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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9일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열왕 11,29-32; 12,19
복 음 : 마르 7,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34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이제까지 했던 선택 중에 가장 잘한 것을 제게 꼽으라고 한다면,
자신 있게 사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신학생 때 다른 길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는
이 사제의 길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돈, 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학창 시절 때의 친구들을 만나면, 세상일이 너무 힘들다고 합니다.
힘들다면서도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니 계속해서 힘들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자신의 책 ‘맹자’에서 군자삼락, 즉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합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천하의 왕 노릇은 포함되지 않는다.
부모 형제가 모두 살아 계시고 무탈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그리고 천하의 영재를 얻어 이들을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천하의 왕 노릇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
저는 이 군자삼락을 거의 가진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지만, 우리 신앙 안에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신 것이니 주님 안에서 무탈하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아
그래도 100%는 아니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미사 강론과 강의를 통해 교육하고 있으니 이 역시 큰 즐거움입니다.
계속해서 이 군자삼락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권세를 쥐는 것이 즐거움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충실한 삶 안에서만 진짜 행복이 나오게 됩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행복도 세상의 성공과 권세에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어떤 사람이 함께했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당시에 힘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소외되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던 병자나 마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시는 주님을 오늘 복음에서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실 때,
당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이용해서 말씀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지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보이는 사랑처럼 하십니다.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을 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치유를 위한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나요?
진정한 행복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에파타!(열려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조건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닫혀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우리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 (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 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 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저희 귀에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저의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소서.
오늘 제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시고,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서는 나와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의 서북쪽 해안 지역,
즉 티로와 시돈을 훑으신 다음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베이스캠프 격인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목터로 돌아오자마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를 청하십니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저도 청력이 조금씩 약화되어 가니,
청각장애인이 겪는 고통과 그들의 심정을 아주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심하지는 않으니 그냥 마음 편히 가시고 살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순순히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청각 장애와 함께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언어장애입니다.
잘 안 들리다 보니 말수도 줄어들고, 결국 말도 어눌하게 되고 더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안 들리고 말을 잘못하는 것, 어쩔 수 없지, 다른 불치병보다는 괜찮지,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 겪는 고통은 만만치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소통이 안 되니 거기서 느끼는 소외감과 막막함,
사회로부터의 단절감과 고립감은 그를 엄청난 외로움으로 몰고 갑니다.
이런 중복 장애인을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르르 단체로가 아니라 주님과 나 단둘이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요 구세주이신 하느님께서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마련하시고
나를 특별히 대우하시고 배려하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그 옛날 그 중복 장애인은 예수님과의 일대일 만남,
그것 하나만으로도 벌써 몸과 마음의 치유가 시작되었습니다. 더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굳이 접촉하지 않으셔도 말씀 한마디로, 눈빛 한 번으로 치유가 가능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그토록 크신 하느님,
지고지순하신 하느님께서 하찮은 우리 인간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당신의 존귀하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집어넣으십니다.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환자 입장에서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을 것입니다.
입에서는 감사의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권능으로 가득 찬 한마디 말씀으로 그를 자유롭게 해 주십니다.
“에파타!”
오늘도 주님께서는 여기저기 막히고 단절되어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에게
힘주어 능력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열려라!”
열려라 - 에파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다시 갈릴래아로 가시자마자 귀먹은 반벙어리를 만나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주 친절하시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신다.
귀먹은 반벙어리를 따로 불러 친절하게 손가락을 귀에 넣으시고 그의 혀를 만지셨다.
그리고 그 불구를 완치시켜 주는 은혜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에파타!” 곧 “열려라!”(34절) 하신 것이다.
그는 혀가 풀리고 귀의 닫힌 문이 열렸다.
성령은 “하느님의 손가락”(루카 11,20)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에 넣으시어,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그 사람의 마음을 믿음을 향해 열어주셨다.
그분이 귀를 만지신 것은 그의 귀가 막혔기 때문이고,
입을 만지신 것은 그가 말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파타!”, 즉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입과 귀도 열어주시기를 청하자.
