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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에서 발간되고 있는 문예지 <한솔문학> 최근호에 게재된(될) 저의 단편입니다.
닥터 지바고의 여주인공 라라의 노년의 이미지를 한국 청년의 입장에서 다룬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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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문학/2021)
(단편)
은발의 라라 / Silver-Haired Lara
곽명규
세월은 날아가는 화살이라는 말이 이렇게 실감날 수가 없다. 내 시야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햇수로 환산해서 오 년이라는 긴 거리를 이 화살이 순식간에 관통하고 사라져 버렸다. 지금 내 시야는 불 켜진 극장의 화면처럼 하얗게 색이 바랬다. 나는 방금 잠에서 깨어 일어난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잊혀 가는 꿈속의 장면들을 하나라도 더 붙잡아 기억의 화면 속에 담아 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금요일 오후였었다. 공항도 주말을 타는지 입국자가 많았다. 환영 나온 사람들도 나처럼 약간씩 지쳐 보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 나가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손을 흔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 이름이 있네!”
하얀 종이 두루마리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내 이름의 철자를 한 글자씩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큰 소리로 읽었다. 두루마리가 도르르 말리고 하얀 여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라라예요.”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고 나서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라라.”
그녀의 손을 잡을 때 <의사 지바고>의 라라(Lara)가 떠올랐었다. 물론 이름 때문이었을 뿐, 생김새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녀는 영화 속의 라라 만큼 예쁘지도 않았고 또 젊지도 않았다. 적게 잡아도 오십은 넘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머리카락이 은빛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은은하나마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주 단정하게 다듬어진 채 하얀 이마 위에 곱게 올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냥 인상만으로 본다면 오히려 줄리 크리스티보다 더 라라의 이미지에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웰컴 투 로스앤젤레스!”
라라가 공식 인사말을 던지고는 멋쩍은 듯 웃었다.
“고마워요, 라라. ...참, 닉(Nick)은 잘 있나요?”
닉은 앞으로 오 년 동안 함께 일할 파트너였다. 몇 달 전 서울에 잠깐 왔을 때 점심을 함께한 적이 있었고, 그 뒤로 팩스도 여러 번 주고받아 꽤 가깝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네. 아주 즐겁고 여유롭게 잘 지내고 있지요. 오늘은 정말 예기치 못한 일로 공항에 못 나오게 돼 내가 대신 나왔지만, 이런 일은 일 년에 한 번도 일어나지 않지요.”
라라의 대답을 듣고 나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항을 벗어나면서는 하품까지 쏟아졌다.
“미안해요, 라라. 비행기에서 잘 잤는데 왜 이런지 모르겠네.”
“길이 막힐 땐 누구나 졸리죠. 금요일 오후인 걸 어쩌겠어요? 어휴, 저 프리웨이(freeway/고속도로) 좀 보세요.”
멀리 프리웨이가 보였다. 달리는 차는 한 대도 없고 모두가 기다란 공중 주차장에 서 있는 듯했다.
“로칼(local/시내 일반도로)로 가야겠어요. 좀 주무세요.”
라라는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자동차는 좌회전 우회전을 거듭하면서 가는 듯 서는 듯 꾸물꾸물 움직였다. 한참을 가다가 문득 차가 한쪽으로 크게 쏠리는 것 같아 눈을 떴다. 공군 부대의 표지가 걸린 긴 울타리가 눈앞에서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라라?”
“아무 데도 아녜요. 프리웨이 사정이 좀 나아진 것 같아 방향을 돌렸어요.”
“아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길을 잘 알죠? 택시 운전사처럼?”
“예전에 이쪽에서 살았거든요.”
“아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따금 라라의 말이 들려오면 멍한 눈을 쳐들어 앞서가는 자동차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면서 건성으로 대꾸를 하곤 했다.
롱비치(Long Beach/로스앤젤레스의 남부 항구도시)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원래는 이십 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다.
사무실은 이 층 짜리 목조 건물에 있었다. 옥외로 노출된 계단을 올라가며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주변은 온통 팜트리(palm tree/종려나무)들 뿐이었다.
