에게 ‘길거리 캐스팅’되어 《황혼열차》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와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올해로 영화인생이 어언 환갑을 맞은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저리 예쁠 수가 있을까?’ - 김기영 감독은 영화 촬영 내내 스텝들에게 이 말을 계속했다고 한다. <매혹의 배우, 김지미> 특별전은 오는 7월 12일까지 상암동에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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