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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0일 토요일 설
제1독서 : 민수 6,22-27
제2독서 : 야고 4,13-15
복 음 : 루카 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음력 1월 1일로, 조상님을 기억하면서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어떤 분은 “또 한 살 더 먹는구나.”라면서 슬퍼할지 모르겠지만,
그 모두를 뛰어넘어서 또 새해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더불어 나를 이 세상에 존재케 해주신 조상님들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해인 오늘 새해 인사를 나누면서 덕담을 나누는데,
과연 주님께서는 어떤 덕담을 우리에게 전해주실까요?
책을 읽다가 미국에서 15년 동안 인류학을 가르친
어느 대학교수의 인상 깊은 체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학교수는 자신이 가르치는 요즘의 대학생들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발표도 거의 하지 않고, 책도 미리 읽어오지 않고,
교수를 만나러 오지도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창 시절과 다른 학생들의 이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수 생활을 한 지 7년 만에 맞이하는 안식년에 할 획기적인 결심을 세웁니다.
다시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새내기 대학생이 된 교수님’은 1년 동안 기숙사에 살면서
강의를 듣고 과외활동하는 등 여느 대학생들과 똑같이 지냈습니다.
어떠했을까요? 교수 때는 학생들이 수업 준비를 제대로 안 해 온다고 생각했는데,
학생 입장이 되어 보니 여러 과목에서 동시에 내주는 자료를 다 읽을 시간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학생들은 시간 관리를 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짜 알게 되면 더는 그를 증오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제는 진짜 알지 못하면서 퍼붓는 혐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혐오와 대립과 갈등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닐까요?
앞선 교수처럼 역할을 바꿔서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는 데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요?
분명히 상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될 것이고,
이런 헤아림에서부터 사랑이 울려 퍼지는 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시작은 바로 ‘나’부터였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복음을 통해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덕담을 전해주십니다.
어떤 준비이겠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그 준비는 바로 사랑의 실천에만 있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함께 살 수 있는 사랑을 해야지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세상에 펼칠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올해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하는 ‘나’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보면 어떨까요?
축복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있습니다.
사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 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 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축복을 빌어주는 이른바 ‘축복기도’는 아주 간단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할 때, 이미 자기 자신이 변한 것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그 상대를 축복해 주는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자신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서 그를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이 소박한 우리의 ‘축복기도’는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립니다.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 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단지 잠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임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리워하는 임을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임이 나를 이미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 임이 날 그리워하는 희망 안에 제가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묘지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한 형제와 작별하러 공원묘지에 갔을 때입니다.
하관 작업과 추모를 마치고 시간이 좀 있길래 묘원 사이를 거닐었습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거기 누워계시는 한분 한분을 위해 기도해 드렸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과 세례명, 생몰연대를 쭉 읽어나가는데,
100년도 훨씬 전인 1900년대 초반에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불과 사흘 전에 묻힌 분도 계셨습니다.
백수를 누리고 돌아가신 분이 있는가 하면 꽃다운 20대 초반 나이에 돌아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제 개인적으로 은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짧은 하루 피정 같았습니다.
공동묘지는 우리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생명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 존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묵상하도록 초대합니다.
설날을 맞아 교회 전례 독서는 우리를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의 죽음을 헤아려 보며, 우리의 근원, 우리의 처지,
우리의 목숨이 대체 무엇인지도 성찰케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명과
목숨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 목숨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칩니다.
이런 우리에게 야고보서는 얄짤 없습니다.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기대수명을 너무 길게 잡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만해도 기대수명이 84세인데, 처음에는 한국인 평균은 되는구나 했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왜 94가 아니고 84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의 큰 착각은 우리가 아주 길게, 영원히, 적어도 백 살은 살겠지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루카 복음사가 역시 칼같이 짜릅니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준비하고 있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 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 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 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 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 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 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고 건강 하시길 기원하며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길 빕니다.
아울러 오늘 ‘통, 통, 통, 통’ 4가지 복을 선물로 받으시길 기도 드립니다.
1. 의사소통, 2. 운수대통, 3. 만사형통, 4. 쓰레기통입니다.
1.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기를 빕니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과 통해야 하고, 이웃과 소통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과 잘 통하려면 상대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상대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들어주려고 할 때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소통의 일차적 수단은 언어입니다.
