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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2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 야고 1,1-11
복 음 : 마르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313년 로마 제국이 종교 자유를 허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 면제, 세금 면제 등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걱정한 부자들은 유산 대부분을 교회에 기부했고,
가난한 사람도 죽을 때 구원을 위해 교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통해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심각한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발 빠른 사람은 자기 자녀를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성직매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을 받아 부자가 된 주교들은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호화스럽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들이 벌인 잔치는 로마 제국 황제의 잔치들보다 더 성대했다.”
종교 자유는 분명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부패했고,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편하고 쉬운 세속화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세속화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은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빵의 기적 등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들 앞에서 직접 표징을 행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이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의 자유로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던 것처럼,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불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말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세상 것에 기준을 내세울 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계속된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 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본 훼퍼가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저희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낄끼빠빠, 낄 데 끼고 빠질 때 잘 빠집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르르 몰려다니던 젊은 시절, 다들 없이 살던 때였습니다.
식사나 술을 한 잔 하고 나면, 서로의 얇은 지갑 상황을 고려해서,
십시일반 거두어 함께 내곤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산하는 순간, 귀신처럼 사라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 아픈가? 무슨 사고라도 났나? 하고 걱정들이 많았는데,
상습범이 되고 나니 나중에는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낄 때 껴야 하는데, 꼭 빠지는 전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살아온 나날을 뒤돌아보니 끔찍할 정도로 햇수가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병원이나 면사무소나 우체국에 가면, 아버님이라는 소리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저희 가문 안에서도 부모님 떠나시고, 형이 떠나고 나니,
이제 저는 가계도 최상위 자리에 위치 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몇 가지 결심을 세우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른바 낄끼빠빠입니다.
나이와 위치에 걸맞게 낄 데 끼고 빠질 때 빠지자는 것입니다.
반드시 끼어야 하는 순간은 어떤 때이며, 반드시 빠져야 할 순간은 어떤 때인지
늘 헤아려 가며 처신을 잘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 노년의 삶은 추하고 비루해지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요즘 얼마나 자주 그런 모습을 목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낄빠빠낄입니다. 끼어야 할 때는 빠집니다.
그러나 빠져야 할 때 반드시 끼어서 손가락질 받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대자연의 순환 논리를 자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노년기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시기입니다.
시들고 쇠락하고 소멸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결국 내려놓는 시기요, 사라지고 죽어가는 시기,
그러나 반대로 불멸의 희망을 지니는 시기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처신이 참으로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시비를 걸었습니다.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자신의 전지전능하심과 능력의 손길을 절대 허투루 사용하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야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기적을 행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들의 미성숙하고 유치한 태도에
마음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뒤로 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을 버려두신 채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른바 빠져야 할 때 잘 빠지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엉뚱하고 몰상식한 바리사이들의 언행 앞에 크게 분노하며,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소리소리 지르게 되고,
나중에는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까지 하게 될 것입니다.
논쟁할 가치조차 없는 바리사이들과의 대화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한 채 신속히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이른바 생활 속 거리 두기, 관계 안에 완충 지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우신 예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낄끼빠빠를 잘 하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 아닌 주제로 목숨 걸고, 피 튀기며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로 인해 그 좋던 관계 다 산산조각 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한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12절).
예수님의 이 거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마음의 회개와 더불어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이르는
영적이고 내적인 변화의 기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물리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행위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를 정복하여
자신들이 타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현세적인 지상 왕국을 만들어 내는 징표를 보이라는 것이다.
파라오 시대에는 원수에게서 해방되어야 했기에 그런 표징들이 일어나야 했지만(탈출 3-15장 참조),
하느님이신 그분께 다른 표징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뜻은 그것과는 다른 것으로 인간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세상의 구원을 향하여 가시고 계시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적을 하느님께 청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현세적인 부귀영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사는가?
아니면 나 자신의 내적인 회개와 쇄신을 통해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찾고자 하는지?