“롱비치라더니, 바다가 안 보이네요?”
내 목소리에 아쉬움이 섞여들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워요. 자주 가게 될 거구요.”
라라가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사무실은 입구 쪽이 네모반듯한 홀이었고 그 안쪽으로 좌우에 방 하나씩이 마주 보고 앉은 단순한 구조였는데, 라라와 닉과 나, 달랑 세 사람이 근무할 곳으로는 조금 너무 넉넉한 공간이었다.
오른쪽 방으로 안내를 받아 가방에서 서류를 하나씩 꺼내 책상 밑 서랍 속 폴더에 꽂아 놓고 겨우 의자에 기대어 앉았을 때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군요. 수고했어요.”
닉의 목소리였다. 빠른 발소리가 몇 걸음 들린 다음 닉이 방으로 들어왔다.
“새로운 시작을 자축해야죠. 셋이서 바닷가에 나가 한 잔 해요. 모텔도 그쪽으로 잡아 놨어요.”
닉이 인사를 마치자마자 시원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닉.”
“아, 내가 아니라, 로라에게 고마워해야죠. 모두 다 그녀의 아이디어니까요.”
닉이 엄지손가락을 뒤집어 등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로라...? 그녀 이름이 로라(Laura)였어요?”
내가 머뭇머뭇 물었다.
“아직 로라와 통성명도 안 했나요?”
닉은 그녀를 부르려는 듯 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니, 이름을 확인하려는 것뿐이오. 라라라고 들은 것 같아서...”
나는 급히 닉을 만류했다.
저녁은 매우 재미있었다. 무엇보다도 바닷가 호텔인 퀸 메리 호 의 갑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나를 흥분시켰다.
“고마워요, 로라. 이렇게 큰 배는 처음 타 봐요.”
저녁이 끝나 갈 때 내가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귀한 주말 저녁 시간을 할애해 준 것도요.”
“아니에요. 덕분에 나도 외로운 주말저녁을 면한 걸요.”
그녀의 이 말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외로운 주말?”
나는 눈에 의문을 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혼자 살고 있거든요.”
“아아...”
무슨 말을 하기가 거북해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 그녀가 스스로 설명을 덧붙였다.
“오래 됐어요. 아주 오래 됐지요. 남편 타미(Tommy)가 떠난 지.”
나는 다시 고개만 끄덕였다.
몇 달이 휙 지나갔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 아내도 도착해 있었고 라미라다(La Mirada/로스앤젤레스의 남동부 소도시)의 셋집과 롱비치 사무실 사이의 웬만한 장소는 다 알 만큼 미국 생활에도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로라—가끔 일부러 라라라고 부르기도 했지만—와도 별 스스럼이 없었고, 닉과는 꽤 가까운 친구—나와 동갑인 서른 살이었다—처럼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닉과 둘이서 부두에 나가 하역회사 사장과 점심을 먹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졸음이 바닷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팝송이나 들을까?”
닉이 CD(컴팩트디스크) 버튼을 눌렀다. 아는 노래가 나와서 몇 군데는 따라 불렀다.
“이런 옛날 노래들을 어떻게 알지, 킴?”
닉이 힐끗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할 말이지, 닉. 젊은 사람이 케케묵은 노래들을 좋아하니 신기해. 나야 학교 다닐 때 공부하느라고 외웠던 것뿐이지만.”
그때 마침 처음 듣는 노래 하나가 시작되었다.
“이 노래는 못 들어봤네. 최근 노랜가봐?”
“못 들어봤다고? 1960년경의 히트곡인데! ...하긴 너무 옛날 노래군. ‘사랑한다고 로라에게 전해주오(Tell Laura I Love Her)’라는 노랜데... 아니, 이 금지곡이 왜 여기 있는 거지?”
닉이 설명을 하다 말고 혼잣말을 했다.
“금지곡이라니? 미국에도 금지곡이 있나?”
