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급히 베낭을 싼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자정에 있는 백무동 행 버스를 타기 위해서이다.
이번 산행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지난 1월 서북능 팔랑치에서 비박하면서 두고 온 바람막이를 찾기 위해서이다.
밤사이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눈 속에 있는 바람막이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출발한것이다.
두고 왔다는 걸 집에 와서야 알았다 ㅡㅡ;
바람막이야 또 사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큰일을 보고 뒤를 닦지 않은것 같이 찜찜한 기분이 계속 남아있기도 했고
더 큰 이유는.... 옛날 남자친구가 준 것이라 왠지 미안한 마음에 꼭 다시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모두다 산에 가기 위한 핑계)
새벽 3시 반.
버스는 만원이였지만, 구인월에서 내리는 이는 나 혼자이다.
터미널 옆 편의점에서 주전부리 간식을 사고,
아무도 없는 구인월마을회관으로 침입(?)한다.
오??? 바닥이 뜨끈뜨끈 하다!!!!!
원래 채비만 하고 출발할 생각이였는데
그 유혹을 참지 못해 벌러덩 누워 등을 지지기 시작한다.
'하하하 ^0^ 이거 찜질방이 따로 없군'
무아지경, 비몽사몽으로 30분 정도 등을 지지다가
오늘 노고단까지 가야한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벌떡 일어나 등산화를 신는다.
어휴 대책없기는.... 난 이게 문제다 ㅡ,.ㅡ
등산로 초입을 찾아 마을을 지나가는데 왈왈왈 왈왈~~~
동네 개들이 짖고 난리가 났다. 예민한 놈들 ㅡㅡ+
'짜식들아. 조용히 좀 해. 아휴. 동네 어르신들 다 깨시겠네'
덕두산을 향하는 길.... 오랜만에 하는 야간산행이라 그런지 헤드랜턴 불빛이 어색하다.
으악~~~ 쿵쿵 쿵쿵쿵쿵쿵!!!!!!!!
얼어있는 흙바닥이 진동을 한다.
멧돼지 떼 ㅜ.ㅜ
멧돼지들은 그 뒤로도 2번이나 나를 놀래켰다.
휴.... 간이 쪼그라 붙을거 같다.
30분 정도 걸었을 무렵.... 갑자기 길이 끊긴다 ㅡ,.ㅡ
지난 1월 와봤던 길이라고 자신있게 올랐는데.... 이럴수가~
다시 빽!!!!!!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
어디서부터인가 멧돼지들이 내놓은 길로 온 것 같다 ㅡ.ㅜ
야간산행이라 감도 잘 안잡히고. 평소 눈에 거슬리던 리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눈이 다 녹고나니 여기도 길 같고... 저기도 길 같고....
이리로 저리로 몇번을 왔다갔다 하니 진땀이 난다.
이러다가 해 뜰때까지 해멜거 같아서 그냥 잡목을 헤치고 오르기로 한다.
짐승 산행. !@$@#$!
한참을 잡목과 씨름하다 겨우 능선을 찾아서 올라선다.
덕분에 덕두산 오르는데 3시간이 걸렸다.
예쁜 해가 뜬다. 하하 ^^;;;;;
이거 이래서 오늘내로 노고단까지 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진다.
'오늘 고리봉에서 하산해야겠다'
비박색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당일산행으로 계획이 급 수정된다.
동행자가 있어 속도를 맞춰야하는 것도 아니고, 노고단 가면 누가 칭찬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늘 안가면 다음에 가면 되지 뭐....
다만 바리바리 싸들고 온 침낭과 메트리스가 무색해질 뿐....
혼자 다니면 좋은 점도 많다.
먹고 싶을 때 먹고, 낮잠 자고 싶을 때 자고, 혼자 이런저런 생각도 하고, 혼자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 사람을 만나면 왠지 반갑고....
(사실 그래서 혼자 다니는건 아니다. 게으른 데다가 대책 없는 나를 데리고 다니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 ㅠ.ㅠ)
바래봉에 도착해서 여유있게 누룽지를 끓여먹고 다시 출발.
눈앞에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길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눈은 다 녹았고, 일부 구간은 얼어서 빙판 수준.
얼어 있는 눈 위로 흙과 낙엽이 살포시 덮여 있어 무심코 디디면 미끄덩 >.<
3 번이나 넘어질 뻔 했다.
팔랑치 도착.
나무 계단에다 베낭을 내려놓고 나의 바람막이를 찾아 샛길로 내려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흐흑~ 세상에!!!!!
바람막이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다시는 널 버리지 않을께 ㅠ.ㅠ'
감동의 재회를 마치고 바람막이를 안고 다시 팔랑치로 올라선다.
