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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기행
[0068]사무친 단절의 강… 가야할 기약의 강(두만강:1) 한국일보 940621 09면 기획 1983자
◎「푸른 물」 간데 없고 맺힌 한 탁류되어… 두만강은 푸르지 않다. 백두산기슭 발원지에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류 쪽만 그런 대로 「두만강 푸른 물에…」라는 김정구의 노랫말다운 물빛을 띠고 있을 뿐이다. 그 아래로는 오염에 찌들대로 찌든 검은 탁류가 동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검은 강물은 어쩔 수 없는 두만강의 현실이다. 그러나 물 빛깔이 어떻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두만강은 현실 너머에 있다. 여울마다 모래톱마다 또는 강변 고갯길마다 절절하게 녹아 들어 있는 우리 삶의 끈끈한 자취들이 두만강을 현실의 강이 아닌 이미지의 강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강을 따라 이루어진 한민족의 역사가 어찌 한과 설움뿐이랴 마는 우리 정서 속의 두만강은 1870년대 이후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민족수난사와 겹쳐진 모습이다. 실개천이 마을하천쯤으로 넓어진 뒤 비로소 두만강이 강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개산둔(개산툰으로 읽는다)지역 중류에 통한의 섬 간도가 버려진 듯 자리잡고 있다. 말이 섬이지 고구마모양의 작은 강상 퇴적지에 지나지 않는 이곳이야말로 만주벌판으로 흩어져간 조선족 이민자들의 첫 발길이 닿은 곳이며 두만강이 상징하는 한과 설움의 발원지이다. 한 줌의 곡식과 감자 몇 알을 위해 밤이면 목숨을 걸고 이 사잇섬을 디딤돌 삼아 강을 건너던 참담한 가장의 모습은 이제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만주의 혹독한 북풍에 이지러진 버드나무 사이로 군데군데 눈에 뛰는 억새 밭 만이 무심한 세월을 속절없이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세대를 뛰어 넘어 국민가요가 되어버린 김정구의 「두만강」도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작사자 김용호는 35년 당시 간도에 이웃한 선구마을 나루터에 들렀다가 일경에 의해 옥사한 남편을 따라 바로 그 날 이곳 두만강에 몸을 던진 조선아낙의 애달픈 사연을 노랫말로 지었다. 예사롭지 않게 태어난 「두만강」노래는 두만강을 더욱 두만강답게 만들었다. 그 옛날 조선이주민의 행로를 좇아 간도를 등지고 만주벌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험준한 산령이 앞을 막아 서고 계곡과 능선을 따라 실타래처럼 풀려 있는 길이 아스라하게 눈에 잡힌다. 아흔아홉 굽이마다 어느 한 곳 눈물 배지 않은 땅이 없을 이 고개가 바로 한 많은 아리랑고개다. 남부녀대한 초라한 행렬에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설렘따위는 애초부터 있을리 없었다. 두고 온 고향생각만으로도 서러운 이주민들에게 흉악한 비적들의 잦은 출몰은 큰 위협이었다. 그들이 고개를 넘으며 부르던 「집 잃고 밭 잃은 동무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라는 「아리랑」가락에는 그래서 구슬픈 한이 서려 있다. 아리랑고개를 힘들여 넘은 이주민들은 논밭을 일구어 낼만한 땅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건 뿌리를 내렸다. 선구자의 땅 농정도 그런 곳이다. 용정 벌 넓은 들판 한 켠에 솟은 비암산 꼭대기 일송정에 서면 벌판을 가로질러 용틀임하듯 휘어져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 해란강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석양이 만주의 흙먼지를 붉게 물들일 때면 해란강 물줄기를 따라 말 달리는 선구자의 비장한 모습이 손에 잡힐 듯 환영으로 떠 오른다. 강을 건넌 그들 모두에게 두만강은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강, 기약의 강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만강은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닫혀 있다. 중국과 북한의 두만강하류 통상로인 도문 해관에서는 오늘도 핏줄이 헤어지는 애끊는 이별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시간이 멎어 있는 것 같은 두만강에는 여전히 눈물이 섞여 흐르고 강가에서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기다림이 이어지고 있다. 두만강은 그런 곳이다. 두만 강변 어느 마을에건 들러 누구를 붙들고 얘기를 건네든 한스런 사연이 끝없이 풀려 나오는 곳이다. 두만강 물길을 따라가는 것은 그러므로 두만강이 상징하는 민족 정서의 실체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발치를 흐르는 강물은 검은 빛이지만 돌아서 떠올리면 다시 푸른 빛이다. 현실 너머에 있는 우리 속의 두만강은 더럽혀져 있지 않다. 두만강은 언제나 푸른 물이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열기자기획취재부>
[0067]“원시림속 원지”큰강을 잉테하고…(두만강:2) 한국일보 940628 09면 기획 2617자
◎하늘가린 숲 속 경승지에 「김일성낚시터」 무릇 만물의 시원은 대체로 명쾌하지 않은 법이다. 더욱이 의미있는 것일수록 시원이 가려져 스스로의 신비한 무게를 더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두만강임에랴. 두만강의 발원을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더 힘이 들었다. 시기마다 기록마다 심지어 주장하는 이마다 두만강의 발원점은 서로 다르다. 상류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실개천같은 물줄기들이 여기저기서 합치고 갈라지는 까닭이다. 그나마 북한쪽의 물길은 더듬어 확인할 길조차 없다. 백두산 동편 고원지대의 원시림 속에서 가까스로 찾아낸 원지는 그러므로 「현재 중국 측이 두만강의 발원지로 주장하는 곳」이라는 주석을 붙여야 마땅하다. 원목운반 트럭들이나 이따금 오가는 좁은 산길에서 숲속 사잇길로 꺾어 들자마자 돌연 시야가 탁 트이면서 거짓말처럼 호수가 떠오른다. 워낙 감쪽같이 길에서 고립 돼 있는 탓에 노련한 현지안내인조차 몇번을 지나치며 헤맸다. 자작 나무숲과 좁은 늪지에 둘려 있는 이 산중호수는 둘레가 족히 10리는 될법한 크기에 거의 완전한 원형이다. 원지라는 이름도 그래서 얻은 것이다. 인적이 전혀 없어 사위가 적막한 호수에 물이 드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두만강의 한 갈래는 아직 사연을 만들지 않은 무구한 모습으로 이제 막 그 긴 여정을 시작할 참이다. 원지 한 귀퉁이를 빠져나간 물줄기는 약류하라는 어울리지 않게 큼직한 이름을 달고 지하와 지표면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1㏄쯤 동진하다. 북한땅 적봉을 돌아 나온 홍토수를 만나 합수한다. 홍토수의 굵기도 딱 약류하 정도이다. 폭 1m도 안되는 물줄기를 하라고 부르다니…. 중국인의 예의 그 과장버릇이 이곳 작명에 서도 드러나 웃음을 머금게 한다. 약류하와 홍토수의 합수목에 이르러서야 물줄기는 비로소 두만강이 된다. 이 개울이 말하자면 국경하천으로 두만강의 시작점인 것이다. 이 때문에 여러 기록과 보도에서 자주 원지로 잘못 소개되는 곳이기도 하다. 개울을 건너면 바로 북한 땅이다. 양 켠에 한 발씩 걸쳐 놓기도 하고 두 발을 모두 북한 땅에 옮겨보기도 하는 사이 사람과 이념의 가름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남북의 합수 머리는 도대체 어디쯤인가 하는 상념이 꼬리를 물면서 장난스러움은 어느덧 쓸쓸함으로 바뀐다. 주변을 온통 뒤덮은 억새풀들만 바람결을 따라 누웠다가 일어나기를 속절없이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멀지 않은 관목숲 속에 북·중국경비가 서 있다. 1962년 아래편 지류석을수에서부터 이곳으로 국경을 재조정할 때 세워진 높이 1m정도의 화강암 비에는 21호 국경비라고 씌어 있다. 이제부터 두만강물길을 따라가는 본격여정이 시작된다. 개울은 좀처럼 넓어지지 않고 돌 틈으로 덤불사이로 숨바꼭질을 하는 사이 억새밭은 뒤로 물러가고 다시 하늘을 가린 숲길로 접어든다. 가문비, 낙엽송, 잎갈나무 등이 뒤섞인 틈에 줄기 흰 자작나무군락이 반점처럼 박혀 있다. 문득 「두만강변 산보놀이금지」경고판이 막아선다. 두만강 상류에서는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는 여기가 이른바 「김일성 낚시터」다. 좁은 개울 중앙을 3m쯤 비워두고 폭 넓은 목재가교가 걸쳐져 있다. 김일성이 만주에서 빨치산운동을 할 당시 이곳에서 두만강의 명물 산천어를 낚으며 훗날 최대 승첩으로 자랑하게 될 「보천보 전투」를 구상했다는 곳이다. 북한측에서는 인민들이 한번은 순례해야 할 「성지」로 정해 언덕너머에 빈관(여관)과 양어장 등 구색을 갖춰 단장해 놓았다는 현지인의 설명이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에게야 나들이장소 이상이 아닐 터이다. 오랜 세월 풍우에 씻긴 잿빛 널빤지 위에 앉아 숨돌리려던 차에 건너편 북한초소 앞에 총 든 경비병이 불쑥 날카로운 눈초리를 드러낸다. 자칫 자극했다가는 봉변을 당하거나 곧바로 중국초소에 항의가 전달돼 남은 여정을 망치게 된다는 안내인의 겁 질린「협박」에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두만강은 발원지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역사에 치이고 긁힌 상처들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다. ◎강의 어원과 길이/만족어 투먼」설 유력… 5백47∼6백10㎞ 주장 “분분” 두만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갈래 설명이 있으나 만족어 「투먼」을 한자음으로 차용한 도문강이 두만강으로 전이 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투먼은 만 갈래 물의 원천, 혹은 만 갈래 물길의 흐름이 합쳐지는 합수 머리라는 뜻이니 두만강에 손색없는 이름이다. 도문색금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다. 여진말로 새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이 이름 외에도 고려강, 도문강, 통문강등 갖가지로 불러왔으나 우리 기록에서는 늘 일관되게 두만강이었다. 두만강의 길이에 대해서도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북한과 중국간의 국경조정(62년) 이전까지 국경하천이었던 석을수를 원천으로 잡을 경우 두만강의 길이는 대체로 5백47㎞가 된다. 대부분의 국내자료에 이렇게 나와 있으며 한국일보의 시리즈도 이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그러나 지금은 홍토수와 약류하의 합수 지점에 국경비가 선 만큼 원지나 홍토수의 발원지부터 실측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아직 이 길이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상류의 물줄기 중 가장 긴 북한쪽 서두수를 기준으로 하면 대략 6백10㎞로 훨씬 늘어난다. 이 경우 두만강은 낙동강을 제치고 압록강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긴 강이 된다.