나는 이해를 못 했다. 닉이 얼른 손을 뻗어 노래를 다시 틀고는 전주가 나오는 동안 빠르게 말했다.
“가사가 문제지. ...카 레이스에 나간 청년이 사고로 죽으면서 로라를 사랑한다고 유언을 남기는 내용이거든. 혹시 우리 로라가 듣게 될까봐 차에 두지 않기로 했던 건데,,,”
“로라가 이 노래를 싫어하나 보지?”
“그게 아니라... 잘 들어 봐.”
전주가 끝나고 막 노래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 부분이 감동적이었다.
“사랑한다고 전해 주오. 그리고 울지 말라고 말해 주오. 내 사랑은 죽지 않을 것이니.”
노래가 끝나고 닉은 디스크를 꺼내 케이스에 넣었다.
“끝이 좋군. 죽은 뒤에도 계속 사랑하리라는 마지막 말이 감동적이야. 내 생각엔 로라가 들어도 꼭 슬퍼할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레이서의 이름이 문제지. 우리 로라의 남편과 똑같은, 타미(Tommy)이거든.”
“타미? ...내가 그걸 놓쳤었군. 맞아. 그녀의 남편이 타미였지!”
이야기가 끝나고도 나는 혼자 생각을 계속했다. 그녀도 어쩌면 이 노래를 잘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불현듯 이 노래의 주인공 타미가 떠올라 남편의 죽음과 겹쳐지면서 갑자기 슬픔에 빠지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 후 한동안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와 사무실에 막 들어선 순간이었다. 그녀의 책상 뒤, 벽에 기대여 있는 기다란 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던 스틱이 왜 그날따라 눈길을 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웬 아이스하키 스틱 같은 걸 갖고 있지요?”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이스하키요? 그렇다고 보기엔 너무 작지 않을까요?”
그녀는 눈 끝에 웃음을 담고 말했다.
“그렇기는 한데...”
“골프 퍼터(putter)예요.”
“에에? 무슨 퍼터가 그렇게 생겼죠?”
나는 어린애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퍼터를 집어 들어 카버를 벗기고 내밀었다. 목 부분이 옛날 영국 뱃사람들의 담배 파이프처럼 두툼하게 휘어 있는 L자 모양의 나무 퍼터였다.
“정말 이걸로 공을 칠 수 있나요?”
어쩌면 모양만 퍼터인 목각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럼요. 타미가 얼마나 좋아하는 물건인데요? 이걸로 치면 버디(birdie/표준보다 1점 좋은 스코어)가 쏟아진다나요.”
그녀는 마치 지금도 남편이 쓰고 있는 퍼터인 것처럼 말했다.
“나는 이걸로는 버디는커녕 보기(bogey/표준보다 1점 나쁜 스코어)도 못 하겠네요. 남편께서는 프로급이셨던가 보죠? 하지만 취미가 좀 특이한 분이셨나 봐요. 이런 이상한 퍼터를 쓰시다니.”
“시아버님의 결혼 3주년 선물이에요. 이 퍼터를 몇 달 못 쓴 채로 갑자기 집을 떠났었는데...”
바로 그때 전화 벨이 울려서 이야기가 끊어졌다. 나는 방에 들어가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남편 타미의 이야기를 꼭 살아 있는 사람 말하듯 했었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일까.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어딘가 다녀오려고 집을 떠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지금도 언젠가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녀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또 내가 스스로 알아맞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로라라는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걱정했듯이 그녀가 타미—남편 타미이든 노래의 주인공이든—를 떠올리며 갑자기 슬픔에 빠지게 될 위험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스앤젤레스는 주재원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곳이었다. 우선 오후 5시 퇴근 시간이 되어서야 서울은 겨우 출근 시간인 아침 9시였다. 그러므로 근무시간 중에 불쑥 전화가 걸려 올 일이 없었다. 일 년 중 여덟 달이나 그랬다.