기분이 좋다~
누굴 만나면 '나 바람막이 찾았어요~' 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데
지나가는 이 하나 없다.
겨울의 외로운 서북능.....
부운치로 가는 길
목적지가 변경되어 여유가 생기니
나의 나쁜 습관 '토끼 산행' 이 또 시작된다.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 에 나오는 토끼처럼.... 나는 종종 낮잠을 잔다.
버스에서 앉은 채로 졸며 내려왔는데 낮잠도 한숨 못자고 하루종일 걷기는 싫다.
고리봉에서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찍 하산해도 할 일도 없고~
워낙에 노고단에 가서 쓰여야 할 메트리스는 순식간에 낮잠용(?)으로 전락하고 만다.
날씨가 따뜻하다. 그러고 보니 입춘도 지났네.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누워있으니 덮을 것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따뜻하다.
눈이 부셔서 지도로 얼굴을 가리고 낮잠을 잔다. 이런게 행복이겠지.
내 모습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뭐라 해야하나?
광합성? 자외선 살균 소독?
낮잠 자며 포동포동 살을 찌우고 있는 아기 돼지 한마리?
부운치를 지나 세동치 가는길....
지난 1월 러셀을 하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짠하다.
'맞아. 이 자리에서는 아무리 눈을 헤쳐도 제자리 걸음이였어 ㅡ.ㅜ'
이렇게 편한 길을 그때는 치를 떨면서 그렇게 힘들게 갔었는데....
세걸산에 오르니 사람들이 있다. 남원우체국 산악회라고 한다.
오전 내내 혼자 걷다가 사람들을 만나니 반갑다.
"혼자 다니면 안무서워요?"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난 항상 그렇 듯 "무서워요" 라고 대답한다.
아이젠은 가져왔냐며 아저씨들이 걱정해주신다. ㅎㅎㅎ
이바구를 좀 떨다가, 진행방향이 반대라서 다시 홀로 걷기 시작.
이제부터는 처음 가보는 길. 새로운 길은 항상 설레인다.
날이 흐려 시야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따뜻해서 걷기에는 좋았다.
오후가 되니 얼어있던 눈이 녹아 길이 질척질척 ㅡ.ㅡ
고리봉 가는 길.
정말로 봄이 오긴 왔나보다. 봄이라 그런가 왜이리 졸린지...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깔고 또 낮잠을 자기 시작한다.
풍류산행.
칼바람을 각오하고 왔는데
칼바람이 아닌 살랑살랑 봄바람을 맞다니, 뜻밖의 호사를 누리는 듯 기분이 묘하다.
자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3시반.
'어? 고리봉 삼거리까지 해지기 전에 가려면 서둘러야겠네'
너무 늦장을 부렸나보다.
허겁지겁 고리봉을 향해 걷는다. 이럴 땐 자동으로 속도가 붙는다.
(난 항상 이런 식이다 ㅡ,.ㅡ 이러니까 아무도 안데리고 다니지)
고리봉에 도착하니 4시반.
까마귀 대여섯 마리가 고리봉을 주변을 떠나지 않고 맴도네.
머릿속에 '조장' 이란 단어가 떠오르며 갑자기 오싹해진다. 워이 워이~ 가까이 오지마!! 녀석들아 ㅡ,.ㅡ
고리봉 삼거리로 하산하는 길.... 가파르다.
날이 다시 추워져 녹았던 눈이 다시 얼어 빙판이 되면서
미끄러져 굴렀다 ㅡ.ㅡ
본 사람 아무도 없는데 쪽팔린 이유는 뭘까?
나에겐 왜 김연아 같은 운동신경이 없을까. 괜찮아. 나에겐 굵고 튼튼한 다리가 있잖아 ㅡ.ㅜ
툭툭 털고 일어나..... 아이젠으로 얼음을 팍팍 ㅡ.ㅡ 찍어가면서 내려간다.
쳇... 이제는 안미끄러질테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백두대간을 시작하겠지.
귤껍질, 물티슈, 비닐장갑.... 쓰레기가 많아 보기 않좋다.
특히 적당한 간격으로(?) 버려져 있는 사탕 껍질들.... 산행 중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 하나.
학생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쓰레기를 한봉지 가득 주우며 산행을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누가 이런걸 버리냐 하고 속으로 궁시렁거릴지언정 쓰레기는 줍지 않는다.
나도 변한것이다.