고운 말, 바른말, 따뜻한 말을 사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일상 안에서 마음에 잘 담아놓아야 합니다.
친밀감 있는 언어를 사용할 때 벽을 무너뜨리고 잘 통하게 됩니다.
통하면 생명이 주어지고, 막히면 죽음이 드리웁니다. 혈관도, 바람도 통해야 합니다.
2. 운수 대통입니다.
운수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천운입니다.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에 하느님 전지전능의 은총으로
하는 일마다 크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되리라는 믿음 안에 지내시길 기도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하느님께 의탁하는 우리의 삶에 그분께서 넘치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활짝 열어주시고 항상 동행하십니다.
3. 만사형통입니다.
모든 일이 형통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욕심으로 내 뜻을 이루려고 하면 시끄러워집니다. 관계가 어려워집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뜻이 무엇일까?를 찾는 가운데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되라”(시편1,2-3).
주님께서 강복하셔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잘 되길 바랍니다.
4. 쓰레기통입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걸맞은 삶을 살아가시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소중한 사람,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주고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명절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 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116,12).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고,
도움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축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른에게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 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 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치레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6,38).“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한결같이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설 명절입니다.
음력을 사용하던 옛날에는 오늘이 새해의 첫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해가 바뀐 것은 1월 1일입니다.
二重 과세를 하자고 있는 오늘의 설 명절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겨레는 설 명절에 조상들에게 茶禮를 올립니다.
가톨릭 신자라서 차례를 올리지 않는 이들도 미사를 봉헌하며,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고 함께 기도합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은 우리 곁을 떠나가셨지만,
우리의 삶 안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십니다.
그분들과의 인연이 있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습니다.
그분들은 떠나가셨지만, 우리는 그분들과의 어떤 연대성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분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분들과 맺었던 우리의 인연이 소중하고, 은혜롭게 기억되는 그만큼,
우리는 오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면서
그분들과의 소중한 인연들을 마음에 다시 새깁니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의 어른들을 생각하면,
그분들로부터 우리 안에 흐르는 사랑과 헌신의 삶을 다시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분들도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고, 힘든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분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고 섬기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어가는 것은, 그분들이 살고 가신
‘사랑과 섬김’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과 섬김’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오늘 다시 바라봅니다.
그것이 설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유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라.’고 말합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세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등불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빛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종과 같은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은 힘 있는 사람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종은 자기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우리 위주로 행동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이루는 중요한 일들이 많습니다.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자기 위주로 살지 않아서 자녀가 성장하고,
자녀가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웁니다.
노쇠한 부모를 모시는 자녀도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습니다.
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또한 그러합니다.
예술가의 작품활동도 그렇고, 우리가 하는 공부나 노동도
그것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에 전념 헌신해서 성취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높이 평가하는 중요한 일들은 모두 우리 위주로 편하게 살아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잊고, 헌신하여 이루어 낸 일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헌신과 섬김을 실천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도 당신이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높이거나 誇示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마르 8,11)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예수님은 한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과시하는 일은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단순히 실천하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敵意나 그 사회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도 그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이켜서 당신이 잘 되는 길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부능로 처신하면서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그대들의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행한 대로 그대들도 행하도록 나는 본을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서」(13,14-15)의 말씀입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 것은
그분의 섬김을 우리가 배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섬김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그 선하심과 자비를 실천하는 몸짓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흩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살 듯이,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도 세상 곳곳에 다양한 모습으로 실천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각자 ‘허리에 띠를 띠고’ 복음의 ‘등불을 밝히고’ 나서야 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가신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그분들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 안에 살아있게 하겠다고 마음 다짐하는 것은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겠다는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분이라, 부모들은 역경을 딛고도, 자녀를 사랑하며 키웠습니다.
그리고 자녀된 사람들은 노쇠한 부모들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스승들은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쳤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원하였던, 혹은 원치 않았던,
모두 선하고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정성과 사랑을 은혜로운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의 흐름에 우리가 합류하는 일입니다.
부모님과 집안의 어른들이 실천하신 선과 자비는
하느님을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들을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다.
그분들이 실천한 은혜로움이 있어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살아계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실천으로 하느님이 세상 안에 살아계시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체면치레나 허세도 아니고, 독선도 아닙니다.
