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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3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야고 1,12-18
복 음 : 마르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매서운 겨울밤, 급하게 운전해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실제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신한 딸이 출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운전하는 차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둘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해서 나무를 옮기려고도 했지만, 둘이 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워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목적지인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반대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차 열쇠를 서로 교환한 뒤에 상대방 차에 올라타서 목적지를 간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를 바꿔타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상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빵이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을 빵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이미 보았습니다.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나누어주는 것을,
또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던 기적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이 기적을 기억하고 있다면, 빵 하나만 있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의 부족함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것처럼, 마음 안에 있는 허영, 가식, 탐욕, 권력욕, 교만 등의
작은 죄악들이 점점 부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걱정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누룩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풀어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누군가가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특히 가장 힘센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카 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마르 8,14-16)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
사실 이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 마는,
그러나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누룩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바로 그들의 그러한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일까요?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오직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것일 뿐,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우리도 예수님처럼 큰 꿈을 꾸고, 큰 그림을 그립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수도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련자 시절
수련소 공동체는 한 주에 한 번 오후 소풍을 다녔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하루 소풍을 갔는데... 늘 버스 타고 다녔습니다.
다들 배낭에는 점심 식사를 위한 식자재며 버너며 식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무등산이나 송광사, 선암사, 보성, 해남 등등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다들 기다리던 점심 식사 시간, 짐들을 펼쳐놓는 순간,
수련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쌀을 안 가져왔다든지, 양념에 잘 재어놓은
제육볶음을 안 갖고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련장님 눈치를 보며 이 일을 어떡하지?
야 네가 당번인데, 정신 똑바로 안차리냐?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늘 제자단 가운데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장거리 전도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빵 당번이
깜빡하고 빵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들 배에 올라타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순간에야
제자들은 아차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 교육을 시키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깜박하고 빵을 챙겨오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미성숙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스승님이 세상만사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능력과 지혜로 충만하신 메시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탄 배 위에 앉아 계시는데,
웃기게도 제자들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세상 만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꿈을 꾸시고, 큰 그림을 그리시는데,
제자들은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잘 돌아볼 일입니다.
눈앞에 당면한 일에만 치중하고 혈안이 된 나머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큰 계획은 안전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하겠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 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반영억 라파엘 신부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이 말은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지듯이
나쁜 것도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진다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 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
들의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주장, 자기 주체성과 자존감, 소신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똥고집이 된다면 문제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의견이 절대적인 것처럼 행동하거나 우기는 것은
주님을 슬프게 하는 완고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마르8,15).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기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몸에 젖어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하느님을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의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을 부풀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싸여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13개의 입에 한 덩어리 빵의 걱정
박상대 마르코 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자 예수께서는 탄식에 찬 語調로
“이 세대에 보여 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8,12)고 말씀하시고는
즉시 달마누타(8,10)를 떠나 배에 오르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에게 배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이른바 선상에서의 설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는 제자들에 대한 경고와 질타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배 위에서의 상황은 제자들이 배를 탈 때 먹을 빵을
한 덩어리밖에 챙겨오지 못했던 것으로 설명된다.
상황이야 어쨌든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누룩은 원래 부패에 대한 은유로 유다와 헬라 사회에 통용되었다.
누룩은 반죽에 침투하여 전부를 변화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루카는 바리사이의 누룩만을 말하는데(12,1) 마르코는 헤로데의 누룩을 덧붙였다.
예수께서는 헤로데 일당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위험스런 존재들로 보시는 것이다.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불신 상태를 그들의 누룩 속성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牛耳讀經인가?
제자들은 ‘빵이 없다’며 서로 걱정한다. 사실 그랬을 것이다.
4,000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 7광주리의 빵 조각을 남긴 기적(8,1-9) 후에
예수의 일행이 곧 배를 타고, 달마누타로 갔다.
거기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시험과 요구를 물리치고
즉시 배를 타고 떠나게 되었으니, 빵을 챙길 시간이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걱정하는 제자들을 질타하신다.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아듣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 지금까지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제자들을 나무랄만 하다.
우매한 군중들,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와 율사들, 예수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은 제쳐두고라도
제자들이 아직까지 믿음을 가지지 못한 것은 심히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믿음의 길이 멀고도 험한 것인가?
그러나 제자들의 불신은 다른 여느 불신과는 다르다.
비록 제자들이 오늘 배 위에서 13개의 입에 한 덩어리의 빵을 놓고 걱정했지만,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생명의 빵’이 그들 곁에 계시다는 것이다.
한 덩어리의 빵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빵’(요한 6,27)이다.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다.
