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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공의 연금술사 원문보기 글쓴이: 연금술사
심리 공략의 기술
사철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1. 목표를 위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다
2. 때와 장소에 맞게 처신의 중용을 지키다
3.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분명히 하다
4. 반대파는 반대파의 손으로, 적은 적의 손으로 처리하다
5. 정보정치를 활용하고 신상필벌이 명확하다
6. 권력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다
7. 제도 운용과 위계를 바로 세우다
8. 여성 정치가로서 위대한 선구자였다
9. 사회문화적 개혁의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다
10. 역대 제왕의 교훈을 평생의 싱크탱크로 삼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1. 심리 공략의 전진술 - 계책은 숨기는데 성패가 있다
2. 심리 공략의 발견술 - 한번 물면 절대 놓지 마라
3. 심리 공략의 실전술 -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아야 지배한다
4. 심리 공략의 필승지책 - 상대의 치부는 덮어주되 비겁함을 공격한다
5. 심리 공략의 용인술 : 정치적 포용과 용서는 사기극이다
6. 심리 공략의 치인술 - 사람은 사람으로 다스리다
7. 심리 공략의 연환술 - 때로는 대담하게 권력을 내려놓아라
8 심리 공략의 호신술 - ‘신중’을 삶의 지침으로, 밀고 당기기에 능하라
9 심리 공략의 통치술 - 정치의 근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있다
10 심리 공략의 입신양명술 - 용상에 앉아 천하를 염려하다
1부 심리 공략의 달인 무측천 리더십의 10가지 특징
꿈을 놓지 않을 때 내일이 준비된다
인생의 난관에 부딪쳤을 때 어떤 사람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파멸을 자초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악물고 고난에 맞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후퇴하지 않는 ‘삼불(三不)’ 정신을 보여준다. 무측천은 후자에 속하는 인물로서, 입궁한 후 태종의 총애를 잃게 되면서 첫 시련을 맞았다. 실제로 궁 안의 여인은 그 누구라도 황제에게서 잊혀지고 싶지 않겠지만, 막상 잊혀진 여인이 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란 더욱 쉽지 않다.
장손 황후가 죽은 후 당 태종은 양비(楊妃)를 황후로 책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위정이 나서서 말렸다. “폐하의 현덕은 요순(堯舜)에 비할 만한데 어찌 진영의 일로 사서 고생을 하려 하십니까?” 위정은 두 군주를 섬긴 사실을 빗대어 태종에게 황후를 책봉하지 말도록 권했다. 명예를 중시한 당 태종은 언제나 자신이 어진 황제임을 자처했고, 군신들도 그런 그를 요순과 비교하곤 했다. 위정의 비유가 설득력을 얻음으로써 태종은 양비의 황후 책봉을 없던 일로 했다. 그 후 태종은 황후 책봉에 관해 일체 거론하지 않았고, 13년간 국모 자리는 공석으로 남았다.
그러나 태종이 황후 자리를 비워둔 이유가 단지 위정의 간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종은 무측천을 얻은 이후 또 한 명의 미인을 맞아 들였다. 성이 서씨이고 이름이 혜였던 이 여인은 무측천보다 세 살 아래로 미모가 출중한데다 총명하여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재원 중의 재원이었다. 태종은 그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필력에 매료되어 입궁 후 곧바로 첩여(비빈의 칭호 중 하나)에 봉했고, 얼마 후 다시 충용(비빈의 칭호)으로 봉해짐으로써 서씨의 품계는 무측천을 바짝 위협했다. 젊고 아름다우며 문사(文事)에 정통했던 서충용은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태종의 침실 수발은 물론 정치적 조언자로서 죽은 장손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서충용을 무측천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측천은 잠시 총애를 잃었다고 해서 상심하거나 자포자기하진 않았다. 이는 제왕 이원길의 첩이었던 사촌 이모 양비가 제왕의 사후에 의지할 둥지를 잃은 처량한 신세로 전략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궁 안의 비빈이란, 황제가 살아있을 때는 노리개로, 황제가 죽고 나면 흔히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후손이 없었으므로 불안감이 큰 것은 사실이었다.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거부한 무측천은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미래를 준비할 결심을 굳혔다.
