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쓴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 장면이 꿈에 나타난다」 면서 「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 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 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 체제를 이룬 역�瑛�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 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 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 감 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 친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 그리고 정쟁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 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북위 17도선 이남에는 자유 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 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 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쭝딘쥬&g t;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 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위원단온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 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은 변함이 없은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 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측 지배지역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 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 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 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 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 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군 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 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주월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 중이였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 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 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一線)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 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 군대가, 식량 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문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求�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 보았던 것이다.
우익 ·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 돛美�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25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즉각 정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 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월맹을 이용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반체제 운동가들 - 통일 후 감옥으로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멸 당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월남군제2군단장 만푸 소장, 특별부대사령관 반토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 남 중장 제5사단장 레원비 준장, 제7사단 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무너지는 군대를 보면서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망명 거부, 모두 권총 자결했다.
「거지군대」에 패망한 월남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군인·경찰은 무장 해제되고 수용소에 보내졌다. 그리고 월남의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 언론인, 정치인들도 모두 체포돼「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다. 이중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공산 정권은 수많은 공무원들을 잡아넣는 형무소가 모자라자 과거 월남군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공무원과 지도층 인사를 수용하기도 했다.
반정부·반체제 운동을 벌이던 교수, 종교인, 학생, 민주인사들도 모조리 체포 처형됐다. 그들의 수감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같은 것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층(下層)의 월남 국민들은 소형 선박을 이용해 목숨건 탈출에 나섰다.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 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으로 집계됐다. 나는 이 참혹한 패망의 역사를 그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강대국과 맺은 방위공약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정은 절��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나는 티우 대통령이 미국에게 구원을 호소하는 모습을 내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무질서와 공산 프락치들로 인한 국론 분열에 빠진 월남에 고개를 가로 저었던 미국은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자기 국가의 안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가안보는 미국과의 방위공약도 아니고 공산당과의 휴전협정도 아닌, 오직 자국(自國)의 군사력이 담보할 뿐이다. 체제가 안정되었다거나 경제력이 우수하다는 말은 조국에 충성하는 국민의식과 군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부 잠꼬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었던 내가 체포되기 전 사이공 시내에서 직접 목격한 놀라운 사실은, 월맹 군인들은 소금만 가지고 하루 두 끼 식사를 겨우 할 정도였고, 속옷은 구경조차 힘들었다는 점이다. 월맹군은 전차 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를 신은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채 질질 끌고 다니며 월남군과 전투를 했던 것 이다.
이런 군대가 최신무기로 완전무장을 한 월남 군대를 붕괴시켰다.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파리 휴전협정 체결 과정에서 외국의 몇 및 언론은 「키신저가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해 휴전협정을 너무 서두르고 있다」며 걱정스럽게 지적했었다.
그러나 이런 충고를 무시한 키신저가 수상한 노벨평화상은 결국 자유월남의 시체 위에서 얻은 비극의 노벨상이 되고 말았다. 미국이 영국과 프랑스, 중공과 소련까지 동원해가며 맺었던 「방위조약」은 단순한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월남의 패망과 아비규환(阿鼻叫喚)에 빠진 월남 국민의 절규에 대해 침묵으로써 대답했다.
대한민국 ROTC 구국연합 |
2)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 살아있는 영웅, 살아있는 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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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시대가 험합니다.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세월에 우리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많은 영웅적 애국자 있었으나 그 분들은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좀 더 실감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영웅적 귀감으로 전 주월공사 이대용 장군을 조명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1편에서는 월남의 마지막 날과 억류생활 및 귀환과정을 소개하겠습니다.
1. 재월한국인 철수 및 안전확보
북월군이 파리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북위17도선을 넘어 남침 총공세를 취하자 베트남공화국(남월)은 패망위기를 맞이했다. 주월 한국 대사관은 우리정부의 지시에 따라 1975년 3월말, 재월한국인 철수본부를 설치하고 육군 현역 준장이며, 주월 한국 대사관에 파견되어 경제협조실장(경제공사)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이대용 공사를 재월한국인 철수본부장에 임명했다. 당시 재월한국인수는 외교관 21명, 외교관가족 59명, 농업사절단 20명, 의료사절단 21명, 수자원사절단 4명, 그리고 순수 민간인 1,009명이었다.