허리에 띠를 띤 종이라는 말은 체면치레나 허세를 찾는 인간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집안의 어른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헌신적으로 살겠다고 마음 다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고 넘쳐흐르게 하겠다는 마음 다짐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행복의 근원으로부터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설 명절은 우리가 우리의 시원을 깊이 성찰하는 날입니다.
시원(始原)이란 우리의 시작과 근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존재와 삶이 어떤 근원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보고,
우리의 존재와 삶이 시작된 근원이 어디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그리고 나의 행복의 근원은 어디인지,
하느님이 나의 행복의 근원인지 불행의 근원인지 돌아보는 날입니다.
사실 지금 내가 불행하다면 욥처럼 자기가 태어날 날을 저주하고,
자기를 배었던 어미의 태를 저주하고
마찬가지로 자기를 생겨나게 하신 하느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기의 모든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내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내가 왜 이렇게 행복한지,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지,
누가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돌아보고 감사할 것입니다.
시원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근원으로부터 찾지 않고 자기 혼자 기를 썼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불교는 행복도 불행도 자기 업보라고 얘기하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비롯하여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행복의 근원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행복합니다.
오늘 민수기의 모세는 그래서 이렇게 백성에게 권고합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와 생명이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했다면
한 해의 시작과 하루의 시작도 그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내게만 복 주시기를 빌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데 있는 사람까지 하느님께서 복 주시기를 빌 것입니다.
사실 자기 행복만을 위해 비는 사람은 자기 행복에 급급한 사람이고
그러기에 자기도 행복하기 어렵거나 겨우 자기만 행복할 것이고,
멀리 있는 사람까지 복을 빌어주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이 크고 넘칠 것입니다.
저의 올해 목표도 복음 전파이고 행복 전파입니다.
같이 사는 공동체 형제에게 눈 뜨자마자 미사 드리면서 행복을 빌고,
우리 식당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행복을 빌어주겠습니다.
음식 맛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지 않고
사랑에 끌려 우리 식당에 오고
오면 행복해지니까 우리 식당에 오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창피한 계획이지만,
올해는 복을 빌어주지 못할망정 저주는 비록 작은 저주일지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작은 저주란 염병할 놈이나 벼락 맞아 죽을 놈이라고 욕하는 것처럼
누가 진짜 불행해지기를 바라고 욕하는 그런 큰 저주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저 자주 정치인들을 보고 빌어먹을 놈들이라고 작은 저주를 퍼붓고,
자기밖에 모르는 얌체 족속들에게 못된 놈이라고 지나가는 욕을 퍼붓는 것인데
비록 그런 작은 저주와 지나가는 욕일지라도 올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올해 새해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셔서 부디 자신도 행복하고,
그 행복을 이웃과 나눠 이웃도 행복하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빕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이승화 시몬 신부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합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정을 나누는 시간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를 이야기 나누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이 날은
우리가 전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신정이 생긴 후에
여러 번 구정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음력 1월 1일이라는 전통을 지키며
우리가 같은 민족이며 한 가족임을 기억하기 위해서
오늘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인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우리의 삶은 저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안에서 한 믿음을 고백하고
같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자세
바로 거룩한 전통을 이어받으며 신앙을 전해주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상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며
지금 함께하고 있는 가족이
서로 운명 공동체임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누구에게만 책임을 넘기는 것이 아닌
서로 함께 독려하면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그런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덕담과 함께 격려를 합니다.
서로가 나누는 정 안에서
사랑이 꽃필 수 있기를 기원하는 날
서로가 맺은 결실을 통해 함께 나누며 나아가길 청하는 날
이날을 통해 함께 하는 시간에 의미를 담고
함께 나아갈 길에 희망을 품을 수 있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함을 기억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깨어 기다림
김 빈첸시아 수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깨어 있는 종들이 있다면 이와 반대로 깨어 있지 않은 상태는 어떨까요?
주인이 문을 두드릴 때,
바로 듣지도 열지도 못할 것이며
주인을 반겨 맞아들일 수 없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봤을 때
생각과 마음을 두드리며 부르시는
성령의 소리에 우리는 얼마나 깨어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느님과의 만남, 관계가 시작됩니다.
잠든 영혼은 자기 자신과도 만날 수 없고
삶의 방향감도 잃어갑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의식하고
하느님과 자주 만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