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새 것인 내복을 내가 두고 입었다. 에어메리라고 해서 골이 져 있는 내복이었다.
오후에 한 후배가 집에 오기로 되어 있어서 머리를 감고 내복을 갈아입어야 했다. 친정어머니가 물려준 에어메리는 이젠 없다.
내복을 갈아입은 뒤, 폴라 티를 입는 대신 모처럼 봄 남방을 찾아입기로 했다. 회색 남방을 꺼내 입는데 소매를 넣을 사이가 없이 후배는 왔다. 단추를 목 아래까지 채우려다 답답해서 하나는 채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목 아래가 써늘했으나 지체할 겨를이 없이 점심을 먹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후배는 청국장, 나는 갈치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한참 떠들다 집에 돌아와 무심코 거울을 보게 되었는데 옷깃 사이로 흰 내복이 내다보였다.
여자 내복은 대체로 앞이 파여 있어 단추 하나 풀어놓은 일로 해서 내다보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소윤 아빠가 입었던 윗내복을 입은 탓이었다.
그가 아플 적에 산 내복이었는데 몇 번 입지 않은 새 것이라서 윗내복만 챙겨 놓았던 것이다. 그 내복이 모처럼 입은 남방 바깥으로 내 보인 것이다.
후배는 하늘같은 선배를 너무 어려워 하느라 내복이 내다 보인다는 말을 하지 못했나 보다. 어렵게도 안 했는데 후배는 나를 퍽이나 어려워 했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 뒷길에는 벚꽃이 흰 빛으로 가만가만 흔들렸다. 앵도꽃과 살구꽃도 피었다. 모란은 황록빛 순을 올리는 중이었다.
후배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일없이 중랑천 둑길 벚꽃나무 아래 서있고도 싶었으나 그만두었다.
돌아온 길로 이불을 볕에 내다 널고, 어제 작은 딸아이가 들고온 마른 빵조각이나 물어 뜯었다.
봄은.
내가 짐짓 지켜 서있지 않아도 제멋대로 흥겹고 기쁠 터이다. 나는 잠깐 컴을 쉬는 동안 손빨래 몇 가지를 널고, 그릇 몇 개를 씻어 엎어 놓고 밖으로는 지천인 봄을 그냥 두고 볼 참이다.
남편의 내복을 거두어 놓기는 참 잘했다.
첫댓글 요즘은 새로운 트랜드가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니까 내일쯤이면 마담덕분에 내복이 훤히 보이는 패션이 유행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멀쩡한 절 하나를 태워먹고도 덤덤한 나라에서 뭔 일이든 몬 일어 나겠습니까. 어려워서 그런게 아일 겁니다.
속에 받쳐 입은 흰 티셔츠로 보았을까?
회색이라면서요?ㅎㅎ
회색인 건 남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