재월한국인 철수계획에 따라 1975년 4월 26일까지에 재월한국인 총수의 약 80%인원을 철수시키고 약 200명이 남아있었다. 이들 잔류 민간인 대부분은 개인재산처리가 잘 안되어 쉽게 떠나지 못하고 동분서주하면서 각종 부동산의 재산처리를 하고 있는 한국인들이었다. 한국대사관 가족전원은 이미 철수가 끝났고, 21명의 한국외교관 중 8명은 철수를 끝내고 13명이 남아있었으나, 미국 측과의 합의에 따라 이들 13명은 미국 대사관 책임 하에 미군 헬리콥터로 철수하겠금 되어있었다.
미국 국무장관 키신져는 소련 외무장관을 중간에 내세워 북월 정부 측과 비밀교섭을 해서 사이공에 투입된 미군이 미국 민간인과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철수작전을 완료할 때까지는 사이공 외곽에 있는 북월 공산군이 절대로 사이공시내에 진격해 들어가지 않는다는 확실한 보장을 받아놓고 있어, 미국 측은 상당히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헬리콥터에 의한 사이공으로부터의 미국인 철수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미국 측이 한국 대사관 직원 전원을 철수시키겠금 한-미 합의가 이루어져서 한국대사관 외교관의 마지막 철수 및 잔여 한국 민간인 철수도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했다.
1975년 4월 29일밤, 재월 미국인철수의 총책임자인 주월 미국 마틴 대사는 ‘지금 북월 공산군 대부대는 사이공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으며, 그 선두는 주월 미국 대사관 수백 미터 거리에 진격해 왔다.’ 라는 사실무근의 잘못된 첩보를 접하고 철수작전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1975년 4월 29일 밤 20시 50분, 이대용 한국인철수본부장은 마틴 대사를 보좌하고 있는 베넽 공사를 만나서 주월 미국 대사관 별관마당에 집결하고 있는 한국 외교관 11명을 포함한 약 180명의 한국인들을 수시로 날아오고 있는 헬리콥터에 조속히 태워 철수시켜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넽 공사는 상황이 위급하니 이대용 철수본부장만 자기가 지명한 미국 대사관직원의 경호안내를 받으며, 지금 당장 대사관 옥상의 헬리콥터장으로 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떠나라고 했다.
한국인 전원의 철수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이를 거부했다. 철수본부장이 부하직원과 한국 민간인들을 생사의 갈림길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살려고 도망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어쨌든 한국인 모두를 철수시키겠금 어떤 대책을 강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미국측이 한국인들을 철수 못시키고 철수작전을 중단한다면 한국인들이 살아남을 길은 오직 하나 주월(사이공) 프랑스 대사관이나, 주월 영국 대사관에 긴급교섭을 해서 그들 대사관안으로 들어가는 길 뿐이었다.
프랑스나 영국은 북월 하노이에도 대사관을 설치하고 있어 남월, 북월 모두에게 대사관이 있는 상태임으로 사이공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이나 영국 대사관도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북월 공산군이 절대로 침입하지 못하게 되어있었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외교관 공사의 높은 직함이 있고, 프랑스 대사관이나 영국 대사관 고위층과 개인친분 관계가 두터움으로, 적극 노력하면 그 교섭이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지며, 그것을 위해 전심전력을 기우릴 수가 있다고 판단했다.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30분경, 미국 측은 한국인, 독일인, 기타 여러 나라 국민들을 버리고, 철수작전을 중단하고 떠났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대사관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어둠속에서 한국인들을 집합시키고 상황설명을 긴급히 하고, 대사관 참사관, 1등 서기관 등을 대동하고 이리저리 달려가 교섭 끝에 드디어 교섭이 성공되어 잔류 한국인 160여명을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대피시켜 안전을 확보하고, 이날 정오에 북월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사이공에 쳐 들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행할 때 한국인은 한명도 피해 없이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2. 외국 외교관 앞에서의 의연한 사생관
1975년 5월 1일 오전 8시 30분경 주월 일본 대사관 와타나베 참사관은 우리나라 김동조 외무장관으로부터 이대용 철수본부장 앞으로 보내온 전문을 가지고,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있는 이대용 철수본부장을 찾아왔다.
