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왔나!'
지금도 귀에 선한 그 목소리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의 말이다.
가끔 인사동에 있는 찻집 귀천에 들르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경북 상주가 고향인 목 여사는 바로 옆동네 안동이 고향인 나를 보고
아예 고향 동생 취급을 하셨다.
나는 천상병과 목여사를 선배님, 누님 했다.
천상병 시인은 서울 상대 재학시절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자 4학년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
당시, 지금도 그렇지만, 그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날개를 달 수 있었지만
시인은 배가 고파야 한다며 등록을 포기한 것이다.
천상병과 목여사가 만난 것은 목여사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친오빠가 천상병 시인과 대학 동기여서
서울에 왔다가 명동 돌채 다방에서 함께 만나 아는 사이가 되었다.
1967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서울상대 학생 강빈구 등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천상병도 여기에 걸려들었다.
이유는 강빈구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돈도 빌렸다는 혐의였다.
그 돈이 '공작금'의 일부가 아니냐는 닥달이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목여사는 1주일에 두 번씩 빠짐없이 면회를 갔다.
천상병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아 거의 패인이 되어 출소했다.
그 총명하던 재주도 언어도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부산 출신의 김종해 시인이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했다.
거의 사회활동을 못하게 된 천상병을 보호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은
목여사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것이 목여사에게는 일생의 형극이 되었다.
두 사람은 수락산 자락 단칸방에 신방을 차렸다.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천상병의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신문 잡지에 짜투리 글을 가끔 쓰기는 했지만 그걸로 생활이 될 리 없었다.
목여사는 수를 놓아 팔아서 근근이 생활을 했다.
덥친격으로 천상병 시인의 정신병이 재발하여 병원비까지 목여사를 얽어맸다.
그러던 중 천상병의 친구 강태열 시인이 목여사에게 3백 만 원을 건넸다.
당시로서는 제법 큰 돈이었다.
무언가 먹고 살 궁리를 하라는 말이었다.
목여사는 그 돈으로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을 차렸다.
6평짜리 콧구멍 가게였다.
목여사는 의정부에서 차를 3번씩 갈아타고 인사동으로 출근했다.
여기서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히자면,
천상병 시인은 그 당시 이미 시(詩)를 쓸 정도로 정신이 맑지 못했다.
천 시인의 후반기 시들은 천상병의 낙서같은 글들을 목여사가 시(詩)로 쓴 것들이었다.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보다 열살은 늙어보였던 여사였다.
참...
고생도 많이 한 분...
천상병 시인은 '나 하늘나라로 돌아가거든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고 하고선
눈을 감았다.
천상병 시인이 죽자 부의금이 7백 만원 들어왔다.
갑자기 큰 몫돈을 본 목여사는 보관할 장소를 몰라 하다가
신문지에 싸서 재래식 부엌 재속에 묻어 두었다.
장례라도 끝나면 은행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친척들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바람에 연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천상병 시인의 천국 노자돈이라고 말했다.
그 목순옥 여사가 어제 타계했다는 소식이다.
비교적 가까이에서 여사를 지켜본 사람으로 할 말을 잊는다.
천국에서나마 고된 날개 접으시고 편히 쉬시기를 빌 뿐이다.
'니 왔나!'
하면서 반기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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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올리신 서경님이 당사자인가요?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천상병 시인도 거의 매일 귀천에 나왔지요. 하루 막걸리 한 병이 시인에게 할당된 몫이었답니다. 그 이상은 목여사가 '노!'. 가끔 찾아오는 기인 3인방인 이외수, 걸레스님으로 알려진 중광이나 옛 친구들이라도 오면 옛날로 돌아가 마셨지요. 그러나 정신을 놓으면 하던 말을 자꾸만 반복할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었답니다. 그 남편을 하늘같이 받들던 목여사의 부음에 명복을 빌 따름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편하게 지내실 겁니다...잘?
저는 천상병 시인의 '귀천'과 '새'를 제 즐겨찾기에 올려놓고 매일 한두차례 읽고 갑니다. 혼자의 생각이긴 합니다만 金裕貞 시인을 능가하는 분이라 믿고 흠모하고 존경합니다. 그런 분과 交遊하신 서경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척 궁금합니다.
아, ㅎㅎ...저도 글쟁이입니다...제 블로그 오시면 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관심에 감사드리고요...http://blog.naver.com/brandia21
그런 관계이셨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에고...오늘 왜 그런지 몰것네요. 방금 번역작가인 이윤기 씨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뜨네요. 이런~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탁월한 글쟁이였는데...역시 명복을 빕니다!
서경님, 제가 앞으로도 이 글을 쉽게 검색해 볼수 있도록 글 제목에 '천상병'을 넣어 주실수 없을까요. 예를 들면 '니왔나 - 천상병' 처럼요. 이글을 두고 두고 읽고 싶습니다. 저는 이완수입니다. 018-220-8935.
