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문신은 하나의 형벌이었다. 경형(黥刑) 또는 묵형(墨刑)이라고 불리는 자자형(刺字刑)은 대개 도둑질한 자들에게 가했던 형벌로, 얼굴이나 팔뚝에 죄명을 새겨 넣는 벌이었다. “경을 칠 놈”이라는 욕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인데, 죄를 지어 평생 얼굴에 문신을 새긴 채 살아갈 놈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말이다.
자자형, 즉 묵형은 사실 중국 고대의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형벌은 오늘날과 달리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는 무시무시한 육형(肉刑) 투성이었다. 먹으로 몸에 죄명을 문신하는 묵형은 죄인의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뒤꿈치를 자르는 월형(刖刑), 남성의 생식기를 자르는 궁형(宮刑), 목숨을 빼앗는 사형(死刑)과 함께 ‘오형(五刑)’이라고 하였다.
고대의 육형은 한나라 문제(文帝)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자자형은 오대(五代) 시기에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송나라에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형벌체계로 제도화되었다.
죄지은 자에게 문신을 새기는 벌은 비단 동양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청교도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보스턴에서 발생한 간통사건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주홍글씨」라는 장편소설에 형벌로서의 문신이 등장한다. 목사 아서 딤스데일과 정을 통해 사생아를 낳게 된 헤스터 프린이란 젊은 여성이 간통한 벌로 공개된 장소에서 ‘A(adultery)'라는 글자를 가슴에 새기는 형을 선고받는다. 자신의 죄명을 주홍색 실로 새긴 주홍글씨! 이는 문신을 통해 벌을 주는 행위가 동양과 큰 차이가 없었음음 말해준다.
명나라의 형법전인 「대명률」에서는 절도 초범은 오른팔에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기고, 재범은 왼팔에 새기며, 삼범은 교수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다. 명나라의 형법을 사용한 조선에서도 「대명률」에 의거하여 절도범에 대해 자자(刺字)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자자형, 즉 형벌로서의 문신은 전왕조인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고려사』를 보면 절도죄를 짓고 귀양 간 죄수가 도망쳤을 때에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가중처벌을 한 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고을에 쫓아낸다는 기사가 있으며, 묘청(妙淸)의 난에 가담한 자들에게 ‘서경역적(西京逆賊)’, 혹은 ‘서경(西京)’이라는 글자를 얼굴에 새겨 유배 보낸 사례도 확인된다. 이로써 고려에서 형벌로서의 자자가 종종 집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절도범이 창궐한 세종 임금 때 자자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럼 신체의 어느 부위에 글자를 새겼을까? 팔꿈치와 팔목 사이, 즉 팔뚝에 자자하는 것이 「대명률」의 규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중국이나 조선 모두 법전과 달리 팔 뿐만 아니라 얼굴 등 안면에도 문신을 새기곤 했다.
팔이 아닌 얼굴에 글자를 새기게 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처벌 효과 때문이었다. 조선초기 떼 지어 도적질하는 자들이 늘고 심지어 관물까지 훔치는 등 절도범이 기승을 부리자, 당시 조정에서는 도적에 대한 처벌로 팔에 글자를 새겨 넣어 봐야 옷에 가려 죄인에서 수치심을 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세종 25년(1443)에 도둑질한 자의 양쪽 뺨에 글자를 새겨 가족과 주변사람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이처럼 얼굴에 자자하는 것을 특별히 ‘경면(黥面)’이라고 한다. 이후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경면은 너무 가혹하다고 하여 잠시 금지된 적이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성종, 연산군 때에 자주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글자를 새기는 방법은 이렇다. 대개 바늘 10여 개를 묶어서 살갗을 찔러 상처를 낸 후 먹물을 칠한 후 베로 그 부위를 싸매고 봉한 후에 죄수를 3일 동안 옥에 가두어 두었다. 이는 먹의 흔적이 피부 깊숙이 새겨지게 하기 위한 조치로, 행여 죄인이 자자한 곳을 물로 씻거나 입으로 빨아내어 흔적을 지울까 우려해서였다. 자자에 쓰이는 먹물은 어떤 것을 썼는지 분명치 않지만 송나라에서 사용하던 자주색이나 흑색의 식물 액즙이 아닐까 싶다.
그럼 어떤 글자를 새겼을까? 「대명률」을 보면 관용 창고의 곡식이나 돈을 횡령한 자는 ‘도관물(盜官物)’이나 ‘도관전(盜官錢)’, 백주 대낮에 남의 물건을 탈취한 강도는 ‘창탈(搶奪)’, 일반 절도범에게는 ‘절도(竊盜)’ 두 글자를 새겨 넣었는데, 이 때 새겨 넣는 글자의 크기는 사방 3cm 내외로 하였고, 새겨 넣는 글자의 매획의 넓이까지도 법전에 정해두었다.
이에 반해 조선에서는 다양한 글자를 새겼다. 일반 절도범에게는 ‘절도(竊盜)’ 두 글자를 자자하였지만, 특별히 훔친 물건이 소나 말일 경우 ‘도우(盜牛)’나 ‘도마(盜馬)’를, 그리고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에게는 ‘도살우(盜殺牛)’와 ‘도살마(盜殺馬)’를 새겼다. 또한 장물아비에게는 ‘절와(竊窩)’와 ‘강와(强窩)’ 두 글자를 자자하였고, 훔친 물건이 관용품일 경우에는 특별히 ‘도관물(盜官物)’을 새겨 넣기도 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에 문신형인 묵형이 시행되었는데, 새기는 글자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였다.