게다가 골프의 천국이었다. 롱비치 북부의 사무실 주변만 해도 십오 분 거리에 퍼블릭 코스가 다섯 개나 있었다. 평일이면 미리 예약을 해 놓을 필요도 없었고, 해가 긴 날은 오후 세 시가 넘어 갑자기 사무실을 뛰쳐나가도 18홀을 다 돌 수가 있었다. 나는 걸핏하면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있는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어 골프장으로 불러내곤 했다.
사무실에는 일거리가 많지 않았다. 때때로 롱비치 부두에 드나드는 수출입 화물이 있을 때 통관이나 하역 때문에 잠시 나갔다 오는 일을 빼고는 시간에 맞춰 처리해야 할 일이라곤 없었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들은 닉이 항상 해 오던 대로 처리하고 나서 나에게는 결과만 알려주어도 충분했다.
거기에다 그녀까지 드러내 놓고 나의 골프를 격려했다.
“이 좋은 계절에 젊은 사람이 사무실에나 있으면 되겠어요?”
심지어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언젠가 한 번 퇴근 시간 가까이에 서울에서 전화가 왔을 때는 긴급 회의가 있어 세관에 나갔다고 둘러대 주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자유로웠다. 어떤 때는 닉이나 로라가 혹시 어디선가 내 아내에 대한 뒷이야기—회장의 조카딸이라는—를 들은 것이 아닐까 의심까지 할 만큼, 둘 다 좀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고 협조적이었다. 아마도 사실은 외국 생활에 힘겨워하는 나를 도와주려는 것뿐이었겠지만.
물론 그들만 나에게 잘 대해 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닉과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냈을 뿐 아니라 로라를 마음속으로부터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목요일 오후마다 미장원에 갔었다. 그럴 때면 종종 닉도 볼일을 보러 나가곤 해서, 나는 그날만은 골프도 치러 나가지 않고 혼자 텅 빈 홀에 나와 앉아 라디오로 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네 시 반쯤 되면 그녀는 약간 웨이브 진 은발을 반짝이며 사무실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부끄럼과 자랑이 조금씩 교차하는 것 같은 그녀의 웃음을 볼 때마다 어렸을 적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는 맑은 날 오후면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만져 놓고는 자랑하듯 나를 쳐다보며 웃곤 했었다. 나는 엄마에게 그랬듯이 그녀를 쳐다보며 어린 아들 같은 미소를 보내곤 했다.
한편으로는 나이 든 그녀가 주말마다 무슨 일이 있기에 꼭 머리를 예쁘게 다듬어 놓아야 하는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 번은 닉에게 물어보았었다.
“로라는 저 나이에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는가봐? 저렇게 열심히 머리를 매만지는 걸 보면? ...도대체 나이가 몇인 거지?”
“데이트엔 나이 제한이 없지.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오버 피프티(over 50)’인 것만은 확실하겠지. 얼마만큼 오버인지는 몰라도.”
“인사 서류에 나와 있지 않아?”
“우린 그런 서류를 안 만들거든.”
“정말? 과연 미국이로군. 여자의 나이를 묻지 않는다더니!”
“알아봤자 뭐하겠어? 주말마다 데이트를 하든, 아니면 죽은 남편의 무덤을 찾아가든, 그런 걸 알면 또 무엇에 쓰겠어?”
“그건 그렇지.”
그러다가 어느 목요일 오후, 드디어 그녀의 비밀 한 가지가 베일을 벗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긋이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 하나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로라는 외출 중인데요. 네 시 반쯤은 돼야 돌아올 것 같아요.”
나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말했다. 머리카락은 완전히 백발이었다. 그러나 건장한 체격에 윤기 있는 피부와 기운찬 목소리까지 갖추고 있어 노인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코마로프라는 러시아계 이름을 갖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는데, 볼 일이 있어 내려온 김에 오랜 친구인 로라를 만나 보려고 들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보다 그의 이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저... 코마로프라면 혹시 러시아계 이름인 코마로프스키와 관련이 있으신가요?”
그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네. 원래 이름이 코마로프스키였었는데, 아버지 때 미국으로 오면서 ‘스키’를 떼어버리게 된 거죠.”
