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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고창일대 춘계문화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일요일(4/24) 고미술아카데미 총동문회에서 전북 고창 일대에 문화 답사를 주관해 주셨습니다.
버스 1대로 출발한 답사이지만 모든 분들이 만족해 하셨고,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신 회장님 이하 집행부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창읍성과 동재 신재효 선생 생가,그리고 판소리 박물관부터 들려 봤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아카데미 모든분들을 위해 간략히 스케치 해 보았습니다.
고창읍성입니다.
고창읍성은 나주진관,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는 설을 갖고 있습니다.
서울 성곽이 완성된 것이 숙종때이니 숙종때라는 설에 한표 주고 싶습니다.
성곽 둘레는 1,684m라고 하니 서울 성곽의 10분 1 축소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서울 성곽은 실측 결과 18.127km라고 합니다.
참고로 서울 성곽은 성균관대 뒤에서부터 낙산을 거쳐 동대문→남산→남대문→인왕산→
숙정문으로 이어지며 조성 시기는 숙종 때로 한 고을에서 600척씩 맡아 총 97구간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천자문 天에서 시작해 97번째 조문할 弔에서 끝납니다.
성곽 담장에서는 담장이 덩굴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성벽은 한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으로 여성들 성벽밟기 풍습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왕의 남자 촬영지인 읍성내의 맹종죽입니다.
옛부터 대는 선비들의 기상으로 여겨졌습니다.
대나무는 꺽일지 언정 휘지않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시비를 초월하기 위해 고개를 숙입니다.
그렇지만 반드시 본성인 중심으로 돌아와 당당하고 꿋꿋하게 서 있습니다.
대나무의 마디가 비어 있는 것은 한마디를 채움과 동시 또 한마디를 비워두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비워둠으로써 겸허한 자세를 견지하라는 의미입니다.
대나무가 꽃을 피우면 죽게됩니다.
다시말해 선비가 부귀영화를 탐하면 죽은바 진배없다는 청빈함을 뜻합니다.
대의 뿌리가 튼튼한 것은 대의 덕입니다.
사람들도 근본이 튼튼하면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의 성품이 곧은 것은 중용의 덕에 자립하여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대의 기상이 씩씩한 것은 의를 지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의 마디를 보고 부지런히 일하고 힘써서 세상과 일치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의 풍파를 함께한 소나무의 기상입니다.
곧고 잘난 소나무는 선산을 지키지 못하고 재목으로 쓰입니다.
비틀어진 이 소나무야 말로 고창읍성의 역사를 대변해 주는 듯합니다.
동헌옆의 평근당 건물입니다.
당(堂)이란 건물 전각서열에 따르면 두번째입니다.
전당합각재헌루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 전각서열이 됩니다.
건물 우측에 있는 동헌이 공무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평근당은 나랏님이나 원님의 집무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평근당 현판은 근대 서예의 대가이면서 악필(握筆)로 유명한 석전 황욱의 글씨입니다.
얼마전 여주CC 클럽하우스에 天地人和란 글씨가 있었습니다.
天은 석전 황욱,
地는 일중 김충현,
人은 원곡 김기승,
和는 강암 송성용 선생이 쓴 글씨로 네 대가의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 석전 황욱 선생의 현판을 보게 되어 여간 기쁘지 않습니다.
중요 민속자료 39호로 지정된 동리 신재효(1812~1884) 선생의 1950년경 지은 고택입니다.
동리 신재효는 중인 신분이면서도 말년까지 이곳에 살면서 판소리 여섯 마당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관약방을 하는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재산으로 부를 늘리면서
그 스스로 도리화가,성조가,광대가 등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 중 도리화가는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진채선이 고종4년에 경회루에서 열린 경복궁 완공 축하잔치에 갔다가
흥선 대원군의 인정을 받아 운현궁 '대령기생'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자 애닯고 그리운 정을 엮어 보낸 노래로
더 유명해져 있습니다.
건축물은 서재밖 연못으로 물이 흘러 가도록 한 운치있는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돌담이 쳐진 일(一)자형의 초가집으로 마당가의 우물터와 함께 연못만 복원 되어 있습니다.
신재효 고택 바로 옆이 고창판소리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은 판소리를 중흥시킨 신재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3년에 개관하였다 합니다.