전날 일본 대사관 통신망을 통해서 이대용 철수본부장이 보낸 전문에 대한 본국정부의 응답전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일본 와타나베 참사관은,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의 고위인사들은 점령군과 함께 이미 사이공에 들어와 있으며, 북월 공산 정권 및 프랑스 대사관과 교섭을 벌이고 있는 중이며, 곧 북한정권 인사들이 이곳으로 와서 이대용 철수본부장을 위시한 9명의 한국외교관을 데리고 북한으로 가게 될 것이니, 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 이라고 했다.
후진 공산국들은 국제법을 어기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초긴장을 했다.
군인된 몸으로서 항상 간직하고 있는 사생관, 언젠가는 필연코 가야 할 죽음의 길, 이제 그 시기가 온 것이다. 가야 한다. 깨끗하게 가야 한다. 이 장군은 권총을 꺼냈다. 대한민국 육군 장군에게 지급한 38구경 5연발 리벌바 권총이다. 실탄 5발이 장전되어 있다.
“와타나베씨 고맙습니다. 나는 북한에 불법으로 강제로 끌려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명예를 더럽히는 것 보다는 확고한 국가관, 사생관에 입각해서 자결할 결심입니다. 북한공산요원들이 나를 끌고 가려고 이곳에 나타나면은 그들을 쏴 죽이고 나머지 한발로 자결할 것입니다.”
초긴장 상태에서 생사를 초월한 이 장군의 안색은 너무도 진지했다. 와타나베 참사관은 이 장군의 손을 잡고 자결할 생각을 말아 달하고 하며 울었다. 옆에 있던 이규수 참사관도 울고 있었고, 서병호 영사도 울고 신상범 서기관도 울고 있었다.
“확고한 나의 이 결심을 아무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어서 돌아가 주십시오. 와타나베씨”
한참동안 눈물로 만류하던 와타나베 참사관은 돌아갔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일까. 북한공산정권 요원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3. 사이공 치화 형무소에서의 항거투쟁
베트남 공산정권 외무부는, 사이공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 외교관들에게 ‘1975년 6월 18일 오전 10시 사이공 탄손눝 공항에 나가서 태국 방콕으로 가는 국제적십자사 수송기를 타고 출국하라.’는 통보를 한국 외교관들에게 보내왔다.
한국 외교관들은 국제적십자사 사이공 지사장의 인솔 하에 사이공 탄손눝 공항에 제시간에 나갔으나, 수송기에 탑승하려는 직전에 권총을 찬 베트남 관리들이 나타나서, ‘남조선인들의 출국을 보류한다.’고 해서 한국외교관들은 출국하지 못하고 다시 시내숙소로 되돌아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 후에 초긴장이 감도는 우여곡절 끝에 1975년 10월 3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安寧內政, 보위부)은 이대용 장군을 불법 체포하여 악명 높은 기요틴(단두대)까지 있는 사이공 치화 형무소에 투옥, 수감했다.
이대용 장군을 체포할 때, 베트남 공산정권이 발부한 체포영장을 한국말로 읽어 내린 베트남 관리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과대학을 졸업한 ‘즈엉징 특(DUONG CHINHTHUC : 2004년 8월 현재, 그는 주한국 베트남 대사관 특명전권대사임)’ 이었으며, 그는 이대용 장군 앞에서 “성명 이대용, 직업 외교관, 베트남 혁명사업을 방해했기에 체포함. 1975년 10월 3일” 그리고 구속영장에 서명한 베트남 공산관리의 직책과 이름을 읽었다.
이대용 장군이 수감된 감방은 사형수나 장기수를 수감하는 격리감방이었다. 햇빛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열악한 감방이며, 방안에는 뻥 뚫려진 지저분한 악취가 진동하는 변소가 있을 뿐, 사방은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식사는 하루에 아침, 저녁 두 끼이며, 점심식사는 없었다. 한 끼의 식사는 밥 한 컵 정도이고 반찬은 호박소금국 또는 라믄(베트남 야채)소금국 한가지뿐이며, 한 끼의 부식은 한 컵 정도였다.
이 열악한 급식 및 감방생활은 북한이나 소련의 정치수용소의 급식 및 감방생활을 연상케 했다.