[0063]개울건너 작은 마을은 북한 땅인데…(두만강:3) 한국일보 940705 09면 기획 2465자◎잔뜩굳은 북주민… 멋쩍게 끝난 첫 만남 중국 쪽 국경마을인 숭선, 노과 등을 거쳐 함경북도 무산까지를 두만강의 상류로 잡을 수 있다. 강의 전체 길이로 보아 대략 첫 3분의 1쯤 되는 구간이다. 여기까지는 강폭이 넓은 곳도 고작 10 안쪽이며 바짓단을 두어번 감아 접기만 하면 옷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아직 강이라기보다는 우리 시골 어디서나 친숙한 마을하천 정도의 모습이다. 김일성 낚시터를 떠난 외줄기 길은 곧 물길과 헤어져 하늘을 가린 삼림지대로 접어든다. 달리는 것이 내내 미덥지 않은 낡은 일제 도요타지프 속에서 두어 시간 시달리고 나서야 다시 강줄기를 만난다. 강 양안은 깎아 지른 산세가 대칭을 이룬 절경이다. 초가가 50호 남짓 되는 첫 강변마을 대동촌을 지나면서부터 비로소 강은 원시자연의 모습을 버리고 인간의 삶이 기대는 생활의 터로 바뀌기 시작한다. 대동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좁은 강 위에 나무다리가 엉성하게 걸려 있고 다리중앙에는 철문이 양편을 가르고 있다. 북한의 원목이 넘어오는 곳이다. 정식 통상로인 해관이 아닌 탓에 이름도 없는 곳이지만 교역량은 상당하다는 안내인의 설명이다. 북한산 원목은 여기서 옥수수 등 중국산 곡물로 교환된다. 다리에서 20여 아래쪽에 있는 북한산 원목을 쌓아두는 목재 집하장에서 강을 막 건너와 트럭에서 나무를 부리는 북한인부 서너 명과 마주쳤다. 국방색 인민모와 검은 상의에 말라서 광대뼈가 불거진 얼굴이 완강하게 굳어 있다. 담배를 권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말을 붙여보았으나 경계의 눈초리만 보낼 뿐 끝내 대거리하려 하지 않았다. 두만강을 향하면서부터 오랫동안 기다려온 북한주민과의 첫 만남은 이렇듯 간단하고도 멋쩍게 끝나버렸다. 이 후로도 동해에 이르는 곳까지 강변의 북한 땅은 늘 손에 잡힐 듯 가까웠지만 바라보는 것 이상의 틈입을 결코 허용치 않았다. 두만강은 중국인들에게나 의지하고 더불어 사는 물일 뿐 우리에게는 여전히 단절의 경계선인 것이다. 북한측 지류인 서두수가 합쳐지는 물목 어귀에 숭선향 소재지인 고성리가 있다. 향은 우리의 움정도 되는 곳으로 번듯한 기와집이 섞여 1백호가 넘는 꽤 큰 마을이다. 이곳에 해관이 있고 건너편 북한 삼장리나루와는 허술한 다리로 이어져 있다. 납작한 밑바닥을 드러낸 채 나루터에 누워 있는 녹슨 폐철선은 얼마 전 중국의 단속이 강화되기 이전까지 허약한 목재가교를 피해 북한에서 밀수 승용차를 실어 나르던 배다. 밀수라도 해서 살아가야 하는 북한의 현실은 강 언덕에 올라섰을 때 더욱 확연해졌다. 해관 뒤편의 마을 골목마다 대부분 흰색인 일제 중고승용차들이 단속이 허술해지기를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곁 절벽중간 콘크리트호의 총안(총안)이 풍기는 살벌함에 대비되어 그런지 승용차들의 광채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허세처럼 보였다. 숭선을 떠나 노과를 거쳐 무산에 닿는 강에는 유난히 낚시꾼과 천렵하는 이들이 많다. 꺽지, 버들치 따위의 민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직업적 어부들이다. 하루종일 강물에 발을 담그고 그물과 뜰 채와 씨름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마리 당 30전(한화 30원 가량)에 하루 1백 마리씩 내다 판다니 15년 이상 된 공무원 월급이 3백원(한화 3만원상당)에 비하면 대단한 수입이다. 강가에 비닐텐트와 아궁이까지 만들어 놓고 눌러 사는 스무살 난 조선족청년은 자주 북한쪽 기슭으로 올라가서 그물을 치는데 두발을 다 디디면 월경 죄로 처벌받지만 한 발만 걸치면 「일없다」(괜찮다)고 한다. 그에게는 국경보다 물고기가 더 중요하다. 두만강에서 낚시꾼을 볼 수 있는 푸른 물은 겨우 여기까지였다. ◎북한의 차 밀수/외제승용차 공해서 받아 중국에 밀매“돈 벌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은 자동차 전시장이라고 할 만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비포장길을 다니는 차들 중에는 뜻밖에도 벤츠, 볼보, 링컨, 캐딜락같은 세계적 명차들이 많다. 가장 많고 인기 있는 외제차는 일제로 대부분 중고차지만 도요타의 렉서스같은 최신형도 쉽게 눈에 뛰며 그랜저, 포텐샤를 비롯한 국산차도 거의 전부를 만날 수 있다. 합작기업의 업무용으로 들여온 것 등을 제외하면 이 많은 외제승용차의 태반이 밀수품이며 그것도 대부분 북한을 통해 들어온 것이다. 자동차밀수는 북한고위층이 관할하는 대성무역상사가 손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해의 공해상에서 일본인들로부터 넘겨 받아 두만강 압록강의 해관 등이 있는 국경마을로 들여보낸다는 것이다. 현지 중국인은 『주로 차령 5∼10년쯤 되는 차들』이라며 『북한은 대당 1만 달러 내외의 이익을 남긴다』고 말했다. 한해 1만대를 넘기도 했다는 외제승용차의 밀반입은 올 들어 급격히 줄어 들었다. 밀수를 묵인 내지 방조하다시피 해온 중국이 지난해 11월부터 강변에 무장경찰을 별도로 배치, 강력단속을 시작한 때문이다. 그렇다고 밀수가 근절될 것으로 보는 이는 별로 없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그렇고 자본주의 물건에 맛들인 중국인들의 만만찮은 수요도 밀수를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강폭이 좁고 인적이 드문 두만강상류가 밀수현장으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0062]박제된 잿빛 철광도시 무산(두만강:4) 한국일보 940712 09면 기획 2685자◎발아래 펼쳐진 채색풍광… 회색시가… 인적드문 “북한의 창” 노과마을을 지나면서 강폭은 제법 넓어지고 강 양안으로는 험준한 산세 대신 옥수수등속의 밭작물이 자라는 야트막한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두만강이 비로소 강다워지는 이곳 상류 끝 언저리에 북한땅 무산이 자리잡고 있다. 함북 무산은 추정매장량이 13억 톤이나 되는 동양최대의 철광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곳이다. 명성답게 도시 왼편 샛강 성수천을 따라 버려진 버력(잡석)더미가 족히 서울의 남산크기는 넘어 보일 만큼 엄청나고 시가지를 온통 흔들어 놓는 발파음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무산은 백두산 언저리에서 베어진 원목들이 무산선, 백무선 등의 산림철도와 뗏목를 통해 모아지고 가공되는 두만 강변의 최대 목재집산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산이 각별한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다. 무산 땅이 넓고 낮은 개활지인 반면 두만강 이편 중국 쪽은 거칠고 높은 언덕과 산등성이로 이루어져 있어 강변 언덕에 올라 서면 무산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온다. 더욱이 두만강이라는 것도 여기서는 한 달음에 뛰어 건널만한 너비여서 강변 쪽 동네는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이거니와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도시 남쪽 끝까지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북한의 도시와 주민의 생활모습을 볼 양이면 이 강 안에서 하룻밤쯤 묵으면 그만이다. 혹시 이 강변에 선 사람이 실향민이라면 무산출신이 아니더라도 틀림없이 북받치는 망향의 설움에 눈물을 가누기 힘들 것이다. 말하자면 무산은 비교적 분식되지 않은 북한을 볼 수 있는 창과도 같은 곳이다. 무산은 우리로 따지자면 인구 10만∼20만 가량의 지방 소도시 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으나 샛강을 낀 철광에다 두만 강변의 대규모 목재창과 제재소, 낮은 구릉지대에 구획이 잘 된 주택지 등이 상당히 조화롭게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꽤 넓은 터를 차지한 시가지의 중앙 기차역에서는 연신 증기기관차의 연기가 뿜어져 올라가고 외곽 산등성이마다 살구 밭이 펼쳐져 5월의 제철 만난 연분홍 꽃들이 흡사 구름처럼 흐드러졌다. 여느 광산촌과 달리 자연풍광과 시가지가 그림같이 어우러진 곳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첫 인상은 곧 우울한 잿빛으로 바뀌어버린다. 도시 전체에서 아무런 빛깔이나 표정이 느껴지지 않는 탓이다. 두, 세칸 쯤 돼 보이는 회색의 낡은 단층주택들이 같은 기계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모습으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고 지붕마다 뽑혀 올라간 검은 굴뚝도 마치 사열대의 어깨총 자세마냥 일사불란하다. 돌출한 4∼5층짜리 큰 건물 몇동은 김일성 노작 학습당이거나 노동당사 등인데 어김없이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따위 구호의 붉은 색이 무채색 배경 때문에 한층 생경해 보일 뿐이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광산노동자들의 거친 활력은 고사하고 거리분위기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느낌이 전혀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대낮에도 활동하는 사람이 드물고 간혹 눈에 뛰는 행인들의 걸음걸이도 맥빠진 듯 늘어져 보인다. 발파음과 기적, 간간이 들리는 골목 확성기소리 외엔 거의 생활소음이 없으며 못 하나 박아도 들릴 만큼 가까운 강변 제재소조차 오직 적요할 뿐이다. 문득 학교를 파한 듯한 꼬마 네 댓명이 강둑을 쪼르르 내려와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낚싯대를 물에 들이댄다. 아이들의 깨알같은 웃음이 터지고서야 비로소 도시에 핏기가 돌고 저녁 무렵 공설 운동장같은 곳에 주민 한 무리가 잠시 모였다 흩어지기도 하면서 어수선해진다. 그러나 수선거림도 잠시, 일몰과 함께 무산은 그대로 칠흑같은 적막에 빠져든다. 당사 등 몇 곳을 제외하고는 도시 어디서도 한 점 불빛을 찾기 어려운 침묵 속에 다시 묻혀 버리는 것이다. 박제된 잿빛 도시. 무산풍경을 떠올릴 때마다 이 씁쓸한 이미지가 살아난다. ◎「홍콩시장/중국장사꾼 건너가 생필품판매/북변경도시의 외제품시장 ? 홍콩?이라는 이름은 남북한사람을 막론하고 신기하고 좋은 곳이라는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무산 왼편 철광산밑으로 북한주민들이 줄지어 드나드는 작은 독립가옥이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홍콩시장」이다. 중국의 보따리장사꾼들이 건너가 생필품을 파는 일종의 상설 외제품시장으로 없는 게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곳에 나오는 물건은 주로 옷가지와 식료품이며 품목이 많지 않은데다 질도 보잘 것 없다는 것이 현지 중국인들의 말이다. 실제로 두만강 유역 중국 쪽 도시에는 내의, 점퍼 등 홍콩 시장용 의류만 만드는 전문공장들이 있는데 내수용으로는 팔 수 없을 만큼 값싼 제품만 만든다는 것이다. 북한주민들의 기본생필품 부족으로 수요가 상당하긴 해도 구매력이 낮은 점을 고려한 것이다. 대개 물물교환형태로 이루어지는 거래에서 중국상인들은 북한의 명태나 말린 낙지(오징어까지 이르는 총칭이다)등 해산물을 받아 간다. 국경에서 5리 이내는 중국인에 한해 사증발급을 면제해주므로 보따리장사꾼들은 통행증만으로 비교적 자유롭게 강을 건너 다닌다. 현지인들은 이런 식으로 두만강의 6개 해관을 통해 북한 변경도시의 홍콩시장에 물건을 내다 파는 장사꾼이 하루 1천명은 될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조선족인데다 북한에 친척이 있어 홍콩시장은 단순한 물품거래 외에 안부를 교환하고 선물을 전하는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한 중국조선족(50)은 『무산에 사는 육순의 누나에게 식량을 전해주곤 하는데 강냉이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생활이 너무 비참해 갈 때마다 울면서 돌아온다』며 눈시울을 또 붉혔다.[0061]별리설화는 오늘도 강을 맴돌고…(두만강:5) 한국일보 940726 09면 기획 2886자◎남평마을 조선족들 “고향땅이 갈수록 멀어져” 두만강 강역의 지명에는 유난히 볕양자나 남녘남자가 많다. 높은 지대와 강물의 영향으로 늘 냉한 지역이어서 마을이름이라도 따스하고 양지바르기를 바라서일까. 무산에서 하류 쪽으로 5리쯤 내려가 층암절벽이 병풍처럼 막아선 강가에 오붓이 들어 앉은 남평도 지세로만 보면 얼핏 그런 곳인 듯 싶다. 그러나 정작 남평이라는 이름은 조선조 말의 부부생이별 설화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민란을 일으켰던 한 남정네가 아내를 데리고 도망치다 두만강에 이르러 포졸들에게 쫓기던 끝에 혼자 강을 건넜다. 헤어진 부부는 그뒤 하루 한번씩 강가에 나와 『로덕(함경도 사투리로 부인)이 무사하오』, 『남편께서도 잘 계셨어요』하고 소리쳐 안부만을 주고 받으며 안타까워 했다. 이들 부부는 죽을 때까지 영영 만나지 못했다. 두만강 양켠의 산이 결코 강을 건너 만나지 못하는 것처럼. 강을 따라 길다랗게 형성된 마을의 8백여 가구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인 남평에서는 오늘도 별리의 한이 쌓여 간다. 국경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혈육의 아픔은 이곳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식 해관이 들어서 가까운 무산을 상대로 공식교역이 이루어지고 보따리장사들이 강 건너 「홍콩시장」에 드나든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북한의 밀수차가 들어오던 주요한 통로이기도 했다. 하지만 경조사 때 강건너 고향땅을 이웃집 드나들듯 스스럼없이 왕래하던 불과 한 세대전의 기억에 비하면 갈수록 왕래가 힘들어지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마을어귀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볕바라기를 하던 노인들이 무엇인가 소식을 가져온 사람들을 반기는 표정으로 손을 흔든다. 골목의 양지쪽에서 행상들이 벌여 놓은 좌판이 발길을 잡는다. 각기 집에서 여유분을 내온 남새(야채)와 돼지고기등을 제법 풍성하게 늘어 놓았지만 정작 아낙들은 흥정보다는 수다떨기에 정신이 팔려 있다. 화제는 어디서나 그렇듯 남편, 자식얘기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들이다. 