황제의 총애를 잃고 난 뒤 한동안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지난날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던 궁녀들이 이제 내놓고 그녀를 비웃고 멸시했다. 총애를 잃은 궁녀가 받아야 하는 고통은 단순히 외부의 조소나 멸시, 천대에 그치지 않았다. 음식의 질도 형편없이 떨어져 환관에게 뇌물을 쥐어줘야 그나마 먹을 만한 음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무측천은 비록 죄수 같은 열악한 생활을 할지언정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인내하며 자신을 단련했고, 고난 속에서도 재기를 위한 희망의끈을 놓지 않았다. 특히 누군가의 사랑에 기대는 삶은 지속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은혜와 관용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한 무측천은 오직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결심을 굳혔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기회를 포착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수많은 밤을 번민한 끝에 무측천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녀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태종의 의중을 간파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태종의 현재 심리 상태와 변화를 철저하게 감지해야 했다. 사실 이것은 돈만 있으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 무측천은 곧바로 부패한 환관을 상대로 뇌물을 주고 정보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당시 오품 재인이었던 무측천이 받던 수입과 어머니에게서 받은 결혼 자금, 그리고 태종이 하사한 물품 등을 모으니 자금은 충분했다. 무측천의 ‘뇌물’ 작전은 효과가 있어서 태종의 근황과 비빈들의 현황 - 누가 총애를 받고, 누가 황제의 총애를 두고 서로 반목하는지 - 과 태자들 간의 암투에 관한 정보를 모조리 입수하여 앞날의 정황을 내다보았다.
두 번째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정말로 천하를 책임질 운명을 타고 났다면 그에 맞는 몸과 마음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 무측천은 자신을 더 이상 벽에 걸린 그림처럼 방 안에 가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환관이란 원래 나약하고 단순하여 궁 안의 젊고 아름다운 비빈이 조금만 인격적으로 대해주면 크게 감동하여 그녀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습성이 있다. 이러한 환관들의 생리를 간파한 무측천은 금전을 아끼지 않고 후하게 인심을 쓰는 한편, 항상 따뜻한 말과 깍듯한 예로써 대해주었다. 그 결과 예전에 거만하고 냉정하게 굴었던 환관들이 서서히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모든 일이 그녀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러나 무측천에게는 남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었는데, 얼마 전 태종의 명으로 임신 여부를 알기 위한 검사를 받은 것이다. 사실 무측천은 자신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임신 유무가 아니라 자신이 임신했을 경우 태종이 그 사실을 빌미로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데 있었다. 때문에 그 후 태종 곁에서 그의 수발을 드는 무측천의 몸가짐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현대인의 시각에서 본 무측천의 상황은 아마도 기회와 리스크가 공존하면서도 리스크가 기회보다 좀 더 컸던 경우일 것이다.
황제의 수발을 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오전 수발과 오후 수발로 나뉘는데, 일이 고된 것은 물론이고 규율도 엄격해 어려움이 더했다. 관례에 따르면 오전반 궁녀들은 황제가 입조해서 재상과 대신들의 보고를 듣고, 함께 국사를 논하고 정무를 처리할 때까지 줄곧 병풍 뒤에서 기다리다 황제가 퇴조할 때 열을 지어 그 뒤를 따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황제의 의복 수발을 들고, 알맞게 데워진 차를 올리고,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황제가 찾을 만한 서적을 항시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또 궁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앉을 수 없으며, 먼지를 털고, 부채질을 하고, 향로를 피울 때도 절도 있는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정신적인 부담이었는데, 혹시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하루 종일 노심초사해야 했다.
무측천이 미랑의 신분으로 태종을 보필하는 동안, 그녀에 대한 태종의 태도는 그다지 각별하지도 그렇다고 전혀 모르는 궁녀처럼 소홀히 대하지도 않는 애매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무측천은 다른 궁녀들이 꺼리는 오전 수발을 자청하는 등 더욱 분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그녀가 오전 수발을 자청한 데에는 명군 태종과 재상 및 여러 고위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하는 것을 병풍 뒤에서 조용히 경청하는 즐거움도 한몫했다. 이 경험이 무측천이 실권을 잡은, 향후 50년 동안 정확한 판단력을 발휘, 능숙하고 과감하게 국사를 처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2부 사람을 움직이는 심리 공략의 기술
반목과 갈등을 활용하는 기술
경계심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서로 불신하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격과 방어 행위로만 보는데, 사실 경계심이야말로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거나, 받는다고 해도 그 정도가 미약하도록 해준다. 즉 경계심은 자신을 책임지며 스스로 언행에 신중을 기하도록 하여 그만큼 실수를 줄일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경계심을 가진 사람은 시야도 넓다. 무측천은 만약을 대비해 언제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장수 2년, 무측천이 만상궁에서 천지신명께 제사를 지낼 때 제사 주관자의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황제가 가장 먼저 예를 올린 뒤에 태자 단(旦)이 뒤를 이어 예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번에는 웬일인지 위왕(魏王)이 무승사와 양왕(梁王) 무삼사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차지하고, 무씨 성으로 바꾼 태자 단은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조신(朝臣)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속으로만 사태를 관망했다. 그들 중에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반기는 자도 있었다. 이튿날 황사(태자가 폐위된 후의 직책) 단의 후궁인 유씨와 두씨가 가예전에서 황제에게 인사를 올린 후 돌연 실종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측근인 궁녀들도 두 사람의 실종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무측천에게 가예전 안을 뒤져 볼 것을 권하자, 그녀는 내시를 통해 동궁의 나인에게 살펴보게 했는데, 그때는 이미 두 후궁이 가예전을 떠나고 난 후였다.
