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불교 미술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건축에 이어 조각이라고 볼 수 있다. 불상은 불교도들의 직접적인 숭배 대상이므로, 불상 출현 이후 신앙의 중심이자 불교 미술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삼국 시대
불교가 우리 나라에 수용될 당시 순도(順道)가 가지고 왔다는 불상이 어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인도 불상이라기보다는 중국에서 변형된 양식의 불상일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나라 불상은 초기에는 이처럼 중국 불상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불교가 성행하고 조각술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각국의 특성에 맞는 양식으로 변형하여 발전시켜 나아갔다.
현존 고구려 불상은 주로 소형이며 작품도 매우 적은 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으로서는 먼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19호)을 들 수 있다. 둥근 연화대좌 위에 직립하였으며 등 뒤에는 큰 주형 광배(舟形光背)가 있다. 여기에 4행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긴 얼굴에 부푼 눈과 큰 귀, 미소 짓는 입 등에서 느껴지는 고격한 느낌을 준다. 직립한 자세, 두꺼운 불의(佛衣)가 아래로 내려오면서 힘찬 주름선을 이루는 모습 등이 고구려 불상으로서의 기백과 세련된 솜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연가’라는 연호는 기록에는 없으나 고구려의 연호로서, 7년의 기미년은 불상 양식으로 보아 539년(안원왕 9), 또는 599년(영양왕 10)으로 비정된다.
다음은 황해도 곡산에서 발견된 금동신묘명 삼존불입상을 들 수 있다. 현재 대좌는 잃어버렸으나 광배는 완존하고 있다. 삼존 모두 입상으로 본존불은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에 비하여 양식상 연대가 내려와서 중국 육조시대 말 제(齊)·주(周)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광배에는 ‘景四年在辛卯比丘……’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고구려 불상으로는 평양 평천리에서 발견된 금동미륵반가상(국보 제118호), 금동보살입상(보물 제333호), 평남 대동군 원오리에서 발견된 이조보살입상(泥造菩薩立像) 등이 있다.
백제의 불상은 주로 사비 시대(538∼660년)의 작품으로 고찰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다시 전후의 2기로 구분하여 전기는 위덕왕의 치세를 중심으로 한 6세기 후반까지, 후기는 무왕의 치세부터 백제 멸망기까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기에 속하는 금동불로서는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8호)과 부여박물관에 소장된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을 들 수 있다. 후자는 8.5㎝의 소상이지만 삼존상으로서 광배 뒷면에는 “정지원(鄭智遠)이 조성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성 연대는 없으나 양식상 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시기의 불상으로 군수리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호)을 주목할 수 있다. 보관을 썼으며 X자형으로 교차된 천의(天衣 : 천인(天人)이나 선녀의 옷)가 주목된다.
후기의 금동불로서는 부여군 규암면에서 발견된 보살입상 2구가 유명하다. 이들은 보관이나 상호(相好 :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의 솜씨와 긴 몸에 걸친 천의나 영락(瓔珞 : 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의 양식 등이 매우 우수한 작품이다. 이러한 양식은 전기 불상의 엄격한 전통 양식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세와 화려한 장식 수법 등 백제 불상의 양식적 변천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중국 수·당 이래의 새로운 양식과도 유사하다.
후기에서 한층 주목되는 것은 석조 불상의 조형이다. 특히 이들은 서산과 익산을 중심으로 하였다. 서산 지방에는 마애불이, 익산 지방에는 독립된 석상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서산 운산면 용현리 인바위〔印巖〕에 새겨진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이다. 중앙에는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짓고 보주형의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을 지닌 중앙 여래입상이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만면에 천진한 미소를 띤 얼굴에서 친근감이 느껴지며 광배의 연화문과 불의의 착용법이 고식(古式)을 보여 주고 있다.
협시보살상은 좌협시는 반가상이고 우협시는 입상인 희귀한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 3존은 여래와 미륵·관음 두 보살로 추정되고 있다. 또 하나의 마애불인 태안 마애삼존불(보물 제432호)도 주목된다. 좌우에 각 1구의 여래입상이 있고 그들 사이에 키가 작은 보살입상 1구를 배치한 특이한 형식이다. 이들 또한 서산 마애삼존불상과 같이 당시의 신앙에 따라서 삼존을 골라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석가·관음·약사라고 구전되고 있다.