주님께서는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해 주셨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진리를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리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거룩한 복음을 듣지 않고 행할 바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말 못 하는 청각장애인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능력은 말 못 하는 사람을 제 혀로 다시 말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단순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이 능력 안에는
미래의 일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예전에는 천상의 것에 대해 무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지식과 지혜의 진리를 깨달아
하느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절) 감탄하였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 백성들이 감탄했듯이
오늘의 우리도 다른 이들이 우리의 믿음의 행실을 보고
“참으로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우리와 같이 신앙을 갖기를 원하게끔
우리의 행위를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고쳐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조금씩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그분의 속삭임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할 때,
묶여있던 혀가 풀려 올바로 주님을 찬미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꾸준한 노력의 결실로 나에게 돌아오는 결과일 수 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야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면 그는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관해 말할 수 없다면 그는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현존을 깨닫기도 전에
나를 사랑하시고 먼저 생각하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로마10.17).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으로 귀를 열어주시고 말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하고 지위도 있으며 세상 것에 해박하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둔한 사람들이 있다면 들을 귀가 없는 그는 귀먹은 사람이요,
입이 있어도 주님을 전하는 일에 사용하지 못한다면 말 못 하는 이입니다.
그런 우리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길 청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엘리사벳 자매는 청각장애인입니다.
그분의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놀라시겠지만 ‘음악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육체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지금도 서예를 가르치고 수필을 쓰며 장애인을 위한 활동을 열심히 하시고
말씀도 얼마나 이쁘게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는 육체적인 귀는 닫혔지만, 영적인 귀와 입이 열려 있으십니다.
내면의 귀가 열리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우리도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따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말씀으로 끝날 수 있음에도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자신을 가두어 놓은 주위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것입니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발라 혀에 대는 행동으로
당신의 관심과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셨듯이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하여 이웃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꼭 안아주는 포옹으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그의 손길에 담았습니다.
말보다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혀에 대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단정치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늘 혼자 외롭게 지냈던 그에게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셨다고 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하였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개로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루카9,16).을 베풀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떤 처지나 환경 안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3,2).
성경은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 뵐 것이다”(신명4,29).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귀를 열어주시고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는 주님을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이 말씀에 열리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위로와 구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 한껏 네 입을 벌려 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 주리라”(시편80,11).
사람들이 우리의 변화된 삶을 보고,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하고
놀라워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에파타, 제발 열려라 열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방인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은 참으로 모범적이었다.
반면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 구원의 현주소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스스로가 이를 거부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 구원을 간절히 원하고 애를 끓는 심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보내실 구원과 메시아는 그들을 넘고 비켜서
이방인과 온 세상을 향하여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 서두에 띠로를 떠나신 예수님은
북쪽으로 약 36km 더 떨어진 항구도시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거쳐 다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 오셨다고 한다.
어디 예수님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이 이렇게 단 한마디로 요약될 그런 사안이겠는가?
예수께서 띠로에서 시돈으로 가셨고, 시돈에서 데카폴리스 지방으로 가시자면
골란과 베타네아 지방을 거쳐 남쪽으로 가셨을 것이고,
데카폴리스에서 다시 갈릴래아 호수까지 오셨다면
이 長程은 아무리 짧아도 150km 정도의 먼 길이다.
예수께서 대장정의 이방인 선교여행 끝에 도달한 곳은 다시 갈릴래아 호수였다.
추측컨대, 이곳은 갈릴래아 호수 동편 골란 지방과 데카폴리스 지방의 접경지역이었을 것이고,
일찍이 ‘부대’라는 마귀를 쫓아내고 돼지들이 떼죽음 당하게 했던
게라사(게르게사) 마을(5,1-20) 근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 넓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시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두말할 필요 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가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그 효과 역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그리 탐탁치가 않았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께서 시로페니키아 여인과 같은 믿음을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보실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귀먹은 반 벙어리’의 치유는
단순한 치유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벙어리(dumbness)란 음성언어를 소리낼 수 없는 사람인데,
음성언어를 소리낼 수 있는 능력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고,
이전에는 말을 할 수 있었으나 어떤 원인으로 그 능력을 상실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聾啞인데,
농아는 귀가 먹어 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언어를 익히지 못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께 데려와 치유를 청하는 귀먹은 반벙어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귀먹은 반벙어리는 곧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듣는다고 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자들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사람들,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속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외치신다.