즉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자.
가장 큰 기적이란 바로 나 자신의 변화라는 것이다.
내가 변할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어디서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분에게 항상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삶이 없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상생활을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을 살아가며,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언제나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자 되도록,
그렇게 변화되는 기적을 늘 청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님 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눈을 쌍꺼풀 해야 좋아한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찾기보다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를 소망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마르8,1-10).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집과 몰이해 속에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맞는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성모님과 일치한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우리가 머무는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시험과 요구에 응답은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이방인의 땅에서 4,000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행하신 후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고 한다.(8,10)
달마누타(Dalmanutha)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갈릴래아 호수 서쪽 포구 막달라일 가능성이 높다.
똑같은 대목에서 마태오 복음은 예수께서 마가단(Magadan)으로 배를 타고 가셨다(15,39)고 했는데,
이 또한 막달라와 같은 지명이다.
막달라는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기도 하다.(루카 8,2; 마태 17,56; 요한 19,25)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타(막달라)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께 청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그 이상의 차원인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만한 기적’이었다.
이는 곧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을 말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메시아로 증명해 줄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다인들은 종말에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이를 증명할 만한 놀라운 표징들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약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출애 16,1-36),
해와 달을 멈추게 한 기적(여호 10,12-14),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의 대결에서
제단 위에 내린 야훼의 불길(1열왕 18,30-40) 등과 같은
하늘에서의 표징으로 예수 자신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하늘로부터의 표징을 ‘우주적 이변들’로 표현한다.(묵시 12,1.3; 15,1)
지금까지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이 한두 개인가?
제자들은 물론이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도 예수의 수 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다.
그들이 이제와서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표징을 청하는 이유는
예수를 믿는데 기적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제자들도 아직까지 스승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니,
바리사이들의 불신과 표징을 청하는 무리한 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이 예수께서 하늘이 표징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이 ‘믿음을 위해서’ 표징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시험하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다.
야훼께서 직접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신명 6,16)고 하셨고,
모세도 백성들에게 “야훼를 시험하지 말라”(출애 17,2)고 했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임을 걸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마태 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이러한 태도에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특히 “나는 분명히 말한다.”(12절)는 공관복음 모두가
아주 즐겨 사용하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어법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 다음에는 통상 앞에 서술된 내용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 ‘확신과 진실성’, ‘현저한 대조’,
또는 ‘더 높은 단계로의 진행’ 등의 말씀이 따른다.
시험과 요구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은 없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려둔 채 즉시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표징이란 요구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善射 되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자기가 믿는다는 하느님께 조건을 걸고 선물을 요구한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나도 저렇게 하겠다.”는 식의 조건부 다짐이다.
이것은 신앙을 놓고 거래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과도 같다.
하느님께서 다짐을 보고 조건을 승낙할 수도 있지만,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하느님께서 영영 나를 떠나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이승화 시몬 신부
사람들은 표징을 원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표징의 결이 다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 세상의 것을 얻을 수 있는
그런 표징을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가와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할 뿐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표징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결국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인들도 표징을 원합니다.
이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징을 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따스한 햇빛에서도
차가운 바람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표징을 원하지만
신앙인은 이미 표징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표징은 이미 주어진 것이며
혹시나 나약함으로 인해 흔들릴 때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 위한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표징을 원하고 있나요?
세상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찾고 있는지
아니면 내가 바라는 표징만을 찾는지 살펴보며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따스한 손길을 잡고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마리 피앗 수녀
예수님 마음은 어떠실까?
곁에 계시는 예수님은 안보고,
시험해 볼거리를 찾는
곁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은 못 느끼고,
표정을 요구하는
함께 하시는 성령은 믿지 못하면서,
징크스를 운운하는
이 세대는 믿고, 느끼고, 찾음의
길을 잃었다.
출처 :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복음묵상
첫댓글 아 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