이들 두 마애불은 백제에서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으뜸의 마애석상으로 생각되어 한국 석조 미술의 초기 작품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또한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보물 제45호)은 머리가 없으나 높이 3.63m, 너비 2.64m의 삼국 최대의 광배로 더욱 유명하다. 광배 가장자리의 화염문(火焰文 : 불꽃무늬)과 7구의 화불(化佛)은 당시의 양식을 전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이밖에 백제와 관련하여 백제가 멸망한 직후인 7세기 후반에 그 옛 땅에서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조성된 일련의 비상(碑像)들에 대하여 언급해야 할 것이다. 이 비상들은 충청남도 연기군의 비암사(碑巖寺)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발견된 7개의 납석제 불상을 말한다. 또한 이 비상들은 모두 아미타불과 반가상을 주존으로 삼고 있어 당시 신앙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계유명전씨 아미타불삼존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 국보 제106호)·기축명 아미타불제불보살석상(己丑銘阿彌陀佛諸佛菩薩石像, 보물 제367호)·미륵보살반가석상(보물 제368호)·계유명 삼존천불비상(癸酉銘三尊千佛碑像, 국보 제108호) 등이다. 이와 같은 불상 외에 1983년에 새로 발견, 조사된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禮山花田里四面石佛, 보물 제794호)이나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井邑菩花里石佛立像, 보물 제914호) 2구는 모두 거대한 작품으로 새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고신라의 불상 양식은 600년을 전후하여 살필 수 있다. 특히 600년 이전인 진평왕대는 불교 미술의 중요한 과도기이다. 이 시기에 신라 조각은 발전의 기반을 형성함과 동시에 외래 양식의 도입과 습득으로 꾸준한 기술의 연마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7세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그 내실은 더욱 충실하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금동상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약사여래입상·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184호) 2구 및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양평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6호) 등이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다음으로 특기할 것은 미륵보살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의 조성이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78호)은 머리에 탑으로 장식된 보관을 썼는데 긴 얼굴에는 근엄한 기풍이 나타나 있다. 제작 연대는 안동 옥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국립경주박물관 소장)과 함께 6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다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은 낮은 삼산관(三山冠)이나 상반신이 나체인 양식 또는 대좌에 걸친 옷무늬의 양식 등에서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다 연대가 내려가 7세기 중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들 두 반가사유상은 우리 나라 고대 조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석조불로서는 우선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을 들 수 있다. ㄷ자형의 천연적인 석굴 사원에 총 10구의 불보살상과 인물상들이 새겨져 있다. 굴의 북쪽 바위에는 약 7m나 되는 거대한 여래입상을 새기고, 동쪽과 남쪽 벽에는 보살입상이 각 1구씩 조각되어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명문에 의하여 미륵삼존임을 알 수 있으며, 각 상의 양식 및 기법으로 볼 때 6세기 후반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석불로는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보물 제198호)과 장창곡(長倉谷)에서 발견된 삼화령 미륵세존(三花嶺彌勒世尊, 644년 추정) 및 송화산 금산재(金山齋)에서 전래하던 목 없는 반가상을 주목할 수 있다. 금산재는 김유신 장군묘의 재실로서 이곳은 그의 일가 대대의 원찰(願刹)이었던 송화방(松花房)이라는 사실과 그 불상이 미륵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반가상과 비교할 때 7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2)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 조각은 대략 3기로 대별할 수 있다. 제1기는 통일 직후에서 700년까지, 제2기는 700년경부터 약 100년간, 제3기는 800년경에서 신라 말기인 1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이다.
제1기의 조각은 아직도 전대의 비사실적인 조법과 경직된 의습(衣褶 : 옷주름)이나 작고 둥근 동안(童顔)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대좌 또한 옛 식을 따라 낮고 둥글며 거의 단판(單瓣 : 홑꽃잎)의 연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경주 구황리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은 신라에서 유례가 없는 작품으로 광배와 대좌도 완전하다. 금동함 뚜껑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706년(성덕왕 5) 왕실의 발원으로 봉안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천왕입상 4구는 680년(문무왕 20)경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이 시기의 석상으로는 경주 서악리 마애석불상(보물 제62호),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국보 제201호) 및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석상으로는 군위 삼존석굴(국보 제109호)의 삼존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관음·세지를 협시로 한 아미타삼존불이다. 석굴암 석굴보다 약 반세기 이상 앞선 작품으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제2기인 8세기는 성덕왕과 경덕왕의 두 왕대를 중심으로 신라 조각 미술의 꽃을 피운 시기이다. 이 시대의 금동불상으로는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과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 등을 들 수 있다. 모두 중후한 얼굴과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의 옷주름 처리 등에서 우수한 작품이라 하겠다. 