지리산에 숨어 있는 모든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이 부끄러운 성취욕이 사라지고 나면,
겉모습만 보고 등산객들을 판단하고, 이리저리 계산하는 것에도 질리고 나면,
장비 욕심 부리는 것에도 지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남긴 흔적들에 대해 지리산에게 죄 스러운 마음이 들게되면...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산이 좋고 사람이 좋았던 옛날의 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조금씩 망가지는 산을 보면 나도 한 몫 한거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고기리 삼거리 2 Km 남기고 부터는 소나무 숲길이 나 있었다.
양탄자 처럼 폭신한 숲길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마른 솔잎 더미 위에 누우니 소나무들이 나에게 쓰러질 듯 했다.
누워서 나는 나에게 말한다.
잘했다고. 그래도 오길 잘했다고....
남원에서 목욕을 하고 구례 가는 버스를 탔다.
창 밖으로 섬진강이 이어진다... 마음이 아련하다.
구례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섬진강가를 걸어 볼까 하다가.
하루만에 사람이 그리워진 나는.... 결국 새벽 기차를 탄다. 새벽 4시반 서울 도착예정.
푹 잘 요량으로 캔 맥주 하나 홀짝이니 이내 나른해진다.
잠이 들며 나는 생각한다.
'다음번에는 또 무슨 핑계를 대며 지리산을 찾을까'
첫댓글 "이바구와 보는이 없는데 쪽팔린 이유는..." 에서 깊은 카타라시를 만끽하고 읽는내내 재미나게 보고 갑니다..종종 바람막이 놔두고 다니세요.ㅎㅎㅎ
사전에서 '이바구' 를 찾아보니 '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 라고 나오네요. 경상도 사투리인지는 몰랐었는데 ^^ 왠지 기분 좋은 단어에요.
즐거움이 묻어나네요. 바람막이도 찾으시고.. 웃고 갑니다.^^*
댓글 달린걸 이제서야 확인을 했네요... 그래도 의미 있는 물건인데 찾으셨어 다행이네요.. 항상 안산 즐산하세요...
잘 읽고 갑니다. 그래도 변하지 마시고 한번씩 여유있을때 버려진거 줏어 오세요.원래 버리는 놈 따로 있고 줏는분 따로 있다 합니다.
네... 그래야죠 ^^
글이 술술 읽히네요. 산 좋아하는 님의 모습을 잠시 상상해 봅니다.~~
그래도 너무 좋았겠어요..예전의 내보습을 보는듯해서 약간의 미소가 도네요...항상 건강하시고 즐산하세요.
감사합니다 *^^*
대단해요 혼자서 서북능선을 그것도 밤에 ㅎㅎㅎㅎㅎ 전남자인데도 밤에 혼자 못갈것같아요 귀신나올까바서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부럽습니다 님에 용기에 박수를 10분 쳐드림니다
멧돼지가 그렇게 많으지 모르고 갔습니다. 이제 밤에는 안갈랍니다 ㅡ,.ㅡ 멧돼지들 무서워서...
당신을 존경합니다 전 남자인데도 엄두는 커녕 생각도 못할 일을 하고 계시니 .......
서북능은 겨울엔 겁이나서 쳐다도 못보고 있는데 혼자 몸으로 대단~하세요. 지리산 오실때 남원 들르시면 제가 맛난 추어탕 사드릴께요. 꼭이요^^*
소천님 후기가 올라올때가 된것같은데 ㅎㅎㅎㅎ 요즘은 산에 안가시나요? ㅎㅎㅎㅎ
소천님. 저 추어탕 겁나게 좋아해요 ㅋㅋ 근데요.... 추어탕이랑 어탕은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추어탕은 미꾸라지.. 그럼 어탕은 뭘로 만든 거에요??? (이상 구인월의 '어탕전문' 간판을 보고 든 생각)
추어탕은 미꾸라지로 만든것이 맞아요. 가을 미꾸라지가 제격이라 추어탕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들었고.. 인월 어탕은 유명하다고 듣긴 했는데 저도 안먹어 봤어요. 아마 민물고기 이것저것을 삶아 갈아서 죽을 쑨것같은데..요??? ㅎㅎ
소천님 나한테도 살게 있지 싶은데...ㅋ 나부터 사주셔야죠? ㅋㅋ
추어탕 고빼기로다가 준비해 드리죠^^
카메라도 가지고 다니시면서 흔적도 남기시면 금상첨화일 듯^^
우린 쏘주나 미사일을 대뽀시켜놓는데 바람막이까지 대단한 알파인이쉼돠~ 지리산 멧돼진 맛도없는것들이 겁나 무서버요 저두 산방끝나기전에 쌍계사에서 나홀로 남부능선때리고왔는데 ..산죽길이라 항상긴장했네요 ^^ 글이 맛나네요~
다음엔 무슨 핑계로 지리를 찾을까...부럽네요...너무...
바람막이 또 놔두세요
너무나 좋은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