언젠가는 제자들도 예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또 예수 때문에 자신의 전부인 생명까지도 바칠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복음은 믿음의 그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이승화 시몬 신부
눈앞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있고
문제의 원인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문제의 현상에 집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원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인을 깨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고
방법을 알게 될 때 희망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현상만 바라보는 사람은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저 한 번에 누가 해결해 주기만을 바랄 뿐
유혹은 멈추지 않고 찾아와
또 다른 영웅이나 희생자를 찾게 됩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죠.
원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물과 은사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통해 희망이 자라나고
희망을 통해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는
아직 현상만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이들을 배불리 먹였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눈앞의 문제라는 유혹에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희망을 꿈꿀 수 없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유혹에만 매여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든 제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의 현상이 아닌 원인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희망을 키워나가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시몬 신부의 신앙이야기] https://frsimon.tistory.com/1605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8,14. 17)
우리가 흔히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란 한 자리에서 같이 생활하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뜻으로,
겉으로는 같이 행동하면서도 속으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오늘 복음에서 드러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이 동상이몽의 상태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했으면서도 스승과 제자의 생각이 너무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 연꽃 한 송이를 들어 사람들에게 보이자,
그 많은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에게는 당신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마하가섭이라는 제자라도 있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런 제자가 없었으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난감하고 당혹스러웠을까 싶습니다.
부처님은 연꽃을 들고 설법하셨는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빵이 부족하기에 예수님께서 누룩 이야기를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누룩은,
“하늘나라는 누룩과 같다.” (마태13, 33) 는 비유에 나오는
역동적인 순기능을 하는 누룩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생각한 부정적인 의미의 누룩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과월절 예식을 누룩에 빗대어 설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묵은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묵은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1코린 5,6-8)
이처럼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묵은누룩은 급속히 번져 가는 악을 뜻하며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려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염려하신 것은
‘악의 파급력과 확장성’ 그리고 ‘종교적 위선’ 등을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삶은 그 당시 대표적인 악의 본보기들이며,
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나쁜 생각들과 악을 조장하는 말과 행동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나쁜 영향력에 중독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악의 경향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누룩이 빵을 부풀어 오르게 하듯 그들의 나쁜 성향과 생각들의 파급력과
확장성을 조심하라는 경고라고 느껴집니다.
물론 그들은 드러내놓고 그들의 나쁜 의도를, 생각을 표현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위선과 간계를 더욱더 조심하라는 말이며,
이는 또한 우리에게도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 된다, 는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실상 우리는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양식을 갈망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체로 양육되기보다는
먹고사는 데 집착하고 재물과 돈을 충분히 가지지 못해
삶이 불만족스럽고 불평으로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 삶이기에
늘 세상의 누룩이 아닌 하늘나라의 누룩이 되도록 늘 깨어 조심하라는 주의의 말씀입니다.
사실 제자들의 어리석음은 분명 빵의 기적을 통해서 보이지 않지만
늘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으면서도,
아직도 세상적인 빵을 말씀하신다고 이해했던 것은,
결국 그들의 속내가 여실히 드러난 것입니다.
겉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도 그들의 속내는 스승의 가르침과 삶과는
전혀 다른 세상적인 것에 관심이, 생각이 머물러 있었다는 뜻입니다.
마음도 굳어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딴것에 시선과 마음이 쏠려 갈라져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러기에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 는 당신의 말씀에
빵이 없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보고
주님께서는 몇 가지 부정적인 언사로 한탄하시며 꾸짖습니다.
어떤 의사가 이렇게 말했더군요.
『나는 그동안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스승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많은 환자들이 입에 담는 ‘만약’이란 두 글자입니다.
나와 만난 환자들은 지난 일을 회고하고,
그때 반드시 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일을 후회하면서 보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후회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처럼 쓰는 ‘만약’이란 말을 ‘다음에’라는 말로 바꾸어 쓰는 것입니다.
다음엔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한다면 과거의 후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정열을 현실과 미래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습관에 젖어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8,17~18)
이는 결코 허투루 듣고 잊어버릴 말씀이 아니라
우리 또한 명심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고 봅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시고 허하셨기에 주님께서 이토록 추궁하듯이 쏟아내셨겠습니까?
성서에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느냐?’는 표현이 무려 17번이 나온다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듯이 동일한 표현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고,
한번 보는 것보다 마음을 열고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오관)을 통해 듣고 보고 만진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고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봅니다.
흔한 표현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멀고도 가까운 거리가
머리에서 심장(=마음)까지라고 하듯이 신앙은 이성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닫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그 모든 말씀과 행동이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마음과 하느님 나라를 깨닫도록 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하리라 봅니다.
마음이 아니고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낄 수 없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며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 당신이 깨우쳐 주시는 사람은 행복하옵니다.” (화답송 후렴)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