이밖에 소금동불들이 다수 전래되고 있어 이 시대 불상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8세기 전기 석상의 대표작은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과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을 꼽을 수 있다. 불상 자체도 완전할 뿐 아니라 광배 뒷면에 조상기(造像記)까지 새겨져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명문에 의하여 볼 때 이들은 719년(성덕왕 18) 김지성(金志誠)에 의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감산사 불상에 이어 들 수 있는 것이 석굴암 안의 석상들이다. 석굴암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5 대성효2세부모(大成孝二世父母)에 창건 설화와 건립의 인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본존인 여래좌상은 당당한 체구와 우아한 얼굴 그리고 섬세한 옷무늬의 조각 등이 조화를 이루었다. 크고 둥근 연화좌와 후벽 천장 밑에 새겨진 연꽃무늬의 두광 등도 우수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하는 주벽에는 보살·천부·10대제자 등의 입상과 그 위쪽의 작은 감실 속에 좌상 10구(현재 8구 유존)를 안치하였다. 이들은 모두 매우 우아하면서도 자유스러운 모습으로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뒷벽 중앙의 11면 관음보살상은 긴 체구에 가득히 늘인 영락의 장엄·우아하고 자비스러우며 기품이 높은 조상 양식은 신라 조각의 명공만이 이룩할 수 있는 명작이다. 전방후원(前方後圓)을 기본으로 삼은 이 석굴 입구에는 사천왕상·인왕·팔부신장상이 좌우로 대립하고 있다. 이중 팔부신장의 조각은 양식적으로 볼 때 다른 것보다 연대가 떨어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석굴의 경영을 위하여 수십 년의 긴 세월이 소요되었으나 김대성(金大城)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남에 따라 나라에서 완성하였다는 옛 기록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석굴암 본존을 모범 삼아 이루어진 조각으로는 경주 삼릉계 석불좌상(보물 제666호)이나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보물 136호)·청량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65호)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8세기 불상 조각은 석굴암 본존을 정점으로 점차 내리막길에 들어서 섬약과 장식에 흘렀다. 이러한 추세는 9세기에 들어서 더욱 두드러졌다. 9세기의 신라는 정치·사회적으로 크나큰 혼란의 시기였다. 왕권을 둘러싼 골육상쟁과 지방 분권화가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현상과 함께 불교계에서도 9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는 등 선종이 크게 대두되었다. 불교 조각에 있어서도 선종의 도입과 밀교의 유행으로 비로자나불이 주존으로 많이 조성되었다.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58년, 국보 제117호),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865년, 국보 제63호) 및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863년, 보물 제244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또한 이들 불상에서 보듯 철불이 많이 조성된 것도 이 시대 불상 조각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 이밖에 석상으로는 방어산 마애불(801년, 보물 제159호)·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46호)·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24호)·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6호) 등 수많은 작품을 열거할 수 있다.
(3) 고려 시대·조선 시대
통일 신라의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창건한 고려 태조는 통일 국가의 정신적인 이념을 불교에 두었다. 그래서 수도인 개경에는 10대 사찰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찰이 건립되고 이에 따라 불교 미술 또한 크게 발달을 보게 되었다. 우선 이 시대의 금동상으로는 영탑사 금동삼존불(보물 제409호)과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을 들 수 있다. 후자는 근년에 발견된 복장의 조사에 의하여 14세기 작으로 밝혀졌다.
또한 신라 말부터 유행된 철불 조성의 전통이 이어져 춘궁리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332호) 및 충주 철불좌상(보물 제98호)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다수의 철불상이 진열되어 있다. 석불상 또한 많이 전해지는데 높이 18m의 국내 최대의 석상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은 각부의 균형은 불완전하나 이 시대 초기의 거작으로 특기할 만하다.
또한 북한산 구기리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제215호)을 비롯하여 11세기의 명문이 있는 태평이년명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등 마애불상도 많이 있다. 이러한 원각 또는 마애거상으로 지방에 전래하고 있는 것은 거의 이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중요한 예로는 관음사 보살좌상·신복사지 보살좌상(보물 제84호)·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안동 이천동 석불상(보물 제115호)·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보물 제377호)과 거창 상동 석조관음입상(보물 제378호) 그리고 개태사지 석불입상(보물 제219호)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소조상(塑造像)으로서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신라 이래의 오랜 수법을 이어받고 있는 국내 최대의 아미타여래소조상이다. 거대한 광배가 완존하고 있어 주목된다.
새로운 조선 왕조는 유교로 국교를 삼아 불교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초기인 세조 때 불교 진흥의 기운이 있어 한때 사원의 수축과 조상이 이루어졌다. 이때를 전후한 작품으로서 수종사팔각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상들은 15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석상으로는 특기할 만한 게 없고, 다만 목조상으로는 강원도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 초기의 작품으로 주목된다.
그 뒤 임진왜란을 지나서는 전기의 여세를 이어서 많은 사원이 복구되었다. 그에 따라 오늘에 전하는 토불이나 목불을 남겼다. 그중에는 전대의 기법을 계승한 우수작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