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2월 11일 연중 제6주일(세계 병자의 날)
제1독서 : 레위 13,1-2.44-46
제2독서 : 1코린 10,31─11,1
복 음 : 마르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에 대한
구약의 율법의 규정을 알려줍니다(레위 13,1-2,44-46).
그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야 했으며,
공공장소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나타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는 접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접근해 오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해야 한다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교회에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1코린 10,31-32)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의 차이를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의 율법’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규정을 제시할 뿐 그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께 와서 치유 받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피해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수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병들었고 죄인이기에, 오히려 감싸주시고 치료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규정이 아니라 사랑과 호의를 제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는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이는 그가 예수님의 권능, 곧 치유의 능력을 믿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 능력의 행사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달려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오로지 예수님의 처분에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에 순명하겠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신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는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당신도 원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는 온전한 의탁과 신뢰를 말해줍니다.
바로 이처럼 나병환자도 예수님께 그렇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하면서, 자신의 바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바람에 의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는가요?
자신의 바람을 하느님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가요,
아니면 하느님의 바람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레위 13,45-46), 나병환자를 만지거나 접촉하면 부정을 타게 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구원의 힘을 드러내며, 그분의 신체적 접촉은 우정과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병환자가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것은 불결함에 닿아도 불결해지지 않는 오직 ‘거룩하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꽃 속에서도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시고(탈출 3,2),
인성을 취하셔도 죄에 물들지 않으시고,
아기를 낳으면서도 동정성을 잃지 않게 하시듯,
불결한 이를 만져도 불결해지지 않고 오히려 불결한 이를 깨끗하게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신 당신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곧 당신이 거룩하신 분, 구원자이심을 드러냅니다.
그 거룩하신 분, 구원자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41)
하오니, 주님,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소서.
제가 하고자 한 바가 아니라 당신이 하고자 한 바를 이루소서!
저의 희망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을 제게서 이루소서.
당신이 원하니까 저도 원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
당신께서 하시고자 한 바를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저도 바라게 하소서.
당신이 하시고자 한 바를 저도 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만지소서.
저의 바람과 하는 일을 깨끗하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저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인 동시에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러나 주일과 겹치는 관계로 전례 우선순위에 밀려 오늘은 기념 없음으로 표시 됩니다.
돌아보니 저도 이런저런 병고에 참 많이 시달렸습니다.
특히 30여 년 전에는 상태가 심각해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은혜롭게도 그때 마침 루르드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원래 제가 갈 상황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루르드에 딱 도착했는데, 당시 1월 초순이었는데,
아직도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동굴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루르드의 성녀 베르나테트의 생가를 방문하고,
사흘 내내, 묵주기도와 함께 루르드를 산책하였습니다.
루르드에 머무는 동안 한 가지 따뜻한 느낌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성모님께서 평생토록, 사시사철, 시시각각으로 제 인생 여정에 동반하고 계셨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병고로 인해 제 내면에 고착화 되어있던
근심 걱정과 불안한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저를 꼭 안아주신다는 느낌이 참 행복했습니다.
성모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잘 왔다. 내 아들아! 그간 얼마나 고생 많았느냐?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 아들 예수님께서 잘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병자들의 위로요 안식처인 성모님께서 병고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시고,
극복 가능한 질병은 치유시켜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병자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병고를 통해 주님의 고통과 수난에 더 깊이 참여하며,
더 영적으로 변화되길 더불어 청해야겠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병고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과거에는 병에 대한 오해가 참 많았습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도 나병은 천형으로 여겼습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했기에 그 벌로 인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병고와 맞서느라 죽을 지경인데,
당시 환자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손가락질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오늘 우리 안에서 병고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시한부 판정을 받게 되면, 조용히 기도해 드리고,
투병을 위한 도움을 드리기보다는 다들 뒤에서 수군거립니다.
그렇게 절친하게 지냈던 관계인데도, 병문안 한번 가지 않습니다.
“그 소식 들었어? 누구누구가 말기암이래? 그렇게 퍼마시더니, 그때부터 내가 알아봤어.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인데, 처자식들은 어짠댜?”