조선에서 자자형의 시행 대상은 앞서 이야기한 절도범 외에 강도, 공금횡령범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자자형은 연산군 때에 이르면 노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즉 도망 노비가 붙잡힐 경우 ‘도망(逃亡)’, ‘도노(逃奴)’, ‘도비(逃婢)’를 새겨 넣었고, 심지어 자신의 집 종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미리 ‘아무개 집 종’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도 하였다.
또 하나 알아 둘 것은 절도범에게 자자형과 함께 중국 고대의 육형인 월형(刖刑)과 유사한 단근형(斷筋刑)이 조선초기 잠시 시행된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단근형은 발뒤꿈치의 아킬레스건을 끊는 형벌인데, 세종 17년에 절도 삼범의 상습범에게 부과하였다. 이는 절도 상습범을 차마 죽이지는 않되 발의 힘줄을 끊어 활동을 부자유스럽게 함으로써 절도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이마저도 도벽(盜癖)이 심한 자들에게는 형벌 효과가 크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4년 뒤인 세종 21년에는 왼발의 아킬레스건을 끊는 단근형을 받은 후에도 재차 절도를 저지른 죄인에게 왼발의 앞쪽 힘줄마저 끊게 하는 초강경 대응책이 마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 자자형을 폐지하다
도적질을 한 자들에게 문신, 즉 자자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이같은 형벌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노인과 어린이는 자자 대상에서 빠졌다. 노인과 어린이의 경우 원래부터 매를 맞아야 할 때에도 한 대에 얼마씩 속전(贖錢)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자자의 고통은 매질보다 크기 때문에 당연히 자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판부사 허조(許稠)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11년에 70세 이상 노인, 15세 이하 어린이는 자자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다음, 군인과 여자에게도 자자형을 시행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양반 관료들의 경우도 자자를 면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양반 관료들이 자자형에 해당하는 공금횡령을 저지른 경우에도 실제 자자형이 집행된 경우는 드물었다. 뇌물이나 공금횡령 등이 드러난 전임 남원부사 이간(李侃)이나 황희 정승의 아들 황보신(黃保身) 등에게 세종이 자자(刺字)하는 것만은 특별히 면해준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렇다고 관리라고 자자형을 항상 용서해준 것은 아니었다. 세종 6년에 경상도 선산부사 시절의 비리에 연루된 조진(趙瑨)처럼 실제 자자형에 처해진 사례도 없진 않았다.
그나저나 자자, 특히 얼굴에 주홍글씨가 새겨지면 이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힘들었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자형을 당한 자들의 전해 내려오는 애환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자로 인해 얼굴에 새겨진 글자는 전과자임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조상 제사에 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동네 애경사에 왕래할 수도 없었다. 행여 고약으로 흉터를 가리고 갓을 쓰고 나다니다가 발각되기라도 하면 고약이 떼어지고 갓이 부러지는 수모를 겪기 일쑤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도 ‘저 집은 경친 놈의 집’이라고 침을 뱉고, 그 집 아이들이 지나가면 ‘저 놈은 경친 놈의 자식’이라고 따돌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자자형을 당한 사람들끼리 인적이 드문 동대문 안에 움집을 파고 살았으니 그들을 ‘땅군’이라고 불렀다. 땅군들은 빌어먹는 거지노릇을 전전하였으니, 한마디로 천덕꾸러기 인생이었다.
아무튼 숙종 임금 때까지도 시행되던 자자형은 그후 법조목에만 남았고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조는 자자형을 완전히 폐지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이때가 영조 16년(1740)의 일이었다. 당시 영조는 자자 도구를 모두 불살라버리고 다시 이를 사용하는 자는 엄중 징계토록 하였는데, 이같은 자자형 금지 조치는 당시의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에 실렸다. 중국에서는 자자형이 1905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니 조선은 그에 비해 한참 앞선 셈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조선시대의 자자형은 몸에 문신을 새기는 벌이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에서 문신이 앞서 본 것처럼 반드시 형벌로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팔에 새기는 문신은 사랑의 결속 표시로도 행해졌는데,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바늘로 사랑하는 남녀 서로의 팔뚝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연비(聯臂)’라 부르고 있다. 당시 남녀 간에 문신 행위가 적잖게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연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이보다 한참 앞선 성종 임금 때의 그 유명한 어우동 사건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어우동은 자신과 사랑을 나눴던 사내들 중 특히 좋아했던 대여섯 명의 이름을 팔에 새겨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이규경이 이야기한 애정문신의 사례가 아닐까 싶다.
드물긴 하지만 효를 맹세하는 행위로 문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종 10년(1555) 양양에 사는 김수영(金壽永)이란 효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부모가 죽자 채소와 과일도 먹지 않고 3년간 죽으로 연명했으며, 또 스스로 하늘에 맹세하는 글 132자를 지어 자기 손으로 좌우 무릎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문신이 형벌이 아니라 독특한 자기표현으로 사용된 사례들이 있기 때문일까? 요즘 문신은 여전히 터부시되고는 있지만, 서서히 하나의 패션으로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어우동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젊은 열혈 남녀간에 불변의 애정을 기리는 뜻에서 각각 상대방의 이름을 문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보다. 그렇지만 이것 하나는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만에 하나 그토록 다짐한 사랑의 맹세가 산산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을 때 이미 몸에 새긴 글자는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