두만강변에서 도시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국경마을 남평의 풍경은 이렇듯 살가웠다.마을 아래쪽 해관에서는 임시교량을 건설하는 공사가 부산하다. 거룻배로나 왕래하던 나루터여서 불편을 느껴온 북한측의 요청으로 4월초부터 시작된 공사다. 무장군인 3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레인이 트럭에서 목재를 부리고 있고 인부 10여명이 교량을 엮느라 열심이다. 노을이 흐르는 강물에 지친 발을 담근다. 전국시대의 비극시인 굴원이나 당대의 길라잡이 유홍준 교수가 읊은 탁족의 풍류는 아니더라도 저무는 강가에는 때아닌 흥취가 도저하다. 그러나 강변의 여유도 잠시, 일행이 강건너를 향해 사진을 찍으면서 사단이 벌어졌다. 북한측에 넘어가 있던 중국군인 하나가 북한측의 항의를 받고 얼기설기 엮인 다리를 황급히 건너왔다. 강폭이 불과 10여 안팎이어서 시야가 훤했던 탓이다. 발이 넓은 안내인이 나서 아는 사람들을 주워 섬기며 얼버무려준 덕분에 가까스로 카메라를 뺏기는 곤경은 면할 수 있었다. 국경의 밤은 일찍 찾아들었다. 마을의 소박한 여관방 술상머리에 둘러 앉은 남평 주민들은 또 부평초처럼 떠돌아온 예의 한 맺힌 삶을 저마다 풀어내기 시작했다. 강 건너 무산의 여동생에게 인편으로 가끔 먹을 것을 부쳐준다는 얘기에 우울해하다가 1주일에 한번씩 쌀밥을 먹고 있으며 5년에는 갈치를 먹은 적도 있다고 자랑했다는 북한의 당 간부 얘기, 북한에는 핵무기가 이미 2개나 있는데 터뜨리면 양코배기만 죽는다고 믿고 있는 시골사람들 얘기에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웃음조차 뒤끝은 늘 슬픔이다. 두만 강변에서 만나는 조선족들과의 자리는 매양 이런 식이었다. 가까운 곳에 호곡영이라는 높은 고개가 있다. 바람이 불면 호랑이울음처럼 들린다는 고갯마루에 연변시단의 대부로 존경받는 이욱(1907∼1984년)의 시비가 서 있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광복의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이학성 , 월촌등 그동안 사용하던 필명을 새로운 해가 뜬다는 뜻에서 이욱으로 바꿨다. 그러나 시인의 개명에도 불구하고 두만강변에는 여전히 어둠이 걷히지 않고 있다. ◎어느 조선족변사의 인생유전/남한은 아버지고향·북한은 형수가 사는곳/자신은 중국떠돌이 “한민족수난사 축소판”은퇴한 조선족변사 최영복씨(56)의 인생유전은 한민족수난사를 담은 한 편의 영화다. 밤이 깊어 가는 강가의 객잔에서 최씨는 부초처럼 살아온 평생을 회고했다. 학창시절에 시 낭송을 잘했던 최씨는 집안이 어려워지자 59년 중공의 대약진운동당시 영화종사원 모집에 응했고 화룡현 이동 영사대에 소속돼 1백56개 마을을 영사기를 메고 다녔다. 영화가 문화생활의 전부였던 시대에 깊은 산골까지 찾아오는 최씨는 귀한 손님이었다. 들르는 마을마다 조촐한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지금도 화룡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중·노년층에게는 모든 주인공들의 성격을 대변하는 영화 그 자체나 다름없다. 64년에 「영화계통 전국모범」으로 선발돼 모택동 주석을 접견했을 만큼 최씨의 영화인생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영화 밖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남한이라는 것뿐 고향을 밝히지 않은 채 그가 6세 때 갑자기 숨졌다. 이후 최씨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독립군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며 자부심도 느꼈으나 문화혁명(66∼76년)때는 김좌진장군과 함께 찍은 외할아버지 사진 때문에 1년 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하나뿐인 형은 50년 인민해방군에 입대,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눌러 앉았다. 57년에 개성 근처에 살고 있던 형을 잠시 만났을 뿐 형제는 그뒤 재회하지 못했고 78년에 뇌일혈로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영화에 빠져 1년 중 3백일 정도를 밖으로 떠돌 무렵에 죽은 큰 아들은 최씨의 가슴에 묻혀 있다. 최씨의 꿈은 갈라진 남과 북을 모두 가보는 것이다. 북에서는 형수와 조카를 만나고 남에서는 아버지의 고향을 만나야 한다. [0060]양떼·뗏목 뒤편엔 「이념유적」 가득(두만강:6) 한국일보 940802 09면 기획 2713자◎유선은 잿빛탄광촌… 육진의 땅 회령 ?김정숙 도시?로... 중류로 접어들면서 강은 진경 산수의 그림이 된다. 산이 높아 골이 깊고, 치솟은 벼랑사이로 거센 물살이 소용돌이친다. 잠자코 귀를 기울이노라면 으르렁거리는 급류에 대한 두려움도, 조잘거리는 냇물에 대한 정겨움도 결국 마음 속에 있음을 갈파한 연암의 열하일기를 이해할 만하다. 굽이치는 물길에 여러 물상들이 스치며 그림의 구도는 바뀌어 갔다. 먼저 양떼의 출현으로 강의 표정은 풀어졌다. 강가에서 풀 뜯는 양을 어루만지던 양치기청년은 권태로움을 겨냥해 물수제비를 뜬다. 줄지어 동그라미가 퍼져 가는 평화로움도 잠시, 총을 멘 경비병이 나타나자 풍경은 잿빛으로 굳어졌다. 그림 속의 양치기사내는 멈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의 그림 속 평화를 현실로 연결시켜주는 것은 건너편 회령땅에 해방 전부터 호주에서 수입한 면양의 방목지가 흩어져 있다는 안내인의 말 뿐이다. 백금 수력발전소를 지나면서는 좀체 만나기 힘들다는 뗏목을 3개나 보았다. 두만강에서 뗏목을 볼 수 있는 곳은 무산상류, 백금 건너편 송학리에서 유선에 이르는 구간 등 두 군데뿐이다. 58년에 건설된 두만강 유일의 발전소인 백금발전소가 물길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다. 급류를 타는 뗏목은 장쾌한 원시의 힘을 지닌다. 서너길이 넘는 거목을 묶어 선수는 좁게, 선미는 넓게 엮은 뗏목에 네 명의 뗏목공이 버티고 섰다. 삿대로 물살을 걷어낼 때마다 부서지는 포말에 무지개가 돋는다. 뗏목에 시선을 박고 강을 따라 가다가 이켠 기슭에 좌초한 두 개의 뗏목을 만났다. 10여명이 삿대를 곧추 세우고 뗏목을 끌어 내리려고 안간힘이다. 잠시 쉬는 틈에 담배를 건네며 말을 붙였지만 서로 눈치만 살필 뿐 묵묵부답이다. 뗏목공은 마음만 먹으면 국경을 넘을 수 있어 기술보다 사상이 좋아야 한다는 안내인의 귀띔이 그들의 대답을 대신했다. 뗏목은 멀지 않은 탄광촌 유선에서 멎는다. 일꾼들은 종착지에서 기슭으로 끌어 올린 뗏목을 해체한다. 이제 나무들은 인근 제재창이나 가구공장으로 옮겨져 인간의 삶으로 편입되리라. 수북이 쌓인 나무더미 뒤로 펼쳐진 유선마을은 전반적인 무채색조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느껴진다. 생활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지척인 탓도 있지만 두만강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눈에 뛰는 곳이기 때문이다. 석탄과 버력더미 옆으로 탄광 막사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똑같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찬 탄광촌이 보인다. 놀이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나 강변을 거니는 처녀들의 싱그러운 웃음은 보을천이 돌아 나오는 유선을 「신선이 노닐만한 절경」은 아니라도 사람 사는 마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회령이다. 남쪽에서 뻗어 내린 산맥의 줄기가 용틀임하듯 시가지를 휘감고 능선 앞뒤로 회령천과 팔을천이 흐르는 회령은 수려한 지세다. 사월 초파일 전후 북쪽 끝 학포리까지 꽃놀이기차가 다니고 농번기를 앞둔 농민들이 마을단위로 원족을 떠나던 곳. 회령을 떠나온 실향민들이 인근 백천사 등으로 들놀이를 나섰던 것이 바로 이즈음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처녀작으로 꼽는 중편 「두만강」에서 어린 주인공의 눈으로 아스라한 기억을 들추는 작가 최인훈(58)의 유년시절도 이곳에 묻혀 있다. 역전을 중심으로 늘어선 펄프공장, 제재창 등 공장건물과 곧게 뻗은 길 사이로 쇠락한 집들. 삼합 뒷산의 취락정에서 바라보는 회령시가지는 세월의 더께가 내려 앉은 채 생경한 이념의 유적들이 두서없이 가득하다.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생가가 성역화되어 사적관이 들어서고 강가의 나루터에도 이름이 붙었다. 「성지순례」를 나선 북한학생들이 꼭 들러야 할 곳중 하나다. 김종서장군이 개척한 육진의 하나로 북방 경략의 중심지였던 변경의 고도 회령은 우상화의 한켠을 지탱하는 김정숙의 도시가 돼있었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열기자(기획취재부)> ◎회령/미인과 영화의 고향/「북녀」의 본고장 왕비·궁녀 다수 배출/춘사 나운규·윤삼육 감독 등 이곳 출신 회령을 얘기할 때 뺄 수 없는 것은 미인과 영화다. 이 두 가지는 실향민들이 회령의 아름다움을 추억하면서 가장 먼저 꺼내는 자랑거리다. 남남북여의 북여는 대체로 회령과 강계출신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회령미인은 화류계 인물이 많은 강계와는 격이 다르다고 회령사람들은 주장한다. 예로부터 왕비와 궁녀를 많이 배출해 왔으며 회령출신에는 기생이 없다는 게 그 이유다. 지금의 북한에서도 「회령북녀」의 신화는 유효한 듯하다. 우선 김일성의 뒤를 이은 김정일의 외가와 처가가 모두 이곳이다. 김일성의 본처 김정숙, 김정일이 73년에 세 번째로 결혼한 부인 김혜숙이 회령출신이니 김일성 왕가의 국모를 내리 배출한 셈이다. 요즘도 북한의 고위관리들은 여자를 구하러 회령에 자주 들른다고 한다. 큰 도시 호텔, 식당의 복무원에서부터 권력상층부에 닿아 있는 기쁨조에 이르기까지 회령여인들은 인기라는 얘기였다. 우리 영화사도 회령출신을 제외하면 온전할 수 없다. 「아리랑 」 「풍운아」 「벙어리 삼룡이」 「사랑을 찾아서」등 걸작을 남긴 춘사 나운규, 춘사의 친구면서 영화인으로 예총회장을 지낸 윤봉춘, 「복지만리」등을 만든 전창근등 전설적 인물들이 많다. 이들의 2세들도 선대를 잇고 있다. 춘사의 장남 나봉한씨는 영화감독으로 활약중이며 최근 「살어리랏다」로 국제무대에서 호평받은 작가 겸 감독 윤삼육, 연극배우 윤소정은 윤봉춘의 자녀이다. 김정일이 영화광이라는 사실도 우연치고는 기이하다. 모계로 영화인의 고향 회령에 피가 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는지. [0059]「생존의 땅」 찾아가던 비원의 길목/간도(두만강:7) 한국일보 940809 09면 기획 2746자◎배고픈 이주민·독립지사 고난간데없이… 지금은 “억새의 섬” 회령땅이 마주 보이는 강변의 삼합마을을 버리고 하류쪽으로 1백리 남짓 가다보면 개산둔(개산툰)을 갓 지난 곳에 물줄기를 가르는 강섬 하나가 나타난다. 고구마 모양의 이 작은 섬이 바로 한과 설움의 두만강정서 발원지인 사잇섬 간도다. 그 이름이 주는 느낌처럼 간도풍경은 화사한 햇빛 아래서도 버려진듯 쓸쓸하고 황량하다. 성글게 서 있는 버드나무와 잎갈나무는 거센 만주바람에 시달려 이지러지거나 뒤틀려 있고 그 사이로 여기저기 삭막한 모래 바닥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듯 드러나 있다. 한때 채마라도 가꾸었을 법한 밭터에 이제는 무성한 억새들 만이 자라 바람에 흔들리고 이웃 선구마을에서 간혹 소먹이는 아이들이 건너와 무심하게 인적을 만들고 갈뿐이다. 그나마 간도의 한쪽이 중국쪽에 연육되는 바람에 섬은 본래의 형상마저 잃어 버렸다. 그러나 두만강이 푸르름을 잃었다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그 옛날의 두만강이듯 간도도 어떻게 변하든 그 땅이 의미하는 질곡의 역사마저 변형될 리는 없는 것이다. 사실 간도는 애초부터 특정지역만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현실의 간도는 고작 축구장 하나정도 넓이에 지나지 않는 볼품없는 사잇섬이지만 그것은 또 고향에서 내쫓긴 이주민들의 거친 삶을 의미하는 추상명사이기도 했다. 그들이 농사지을 땅을 찾아서 강을 건너 헤매다 닿은 곳이면 만주벌판 어디든 그곳은 간도가 되었다. 원래의 간도는 그러므로 간도로 가기 위해 첫 발을 디뎌야 했던 징검다리와도 같은 사잇섬이었던 것이다. 간도가 그 한많은 사연을 처음 만들게 된 때는 가뜩이나 척박한 함경도 땅이 연이은 가뭄으로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19세기 중엽 구한말이다. 특히 기사년(1869)과 경오년(1870)에 육진 지방을 휩쓴 혹독한 대흉년은 백성들의 삶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웠다. 올망졸망 딸린 식구들을 부양해야 하는 남정네들은 이때부터 감자 몇 알, 곡식 한 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청은 자신들의 발상지인 두만강변 만주 땅을 이민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국경에 봉금영을 내리고 월강죄를 범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는 가혹한 법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곤궁하고 절박한 민심까지 다스릴 수는 없었다. 이들의 필사적 도강의 구실은 사잇 섬의 농사였다. 불모의 모래 섬에 농사가 될 리 없었으므로 『간도에 간다』는 말은 곧 두만강 건너편 벌판에 도둑농사를 지으러 가는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민족의 간도이주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잇섬에서 중국 쪽 강둑을 따라 사방에 지평선이 보이는 천평 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굼실굼실한 검은 흙빛은 아무렇게나 씨앗을 던져놓아도 농사가 될 것같은 옥토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보챔을 등뒤로 들으며 메마른 언덕빼기에 홀로 앉아 강건너 방치된 옥토를 넋잃고 바라 보아야 했던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 되살아난다.1880년대 들어 청이 봉금령을 거두면서 농민들은 봇물터지듯 두만강을 건너 천평벌에 논을 풀었다. 조선농민들이 피땀으로 개간한 이곳 논은 만주국 당시에는 어곡답으로 지정됐었고 지금도 북경의 인민대회당에 납품되는 최고품질의 입쌀이 여기서 생산되고 있다. 일제시대에도 간도는 압제와 수탈을 피해, 혹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는 통로였으며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비원의 길목이 되었다. 