무얼 원하시는지 잘? 암튼 한 번 시도해 볼께요...
안타 깝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쓰시는 별 하나가 또 떨어젔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좋은곳에 가셔서
근심걱정 심름일랑 모두 날려 버리소서.
감사드립니다...어제 남이섬 나들이 나오실 줄 알았는데...언제 함 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아까운 사람들이 갑자기 떠나네요...
천상병 검색하면 1번이 니왔나로 뜹니다. 감사합니다.
아, 성공했군요...감사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님도 건강과 행운 함께 하시는 가을 맞으셔요!
안타갑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대구. 경북 방에 이글을 좀 모시고 갑니다 , 양해 주십시요.
네, 물론입니다...
평생을 책과함께한 사람으로 목여사님 번역가 이윤기님 두 분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영면하세요...
그러게 말입니다...이윤기의 영어실력과 언어능력은 탁월했었는데...
수락산 오르는 초입길을 개량하면서 천상병 시인의 시를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렇지요, 신접살림 차리던 곳에...
잘 알지못한 분들이지만 뒤편에서 보필해주는 아내야 말로 장본인이 있게하는 근본이라 여겨집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드립니다...
순박하고 착하게만 보이던 얼굴과 긴생머리 그분이 가셨다구요 넘 슬프네요 존경하던 분이 차를 주문하면 한대접되는양으로 넉넉하게 주시던 ....짠한 마음으로 그분을 떠올리며 고인이 명복을 빌겠습니다
오늘 컴을 열람해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리 오빠의 글을 읽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오네요.
시인 중, 천상병 시인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천 시인님이 타계했을 때 정말 친지가 떠난듯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인사동 뒷골목안 골방같은 귀천에 들려 님의 흔적을 보는 것으로 슬픔을 삭이고, 나중 조금 더 안쪽으로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옯겼을 때에도 가서 조용히 차 한잔 마시며 묵묵히 있다가 온적도 있었지요. 인사동 간지도 한 참 되었는데 이제 귀천도 없어지는지?
고생만 하시고,천국에서 천시인님 만나 행복한 사랑만 하소서.. 명복을 빕니다..
펴낸 곳 문학세계사, 정규웅 저 <글동네에서 생긴 일> 본문 중, 천상병 이야기 보다 멋진 서경님 이야기가 더 세세합니다. 동백림 사건으로 중정에서 "전기 아이롱으로 와이셔츠 다려지 듯 나의 육신은 다려졌다" 라는 글귀가 너무 잔혹스럽더니..... 목여사님 명복을 빕니다. 소풍 가시 듯 가시옵소서.....
삼가 고인의명복을빕니다 언젠가 친구한테 목여사님이 우리학교(상주여고) 선배님이라는 얘길들었었는데... 수락산 갔다가 천상병시인의 애기같은 모습의 동상을 보고 마음이 찹찹해지던 생각이 납니다 끝도없는 고통의 뒷바라지의 댓가가 잡지에 한두번 사진올라오는게 전부였던 여사님.이젠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천상병 시인을 뵈온적은 없지만,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어린아이 같이 되신 상황이나 이세상에 왔다감을 소풍에 비유하신 순수 하심이 늘 마음에 있었지요. 몇년전 친구와 함께 인사동에 가서 목여사님의 귀천카페에 들른적이 있습니다. 정말 너무도 작은 가게였어요. 일생을 희생으로 사신 천사와같으신 여사님.....좋은곳으로 가소서......
가끔씩 들러보던 귀천.. 천상병 시인님의 분신이 가셨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일본에서 태어난 천상병 시인은 귀국해서 저의 고향인 마산에 정착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를 마산사람으로 여기고 있답니다. 물론 서울대 입학 후엔 서울사람이 되었지만요. '동백림을 거점으로한 간첩단 사건' 국제적으로 비난 받은 그 사건은 결국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모든이들이 석방이되어 이응로는 파리로 윤이상은 베를린으로 돌아가죠. 그후 그들은 북엔 가도 죽을때까지 남한엔 않왔습니다. 지금은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 '윤이상 국제음악제'를 하고있지만요. 천상병. 막걸리에 밥을 말아먹던 어린애같은 시인. 대한민국 최초의 '유고집'을 생전에 남겼던 시인. 그의 명복을 빕니다.
뵈온적은 없지만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등학교시절 국어교과서에 실린 현대시에서 "귀천"을 처음 대했지요. 순수한 시어의 나열에 반해서 좋아했던 시인이었지요. 간간히 지면으로 두분의 근항을 들었지만 참 안타깝습니다. 이젠 정말 두분다 소풍을 끝내고 귀천에 드셨네요. 서경님의 이야기 에서 더 자세한 사연을 읽고 갑니다. 행복하다 라고 읊던 시귀처럼 두분 천상에서 행복하기를 빕니다.
티비에서 본것이 몇년되었네요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고히 잠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