병이라는 것은 결코 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무조건 적대시하고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까칠한 손님 같은 존재입니다.
잘 다스리고 보살피며 극복해 나가야 할 대상입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각자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병고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나약하고 허물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알게 되고,
영원한 보루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많은 환자들께서 품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투병 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돈이란 돈은 다 까먹고,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병과 맞설 때,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모든 환자 여러분들,
여러분의 삶에 분명히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환자 여러분도 병실 안에서, 병과 함께
훌륭한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병 증세가 사라지면서 깨끗이 나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다.
실제로 나병은 육체를 기형적으로 바꾸고
잠재적으로 전염성을 갖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를 주는 병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병은 가장 고통스럽고 혐오감을 주는 병이었다.
레위기에도 나오지만, 나병에 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 철저히 격리되어
아무에게도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레위 13,45-46). 떠돌아다니는 시체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간들에게 저주받은 자들로 여겨졌다.
이 나병환자의 간청을 듣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버림받은 인간에 대해 가지신 연민과 느끼신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41절) 라는 말씀의 연민은 바로 뱃속까지 자극하는 고통의 의미이다.
그 고통은 그 나병환자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의한 사회적 상황 때문에 더 컸을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 나병환자에 대시며(41절) 법을 어기는 행동을 하시지만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41절)는 말씀은
그를 온통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치유의 기적을 이룬다.
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과 같은 체험 때문에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을 널리 선전하여 퍼뜨리고 있다(45절).
예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사제들에게 가서 보이고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44절) 레위기의 규정대로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진 데 대한 감사의 예물을 바치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우선 우리가 항상 하느님의 은총 앞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감사의 표현은 말로써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표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먼저 감사의 표현을 하여야 하겠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으로 참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아마 이 병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어도 다시 사회에 복귀하기까지는
또 다른 검증과정을 통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 기억은 예수님께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나환자를 통하여 장차 당신에게 닥칠 야훼의 고통받는 종,
즉, 나병환자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아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이사 53,3-4)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될 운명을 예견한 것이다.
당신이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불결과 깨끗함을 가리는 논쟁에만 힘을 소비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끌어갈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여
당신이 베푸시는 사랑의 행위를 왜곡하려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내적인 아픔의 표현이라 하겠다.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하며
병자의 날을 맞이하여 갖가지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손길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지속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믿는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 수 있으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믿음은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라는 깨우침을 주소서.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받은 모습이요(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환자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로 말미암은 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병자나 장애인은 그 자체로 죄인으로 간주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종교적으로도 죄인으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며
사회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으며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대시며 고쳐주십니다.
나병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넘어 환자에게 치유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 종교적 단죄, 사회적 소외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는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는 더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나병환자가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은 분리하고 소외시키지만, 주님의 품은 차별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품에 지체함 없이 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합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릎을 꿇으면 비로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보게 되고,
사랑해야 할 이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동하게 됩니다.
오늘이 그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금부터 4년 전입니다. 2020년 2월입니다.
대한민국에 코로나 환자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그동안 방역당국에서 철저하게 관리를 해서 대한민국은 코로나 청정지역이었습니다.
원인은 방역당국이 정한 안전수칙을 어기고 집회를 가졌던 모 종교집단에 있었습니다.
코로나에 감염된 신도들이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방역당국은 원인을 찾았고, 종교집단도 모이지 않으면서 코로나는 진정세로 돌아섰습니다.
가톨릭을 비롯한 다른 종교는 정부의 방역대책에 적극 협조하였습니다.
박해시대에도 계속되었던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거리 두기와 마스크 쓰기에 적극 동참하였고,
대한민국은 3T(Trace, Test, Treatment), 추적, 검사, 치료라는 방법으로
코로나 확산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해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금요일 저녁,
교황님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에 특별 기도를 주례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도록 인류를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구원자이신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도록,
우리가 치유되고 그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두려워 떨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소방대원과 간호사, 의사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코로나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전국의 소방대원들은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였던 대구로 내려가서 환자들을 이송하였습니다.