“에파타!” ‘열려라’는 뜻이다.
에파타! 열려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향해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토록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다.
‘에파타’는 비단 오늘 복음에만 해당 되는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온 세상을 향한 간절한 소망으로서 ‘지금 여기에’만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과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통용될 말씀이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들음과 말함’을 찾았다고는 하나,
‘들음과 말함’이 예수님의 뜻과 부합되지 않을 때는 언제고 緘口令이 내린다.
들어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엄한 함구령 다음에는 또 다른 효과가 있기는 하다.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37절)라는 사람들의 경탄은 지극히 당연하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기뻐 뛰고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는(이사 35,5-6) 현실은 메시아 시대의 표징들이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특별한 사랑이 필요합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유명한 에파타 기적을 행하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에파타’를 우리가 세례 때도 재현합니다.
세례로 이제부터는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가 열리고,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입이 열리라는 뜻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의 행위가 다른 때와 같지 않습니다.
다른 때는 주님의 행위가 이렇게 은밀하지 않은데
오늘은 주님께서 귀와 입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다른 때는 그저 말씀 한마디로 치유해주시는데
오늘은 여러 행위와 직접 손을 대시며 치유해주십니다.
어떻게 보면 과장된 제스츄어의 연출 같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신 걸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신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더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랑을 하신 것이고,
그에게 필요한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쉽게 열리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꼭 이렇게 해야만 열리는 사람이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사람.
귀와 입만 닫힌 사람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마음의 문까지 굳게 닫힌 사람일 것입니다.
사실 귀와 입의 장애는 능력의 주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고치실 수 있고 그런 예는 성경에 수도 없이 많지 않습니까?
창세기에서는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백인대장은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거라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찾아가지 않으시고 한 말씀으로 치유하셨잖습니까?
그러나 오랜 장애로 그의 마음은 정말 굳게 닫혀있었고,
그래서 이 마음의 장애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치유하셔야 했을 겁니다.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한다.
너만 미워한 것이 아니다.
너만 미워해서 너의 귀와 입을 닫히게 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너만 고통을 많이 당했다고 생각하니
지금 이렇게 너만 특별히 사랑할게.
이런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말을 행위에 담아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고,
이런 특별한 사랑이 그의 마음에 닿아 귀와 눈과 함께 마음도 열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사랑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까?
이런 특별한 사랑이 아직도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아직도 필요하다면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완고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그렇다면 곧 사순 시기가 다가오는데
마음이 아직 사순 시기인 우리는 이런 말씀을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예수님께서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셨다.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이에게 벌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가 그동안 쌓아왔던 공덕도 기억해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언제나 살아날 길을 알려주면서도
동시에 죄를 뉘우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공정과 정의의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지은 죄를 벌하면서도
지파를 남겨 주십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보다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모르는 이에게도
언제나 구원이 열려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직,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어도
하느님께서는 다가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교인들 지역을 지나던 예수님은
당신께 데려온 이를 따로 데리고 가시어
귀와 혀가 열리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알지 못해도 그분께 찾아온 이들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대목입니다.
절실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이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그분을 모르고 떠난 이들에게도 언제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을 사랑을 희망하고
우리의 부족함보다 더 큰 하느님의 자비를 희망합니다.
그러니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께 청하며
오늘 주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구원을 맞이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열려라!
김 메리 그레이스 수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어떤 일을 보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
우리는 어릴 때 교육의 효과도 있지만
훌륭한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
악하고 못된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것과
훌륭한 것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천지 차이다.
우리 안에는 이미 훌륭하고 선한 것을 지향하려는
마음이 심겨져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았을 때
그것을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훌륭한 일"이라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있다.
만약 내 마음이 지금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무엇이든 아무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지나가고 있다면
무엇을 지향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되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 마음이 어디에 묶여있는지, 어둠 속에 묶여있다면
그 깊은 곳에 있는 빛 한줄기는 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될 것이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