일경에 붙잡혀 옥사한 남편을 따라 두만강에 몸을 던진 아낙의 실화를 담은 김정구의 「두만강」도 간도가 그 무대이다. 떠나온 고향을 끝내 잊지 못했던 이주민들은 강을 건넌 뒤에도 차마 간도에서 멀리 가지는 못했다. 선구자의 땅 용정과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시는 모두 사잇섬에서 1백리 안팎이다. 간도는 단지 흘러간 과거속의 섬이름이 아니다. 오늘날의 간도는 허망한 이념에 삶을 저당잡힌 줄도 모른채 모진 세월을 살아 온 북녘사람들에게 새로운 생존의 땅으로 발을 내딛는 길목일지 모른다. ◎문학속의 두만강/김동환「국경의 밤」서, 최인훈「화두」까지/ 실향문학 풍부… 조선족 문인활동도 왕성문학의 지평에서 두만강은 암울한 시대를 관통해 흘러왔다. 문학속의 두만강은 유민들의 강이자 척박한 삶의 무게를 견디는 향수와 희망의 강이었다. 민족사의 생채기가 깊은 만큼 두만강을 소재로 한 실향문학은 풍부하다. 한국 최초의 장편서사시 「국경의 밤」을 지은 파인 김동환(경성),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등으로 북국의 토속적 정한을 담아낸 이용악(〃),「해바라기의 비명」의 함윤수(〃), 처녀작 「두만강」에서 최신작 「화두」에 이르는 지금까지 고향을 잊지 못하는 최인훈(회령)등이 두만강역에 고향을 두고 있다. 별헤는 밤마다 고향 북간도를 그리워한 윤동주(명동촌)도 강역의 사람이다. 그리고 안수길의 「북간도」, 김동인의 「붉은산」, 현진건의 「고향」, 최서해의 「탈출기」,이기영의 「두만강」등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상황의 압력에 의해 쫓겨 간 실향민족의 운명을 담고 있다. 현재의 두만강은 중국조선족 문인들의 몫이다.「모아산」「북두성」등을 발표, 연변시단의 대부로 불렸던 이 욱을 이어 전설과 설화를 담은 장편서사시 「새별전」등의 시인 김 철이 활동중이며 작가로는 「격정시대」,「해란강아 말하라」의 김학철,「범바위」의 이근전등이 유명하다. 조선족 문인들은 중국의 사회주의문예이론 때문에 판에 박힌 듯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발양하면서 남북분단상황에서 두만강문학의 공백을 메워 왔다. 두만강이 한민족의 생활터전인 한, 실향민들의 아픔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이 강은 우리 문학의 주요한 원천이 될 것이다. 0058 ]아리랑 고개/아흔 아홉 굽이마다 설움의 가락(두만강:8) 한국일보 940816 09면 기획 2892자◎이주민들 한숨 사라진 채 고갯마루엔 도로확장 굉음만… 강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가장 깊게 각인된 설움의 현장은 아리랑고개다. 중류 삼합과 개산둔(개산툰) 중간쯤인 강역 마을에서 내륙으로 접어들면 길은 깊고 험준한 산령으로 숨어 든다. 실타래처럼 풀려 있는 아흔 아홉굽이. 오랑캐 땅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오랑캐령, 가락 슬픈 아리랑을 불렀다 해서 아리랑고개라고 부르는 고갯길이다. 고갯길의 초입은 강변에서부터 20여리나 이어진 버들 방천. 수령 1백년을 넘긴 버드나무가 지천이다. 짙게 드리운 버들의 터널로 들어서면 한 세기전 초라한 남부녀대 행렬로 이곳을 지나쳤을 초기 개척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일 게 없는 부모들은 아기버들이었을 이 나무의 그늘아래서 지친 다리를 쉬며 한 움큼 시냇물을 떠먹이곤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황사에 버들개지가 흩날리는 하늘가엔 아직 길 떠나는 자들의 한숨이 가득하고 휘적거리는 가지들은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고 거친 세월의 사연을 전한다. 버드나무는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족의 고난현장에 함께 있어 왔다. 이역의 첫 길목에서 쓰린 가슴을 어루만져준 것도 강변의 실버들이었고 황무지를 일구는 힘겨운 노동을 위로해준 것도 논두렁의 버드나무그늘이었다. 삶의 터전을 두르는 울타리로, 주먹밥이나 나물을 담는 광주리나 소쿠리의 재료로도 버드나무는 유용했다. 조선족과 버드나무의 동고동락은 애초부터 닮은 속성탓일지 모른다. 아무데나 심으면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이 그렇고,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습속이 그렇다. 길은 실개천과 만났다 헤어지면서 고개를 오른다. 길 한켠의 안내인이 일러준 주막터에는 흩어진 주춧돌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다. 국밥 한 그릇 말아 먹을 형편이 못 되었지만 이곳은 호랑이 늑대등 산짐승에다 재물과 목숨을 앗아가는 비적의 출몰이 잦은 험한 산길을 함께 할 일행을 기다리던 휴식처였다. 고향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과 기름진 땅이 어디인지를 궁금해 하던 유이민들은 이곳에서 장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서로 달랬다. 10여명으로 길동무를 이루어 주막을 나섰더라도 산굽이마다 돋는 소름을 어쩔 수는 없었으리라. 발길은 무겁고 산길은 멀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하소연하듯 「밭 잃고 집 잃은 동포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나지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후렴)/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벌판을 헤매인다(후렴)」는 「신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하릴없이 뿌렸을 것이다. 「북간도」라는 민요도 비슷한 내용이다. 「문전옥답 다 뺏기고 거지생활 웬 말이냐/ 밭 잃고 집 잃은 벗님네야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나/ 아버님 어머님 어서 오소 북간도벌판이 좋답디다」. 그 가락의 힘을 빌려 고개를 넘는 것은 이주길에 나선 개척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리랑가락이 흩어져간 골짜기는 이제 적요한 채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 호젓 하다.구름이 걸린 고갯마루에서는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산허리를 자른 채 여러 대의 트럭과 트랙터가 구불거리는 길을 펴고 있었다. 처음 골짜기를 따라 난 오솔길에 50년대 차량이 다니는 비포장도로가 겹쳐졌으니 이번 길은 세 번째다. 저 멀리 아득한 용정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쯤에서 낯설고 물선 만주땅 어딘가로 흩어져 가는 개척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까. 파헤쳐진 길 양옆에는 얼마 전 잘려서 밑둥만 남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다. 아리랑고개의 세월을 지켜온 그루터기에는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처럼 박혀 있는 옹이가 풀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 채 완연하다. 아리랑고개의 굽은 길이 곧게 펴지고 나무들이 잘려 나간다 해도 실향민들의 가슴에는 한이 남듯이. ◎한민족 중국 이주사/19세기말 시작「1백20년 역사」현재 2백만명… 97%가 동북 3성 거주한민족의 중국이주역사는 청의 봉금령 철회로 대량 이주가 시작 된 1875년부터 1백20년이라는 게 일반론이다.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2백만명이 약간 넘는 수준. 중국정부의 90년 통계(제4차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조선족은 모두 2백9만7천9백2명이며 길림·흑룡강·요녕성등 동북3성에 97.1%(1백79만4천7백여명)가 살고 있다. 성별로는 길림성 1백18만1천9백여명(65.8%), 흑룡강성 45만2천3백여명(25.2%), 요령성 23만여명(9%) 순으로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만 82만1천여명이 산다. 두만강을 끼고 있는 연변에 절반가량이 몰려있는 셈이다. 조선족은 대체로 두만강, 해란강(용정), 부르하통하(연길), 육도하(명동촌)등 하천주변에 밀집한다. 주로 관개가 필요한 논농사를 짓는 때문이다. 출신지별 분포를 보면 한반도를 거꾸로 접어놓은 꼴이다. 함경도, 평안도사람들은 바로 강건너에 사는 반면 경상, 전라등 남도사람들은 흑룡강성등 내륙쪽에 자리를 잡았다. 강근처 사람들이 먼저 이주를 시작했고 나중에 이주한 남도출신들은 터전을 찾기 위해 북상한 탓이다. 이주 초창기에는 청의 관리나 국경순라대의 눈길을 피해 산골짜기나 구릉지대등 은밀한 장소를 택해 밭농사를 지었다. 금세기에 들어서 비교적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조선족은 점차 비옥한 평야지대로 진출했다. 기후와 토질탓에 어렵다던 논농사가 만주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도 이 즈음이다. 초창기 이주노선은 종성―개산툰―아리랑고개, 회녕―삼합―아리랑고개, 무산―덕화―화룡, 온성―도문, 경원―혼춘등 다섯 갈래로 종성노선이 가장 먼저 이용됐다. 30년대부터는 중국침략에 혈안이 된 일제에 등을 떼밀려 강제이주가 시작되면서 잇달아 개통된 안봉선등 철도가 주요 수송수단이 됐다. 해방이후에는 50만명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부분이 그동안 일군 삶의 터전을 제2의 고향 삼아 3대 또는 4대에 이르도록 살고 있다.
0057 ]명동촌/「독립의 꿈」 이젠 어렴풋한 흔적뿐(두만강:9) 한국일보 940823 09면 기획 2676자◎윤동주 고향… 교회는 폐가로, 학교엔 주춧돌만 아리랑고개를 넘은 이민자들의 고달픈 행로는 해란강지류 륙도하를 따라 만주내륙으로 가는 북상길로 이어진다. 강을 낀 너른 들녘에 50호 안팎의 작은 마을들이 올망졸망 흩어져 있다. 정처없이 걷다 논밭을 일굴만한 터를 만나면 지친 몸을 주저앉히고 보따리를 풀어낸 흔적들이다. 명동촌도 그런 마을이다. 암울한 식민지시대를 앓으면서도 별처럼 순결한 영혼인 채로 숨져간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며 독립운동의 전초기지로 우리 가슴속에 선명히 각인된 명동촌은 초입에 세워진 엉성한 표지판만 아니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평범한 모습이다. 퇴락한 농가의 골목 사이로 눈꼬리 처진 누렁이가 어슬렁거리고 뜨락에서 담배모판을 다듬는 아낙의 손길도 한가로운 전형적 농촌일 뿐이다. 마을이름에도 독립의 염원을 담아 동쪽을 밝힌다는 뜻으로 지은 명동촌의 그 치열한 의기마저 세월에 깎이고 지워진 것일까. 마을 초입의 명동학교 터에서도 쓸쓸한 공허감만이 느껴진다. 여기저기 주춧돌로 쓰였을 법한 돌이 뒹굴 뿐 숱한 민족지사들이 독립의 꿈을 키우던 배움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한때는 담배밭으로 일궈지기도 했다는 1백 여평 남짓한 학교터는 개구쟁이들의 놀이터, 가을날 볏가리 따위를 말리는 공터에 지나지 않는다. 간혹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노동창들이 찾아와 무상한 세월을 추억하곤 한다고 주민들이 전한다. 안쪽에 있는 명동교회도 비슷하다. 한동안 정미소로 사용되던 교회당은 전혀 쓸모 없는 폐가로 변해 풍상에 쓰러져가고 있다. 민족이라는 대의로 기독교신앙을 포용했던 신앙공동체이자 민족단체였고, 뿌리뽑힌 이주민들의 생활공동체였던 곳은 이제 이끼 낀 기와가 부스러지고 흙담 안쪽 여덟칸 공간도 무너져 앉은 마룻바닥으로 을씨년스럽다.교회건물 앞에는 명동촌을 건설한 규암 김약연 선생(1868∼1942년) 기념비가 교회를 세울 때 심었다는 미루나무 두 그루를 양편에 거느리고 서 있다. 윗머리가 떨어져나간 기념비는 흉한 모습이다. 오래돼 저절로 허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혁명이라는 허망한 이념의 광풍이 휩쓸고 간 흔적이다. 당시 홍위병들은 부르주아의식 타도와 함께 민족주의의식 척결을 내세우며 기념비를 부수려 달려들었다. 학교건물도 그때 피해가 났으며 조선족 상당수도 이유 없이 반동으로 몰려 혹독한 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결국 명동학교는 복구되지 못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규암 기념비는 마을사람들이 숨겨둔 덕분에 지난 90년 상한 모습으로나마 다시 제 자리에 서게 됐다. 윤동주(1917∼1945년)의 생가터는 명동교회 옆에 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의 은진 중학으로 진학해 이사했던 15세 때까지 살던 곳이다. 81년에 헐려 담배 밭 한가운데 주춧돌 몇 개만 남은 터에서는 올 봄부터 생가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은 윤동주의 생가가 기와를 얹은 열 칸짜리 본 채와 별채가 딸린 자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규암의 조카로 심성 여린 소년이었던 윤동주는 명동촌 주민 누구나 서슴없이 꼽는 마을의 자랑이 되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도 명동촌은 윤동주의 고향이어서 친숙한 이름이다. 중국당국의 관광규제가 많이 풀리면서 명동촌은 백두산 근참길의 한국관광객이 반드시 거치는 곳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한 흔적으로만 남은 평범한 농촌마을 명동에서 과연 숙연한 의미 한 자락이나마 붙들 수 있을는지. 내년에 마을 뒤편 구릉을 가로질러 뚫릴 용정―삼합 4차선 산업도로에 주민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의 회녕―청진 도로와 연결돼 명동촌이 앞으로 한국과의 직교역로에서 요충을 담당하게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명동촌의 역사/1899년 김약연선생 등 이주해 세운 마을 /독립운동가 배출 명동학교는 민족교육 본산만주독립운동은 무장투쟁과 교육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무장투쟁의 상징이 청산리와 봉오동이라면 민족교육의 현장으로 명동촌이 있다. 명동촌의 역사는 김약연이라는 선각에 의해 시작된다. 그는 1899년 관북실학의 대표격이었던 김하규(문익환 목사의 외조부), 문치정, 남위언 등 「종성오현」과 함께 식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와 사재로 임야 수백 정보를 사들여 학전을 일구고 규암재라는 서당을 열었다. 