소방대원들의 차량이 대구로 향하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자발적으로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 대구로 향했던
간호사들의 충혈 된 눈, 지친 얼굴, 바닥에 앉아 빵을 먹는 모습은 감동이었습니다.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던 의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본인도 코로나에 감염되어 쓰러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코로나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아픈 사람과 함께 하려고 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돌아온 교민들이 있었습니다.
용인과 아산의 주민들은 ‘우리는 교민들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멀리 타국에서 온 교민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의료 선진국이라는 뉴욕도 코로나의 확산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사망하였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제게 안부 전화를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나약함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3,000년 전인 구약의 시대에 감염병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없었을 것입니다.
방역의 차원에서 격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곁에 있으면 같이 병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죄인과 함께 있으면 죄에 물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이 개인과 집단에서 발생하면 ‘따돌림’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와 국가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면 ‘민족차별’로 드러납니다.
노예제도, 식민지 건설, 유태인에 대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낯선 이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우월감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부정한 사람을 두려워해서 멀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서 사랑으로 돌보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부정한 사람도 치유될 수 있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선행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월감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우리들 또한 따뜻한 마음으로 주변에 아픈 이들과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한 사람을 치유하신 이야기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그분이 믿으셨던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그분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고, 그분이 아버지라 부른 그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외아드님을 알려 주셨다.”(1,18)
같은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도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다.”(14,9)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며” 그를 고쳐 주십니다.
나병은 예나 오늘이나 法定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격리시킵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들을 격리하는 시설들이 여럿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격리시설이 없던 옛날에는, 그들을 동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격리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병을 진단하는 방식도 과학적이 아니어서
피부가 불결하면, 나병환자로 취급받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티나에도 나병환자는 마을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불결! 불결!”하며 외쳐서
사람이 자기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병은 不淨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죄인이라,
피부가 더러운 상태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레위 13,44-46)
유대교 율법은 부정한 그들과 신체적 접촉을 금합니다.
접촉을 한 사람도 부정한 사람, 곧 죄인으로 취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대어’ 그를 고친 다음,
사제에게 가서 보이고, 부정을 벗어나는 절차를 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교는 나병을 죄의 대가로 주어진 벌이라 믿었기에,
치유 여부를 사제가 확인하게 하였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환자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드러나게 고으로 들어가지 못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와 접촉하였고,
임의로 격리를 해제하였기에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 곧 天刑이라 일컬었습니다.
나병에 걸렸던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은
천형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
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이 병이 ‘어처구니없는’ 불행인 것은,
하느님 혹은 하늘이 주신 벌이라고 말하면서 환자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소외시키고,
또 전염성으로 말미암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소외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한하운 시인의 말을 빌리면, 환자를 하느님도 사람도 없는,
‘하늘 밖에 세워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겨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엾이 여기고, 그에게 손을 대면서 먼저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제에게 보내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선하고 자비로운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하느님 한 분 말고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마르 10,8)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등의
예수님 말씀을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복음섣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당신이 부정한 인간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장애를 지니고 태어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육체적 혹은 정신적 고통을 당하는 생명들도 있습니다.
선의의 사람이 짓밟히고 고통을 겪는,
반면 악의를 지닌 사람들이 높은 지위와 재물을 누리기도 합니다.
저ᅟᅧᆼ직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이 반드시 대우받는 세상이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던 사람이 더 대우받기도 합니다.
그런 不可思議한 일들이 있는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가사의한 일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 들렸다는 사람들에게서 마귀를 쫓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율법을 범하여 스스로 죄인이 되면서도,
나병환자를 고쳐서 사회에 복귀시켰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주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숨을 구하는 일”, 곧 “선한 일”(마르 3,4)을 하며 세상에 사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돌아온 대가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며, 구약성서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당하는 하느님의 종’을 그분 안에 보았습니다.
「이사야서」는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앓는 병을 앓아주었으며, ...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 당하였다.”(53,4-5. 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은 있어도 正義를 빙자한 분노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예수님이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죄에 속한 육의 모습으로”(8,3) 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 안에 같은 친교를 누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당신과의 친교에서 아무도 제외하지 않으십니다.