1975년 10월 10일 베트남 공산정권의 안닝노이찡 요원들은 치화 형무소로 와서 이대용 장군을 신문했다.
한국말 통역은 체포당시의 통역인 ‘즈엉징 특’이 했다. 안닝노이찡 요원은 한국에 대해 원한이 사무치는 것인지 또는 이장군의 기를 꺾어버리려는 속셈인지, 언성을 매우 높이며, 남조선 박정희 집단은 맹호사단, 백마사단, 청룡여단 등을 베트남 침략군으로 보내 수많은 베트남 양민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큰 범죄를 저질렀다는 말을 길게 하고 “그대(이 장군)는 총살형에 해당한다.”고 큰소리로 외친 후 “그러나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고 진보적 민주주의(공산주의)편에 가담해서 인민들을 위해서 일 하겠다면 과거를 관대하게 용서하고 인도적 대우를 해주겠다.”고 말하였다.
이대용 장군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했다. “나는 유엔이 제정한 비엔나협정에 의하여 외교관 면책특권이 있으며, 따라서 베트남 정부는 나를 신문할 권한이 없고, 나는 답변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고 “정치에 있어 이 지구상에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교전당사국이라도 외교관은 체포할 수 없으며, 국제법에 따라 모두 서로 본국으로 보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국제법에 규정한 대로 유엔의 보호를 받는 이장군은 결코 베트남관리들의 신문에 응하지 않겠다고 확고한 발언을 거듭 강조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 요원은 “어쨌든 그대는 총살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이대용 장군은 “총살, 총살하는데 할 테면 하라. 그 따윈 협박에 두려워 할 내가 아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러나 총살하려면 유엔이 주동이 되어 국제규모재판소를 설치하여 국제재판을 한 후에 총살하여야 한다. 베트남 정부는 국제외교관인 나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안닝노이찡 요원과 이대용 장군은 평행선을 그으며, 언쟁만 벌이다가 국제법상 정당한 주장인데다가, 또 이미 나라 위해 죽을 각오가 확고히 되어있는 의연한 정신자세의 이대용 장군의 주장에 대항할 이론적 밑천을 잃은 안닝노이찡 요원은 하는 수 없이 “오늘의 신문은 이것으로 끝내겠소. 곧 2차 신문을 하러 오겠소.”하고 제1차 신문을 끝내버렸다.
한국 정부는 이대용 장군이 베트남 공산정권에 의하여 체포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어디서 어떤 일을 이 장군이 당하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거운 안닝노이찡의 압박이 이 장군에게 가해지고 있었다.
안닝노이찡은 이 장군에게 일광욕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열악한 식사로 인해서 영양실조와 햇빛을 전혀 못 보는 상태에서 갖가지 병이 생겼다.
약 10개월간 단1초도 햇볕을 못보고 좁은 격리감방에 가둬놓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안닝노이찡은 이러저러한 갖가지 수단방법을 써서 이 장군을 굴복시켜 사상적 전향을 시키려고 애썼으나 모두가 허사로 돌아갔다.
이런 가운데 이 장군이 형무소측에 계속 항의했더니 실로 297일 만인 1976년 7월 27일에야 일광욕을 15분간 시켜주었다. 영양실조로 체중은 자꾸 줄어서 약 1년 만에 이 장군의 체포 당시의 체중 78kg는 46kg으로까지 내려갔다.
식물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살의 유혹이 수없이 찾아왔으나 “자살은 의지가 박약한 자의 행위다. 끝까지 투쟁하여야 한다.”고 자신을 격려하며 강철 같은 의지력으로 버텨나갔다.
한국 정부와의 연락이 전혀 되지 않고, 사이공 시내에 있는 교민과도 서로 소식을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홀로 고독하게 베트남 안닝노이찡과 투쟁하고 있는 이 장군에게 수감되어 1년 9일이 되는 1976년 10월 12일 깜짝 놀랄 기적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우리정부에서 백방수단을 강구하며 1년간 애써온 결과, 치화 형무소 간수가 우리 편을 들어 사이공에 있는 우리 교민회장의 편지조각을 이 장군에게 가져온 것이다. 극비로 이 쪽지를 보내니 이 장군의 건강상태, 북한요원으로부터 신문 받았는지의 여부, 특히 보안에 유의하면서 답신을 써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때부터 이 비밀루트를 통해서 이 장군은 어렵사리 가끔 한국 외무부 장관, 그리고 가족 또 때에 따라서는 한국 대통령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식은땀을 흘리며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면서 보내는 편지라서 그 횟수는 아주 적었다.