“그렇군요. 책에서 본 이름이라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사실은 책이 아니라 영화에서 본 것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여튼 추측이 들어맞아 기분이 좋았다.
그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로라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그를 더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저녁에 집으로 전화하겠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는 그냥 놓아 주고 말았다.
“당신의 보이프렌드가 왔었어요, 라라.”
네 시 반에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특종 뉴스를 전하는 기자처럼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그러면서 일부러 그녀를 라라라고 불렀다.
“네에? 보이프렌드요?”
그녀는 얼른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시베리아에서 코마로프스키가 왔었다고요.”
“어디서, 누가요?”
“아니, 샌프란시스코에서 코마로프라는 분이요.”
“아아, ...그 분이 웬일로...”
그녀는 혼자 생각을 더듬으며 눈길을 천정 쪽으로 보냈다. 나는 코마로프의 말을 자세히 전해 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참, 그분은 보이프렌드가 아니고 그냥 프렌드예요.”
그녀가 목소리를 조금 높이고 말했다.
“그래요? ...하긴 나 혼자 그렇게 상상해 본 것뿐이지요. 이름 때문에.”
“이름 때문에? ......”
그녀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의사 지바고 영화... 봤지요? 거기 나오는, 몸집도 좀 있고 나이도 좀 든 사람...”
“아, 세력도 좀 있는 사람요?”
“네. 그 사람 이름이 코마로프스키죠, 당신의 친구 코마로프 씨도 원래 이름에 스키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까 처음에 시베리아에서 코마로프스키가 왔었다고 말했군요. 하지만... 그 이름과 보이프렌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네요.”
“코마로프스키와 라라의 관계를 모르나 봐요?”
나는 이렇게 말해 놓고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그건 알죠. 하지만... 설령 코마로프 씨는 이름 때문에 의사 지바고의 그 남자로 상상해 본다 치더라도, 나는 어떻게 그 라라가 될 수 있죠?”
그녀는 이제야 문제의 핵심을 알았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이름 때문이죠. 라라라는 이름!”
나는 일부러 강한 액센트로 라라를 발음했다.
“내 이름이 라라? ...킴!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나를 라라로 알고 있었던 거군요? 로라를 불분명하게 발음한 게 아니라!”
“그래요. 처음에 라라인 줄 알았었죠. 공항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 들었거든요. 그 뒤에 로라인 걸 알았지만, 자꾸 저절로 원래의 이름이 나왔었죠.”
“아아!”
라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아직도 당신이 라라인 것만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죠, 라라? 아니, 로라?”
나는 이제는 라라라는 이름을 영영 포기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뇨, 그냥 라라로 부르세요. 좋은 이름이니까. 닉네임으로 삼죠.”
그리고는 조금 신이 난 듯 혼잣말을 반복했다.
“라라! 하하하, 내가 라라가 되었네. 나이 든 라라!”
이렇게 해서 라라는 정식으로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남편 타미도, 친구 코마로프도, 회사 동료 닉도, 아무도 모르는 오직 그녀와 나 사이의 비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해가 가고 또 가고, 어느새 주재원 생활 오 년의 마지막 해도 빠른 속도로 한 달 한 달 줄어들고 있었을 때, 로스앤젤레스 일대의 거래처 사장들을 초청해 공식 파티를 열게 되었다. 손님들을 배웅하고 나서 셋이 함께 마지막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잠깐 닉이 자리를 뜬 사이에 라라가 불쑥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킴, 내 후임자를 좀 알아봐 주세요,”
“그게 무슨 농담이오, 라라?”
“농담이 아니에요. 언제까지나 회사만 다닐 수는 없잖아요?”
“회사를 안 다니면 뭘 하시려고요?”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죠, 죽음을 포함해서.”
“라라, 무슨 그런 말을...? 나 같이 막 사는 사람도 아무 준비를 안 하는데...”
“나도 젊다면 왜 준비를 하겠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닉이 돌아왔다. 라라는 먼저 가겠다며 일어섰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들려주자 닉은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그냥 무시해 버리자고 했다.