뜻하지 않은 사건에 태자 단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또 동궁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할 것을 명했다. 그는 모후의 냉담한 태도에서 더 이상 예전처럼 자신이 두 번째로 제사를 주관할 수 없게 되었음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보다 더한 불행이 자신에게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안에 떨던 그의 선택은 침묵이었다. 오직 침묵만이 자신을 위기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유비와 두비의 실종은 위단아라는 여자 노비와 관계가 있었다. 위단아는 무측천을 모시는, 비교적 직급이 높은 노비였는데, 총명하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미모와 몸매도 빼어났다. 위단아는 자신의 미모로 고관대작의 애첩이 되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태자 단을 목표로 삼은 위단아는 단과 마주치는 기회를 이용해 그를 유혹했고 노골적으로 자신의 처녀성을 그에게 바칠 뜻을 내비쳤다. 자고로 꽃을 마다하는 나비가 없듯이 자신처럼 아름다운 꽃을 태자 단이 거절할 리가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위단아를 바라보는 단의 심사는 복잡했다. 그는 위단아가 모후 무측천이 자신에게 심어두려는 미끼라 여겨 그녀를 거절했다.
단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한 위단아는 복수할 생각을 품었다. 그녀는 사람 모양의 나무 인형을 구해 무조(武曌)라는 이름을 새기고 그 위에 다시 두 개의 못을 박았다. 그러고는 평소 친분이 있는 동궁의 시녀를 시켜 몰래 유비와 두비의 침상 아래에 두었다. 그런 후 무측천에게 두 태자비가 폐하를 해하려고 매일 밤 저주를 퍼부어 황제의 명을 단축시키고 있다며 고해바쳤다. 황제는 설마 하는 생각에 무측천에게 진상 파악을 지시했다.
그러나 무측천은 사람을 파견하지 않았다. 태자의 현재 상황으로 보면 두 태자비가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날 두 태자비가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실종되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태자가 예종으로 즉위한 후 가예전 지하와 주위를 파 보도록 했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사라진 두 사람을 황후로 봉하고 낙양 남쪽 교외에 두 태자비를 기리는 능을 세웠다. 태자비의 실종과 관련해서는 이후에도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두 사람의 죽음과 위단아가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두 태자비만 없어지면 태자가 자신에게 오리라고 생각했던 위단아는 예측이 빗나가 태자가 전혀 관심을 내보이지 않자 애가 타고 밤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마침내 분을 못 이겨 태자를 살해할 끔찍한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시녀에게 털어놓고 함께 살해 계획을 짰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될까 걱정이 앞선 시녀는 몰래 이 사실을 무측천에게 고했다.
살해 계획을 전해들은 무측천은 나이도 어린 계집아이가 참으로 독하다고 여기고 후환을 막기 위해 위단아를 없애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무측천은 조그만 잘못을 빌미로 위단아를 불러 태형을 내렸다. 두비가 실종된 후에 무측천은 태자 단의 황제 즉위와 당 왕조의 부흥을 도모하고 무속으로 황제의 명을 재촉하려 했다는 죄명을 씌워 두비의 어머니 방씨와 방씨의 세 아들을 영남 지방으로 유배시키고, 두비의 아버지 윤주자사 두효심을 나주사마로 좌천시켰다.
그러나 이는 날조된 사실로, 방씨 집안의 노비가 함정을 파고, 승진에 눈이 먼 감찰어사 설계창이 사건을 확대 해석해 ‘당조 복원’이라는 역모죄를 씌운 결과이자, 무(武)를 숭상하고 이(李)시를 억압하는 무측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다행히 서유공이 죽음을 무릅쓰고 변호하여 겨우 사형만은 면할 수 있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반목과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싫다고 해서 피할 수만도 없다. 무측천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해 반목과 갈등을 적절히 이용하는 법을 알았다.
성공의 연금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