이 극비 통신루트로 인해서 우리 정부는 이 장군의 1년간의 필사적인 확고한 투쟁정신과 태산 같은 부동의 사생관, 국가관, 군인관, 애국심을 모두 파악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 장군을 구출하라고 정부 해당 각 부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1977년 2월 음력 명절 때 치화 형무소에서는 모든 수감자들에 대한 가족, 친지 면회가 특별히 허용되었다. 외국인 수감자들에 대한 면회는 그 나라 교민회원들이 하도록 허용되었다.
치화 형무소에 수감된 약 5,000명의 수감자들은 모두 형무소 광장에 모여서 즐거운 약 2시간의 면회를 하며 가족, 친지들이 들고 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대화를 나눈 뒤 나머지 각가지 차입품을 들고 형무소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유독 공산당에게 전향을 거부하고 있는 이대용 장군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1977년 9월3일 베트남 국경일에도 치화 형무소 수감자 전원에게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허용되었지만, 이대용 장군과 수일 후에 총살이 집행되는 와하우교 반공청년장교 5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후 해마다 음력 명절과 국경일에는 치화형무소 수감자 전원에 대한 가족, 친지, 교민들에 의한 면회가 있었으나, 이대용 장군 한 명만은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대용 장군이 안닝노이찡이 강요하는 소위 인민(공산주의자)편으로의 전향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어, 이 장군이 그들의 압박에 지치고 지쳐 굴복할 때까지 심적 고통을 끈질기게 가하는 수단의 하나로 면회금지를 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장군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한번도 면회를 못하는 진기록을 남기고 옥사(獄死)하던가 아니면 반송장이 되어 출옥하게 될 것이다
. 아닌 게 아니라 훗날의 일이지만 이 장군은 치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4년 7개월 동안 단 한번도 면회를 해보지 못하고 가지가지의 병에 걸린 몸으로 옥문(獄門)을 나서게 된다.
옥중(獄中)에서 ‘어떠한 칠난팔고의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도 의연하게 극복하리라’는 철석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 장군이지만은 정신력과는 달리 신체는 자꾸만 허약해지고 있었다. 1977년 6월21일부터는 머리가 뜨끔거리면서 잠을 못 이루는 몹쓸 병을 앓기 시작했다. 6월24일 밤에는 거의 한잠도 못 이루고 꼬박 새우다가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정신력으로 극복해 보려고 이를 악물고 애를 썼으나 견디기 어렵게 몸이 쑤셨다.
6월 26일 오후부터는 40도의 고열이 온몸을 쑤시게 하며 감방의 천정이 거꾸로 되었다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면서 빙글빙글 도는 환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깼다를 반복했다.
3일간 식사는 손도 못 대고 물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6월 27일 형무소 당국도 거적대기 위에 누워서 펄펄 끓는 이 장군의 실신상태의 몸을 보고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형무소 본부에서 간부들이 몰려오고, 2명이 밤을 세워가면서 이 장군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6월 28일 오후에는 간수들이 여 의사와 여 간호원을 데리고 감방 안으로 와서 왕진을 하고 갔다. 그리고 병원에 돌아가서 여 의사는 알약을 20여알 보내왔다. 7월 1일이 되면서 고열은 가시고 미열만 계속되었다. 7월 4일이 되어서야 이 장군은 제대로 일어나 식사를 겨우 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 장군은 일어나서 런닝셔츠와 팬티를 갈아입으려고 벗었더니 많은 피가 끔직하게 뒷부분에 묻어있었다. 살펴보니 이 장군이 모르는 사이에 둔부 양쪽과 허리 뒷편에 각각 손바닥 크기의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피부껍질은 모두 없어지고 시뻘건 살덩어리 위에 피가 엉켜있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을 1주일간 계속 앓으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고열에 신음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차렸다 하며 조잡한 콘크리트 방바닥에 얄팍한 거적대기와 담요 한 장을 깐 채 고통을 이겨내려고 이리저리 몸부림치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큰 상처였다.