그런 채로 두 주일이 지나갔다. 라라가 정식으로 닉과 나를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사실은 내가 몸이 너무 좋지 않아 더 일하기가 어려워요. 빨리 후임자를 뽑아 주세요.”
닉은 머리를 끄덕였지만 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라라, 그렇다면 그냥 쉬세요.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마음 놓고 조퇴나 결석도 하고, 그러면서 빨리 나으세요. 그럴 땐 내가 대신 일을 할 테니.”
나는 정말 그러기를 원했다. 그러나 라라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정도로 나을 수 있는 병이 못 돼요. 내 말대로 하세요. 그래야 편하게 집에서 쉬지요.”
그 말에는 나도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임자를 두 주일 동안 가르쳐 놓고 라라는 집으로 아주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함께 저녁을 먹고 나서 포옹을 한 채로 그녀는 말했다.
“킴, 오 년 동안 즐겁고 행복했어요. 특히 나를 라라로 불러 주어서 너무 고마웠어요. 그 바람에 젊었던 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했어요. 죽은 뒤에도 잊지 못할 거에요.”
나는 그 말을 막연하게 감상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오히려 라라에게 감사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난 엄마가 생각났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라라가 떠난 뒤로 그녀의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빈 사무실을 드나드는 것이 너무나 쓸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귀국 날짜가 한 달 한 달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위안으로 여겨졌다.
몇 달 후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마침 모두들 외출하고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아, 코마로프 씨.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로라는 몇 달 전 몸이 많이 아프다며...”
나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코마로프의 얼굴이 무척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주저앉듯이 가슴이 내려앉았다.
“로라는 이제 더는 아프지도 않을 겁니다.”
코마로프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내밀었다. 장례식의 일시와 약도가 들어 있는 안내장이었다.
롱비치 성당의 장례 미사는 아주 조용히 진행되었다. 참석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미사가 끝나고 잠깐 동안 추도 순서가 있었다. 먼저 여동생이 인사에 이어 언니를 추억했다.
“언니와 나는 어려서—그때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았었는데—부터 자매보다는 친구로 자라났지요. 그러나 둘 다 결혼해 언니는 로스앤젤레스로, 나는 뉴욕으로 떨어져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게 됐었지요. 그러다가 언니가 혼자가 되었기에 뉴욕에 와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언니는 남편의 추억이 있는 이곳을 끝내 떠나지 않았지요. 이제는 나중에 내가 죽어 천국에나 가야 다시 만나게 되겠네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코마로프에게 추도사를 부탁했다. 코마로프의 말—추도사라기보다는 회고담이었다—은 미리 준비해 오지 못했던지 그다지 매끄럽지 않았지만, 듣고 있을수록 감동이 일어났다. 내용을 정리해 보면 이러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로라의 남편 타미와 친구가 되었지요. 타미가 로라와 결혼해 로스앤젤레스에 신혼집—그의 근무지였던 공군 기지에서 롱비치 쪽으로 조금 내려온 곳이었다고 기억합니다—을 꾸린 뒤에는 내가 종종 주말에 내려와 셋이서 함께 지내며 때로는 골프도 함께 치곤 했었지요. 그러면서 자연히 로라와도 절친한 친구가 되었지요. 타미가 뜻하지 않게 타계한 뒤 로라가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지 않고 신혼살림을 했던 이곳에 계속 머무는 것을 보며 무척 안타까웠었지요. 나중 몇 번은 로라에게 재혼을 권해 보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자신은 여전히 타미의 아내라고만 대답할 뿐이었지요. 이제 로라마저 세상을 떠나버리니, 개인적으로는 일생의 두 친구를 모두 잃은 슬픔을 견딜 수 없지만, 한편 로라를 위해서는 오히려 이제 마음을 놓게 되었군요. 로라는 그동안 떨어져 그리워했던 영원한 남편 타미와 오늘 다시 완전히 결합하는 것이니까요. 천국에서 이어질 타미와 로라의 내세의 삶이 옛날 이승에서 그랬듯이 마냥 행복하기를 빕니다.”