신재효의 유품과 고창지역의 명창,판소리 자료 등 1,000여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안내를 맡으신 분께서 먼저 판소리 한마당을 하면서 일행을 맞이 합니다.
민속악에서 판소리란 이별,사랑,권선징악,풍자 등 '판'에 짜여진 소리를 말합니다.
때문에 주제에 따라 판소리 길이가 달라지는게 특징입니다.
판소리는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 등과 같은 장단과 우조,계면조,평조 등의 조로 이루어집니다.
판소리의 역사는 300여년 된다고 하지만
현재의 다섯 혹은 여섯마당 판소리는 19세기 말에 형성된 것이라는게 중론입니다.
고창 고인돌 유적지 입니다.
강화,화순의 고인돌 유적지와 함께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고인돌 공원 또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어 있는데,
인근에만 50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고 합니다.
고인돌들은 마을에서 산 중턱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 있습니다.
완만한 산기슭 다랑이 논밭 사이로 수십기의 고인들들이 엎드려 있습니다.
이곳의 것들은 주로 남방식 고인돌이지만 드문 드문 북방식도 섞여 있습니다.
북방식 고인돌은 탁자식이며,
남방식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을 말합니다.
또한 고인돌의 양식으로 개석식과 지상석관식 고인돌이 있다고 합니다.
탁자식(북방식)은 하단부에 얇고 넓은 판석이 사용되고 상석 역시 판석형이 사용됩니다.
시신이 매장되는 매장부가 지하에 위치하지 않고 지상에 위치한 것으로 보는데
원래는 사면을 모두 막아 판석 자체가 석관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둑판식(남방식)은 하단부가 판석이 아닌 굄돌을 사용합니다.
할석,자연석으로 쌓은 석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 정도의 굄돌을 놓고,
그 위에 마치 바둑판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큰 바둑판식 고인돌은 산기슭이나 구릉 위,계곡 끝 평지에서 1기씩만 존재한답니다.
지상석관식은 하단부에 전형적인 탁자형 판석에 비해 높이가 낮은 판석이나 또는 여러개의
판석을 덧대어 지상에 석관이나 석관 같은 구조를 만들고 외곽에는 굄돌을 판석 높이로 세운 형태와,
굄돌은 없고 판석 부분만 남아 있는 형태가 있습니다.
개석식은 한반도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형태로 땅속에 무덤을 만들고 무덤방 뚜껑으로
커다란 돌만이 올려져 있는 고인돌을 말합니다.
이곳 고인돌은 2,500년전부터 약 500년간 이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묘역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교과서에서 청동기시대로 불리는 삼한시대 진국의 유물로 봅니다.
청동기인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족장내지 부족체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이 살았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이 야산과 들판으로 옮겼는데,
고창은 그들이 선택한 땅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을 접할 수 있는 세계 유일지이며,
고인돌 분포가 조밀하고 거석화된 고인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합니다.
미당시문학관입니다.
1997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2001년에 완공하였다 합니다.
이곳에는 미당의 육필 원고와 작품집이 전시 보관되어 있고,살아 생전 그의 애장품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미당 문학제가 지난주부터 열리고 있습니다.
1915년에 태어난 미당은 85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900여펀의 시를 남겼습니다.
'모국어의 연금술'이라고 할만큼 그의 언어적 재능은 특출합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壁>을 비롯해
시인적 숙명을 예감케 하는 <自畵像>이 단연 돋보입니다.
<자화상>
애비는 종이었다.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此一編昭和十二年正丑歲仲秋作,作子時二十三也
미당은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내 놓았습니다.
화사집(1941),귀촉도(1948)를 비롯해 1997년 15번째 시집 <80소년 떠돌이 詩>까지 899편에 달합니다.
이곳 시문학관을 찾으면 미당의 진솔한 내면도 만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나는 왜 친일을 했는가 입니다.
시인의 또다른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시대상과 시인의 솔찍한 자기고백!
그래서 일행중에 미당의 또다른 모습을 보고 놀랬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서정주論과 그의 사상은 역사와 역사가에 맡기되
그사람이 살아온 신발의 역사가 이력(履歷)인 만큼
왔다갔다 하지 말고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게 걸어가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산대사는 <답설야중거>에서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제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욱이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선운사는 차로 이동하여 도솔암 마애불부터 먼저 보는 특전을 누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처음 마주한 이 소나무는 600년된 천년기념물 반송입니다.