규암재는 1908년 이상설이 세운 최초의 근대학교 서전서숙이 폐교되자 명동서숙으로 이름을 바꿔 신교육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서숙은 신민회의 정재면목사가 참여하면서 명동학교로 변신, 애국교육의 본산으로 자리잡았다. 학교옆에 교회도 세웠다. 명동학교와 명동교회 설립은 규암의 놀라운 결단 덕분이었다. 정목사가 신식교육을 가르칠 교사들을 공급하는 대신 기독교 수용을 요구하자 규암은 마을원로들과 숙의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유학자에서 기독교인으로 세계관 자체를 바꾼 것이다. 민족교육이라는 대의를 위해서였고 독립이념의 모색이 전통유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규암 자신은 1929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장로교목사가 됐다. 1919년 3·13만세운동 이후 명동학교는 북간도 대한국민회의 본부가 됐고 졸업생들은 명월구등지의 무관학교를 거쳐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부대의 대한독립군에 참여하거나 신문 발간, 군자금모집에 종사했다. 「흰 뫼(백두산)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단군)이 그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명동학교의 교가처럼 민족의 동량이 된 것이다. [0055]말달리던 선구자 간곳 없고…/용정:상(두만강:10) 한국일보 940830 09면 기획 2499자◎일송정·용주사도 세월 무게에 사라져/이주민이 발견한 「용두레 우물」은 조선족 원천으로 남아「일송정 푸른 솔」로 시작되는 유명한 가곡 「선구자」의 원래 제목은 「용정의 노래」이다. 작곡자 조두남(84년 작고)의 회고록 「나의 넋두리 나의 세월의 앙금」에 의하면 만주를 방랑하던 1933년, 목단강 주변의 여인숙에 불쑥 찾아와 윤해영이라고 이름을 밝힌 젊은이가 꼬깃꼬깃한 종이에 쓰인 가사를 내밀었다. 초췌하지만 형형한 눈빛이 독립운동가임을 알 수 있게 했던 청년은 『달포 뒤 찾아와 노래를 배우겠다』며 황망히 떠났으나 그 뒤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조두남은 이 청년에게서 발견한 독립 투사의 기상을 기리는 뜻에서 해방 후 「선구자」라고 제목을 고쳐 붙였다. 노래의 유래가 그러하듯 「선구자」가사는 그대로 용정의 모습이다.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떠나 30가량 북상하면 구릉지대가 끝나면서 탁 트인 평야를 만난다. 두만강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까지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다. 일송정은 이곳 용정 너른 벌에 홀로 우뚝 솟은 비암산 정상에 서 있다. 그러나 정작 일송정에 오르면 「선구자」의 비장감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멘트골격에 울긋불긋한 색깔을 입힌 중국식 작은 정자가 워낙 생경한 까닭이다. 원래 일송정은 가사대로 정자처럼 그늘이 넉넉한 한 그루 푸른 소나무였다. 늠름한 기개와 고절의 표상이었던 노송은 이제 등걸로도 남아 있지 않고 대신 그 자리를 차고 앉은 조잡한 정자가 공연히 뻔뻔스러워 보인다. 번듯한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어 주변도 썰렁하기 그지 없다. 비암산은 서울의 남산정도인 듯한데 주변이 평지인 탓에 상당히 높아 보이며 화강암이 곳곳에 노출된 골산이어서 일찍이 시인 김기림이 「간도의 내금강」이라고 읊었을 만큼 전체적 경관은 상당히 빼어난 편이다. 현지인들이 흔히 범이 웅크린 상으로 표현하는 비암산의 머리부분에 일송정이 있고 허리에 선구자탑이, 그 아래쪽에 연변TV방송국의 송신탑이 서 있다. 그러나 지난 91년 몇몇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선구자 탑은 1년도 채 안돼 민족주의의 발호를 우려한 중국당국에 의해 철거돼 기단만 흉한 몰골로 남아 있다. 비암산에서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용정은 산지에 둘러싸인 분지 모양이다. 서북쪽 평강령 틈새를 간신히 비집고 나온 해란강이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 도시 한가운데로 흘러 간다.선구자가 말달리던 강변을 따라 연길과 함께 중국조선족의 양대 중심도시로 성장한 용정의 주택가가 길다랗게 형성돼 있다. 용두레 우물터는 용정 시내 한 복판 용정중학부근 삼거리 한 켠에 조그만 가로공원으로 단장돼 남아 있다. 「룡정지명기원지우물」이라는 한글이 씌어진 높이2가량의 석탑 옆에 이곳의 유래가 자세히 설명돼 있다. 「1880년경 조선이민 장인석·박인언이 우물을 처음 발견해 우물가에 용두레를 세우고 우물이름을 용정이라 했으며 그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용두레는 우물물을 퍼 올리는 장치로 그 모양이 용머리를 닮았다 해서 불리는 이름이다. 시내 초입 용문교에는 구름을 타고 비상하는 황금색 용장식이 해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양편을 치장하고 있다. 최근의 건축물이 대개 그렇듯 88년10월에 만들어진 이 다리의 치졸한 모습도 「선구자」가사에 담긴 깊은 뜻과는 거리가 멀다. 비암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었다던 저녁 종소리 그윽했을 용주사도 터조차 알아볼 수 없는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어디에서도 선구자의 자취는 찾기 힘들다. 용정은 이웃 연길을 뒤쫓는 상업중심지로, 백두산여행길에 반드시 들르는 역사관광지로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가고 있다. 오랜 정체에서 깨어나 아침마다 용문교의 넓은 시멘트포장도로를 자전거행렬로 메우는 용정사람들은 달라진 시대의 새로운 선구자 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특별취재반/권주훈 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선구자」의 수난/작사자 윤해영 변절친일시인 밝혀져“충격” 조국수복의지를 장렬하게 노래한 「선구자」는 세대와 계층을 뛰어넘어 온 국민이 사랑하는 국민가곡이다. 행사장이나 술자리에서, 심지어 운동권집회에서도 불리는 「선구자」는 그러나 작사자 윤해영의 새로운 면모가 알려지면서 시비에 휘말렸다. 작곡자 조두남의 회고를 통해 비장한 청년독립지사의 이미지로 알려진 윤해영이 일제괴뢰 만주국을 찬양·합리화하는 글을 쓴 변절친일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사료를 통해 지난 91년 처음 알려진 것이다. 「선구자」가 「낙토만주에서 터를 닦는 선구자」로 바뀐 친일 시까지 발견돼 이 노래를 아껴온 많은 이들에게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또 최근 연변대 조선어문학과교수 권철씨(65)는 윤해영이 독립운동가가 아닌 시인이었으며 만주국의 친일조직인 협화 협회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 함북 회녕으로 가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구체적 행적을 밝혀내 오랫동안 가려졌던 베일을 벗겨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이 노래는 지난해 림정 선열5위 영결 제전때 조가로 선정됐다가 독립운동 유관 단체 등의 격렬한 반대로 취소됐다. 「선구자」는 작곡시기가 10여년 앞선 박태준곡 「님과 함께」의 모작이라는 표절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0053 ]용정:하/초라한 무덤에 잠든 ?항일의 함성”두만강:11) 한국일보 940913 09면 기획 2308자◎기미 3·13만세운동…학생 등19명희생/ 윤동주 묘지 등 곳곳엔 투쟁의 유적독립투쟁의 도시 용정에는 피끓는 청년들의 고결한 희생과 투쟁의 함성이 스며 있다. 함성의 흔적은 시내 한복판 미식거리에 있는 용정중앙소학교(구 간도 중앙소학교)에서 시작된다. 간도독립운동의 한 정점인 3·13만세운동의 현장이다. 학교 뒤편 공터에는 용정시 소방중대가 들어섰고 집회시작을 알렸던 성당의 종루 역시 문화 혁명때 파괴돼 현대식 시멘트 건물로 바뀌었지만 학교를 파한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개펄처럼 남은 낡은 교사는 엄숙한 역사의 표정을 되찾는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13일 서전벌판으로 연결된 이 학교의 뒷마당에 2만 여명이 모여 항일집회를 열었다. 국자가(지금의 연길), 개산둔 , 화룡, 명동 등지에서 밤새워 모여 든 청년들이었다. 정오에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된 민중대회는 김약연 목사 등 17명의 대표가 독립선언포고문과 공약3장을 낭독하는 가운데 우레 같은 독립만세소리로 뒤덮였다. 함성의 물결은 곧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일본총영사관을 향한 시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명동학교의 교원과 학생으로 조직된 충렬대가 행렬을 이끌었다. 일본경찰과 이 지역에 주둔해 있던 만주군벌 맹부덕 부대는 시위대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 3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13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부상자중 6명도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학생들의 희생은 간도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5월말까지 2개월여 동안 간도전역에서 7만 여명이 참가한 50여 회의 집회와 시가행진이 잇달았다. 간도의 독립운동은 여기서부터 무장투쟁의 굽이로 접어들어 봉오동이나 청산리 대첩 등의 높은 봉우리로 치솟게 된다. 함성이 잠든 곳은 시내를 벗어나 명동촌 방향으로 거슬러 가는 곳에 있는 3·13묘지이다. 용남촌 부근의 큰 길에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 길을 따라 가면 세월에 깎여 야트막한 언덕이 돼 버린 묘들이 눈에 들어온다. 「삼·일삼 반일 의사릉」이라고 적힌 대리석 묘비가 없다면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분묘로 지나칠 법하다. 3·13운동 희생자들의 묘소를 발굴한 것은 89년말. 개방의 시대를 맞아 민족주의에 대해 중앙정부가 관대해지자 연변의 사학자들은 문혁의 광풍에 조각난 조선족의 역사를 복원해 가기 시작했다. 인근 마을 노인들의 입에서 나온 만세묘지라는 단서 하나로 시작된 발굴작업은 90년 4월 마을주민들과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마무리됐다. 93년 5월 한국독지가의 도움으로 묘비가 세워졌지만 휑한 벌판에 있는 13기는 여전히 초라하기 그지없다. 언덕을 오르면 또 다른 투쟁으로 숨진 시인의 무덤이 있다. 윤동주의 묘지이다. 해방을 몇달 앞두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숨진 시인은 화장된 채 뼈만으로 돌아와 이 자리에 묻혔다. 찾는 이없이 버려졌던 시인의 묘지는 80년대 후반 한국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명소로 바뀌었다. 봉분주위에는 시멘트로 띠를 둘렀고 상석도 새로 놓았다. 시인의 모교인 은진중학을 통합한 용정중학이 자랑스러운 졸업생을 기리는 뜻에서 수선작업을 한 것이다. 맞은편에 펼쳐진 비암산 사이로는 용정시가지가 길다랗게 늘어서 있다. 항일투쟁의 유적들은 30여만명의 상공도시로 새롭게 태어나는 용정의 역사를 증언해주는 상징이 되고 있다. ◇특별취재부/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또 하나의 별” 송몽규/문예·독립투쟁·옥사… 외사촌 윤동주에 가려용정시가를 굽어보는 동산기슭에는 윤동주와 그의 그늘에 가려진 또 하나의 별 송몽규가 묻혀 있다. 사촌간인 두 사람은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같은 해(1917년)에 태어나 같은 장소(후쿠오카형무소)에서 같은 해(45년) 옥사했다(윤동주 2월 16일, 송몽규 3월 10일). 소학(명동) 중학(은진) 대학(일본 동지사)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체포됐을 때의 죄목(치안유지법위반)도 같았다. 사후에 윤동주는 친족들이 유고시집을 발간한 반면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는 남아 있는 글이 거의 없어 평가기회를 얻지 못한채 잊혀졌다. 윤동주는 정지용이 발문을 쓴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민족시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송몽규는 윤동주를 이야기할 때나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등과 더불어 소학때부터 문예활동을 했고 중3때인 35년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문사의 길은 먼저 들어선 셈이다. 송몽규는 무장독립투쟁의 요람중 하나였던 남경군관학교를 다닌 열혈청년으로 후쿠오카형무소의 형기도 윤동주보다 6개월이 긴 2년6월이었다. 두 사람이 넋으로 다시 만난 것은 90년 4월. 용정시 지신향 장재촌에 버려진 송몽규의 묘가 발견돼 윤동주묘곁으로 이장된 것이다. 죽음으로 헤어진지 45년만이었다. 0051 ]청산리·봉오동/함성잠든 청산리엔 산새소리만(두만강:12) 한국일보 940927 09면 기획 2593자◎ 봉오동 격전지는 거대한 댐에 “수몰” /전설적인 양대첩 이젠 조선족 가슴에 남아용정 3·13만세운동으로 본격화된 간도독립운동은 이듬 해인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신화적인 대첩으로 그 절정을 이루고 홍범도와 김좌진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낳는다. 두 전투의 이야기는 아들 손자에게 전설처럼 전해오면서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두만강변 조선족의 가슴에 엊그제 일같은 생생한 현실감으로 살아 있다. 전적지는 용정을 중심으로 각각 동서 1백리쯤 거의 대칭되는 곳에 떨어져 있으나 입구의 넓은 평지와 이어지는 수십리 험준한 골짜기의 지형은 많이 닮았다. 병력과 장비가 크게 열세인 독립군이 적의 대병력을 유인, 기습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적절한 지형임을 문외한이라도 한 눈에 알아볼 만하다. 