이런 가운데 이 장군은 가지각색의 잔병에 시달리면서 치화 형무소의 암흑터널 옥고(獄苦)의 세월은 아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은 계속해서 별의별 수단방법을 다 써가며 이대용 장군을 회유, 공갈, 협박했으나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장군이 수감되어 약 3년이 된 1978년 9월25일 드디어 북한 노동당 제3호 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 있는 중견 간부중 빼어난 일꾼인 궁상현, 박영수(훗날 서울불바다 발언한 자), 한경수의 3명이 이 장군을 신문하기 위하여 평양에서 베트남으로 왔다.
그들 3명중 2명이 7일간에 걸쳐 이 장군을 직접 심문했다. 그들은 민족, 혈연, 남북대화 문제들을 들고 나와 이 장군을 회유도 하고 공갈, 협박도 하면서 끈질기게 괴롭혔다. 그들은 이 장군이 사상적 전향을 하고, 북한으로 가겠다는 자의망명서(自意亡命書)를 쓰게 한 후 평양으로 이 장군을 납치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국제법에 의해서 외교관은 체포나 구금을 시킬 수는 없으나, 외교관의 자의(自意)에 의한 타국으로의 망명은 국제법이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 이 장군이 북한에 끝내 가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극비리에 사상전향서를 이 장군으로부터 받아, 처자가 있는 서울에 보내주긴 하지만 북한의 극비 거물간첩으로 극비지령을 내려 이 장군의 북한 비밀간첩으로서 서울에 묻어둔다는 차선안(次善案)을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
궁상현 일행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그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이 장군을 밀어 넣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헛일이었다.
이 장군은 안닌노이찡에 맞서 싸울 때와 똑같은 이론으로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북한 요원들이 국제 외교관을 신문할 권리나 자격이 티끌만치도 없고 국제 외교관인 이대용 장군은 그들의 심문에 답변할 의무가 전혀 없으니, 한마디로 답변하지 않겠다면서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욕지거리를 하면, 이 장군은 이에 맞서 동등한 욕지거리로 대했다. 하루는 궁상형이 “이 새끼”하며 이 장군을 때리려고 상의를 벗으며 일어나자, 이 장군도 “야, 이 새끼야, 때릴 테면 때려봐라” 더 큰소리치며 일어서서 그자를 태권도로 때려눕힐 자세를 취했다.
나라 위해 이미 죽음을 완벽하게 각오한 이대용 장군은 태권도 유단자이며, 무서운 것은 티끌만치도 없었다. 궁상현은 덤벼들지 못하고 옆에 있는 자가 말려서 이 장군은 격투까지는 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심문은 헛돌 뿐이었다.
1978년 10월2일 오후 2시 제7차 신문이 시작되었다. 이 장군은 계속해서 초연하게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꽤 시간이 지난 후 흰셔츠를 입은 자가 “왜 저렇게 외곬일까? 우리말을 왜 모두 적의(敵意)로만 받아들일까?”하고 체념하듯 말했다.
선임일꾼 궁상현은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떠들어 댔다. 이 장군은 딴생각을 하며 그자의 말에 정신을 쏟지 않았다. 그자는 갑자기 언성을 높이면서 “알갔소? 이세가지 중의 하나를 택하시오” 했다.
이 장군은 궁상현이가 말한 세가지를 귀담아 듣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궁상현은 갑자기 큰 소리로 “좋소. 묵비는 중립이요. 중립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소. 여지껏 우리가 말한 것을 당신이 모두 시인한 것으로 해석하고 당신이 북반부 고향에도 한번 가보기를 원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끝내겠소. 가시오.”하였다.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다. 그냥 나올 수가 없었다. 한마디 해야 했다.
“여보시오. 어째서 묵비가 시인이요. 나는 여지껏 당신들이 말한 것을 하나도 시인하지 않고 또 죽어도 북한 땅에는 안 가겠소.”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로서 북한 노동당 3호 청사 통일전선부에 속해있는 궁상현 일행에 의한 이 장군에 대한 신문은 1978년 9 25일 사이공 안닝노이찡 안가에서 시작하여 아무런 성과 없이 1978년 10월 2일 허탕으로 끝나버렸다.