장례식 다음 날 나는 아내와 둘이서 귀국을 앞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쪽으로 자유롭게 며칠 다녀오는 여행이었다. 가깝고 잘 아는 곳이어서 간단히 다녀올 생각에 그리로 방향을 정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문득 이 여행이 사실은 라라를 대신한 여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할수록 여행의 중심에 라라가 있는 것 같았다. 라라는 먼저 떠난 타미를 추억하며 사느라고, 어쩌면 다시 살아서 돌아올는지도 모를 타미를 기다리느라고, 고향인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곳은 그녀에게 남편 타미를 낳아 주었던 감사의 땅이기도 했고, 동시에 타미의 친구이자 평생 몰래 라라를 사랑했던 코마로프—나 혼자 그렇게 추측한 것이지만—가 혼자 살고 있는 외로운 땅이기도 했다.
여행은 그 때문엔지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했다. 물론 천천히 하루 이틀 더 있다가 돌아와도 안 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왠지 처음 정한 일정대로 정확하게 돌아오고 싶었다. 마지막 날 빅서(Big Sur)—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내려오는 도중에 거치게 되는 해안 명승지—에서 하룻밤만 자고 가자는 아내의 청을 물리치고 일요일 밤중에 무리하게 달려 내려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음날인 월요일은 롱비치에서의 마지막 월요일이었다. 피곤했던 끝이어서 출근이 좀 늦어졌었는데, 책상 위에 편지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에 온 편지라고 했다. 라라의 여동생이 보낸 것이었다.
“인사장이겠군.”
그러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빨리 봉투를 뜯지 못하고 한동안 손에 들고만 있었다.
편지는 아주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은 편지의 첫 줄을 읽자 너무 급하게 가슴이 뛰어 곧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겨우겨우 읽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킴, 내 장례식에 와 줘서 고마워요. 항상 나에게 너무 잘 해 주었어요. 죽은 뒤에도 잊지 않겠다고 말했었지요? 정말 잊지 않을 거예요. 행복하기 바래요.”
편지 끝의 두 단어, “Love, Lara.(사랑하는, 라라)”는 사실 확실하게 읽지도 못했다. 눈이 너무 젖었기 때문이다. 젖은 눈 속에는 라라가 들어 있었다. 오 년 전 공항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단정했던 은발이 하얀 이마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얼굴 위로 다른 얼굴 하나가 겹쳐져 있었다. 어렸을 때 보았던 엄마의 얼굴이었다. 나는 꿈을 꾸고 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 문 앞에 코마로프 씨가 서 있었다. 기다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귀한 물건이라 직접 가지고 왔습니다. 로라의 편지를 받으셨을 테니 따로 설명을 안 해도 되겠지요?”
코마로프는 꾸러미를 두 손으로 전하고는 바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다고 했다. 나도 곧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자, 성직자처럼 어깨를 붙잡고 축복을 해 주었다.
나는 포장을 뜯어 라라의 선물—내 삼십오 회 생일의 선물이라고 여기고 싶었다—을 꺼내 벽에 잘 기대어 놓고 다시 편지를 집어 들었다. 뒷장에,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P.S.(추신)—타미의 나무 퍼터를 친구 편에 보내니 받아 주세요. 지금으로부터 꼭 삼십오 년 전, 타미가 한국 파견 근무 중 정찰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난 뒤 지금까지 줄곧 나를 지켜주었던 이 ”지팡이“—원문의 ”Stick“이라는 단어에 인용부호가 붙어 있었고 첫 자가 대문자였다—를 당신에게 드리는 내 마음을 알리라고 생각해요. 당신의 미소가 타미를 닮은 것 같아, 볼 때마다 항상 그를 만난 듯 즐거웠음에 감사드려요. L.”
나는 한참 동안 하얀 벽을 향하고 앉아서 화살처럼 지나가 버린 라라와의 오 년을 돌이켜 본 다음, 편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고, 벽에 기대 놓았던 라라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 이름의 이니셜 L과 몹시도 닮은 아름다운 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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