그 해 6월7일에 먼저 전투가 벌어진 봉오동은 용정에서 두만강 하류쪽으로 한참 내려간 도문시 인근이다. 험한 산세를 한동안 헤쳐가다 보면 탁 트인 평지가 나타나면서 토성리라는 30호 남짓한 작은 마을 앞에 「봉오저수지유원지」라고 쓰인 회벽담장이 막아선다. 도문사람들이 자주 들놀이 삼아 오는 곳인데도 놀이 시설이나 상점 하나없이 오히려 적막하다. 유원지로 들어가 왼편의 작은 전적비를 뒤로 하고 좁아지는 골 안을 따라오르다 문득 골짜기 양쪽을 막은 높이 20, 길이 1백50여 가량되는 거창한 시멘트 댐을 정면으로 만난다. 항일무장투쟁사의 첫 머리에 오를 봉오동전적지는 안타깝게도 바로 이 댐이 만든 드넓은 인 공호 아래 흔적도 없이 수몰돼 있다. 다만 호수 주변을 감싸듯 둘러선 산세의 험준함으로 막연하게 당시의 격전상황을 미루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전투를 이끌어 용명을 얻은 홍범도는 간도국민회산하 대한독립군 7백명을 지휘, 독립군의 근거지인 이곳까지 쫓아 들어온 일본관동군의 정예연대급 병력을 일거에 궤멸시켜 버렸다. 홍범도의 첫 공격신호탄으로 시작된 전투는 3일을 이어 졌으나 승부는 사실상 첫날 전투로 끝났다. 이 짧은 전투에서 일군은 5백여명이 사상하는 치욕을 당했으나 독립군은 5명의 인명피해를 냈을 뿐이었다. 신화는 넉달 후 청산리에서 재현됐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등 2천8백명으로 구성된 독립군은 반격을 노리는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을 피해 백두산록이 부챗살처럼 펼쳐진 화룡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옮겨 진용을 폈다. 10월20일 골짜기 입구 백운평 너른 평야를 무혈점령한 일본군의 선발부대와 뒤따르던 본대 8천병력이 청산리 협곡에 쳐놓은 김좌진부대의 십자포화망에 걸려들었다. 이후 일군은 홍범도부대가 주력을 이룬 인근 어랑촌전투등을 포함, 6일에 걸친 대회전에서 무려 3천여명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물러났다. 양편 산줄기가 맞닿아 있는 청산리격전지는 여전히 수목이 하늘을 가린 밀림지대다. 두릅 등속을 캐는 약초꾼이나 벌채꾼들만이 간혹 드나들 뿐 인적조차 끊긴 곳에 산새소리만 무심하다. 백운평에는 너와로 지붕을 얹은 귀틀집 서너채가 무성한 잡초 속에 버려져 있고 여기저기 부서진 담장터 옆에 농기구 따위가 뒹굴고 있다. 원래 20호쯤 됐다는 이곳 마을은 세월의 무게 때문에 허물어져간 것이 아니라 청산리패전에 대한 일본군의 보복토벌로 영원히 사라졌다. 두만강변 조선인들의 발길이 닿은 어디든 비극이 함께 하지 않는 곳은 없다.<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 김좌진·홍범도/항일 무장투쟁사의 두거봉 /이념따라 업적 일방적 왜곡항일무장투쟁사에 우뚝 솟은 두 거봉 김좌진과 홍범도의 공적을 섣불리 비교하는 것은 부질없을 뿐 아니라 쉬운 일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이념의 역사에 의해 어느 한쪽이 부당하게 폄하되는 피해를 당했다. 청산리대첩의 영웅이며 무장항일투쟁사의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백야 김좌진(1889∼1930년)에 대한 평가는 우리쪽만의 시각이다. 북한이나 또 그쪽 영향이 큰 연변학계에서의 백야에 대한 대접은 아주 인색하며 홍범도(1868∼1943년)에 거의 일방적인 무게를 싣고 있다. 북한역사연구소가 발간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는 심지어 청산리대첩을 홍범도의 단독작전에 의한 성과로 기술하고 있다. 또 청산리 입구에 세워진 항일전적비에도 김좌진의 이름은 아예 빠진채 「홍범도의 영도하에」 작전이 이루어졌다고 씌어 있다. 이렇듯 김좌진은 북한과 연변학계에서 부르주아적 민족운동가로 그 역사적 위상이 대수롭지 않게 폄하돼 있다. 이같은 사정은 우리의 경우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김좌진에 대한 평가는 충남 홍성의 명문가 출신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이끌며 청산리의 신화를 이끌어 낸 그에 대한 마땅한 대접이다. 그러나 그에 상응한 대접을 받을 만한 홍범도는 김좌진의 그늘에 가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홍범도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는 80년대 이후 비로소 우리 학계에서 시도돼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같은 왜곡은 훗날 홍범도가 소련공산당에 가입하는등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김좌진이 사상적으로 민족주의노선을 고수하다 조선공산당계열에 의해 암살된 사실이 두 인물의 평가에 영향을 미친 때문이다. 분단상황에서 비롯된 이념대립은 해방 후의 역사 뿐 아니라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사까지 자의적으로 왜곡, 두 영웅의 업적을 함부로 재단해버린 것이다. [0050]도문해관/이별이 흐르는 북의 통풍구(두만강:13) 한국일보 941004 09면 기획 2672자◎ 강건너온 북한주민·한국관광객 뒤섞여/하루300여명 왕래 북· 중최대관문… 물물교환식 거래도문은 북한사람과 중국조선족의 만남과 이별이 이루어지는 중·조변경 도시이다.연길부근에서 부르하통하(포이합통하)와 합친 해란강은 동쪽으로 50쯤 흘러내려 어머니 두만강을 만나는 합수 머리에 도문이라는 도시가 형성되게 했다. 도문이라는 이름 자체가 만주어로 여러 갈래의 물이 합쳐진다는 뜻이다. 강물이 만나고 헤어지듯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곳 도문해관은 북한과 연변을 잇는 두만강 최대의 관문이라고 할만한 곳이다. 철교를 통해 하루 두 차례씩 화물열차가 강건너 북한 남양시를 오가고 도문대교로 양쪽을 넘나드는 북한주민이 평상시 하루 3백명은 된다. 두만강변에서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여기만한 곳이 없다. 그래서 지난 8월 김일성 사망후에 북한사회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기자들이 이곳에 대거 모여들었다. 도시 남동쪽 강안에 있는 도문해관에 들어서면 여지없이 개방중국의 상혼을 먼저 만나게 된다. 해관 오른편 입구에서 북한의 지폐와 엽서를 관광기념품으로 파는 조선족 아줌마들과 건너편 북 한땅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권유하는 사진사들이 여간 집요하지 않다. 호객대상은 물론 한국관광객들이다. 백두산 관광길에 두만강건너 북녘땅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의 무대는 십중팔구 이곳 해관이다. 사진 한쪽에 망강루라는 조악한 중국식 정자나 「중조변경」이라는 팻말이 보인다면 틀림없다. 갈 수 없는 고향땅을 사 진으로나마 붙들어 두려는 북한출신 실향민들은 여기서 망연한 표정으로 강너머를 바라보거나 눈물을 쏟고서야 발길을 돌린다. 초라한 3층 콘크리트 해관건물의 경비를 맡고 있는 중국변방 수비대원들의 표정은 중국조선족 장사꾼들의 활력과는 대조적으로 굳어 있다. 특히 김일성 사망 후 이곳을 통해 전해지는 북한정보의 난무와 그에 따른 미묘한 중국측 입장 때문에 경계의 눈초리가 한층 긴장돼 있다. 해관건물안에서 만난 10여명은 억센 함경도 사투리가 아니더라도 눈에 띄게 초라한 입성이나 행색만으로도 단번에 북한주민임을 알 수 있다. 친척방문등을 마치고 돌아가는 이들은 짐을 일일이 뒤지는 까다로운 출국검사로 곤욕을 치른다. 자전거 재봉틀 라디오는 각 1대, 담배 2백이하, 쌀 1가마, 술 2병…. 벽에 나붙은 물품통관 허가기준의 차가운 잣대가 친척들이 챙겨준 물건꾸러미를 마구 헤집는다. 세관원들에 매달리는 이들의 통사정에서 어쩔 수 없이 찌든 궁핍이 전해져 온다. 도문해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무역은 81년께부터 본격화했다. 북한측에 변변한 결제수단이 없는 탓에 대개는 물물교환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중국의 의류등 생활용품을 북한의 명태등 해산물, 약초, 원목따위 임산물과 맞바꾸는 방식이다. 해관을 나서면 도문강 하구안이라고 새겨진 대리석 관문이 우뚝 솟아 있고 1백여 남짓한 도문대교가 북한쪽 국경세관으로 연결돼 있다. 다리의 상판과 난간에 10 간격으로 늘어선 가로등이 중국쪽 주황색, 북한쪽이 하늘색으로 경계표시를 대신하고 있다. 함북 번호판을 단 트럭이 통관된 짐들을 가득 싣고 떠나고 북한주민과 조선족보따리 장사를 실은 소형버스가 강을 건너간다. 사망후에도 북한측 세관건물 정면에는 김일성의 대형 초상화가 여전하다. 북한측에서 보면 도문은 외부세계를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이다. 북한주민들은 그나마 왕래가 있는 도문을 통해 이웃 중국을 바라 보고 그 너머의 세계에 있는 한국을 곁눈질하고 있다. 도문은 그래서 북한에 변화와 개방의 바람을 몰아가는 통풍구가 되고 있다. ◎ 오늘도 눈물에 젖은 강/중조선족 찾아온 북혈육에 선물 싸 보내며“눈시울”도문을 끼고 흐르는 두만강은 여전히 눈물젖은 강이다. 한 세기전 혈육을 건너 보내던 단장의 이별장면이 오늘도 이어진다. 도문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관문(교두)위에서 만난 흑룡강성의 조선족 김모씨(58·여)도 모처럼 친척방문을 왔던 조카(34)를 배웅하러 나왔다. 함북 북청출신인 김씨(58)와 경남 산청이 고향이라는 남편 안씨(62)는 전형적인 남남북녀. 12세때 가족을 따라 중국에 온 남편 안씨는 지리산자락의 고향마을 시냇가에서 고기잡던 평화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지만 회색 양복차림이 어색한 조카는 돌연한 남한사람과의 대면을 부담스러워 했다. 김씨의 친정부모는 함께 봉오동전투에도 참가한 경력이 있는 혁명가라는 이유로 77년 북한당국에 의해 온 가족이 평양으로 「모셔」지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70년대후반까지 중국보다 형편이 나았던 북한행은 당시 중국조선족에게는 대단한 동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을 안쓰러운 눈길로 볼 만큼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조카와 친정어머니(82)의 생활고를 잘 아는 김씨는 주변 친척들을 모아 돈을 추렴, 한 살림이 될 엄청난 양의 「선물」을 마련했다. TV, 라디오, 미싱, 자전거등 북한에서는 귀중품이라고 할만한 가재도구에다가 쌀, 옥수수등 식량까지 꾸렸다. 남동생의 아들로 17세때 평양에 간 조카의 혼란과 갈등은 심해 보였다.짐 실은 트럭을 먼저 떠나보낸 뒤 조카는 선물받은 자전거를 끌고 다리를 건넜다. 남은 사람들은 조카를 내려다보며 눈시울을 적셨고 다리 중간쯤에서 자꾸만 뒤돌아보던 조카도 끝내 고개를 떨구고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조카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중국땅의 가족들은 오랫동안 눈물을 수습하지 못했다. 0049 ]발해 유적지/해동성국의 위용 찾을 길 없고…두만강:14) 한국일보 941011 09면 기획 2747자◎ 성곽은 논밭으로… 중선 “지방정권” 폄하/왜곡된 역사… 발끝에 채인 토편엔 왕국의 전설 “아스라이”698년 고구려의 유장 대조영이 세워 2백27년간 동북아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왕국. 전성기에 북으로 시베리아, 남으로 함남 용흥강에 닿고 동서로는 요동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 찬란한 문화를 일으켜 일찍이 해동성국의 칭호를 얻은 나라. 그러나 발해는 우리에게 쉽게 실감되지 않는 역사 저편 전설의 왕국이다. 두만강이 도문을 지나면서 급하게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해에 다다를 즈음에 혼춘시가 있다. 두만강개발계획에 따른 개발붐으로 들뜬 요란한 이 도시에서 서쪽으로 20리 채 못미친 고즈넉한 곳에 발해의 옛 도읍터가 남아 있다. 두만강지류 훈춘하가 만든 드넓은 퇴적평야 한가운데서 팔련성이라는 화강암 안내석을 발견했을 때 어처구니 없고 허망한 느낌이었다. 팔련성이라면 3대군주인 문왕 대흠무가 천도, 발해의 세번째 도읍이 된 동경 용원부가 있던 곳. 비록 9년만에 다시 지금의 북만주지역인 상경 용천부로 옮겨졌으나 그 때 대제국의 수도로서 지녔을 당당한 위용은 주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온통 논으로 변한 너른 들판에 안내석을 중앙에 두고 멀리 사람 키높이 정도의 낮고 좁은 둔덕이 군데군데 돌출해 있고 미루 나무가 아득한 거리에 도열해 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옛 성벽의 잔해라는 안내인의 설명이 아니라면 둔덕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허물어진 농로의 모습 그대로였다. 원래 팔련성은 외성 내성 궁성의 세겹 성벽으로 이루어졌고 성내에는 정자 누각등이 화려했으며 전체 둘레가 3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였다는 설명은 귓가로 흘렀다. 도성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었다는 온특혁부성, 석두하자성 따위의 위성들도 세월의 풍상에 쓸려 사라져버렸다. 씁쓸한 기분으로 논둑길을 따라 나올 때 문득 발끝에 채인 예사롭지 않은 토편이 바로 발해궁의 기왓조각이라는 현지역사연구자의 설명에 다소 위안을 얻었다. 발해 5경중 두번째 도읍지였던 중경 현덕부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중경 현덕부 자리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멀리 용정을 지나 백두산가는 길목인 화룡현 서성향에 있다. 서고성터로 이름붙여진 이곳도 길 한편의 안내판을 보고서야 간신히 발길을 다잡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논밭으로 변해버렸다. 흙으로 쌓은 성벽 역시 논두렁길 모습으로 내려앉았고 중앙의 번화했을 도성거리터에는 초라한 중국의 전형적 농촌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내·외성과 궁성 5개로 이루어진 둘레 2.7㎞가량의 웅장한 직사각형 도시는 현실감 먼 기록속에만 있을 뿐이다. 좀 더 구체적인 발해의 흔적은 이 서고성 근처에 있다. 멀지 않은 해란강지류 복동하을 건너면 야트막한 용두산언덕에 대흠무의 넷째딸 정효공주의 묘를 만난다. 일찌감치 도굴돼 내부부장품은 없어도 벽화들을 통해 발해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중국당국의 비공개방침에 부딪쳐 무산됐다. 