이에 대한 문제는 북한노동당 3호 청사의 높은 간부로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1980년대에 극비리에 귀순한 황일호씨의 증언에 의하여 모든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1978년 12월25일 베트남공산군이 대병력으로 캄보디아를 침공 1979년 1월 9일에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이때 북한 김일성은 캄보디아를 지원하고 베트남 공산국과 적대관계에 들어갔다. 1979년 2월17일 중공군 대부대가 베트남 국경을 돌파 침공할 때도 북한 김일성은 중공편을 들었다. 이로써 북한 김일성 공산정권과 베트남 공산정권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정부는 이대용 장군 구출 외교노력에 활기를 더하며 가일층 맹활동을 하였다. 이 결과 이대용 장군은 치화 형무소에서 1980년 4월 11일 석방되어 4월 12일 우리 정부가 보낸 아이젠버그 회장의 전용기를 타고 스웨덴 외무차관 리프랜드를 단장으로 하고, 스웨덴 외무부 비서실장 닐슨과 아이젠버그 그룹의 동경지사이사 겸 하노이 지사장 드웍씨의 안내 및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
이와 같이 이대용 장군은 1975년 4월에는 재월 한국인 철수본부장으로서 예기치 않았던 위기상황에서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한국인 생명을 모두 구하고, 베트남 공산정권의 불법체포, 투옥 중에도 확고한 군인관, 공무원관, 사생관, 국가관을 가지고 국가기밀을 보호하며, 국가에 충성한 그 고귀한 정신은 국가 공무원, 또는 현역군인신분을 가진 장병들이 대대손손 만대에 걸쳐 이어받을 귀감이며 이대용 장군의 그 큰 공은 천추에 빛날 것으로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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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께서
ROTC구국연합에 보내온 서신!
<육군사관학교총동창회장>|
- 베트남 27 년 전 베트남 공산화를 방불케 하는 한반도 위기 - 베트남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
월남 패망 현장 목격자의 악몽 |
월남 최후의 탈출자, 이대용 장군
살아있는 영웅, 살아있는 귀감 !
본문 내용 :
베트남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베트남 패망현장 목격자의 악몽> | 일부소개:
"1975년 4월30일 새벽 4시 30분경, 미국 측은 한국인, 독일인, 기타 여러 나라 국민들을 버리고, 철수작전을 중단하고 떠났다. 이대용 철수본부장은 대사관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어둠속에서 한국인들을 집합시키고 상황설명을 긴급히 하고, 대사관 참사관, 1등 서기관 등을 대동하고 이리저리 달려가 교섭 끝에 드디어 교섭이 성공되어 잔류 한국인 160여명을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 대사관 병원에 대피시켜 안전을 확보하고, 이날 정오에 북월 공산군이 노도와 같이 사이공에 쳐 들어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행할 때 한국인은 한명도 피해 없이 모두 안전하게 생명을 보전할 수가 있었다. "
대한민국 ROTC 救國연합을 보는 이 대 용 장군의 시각!
지난 11월 이 대 용 장군께 구국연합이 이 대 용장군의 글
“베트남 공산화 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 에 공감하며
장군의 글에 대한 우리의 뜻을 피력한 바 있는데,
2008년 연말 이 대 용 장군께서 간결하나 각별한 뜻을 보내
주셨기에 그대로 옮겨봅니다.
통일, 안보. 항목의 1.2번에 이 장군님의 역정과 프로필,
그리고 “베트남 공산화 과정 원문의 글 ”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구국연합에서는 기회 닿는 대로 이 대 용 장군을 모시고 직접 고견을 듣는 기회도 구상해봅니다.
- 장군께서 보내주신 답신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
김 정 식 사무총장님!
보내주신 인쇄물 및 김 총장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有備가 있으면 無患입니다.
대한민국 ROTC구국연합을 저는 높이 평가합니다.
그리고 김 정 식 총장이 계시는데 대해 마음
든든히 생각합니다.
저를 실제 이상으로 높이 인정해 주신데 대하여
부끄럽고 또한 영광입니다.
새해에도 放心하지 마시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시도록 김 총장님의 건강을
神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2008년 성탄절 이 대 용 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