正義具現을 하겠다고 하면서 사람들 안에 분노를 불어넣는 행위는
인류공동체에서 우리를 분리시키고, 우리 스스로를 높여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私心에서 옵니다.
그것은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요한 15,13)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모른다.”고
「요한의 첫째 편지」(4,8)는 말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들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실천하신 하느님의 일을 빙자하여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부르지, 군림할 기회를 찾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그대들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시오.”(루카 17,10)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세 번째 주인공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늘 복음은 나병환자가 주님께 와서 치유를 청해 치유 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나병환자와 주님 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대단한 사람이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일 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의향도 있으신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선의가 없으신 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면
주님께 나왔겠습니까? 애초에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이렇게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기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던 그런 사회 상황에서
그는 마치 겁이 없는 사람인 양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직진한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만 보고 걸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오늘 나병환자에게는 병의 치유보다
두려움의 치유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을 겁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치유가 더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영혼의 병 곧 마귀 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또는 선택의 순서를 정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의 병을 선택할 것이고,
그다음이 마음의 병이요, 정신병과 마귀 병이 그다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이렇게 겁이 없이 나아올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 믿음직한 사람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이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병자에 대한 구약의 그 차별과 격리와 단절의 법과 관습을 타파하시는
구별과 차별이 없는 주님의 사랑 곧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주님의 파격적 가르침과 실천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세 번째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과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환자가 주님께 나아올 때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병환자를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아마 환대했을 겁니다.
오늘 병자의 날인데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병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이승화 시몬 신부
병은 환경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풍토병도 있지만
내가 선호하는 음식과
내가 살아가는 삶의 패턴에 따라서
그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래서 병을 낫고자 한다면
당장은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고 치료하거나
약국에서 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꾸던지 환경을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유혹이 계속 찾아와
회복된 건강도 다시 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는 레위기에도 언급됩니다.
병이 걸린 이는 머리에 병이 들었다는 표현
자신이 부정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하라는 말씀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도록 합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연결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것은
기본에 충실하며 삶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세상 유혹에 빠지거나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선택하기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향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돌보고 하느님께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봉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건강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건강입니다.
건강을 잘 돌본 사람은 나이 상관없이 성당에 찾아올 수 있지만
잘 돌보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간절해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환자를 치유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십니다.
나병환자가 찾아와서 예수님께 청하자
그를 치유해 주시며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건강을 되찾았지만, 다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것은
그만큼 의지를 강하게 세우라는 뜻입니다.
이 정도의 의지와 노력이 없다면
병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놓치고 당장의 기쁨만을 찾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 삶은 내가 바라보는 가치와
그 가치를 살아갈 환경에 달려있음을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기 위한 의지와 노력을 하는
그런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이 예레미아 수녀
오늘 복음은 세 공관 복음서에 다 나오는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살아계시는 분(Living God)이라고 말한다.
옛 선조들은 나병환자를 썩어가는, 죽어가는 생명을 사는 이들(Half living people)이라고 말했다.
나병환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도 소외된 자들로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외딴곳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compassion)이
나병환자의 도움의 손길에 응답하셔서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를 치유시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내가 하고자 하니” 예수님의 자유의지가
나병환자의 간절한, 애절함에 응답하여 움직이고 치유가 일어난다.
서로의 마음이 만나는 곳,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라는 것은
레위기 5, 3 이하에 나오는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위반하면서까지도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정결과 부정을 가리는 구약의 제도를 폐기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운 전통이나 규칙, 법률에 의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시고 환영하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소외되거나 버림받는 사람은 없다.
예수님의 치유 활동은 사람은 소외되거나 버림받을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치유를 통해 하느님과 사람들이 서로 정상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주심으로서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내적 치유를 통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이것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방법이다.
나는 어느 누군가를 내치거나 소외시키지는 않았는가?
나는 이웃을 구원의 삶으로 인도하는 사람인가?
나는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이웃과 구원의 삶을 함께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묵상해 보자.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복음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