묘를 보호한답시고 묘 위에 역사적 가치의 무게에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붉은 시멘트벽돌에 함석지붕을 이은 20여평짜리 가건물을 흉한 모습으로 얹어 놓았고 거기다 주먹만한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멀리서 보면 그냥 흔한 농가주택으로 보기 십상이었다. 결국 발해의 실체는 두만강변에서도 그저 희미한 단서로나 잡힐 뿐이다. 오히려 망각의 왕국 발해는 중국인들의 완강한 왜곡과 부정속에서 그 존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안내인은 발해유적지 탐사길 안내를 두만강변에서의 북한땅 근접취재때보다 더 꺼려 했다. 한국인들의 발해취재가 혹시 훗날 만주땅에 대한 영유권거론과 연결될지 모른다는 중국당국의 과민반응때문이라고 했다. 발해는 천년 망각의 세월속에 초라하게 축소되어 있다. 정효공 주묘앞 안내판에는 「당조때 속말갈인이 우리나라(중국) 동북과 지금 소련 연해주지방에 세웠던 지방정권」이라고 쓰여 있다. ◎ 발해에 대한 평가/주변국들,아전인수식 해석… 남·북한서도 소외역사의 진실은 하나일 터이지만 현재의 이념이나 가치관에 의해 재단되게 마련이다. 역사가 현재의 유용성에 종속되는 것이다. 발해의 위상도 마찬가지다. 발해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발해의 영토와 역사를 일관되게 계승한 나라가 없고 사료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와 이해가 닿는 주변국들이 나름대로의 유리한 해석으로 대립하고 있다. 발해영토의 대부분을 점유한 중국에게 발해는 만족에 흡수된 말갈족 중심의 일개 지방정권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중국역사내의 변방가지쯤 되는 위치이다. 국내학자들은 이같은 견해의 근저에는 소수민족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분명히 해둠으로써 그들의 분리독립의식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는 발해사를 중국사에서 분리시키고 있으나 연해주지방에 연구가 집중돼 있고 중국문화보다는 중앙아시아나 남부시베리아의 영향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넓게 보면 이것 역시 러시아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견해인 것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무관해 연고권을 주장할 처지가 아니지만 발해와의 외교관계를 천황제적 질서의 틀로 보고 있다는 것이 우리 학계의 평가다. 즉 왕이 지배하던 발해에 비해 천황제하 일본의 우월성을 부각시키는 시각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교수는 발해사를 각국이 자기중심적 세계관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에는 남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한학계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발해의 성격을 애써 무시한 채 고구려의 계승국으로만 파악하고 있고 정도차는 있으나 우리도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0048]훈춘/북·중·러 「황금심각」 도약의 도시(두만강:15) 한국일보 941018 09면 기획 2574자◎ 러시아길 자동차빼곡/북한길엔 모래바람만/ 강건너편에 60m가 넘는 왕재산 혁명 유적탑이…두만강은 도문을 지나면서 한반도의 북단을 크게 휘감아 돌아 곧바로 동해를 향해 남행한다.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숱한 굽이를 돌아나온 강물은 긴 여정의 막바지에 비로소 평온을 찾는다. 그래서 도문훈춘간도 훈대로를 낀 강물의 유장함은 온갖 풍상끝에 이윽고 달관한 자의 여유를 닮았다. 훈춘 가까운 소읍 경수를 갓 지난 강 건너편 산등성이에는 횃불모양의 장식을 머리에 이고선 거대한 석탑이 있다.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하던 김일성이 36년 두만강을 건너 귀국,8도 대표들을 모아 조선노동당 창건을 선포했다는 왕재산의 혁명적탑이다. 60m가 넘는 탑과 청동 36톤이 들었다는 김일성동상앞에는 1년내내 북한전역에서 천리행진해온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는 안내인이 설명한다. 북한주민들의 소위 혁명유적지참배는 대개 감격에 겨운 울음판이 되게 마련이고 그 울음판은 김의 사후에 더 심해졌다는 것이다. 왕재산유 적탑 바로 아래쪽 강기슭 김일성의 도강지점이라는 곳에도 기념비가 섰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어디나 이처럼 역사적 장소가 되어 있다. 비석앞 계단에는 우마차를 세워둔 농군과 총을 내려둔 인민군이 다리쉼을 하면서 무심한 눈길로 이편을 건너다보고 있다. 배경의 장대한 기념물로 두 사람의 어깨는 더 굽고 지쳐 보인다. 도훈대로가 끝날 즈음 중국 북한 러시아 3국의 국경이 교차하는 연변조선자치주의 동쪽 끄트머리에 훈춘이 모습을 드러낸다. 유엔의 두만강개발계획이 만든 「황금삼각」의 중국쪽 꼭지점답게 초입부터 발전용량 60만㎞의 대형 화력발전소를 필두로 갓 지어진 공장굴뚝들이 즐비하다. 도심에는 발해 동경용원부에서 이름을 딴 4차선 포장도로 용원로가 남북으로 뻗어 있고 양옆으로 4∼5층 건물이 도열하듯 늘어섰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신축중인 건물과 바쁘게 오가는 오토바이,자전거로 자치주의 수도 연길보다 활력에 넘쳐 보인다. 관심있는 사학자들에게나 1920년 일본이 저지른 훈춘학살사건으로 기억될 연변의 오지마을이 동북아개발의 핵심지역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후반이다. 변경무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89년에야 시로 승격한 훈춘은 91년 3월 유엔개발계획(UNDP) 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의 나진과 선봉,러시아의 포시에트와 함께 황금삼각을 이루면서 동북아 개발의 중심도시로 떠올랐다. 이어 92년 3월 중국국무원 비준으로 변경개방도시로 지정된 훈춘은 본격적으로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그러나 북한을 중심으로 한 주변정세가 유동적이고 한국등 주변국들이 투자효과에 자신을 갖지 못해 아직은 훈춘의 의욕만이 두드러지는 인상이다. 훈춘경제활동의 중심은 여전히 러시아·북한과의 변경무역이다. 도심에서 남쪽으로 곧장 가면 러시아 하산지구와 면한 장영자해관이, 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북한과 통하는 사타자해관이 있다. 두 곳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장영자해관쪽은 진입로부터가 번듯한 포장도로다. 새로지은 듯한 3층 통상관 앞마당에는 연변지역의 택시나 대중승용차에서부터 포클레인등 중장비와 대형 군용헬기까지 빼곡하다. 88년 5월 변강 통상구로 교역을 튼 이래 중국은 의류등 일반소비재를,러시아는 기계류등 중공업제품을 바꾸어왔는데 교역량 증가추세로 보아 곧 흑룡강성의 흑하나 원분하지역을 능가할 전망이다. 반면 북한으로 가는 길은 초라했다. 좁고 복닥거리는 재리식 시장을 지나 도심을 벗어나면 포장이 안된 진입로가 낡은 해관에 이어진다. 모래언덕이라는 아름답게 사타자해관에는 모래바람만 불고 단층건물 앞에서는 함북표지판의 동태운반용 냉장트럭이 눈에 띌 뿐 썰렁하다. 강변 어디에도 열려 있는 문은 없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열기자-기획취재부 ◎ 조선족 김민웅 훈춘시장/“올 20개 한구기업 진출… 「중국 자원」에 관심가져야”훈춘개발의 주역은 조선족 김민웅시장(56)이다. 지난해 임기 5년의 민선시장에 선출된 그는 투자유치를 위한 홍보와 외국손님접대에 여념이 없다. 지난해 시에서 맞은 외국인은 9막6천여명. 올 상반기엔 벌써 10만여명에 이르렀다.김시장은 지리적 이점에서부터 물적·인적 자원의 풍요함을 열거하며 훈춘투자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훈춘에 대한 투자는 21세기를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김시장은 『올해 들어온 합자기업 92개중 한국기업이 20기로 가장 많다』면서 『한국은 자원이 없는 만큼 인구와 자원이 많은 중국시장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연변자치주에 대한 지속적 배려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시장이 그리는 황금삼각의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직접 이해당사국인 러시아쪽은 재원조달이 쉽지않고 북한쪽은 개방속도가 워낙 미미한 때문이다. 『하지만 진인사대천명의 심정으로 우선 투자기반조성에 전념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지 않겠느냐』고 낙관한다. 연변통신대학을 졸업한 김시장은 건축기술자로 일하다 용정임산기 업소 경이,용정시 당서기를 지낸 전형적 공산당출신 테크노크라트.빈 틈을 보이지 않던 김시장도 고향얘기를 꺼내자 『선친의 고향 김해를 지난 5월 자매결연도시인 포항을 다녀오는 길에 둘러 봤다』면서 『아버님생전에 거기로 모셨어야 했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0046]방천/절절한 「한의 여정」도 멎고…(두만강:16) 한국일보 941025 09면 기획 2633자◎ 적막한 북·중·러 접경… 강물은 해원의 바다로 백두산 기슭 원지에서 발원, 1천3백리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강물은 이제 그 종착역에 이르렀다. 북한 중국 러시아 3국의 경계가 맞닿은 강의 끝 방천에서 보는 두만강은 이미 바다를 닮아 있다. 강물이 훑어온 그 절절한 한들은 흐름이 멎어버린 이곳에 이르러 이윽고 해원의 평화를 얻는 느낌이다. 동해는 벌써 손끝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다.혼춘에서 방천까지 70여 비포장도로변의 상당구간은 마치 어느사막의 풍경이다. 바닷바람이 만들어낸 모래구릉들이 들판 곳곳에 한 무더기씩의 잡초더미를 얹은채 황량한 모습으로 널려 있다. 해풍이 워낙 거센 탓에 「훈춘바람에 소머리 터진다」는 속담이 생겼다. 대반령이라는 작은 고개를 넘어서야 강변다운 푸르른 운치가 되살아난다. 그러나 방천의 분위기는 개방바람에 들뜬 훈춘과는 판이하다. 방천의 입구쯤에 해당하는 권하에서부터 예전 군사특구때의 긴장감이 그대로이다. 통행증을 요구하는 무장경찰의 단호함과 군부대원들의 곱지 않은 눈길들이 번번이 낭패스러웠다. 얼마전까지 이 곳 국경부대에서 장교로 근무했다는 안내원의 안면이 아니었더라면 방천길은 포기해야 했을뻔 했다. 권하주둔부대뒤편으로 5백여는 돼보이는 낡은 다리가 있다. 일제때 만주의 자원수송을 위해 함북 은덕(옛 경흥)을 연결하던 권하다리다. 65년께부터 조중무역로로 이용됐지만 교역량이 감소하자 80년께부터 폐쇄됐다. 다리위로 파인 비교적 최근의 타이어자국은 밀수차가 드나든 흔적이다. 다리중앙 푸른 줄로 그어진 경계선에 접근하자 곧 건너편에서 강파른 모습의 북한측 경비병이 아연 긴장하는 태도를 보인다. 다리 건너에는 그 유명한 아오지탄광이 있고 북한이 자랑하는 승리화학공장도 있다. 중류서부터 온갖 오염물질을 떠안고 온 강물은 탁한 검은 색이지만 아직도 봄가을로 연어와 황어가 거슬러 올라온다니 자연의 무서운 생명력이 경이롭다. 길은 어느새 러시아와 북한사이 회랑지대로 접어들었다. 방천은 중국측에서 보자면 러시아와 북한의 국경이 마주 붙은 곳을 지나서 흡사 섬처럼 고립돼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러시아땅에 통로를 빌려써야 했다. 중소분쟁등으로 양국의 사이가 안 좋았던 시절에는 드나들 때마다 술이나 음식따위를 요구하는 소련경비병의 등쌀에 시달렸다고 한다. 중국은 92년 8월 영유권을 갖고 있는 강위에 둑 1를 쌓아 통행로를 만듦으로써 오랜 주 민의 고통을 해결했다. 호수위에 떠가는 느낌으로 제법 낭만적이기까지 한 이 좁은 길을 지나면 곧 방천이다. 두만강변 중국의 끝지점인 방천은 민가라야 고작 30채 정도인 군사지역이다. 중소분쟁시절 마을어귀에 세운 「철벽방천(철벽방천)」이라는 화강암비가 개방바람을 거부하듯 여전히 완강한 모습이다. 중국땅 끄트머리에 심양군구의 최동단 전초기지인 방천초소가 3국을 한 눈에 조망하며 서 있고 군부대 막사와 10 높이 망루의 한 켠으로 관광국이 지은 3층건물과 정자 2채가 들어섰다. 개방물결 속에서 엉거주춤한 중국의 망설임을 보는 듯하다. 망루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북한의 두만강역, 왼편으로 러시아의 폴그드나야역이 눈에 들어온다. 전면으로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두만강철교가 가로 놓여 있다. 찬 바람이 이리저리 햇살을 헤집는 아침, 두만강이 그 긴 여정을 접는 하구는 잔잔한 해무에 싸여 있다. 강물의 시원에서부터 틈입을 허용치 않았던 북녘땅은 여전히 표정이 없다. 「되돌아 가 보아야 별 일이 없네/ 여산은 안개비로 덮이고 절강엔 파도가 치네(도득환래무별사 여산연우절강조)」 소동파의 시「관조」에서와 같은 적막감만 강물에 흐르고 있다. □특별취재반/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이준희기자-사회부/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사라진 뱃사공/「푸른 물」없고 유람선… 옛사람의 애환만 흘러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은 이제 없다. 푸른 물도, 뱃사공도 옛 말일뿐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유람선에 올라 옛 사람들의 애환을 상기해보는 정도다. 방천초소와 마을 사이에 유람선선착장이 있다. 식당을 겸한 조악한 바지선 한 척과 유람선 3척, 모터보트 2척이 고작이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에게는 남다른 느낌일 수밖에 없다. 유람선을 탈 수 있는 기간은 6월부터 10월까지 다섯달 정도. 해빙이 더디고 겨울이 빨리 오는 탓이다. 망해 1,2호 송화강이라는 이름의 유람선은 모두 40인승 25톤급. 중국에서 돈이 되는 사업은 대부분 관공서가 하는데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운영주체가 훈춘시 임업국이다. 1인당 요금은 15원. 잔잔한 강물 위에 해풍이 불어 물결을 만든다. 하구의 폭은 3백여, 수심은 3 정도에 불과하다고 선원이 일러주었다. 방천에 대규모 항구를 만들어 출해권을 확보하려는 중국의 노력에 철교높이와 수심이 걸림돌이라고 덧붙였다. 오른편 기슭의 하얀 중국 러시아 국경비석을 지나 두만강철교를 끼고 바짝 북한쪽 기슭으로 다가선다. 모래언덕 사이로 갈대밭이 간간이 눈에 들어올뿐 강변에 인적은 없다. 3개국 국경이 맞닿은 민감한 지역이어서 북한변경 군인들과 안전부사람들 외에는 강변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3년째 유람선을 몰아온 조선족 이성철씨(25)는 『한해 유람선을 타는 손님은 줄잡아 5만명』이라며 『대부분 조선족등 중국국내인들이지만 지난해부터 한국사람들도 가끔 온다』고 말했다. 이씨는 『배를 타고서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들은 한국손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0045 ]연변의 개방증상/유흥업소1,200곳…흥청대는 연길 (두만강:17)한국일보 941101 09면 기획 2724자◎룸살롱·요정·티켓다방까지 성업/“창문여니 파리가…” 부작용 한탄/「돈맛」알곤 순박한 인정 옛말, 한국인은 「봉」두만강은 여전히 단절의 강으로 남아 있으나 강역의 조선족사회는 오랜 폐쇄의 장벽을 허물고 외부로 열려 있다. 그러나 어디서나 그렇듯 익숙지 않은 개방은 혼란스러운 법이다.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X파리가 들어온다』 연변의 조선족이 급격한 개방의 부작용을 한탄하는 얘기다. 연변의 외양은 자본주의의 값싼 상업문화가 시골접대부의 천박한 화장처럼 덧칠돼 있는느낌을 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연길의 밤풍경은 비록 규모는 작고 시설은 어설퍼도 갖출 것은 다 갖춘 한국 도시의 축소판이다. 나이트클럽에 룸 살롱, 안마실을 갖춘 사우나에다 티켓다방, 서태지노래가 흘러나오는 노래방까지 우리가 아는 유흥업종의 거의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연길시내에만 야총회(나이트클럽) 간판을 건 곳이 1백여개에, 노래방과 술집이 7백여개. 간판을 내걸지 않는 비밀요정까지 합하면 무려 1천2백여개의 유흥업소가 어딜 가든 차로 10분 이내인 이 좁은 도시에 들어 차 있다. 인구대비로 중국최고의 소비유흥도시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올해초부터 이런 불명예를 씻기 위해 시당국은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더욱 음성화하거나 인근 용정, 혼춘등지로 확산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유흥업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개방으로 돈맛을 알게 되면서 전통적인 가치는 모두 뒤편으로 물러앉았다. 조선족사회에서 나름대로 명망있는 사람들이나 교사들도 팔을 걷어 붙이고 이런 장사에 나서는가 하면 명함에 꽤 품위있는 직함이 새겨진 이들도 기를 쓰고 한국행 배를 탄다. 괜찮은 직장의 봉급이 우리 돈으로 월5만원 정도니 서울서 한 1년만 식당종업원으로 불법취업하면 그야말로 「집안을 일으키는」 부를 움켜쥘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조선족은 흔히 『왜 같은 동포가 방문하겠다는데 한국정부가 그렇게 까다롭게 구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개방초기 한국인들이 감격해했던 순박한 인심도 느끼기가 힘들어졌다. 옷차림이나 말씨로 남조선사람인 것을 안 순간부터 시쳇말로 「봉」이 된다. 숙박비나 항공, 기차요금등 중국정부가 외국인에 씌우는 최고 3∼4배씩의 공식바가지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택시요금, 음식값, 시장물건값, 안내비등 온갖 곳에서 챙기려 드는 일이 많다. 연변의 조선족사회 분위기를 이런 식으로 바꾸어 놓은 주범이 한국인 자신들이라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연변에 돈이 구르기 시작하면서 분에 넘치는 사치풍조도 두드러졌다. 백산호텔을 중심으로 한 도심지역 일부만 간신히 포장돼 있을 뿐 온통 좁고 울퉁불퉁한데도 길마다 차량홍수를 이루고 있다. 출퇴근시간에는 온 도시가 서울의 러시아워를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을 앓는다. 연길에서 볼 수 있는 차량은 중고가 많긴 하지만 독일제 벤츠, BMW, 일제 도요타 렉서스, 미제 링컨, 캐딜락등 세계의 명차가 흔하다. 뉴그랜저, 포텐샤, 로얄살롱서부터 르망, 엑셀에 이르기까지 한국산 차종도 거의 모두가 망라돼 있다. 대개 북한을 통해 밀수된 이런 차들은 판매가가 국내가의 두배 이상이다. 중국인들의 수입수준으로는 소유 자체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소유주는 개방이후 떼돈을 번 연변의 개체호(개인사업가)들이다. 행세하는 티를 내고 싶으면 핸드폰 정도는 여기서도 필수품이다. 호텔로비 낡은 소파에 앉은 젊은이들은 핸드폰으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죽인다. 연변의 조선족은 아직 면역력을 갖지 못한채 개방증상을 앓고 있다. 현재의 진통이 백신으로 작용할지 중증 질병으로 발전할지는 더 두고 볼 일이다. ◎ 동족일체감 보여도 “우리 중국선…” 한계의식 1 2억 중국인중 7천만 정도가 한족외의 소수민족이다. 56개의 소수민족중 조선족은 2백10만여명으로 12번째지만 교육수준, 민족의식은 가장 높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행정구역으로 보면 중국에는 신강유오량등 5개의 소수민족 자치구와 연변등 30개의 소수민족 자치주가 있다. 연변은 52년 9월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에 의해 자치구로 지정됐다가 55년 중국 신헌법규정에 의해 자치주로 격하됐다. 인구와 면적이 성급에 미달한 것이 격하의 이유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5∼6개의 조선족 자치향이 있다.조선족의 밀집거주지역인 동북3성의 도시별 조선족인구는 용정이 18만3천명으로 가장 많고 연길시(17만7천) 길림성 길림시(16만6천) 화룡현(13만6천) 혼춘시(9만2천) 왕청현(8만5천) 요녕성 심양시(8만3천) 도문시(6만9천) 안도현(5만1천)등의 순이다. 1870년대부터 집단이주를 시작한 이민 1세대는 광복 전후에 연변으로 몰려들었으나 50년대이후 농사등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흑룡강, 길림, 요녕성으로 빠져나갔다. 60년대 들어 고급교육을 받은 조선족청년들이 여러 곳에 배치되면서 거주지역은 다시 확대됐다. 조선족은 중국 특유의 소수민족정책 덕분에 언어와 풍습을 아직도 유지하지만 민족주의에 대한 접근은 적당한 수준에서 제한받고 있다. 91년에 세워졌다가 당국에 의해 파괴된 용정의 선구자 탑사건이 단적인 예다. 특히 92년 한중수교이후 조선족은 한민족이라는 민족의식과 중국인이라는 국가의식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느낌이다. 한국인들을 대할 때면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을 보이지만 『우리 중국에서는…』이라는 말이 곧 이어진다. 조국에 대한 향수나 실향의 아픔은 이제 고인이 됐거나 노인인 이주 1,2세대의 몫이다.[0044]연변은 남북공존의 실험무대(두만강:18·끝) 한국일보 941108 09면 기획 2936자◎이북말·서울말 남유행가·북혁명가곡 혼재/「이별의 강」머잖아 「화해의 물길」 기대
▷연재를 마치며◁ 연변조선족의 마음에는 중국과 남북한 3국의 정서가 혼재한다.그들이 말하는 『우리나라』, 『조국』은 중국이지만 향수라고 할만한 정서의 대상은 대부분 부모나 자신의 고향인 북한이며 경제적 기대를 깔고 동포애를 말하면 그때는 한국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이념이 굳은 머리로는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또는 남과 북의 만남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다.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냉면전문식당인 연길시 하남로의 목란식당에는 지난 7월 김일성사망때 대형 인공기가 3일동안 내걸렸다. 중국조선족은 이곳의 분향소에 줄지어 찾아와 수령의 죽음을 슬퍼했다. 6·25때 중공군으로 참전한 소위 「조선지원군전사」출신들이 보낸 조화도 분향소 곳곳에 늘어섰다. 두만강가 조선족마을 어귀에서는 거창한 대리석비가 흔히 눈에 띈다. 「혁명열사비」라는 것이다. 비석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 중에는 항일투쟁가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6·25때 참전했다 희생된 조선족이다. 길림성내 혁명열사의 90%는 조선족이다. 나이든 이들은 지금도 『그때 대전까지 진격했었다』는 따위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다. 중국에 장기거주하는 북한국적의 조교(조선교포)들만 해도 5천명에 이른다. 연길등지에서 노동이나 단순사무직에 종사하며 북한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는 바람에 북한탈출자에게는 공포의 사냥꾼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난해까지 연간 1천여명이나 됐다는 중국친척방문객이 아니더라도 연변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북한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연길과 청진의 머리글자를 딴 「연청기업」따위의 이름을 내건 북한무역상들이나 합자기업이 큰길가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한국관광객들이 주로 묵는 백산호텔의 내왕객 옷깃에서도 김일성배지가 자주 눈에 띈다. 얼마전까지 목란식당등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연길지역 식당 3곳의 여성접대원은 모두 북한에서 가려뽑힌 처녀들이었다. 한국관광객들의 호기심찬 질문을 잘 받아넘기던 이들은 북한핵문제로 전쟁위기설까지 돌던 지난 3월께 거의 철수하고 지금은 조선족처녀들로 바뀌었다. 연변에는 북한고위층 자제들로 구성된 북한대외무역부직할 무역사무소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과 가까운 한 조선족청년은 『벤츠같은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달러를 물쓰듯 해 종종 남조선의 오렌지족과 비교되곤 한다』고 말했다. 이들을 통한 무역이라야 강변의 국경무역과 마찬가지로 약초, 산삼등 임산물이나 해산물과 식량, 의류등을 바꾸는 정도이다. 오랫동안 중국조선족에게 유일한 마음의 고향구실을 했던 북한은 개방이후 거센 한국붐에 밀려 급속하게 그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 호텔로비에서 마주치는 북한사람들도 압도적인 남조선사람들의 숫자와 거침없는 기세에 주눅든 표정이다. 그러나 눈길은 그다지 냉랭해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미미하지만 남북한의 공존가능성은 조심스럽게 실험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중인 한국의 40대 중소기업인은 『나진·선봉지역에 투자하라는 북한측의 전화를 여러번 받았다』고 말했다. 연변의 조선족이 실향민의 부탁을 받고 친척방문길이나 장삿길에 북한의 친척을 만나 소식을 중계해주는 일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연변지역에 북한의 친척을 데리고 나와 상봉을 주선해 주는 브로커들도 생겼다. 연변조선족의 말투는 완전히 평양말과 서울말의 혼합형이다. 강한 이북억양은 부드러운 서울말의 영향으로 모가 깎여나가고 있다. 그러나 멋쟁이로 보이려고 열심히 서울말을 흉내내는 연변처녀의 말투에는 끝내 버리기 힘든 이북억양이 배어 있다. 나이트클럽의 한족여가수 입에서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노래에 대한 앙코르곡으로 김정일이 직접 작사했다는 혁명가곡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곳이 지금의 연변이다. 공존은 멀지 않아 화해의 길을 틀 것이다. 오랫동안 단절과 질곡의 역사를 상징했던 비극의 강 두만강에서는 그 간절한 희망의 작은 실현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남북한의 접점인 두만강역은 미래로 열린 가능성의 땅이다. ◎연변의 한국기업/3백50개업체 투자… 대기업도 속속 진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동단 혼춘시 외곽에 현지사정으로 보아 드물게 잘 지어진 현대식 공장이 있다. 넓은 2층본관 건물 옥상에는 대형 태극기가 당당하게 게양돼 있다. 동일메리야스가 지난해 1백30만달러를 투입해 지은 보온내의공장이다. 작업여건과 보수가 주변 중국공장과 비교가 안 되는 이곳의 현지여직원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국측 통계에 의하면 연변을 중심으로 한 길림성일대의 한국업체 투자건수는 지난해 상반기에 이미 2백16건으로 오랜 교류를 터 온 홍콩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이 숫자는 전년도까지의 총투자건수의 2배를 웃도는 폭발적인 증가세를 알려주고 있다. 올 여름에 만난 연길의 한국실업인 친목단체 관계자는 『한국투자업체가 길림성 전체에 6백여개, 연변지역에만 3백50곳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두만강개발계획이 본격화하거나 남북관계가 개선돼 청진까지의 육상교통로라도 이용하게 되면 연변지역은 동북아의 새로운 경제중심지로 도약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보였다. 연길시가지 중심 백산 호텔앞 로터리에는 「꿈의 한국형 주거문화」를 선전하는 한신공영의 대형 광고탑이 시민들의 눈길을 끌며 압도하듯 서 있다. 대우가 연길에 호텔을, 인근 안도에 수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현대가 훈춘에 강관 공장을, 한전이 열 병합 발전소를 계획하고 있으며 갑을방적, 기아자동차등 대기업들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그러나 투자업체는 대부분 요식업이나 식품, 의류, 생필품 등을 취급하는 중소규모이다. 더구나 수익성은 의욕만큼 높지 않다. 90%이상이 이익을 못 내고 있다는 것이 현지 투자자들의 얘기다. 그들은 「한 사람에 이쑤시개 하나를 팔아도 12억개」라는 식의 기대에서 벗어날 것을 충고한다. 체계적인 유통망이 거의 형성돼 있지 않아 이런 식의 계산은 전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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