여기에서는 장사송이라 부르기도 하며,진흥굴 앞에 있다고 해 진흥송이라고도 합니다.
통상 다른절 같으면 지팡이 설화도 곁들여야 하겠지만
진흥왕과 워낙 시대적 연대가 안맞다 보니 그냥 장사현의 장사송,진흥굴 앞의 진흥송으로 불리워집니다.
소나무는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언덕에서 자란다 하여 강송(岡松),
내륙에서 자란다하여 육송,
껍질이 붉다하여 일제 강점기 때 친일한 농공부 대신 조중용이가 고시 9호로 명한 적송,
여자의 다리처럼 미끈하다 하여 미인송,
나무 속이 누렇다 하여 황장목,
눈이 온후 가지가 똑똑 부러져 미끈한 설장목,
금강산 줄기에서 자란다 하여 금강송,
춘양지역에서 온 나무라는 뜻으로 춘양목으로 불리워지기도 하며 특징은 2葉입니다.
3엽이나 5엽으로는
해송이라 불리기도 하는 곰솔과
북미 대서양 연안이 고향인 리기다 소나무가 있습니다.
위의 반송(盤松)은 조경수로 주로 쓰는 소나무로 소반같이 생겼다고 해 반송이라 부릅니다.
일반 소나무가 하나의 줄기만 올라와서 크게 자라는데 비해,
반송은 거의 땅 표면부터 줄기가 여러개로 갈라져 올라와 전체적인 모양이 부채꼴 형상인게 특징입니다.
도솔산으로 오르는 길에 진흥왕과 관계된 진흥굴이 보입니다.
백제땅에 진흥왕이 여기에 와 수행했다는 설화는 믿기 어렵다 하도라도 선운사와 도솔산 마애불이
갖고 있는 문화적 가치에 스토리텔링 하나를 더한다면 훌륭한 이야기 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도솔산 마애불!
워낙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동학접주 손화중의 비결과 엮어져 있는 스토리 때문에 더 유명해진 마애불입니다.
도솔천은 대승불교에서는 장래불로 나타나는 미륵보살의 거주지가 됩니다.
이것을 미륵의 정토,즉 도솔천정토(兜率天淨土)라 하며 정토의 장엄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마애불은 미륵불로 해석하면 되겠으며,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가 되겠습니다.
높이 13m의 마애불상 가운데 가슴에는 큼직하게 복장 구멍 흔적이 나있습니다.
이곳 마애불의 배꼽에 신비한 비결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과 함께,
그 비결을 동학의 주도세력 손화중이 꺼내 갔다는 얘기를 통하여 더욱 신비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들은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집중하기 위한 술책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도솔산 마애불 위 내원궁에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습니다.
도솔산과 미륵설화로 엮어 간다면 당연히 미륵불이 모셔져야 맞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곳의 불상은 두건을 쓴 지장보살좌상으로 보물 280호 입니다.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선운사에 이르렀습니다.
제일 먼저 마주 하는 천왕문!
천왕문 출입문 위에 종루가 세워져 있습니다.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입니다.
원교 이광사는 연려실기술을 쓴 이긍익의 부친이며,
해남 대흥사의 무량수각 현판을 갖고 추사 김정희와 일합을 겨룬 이야기가 재미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을 만들고 남겨진 부재들로 만들었다고 하는 만세루는 맞배지붕 입니다.
그런데 루(樓)는 정(亭)의 상위 개념으로 망루의 역할과 정자의 역할을 겸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만세루는 그냥 땅바닥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절이 일주문→천왕문 →금강문(불이문)→본전불당으로 이어지는게 보편적 양식인데
이곳에는 천왕문 다음 만세루가 서 있으니 만세루가 금강문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나름 생각해 봅니다.
만세루의 실내 기둥과 섯가래들이 정말 자연 친화적입니다.
특히 기둥은 토막난 나무들을 모아 연결해 만든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쩌면 스님들의 누비 가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대웅보전의 현판이 천일기도 현수막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정면 5칸,측면 3칸의 대웅보전의 위력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본전 뜰에는 수십년은 됨직한 배롱나무 한그루가 서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은 들어 봤지만 선운사 배롱나무는 오늘 처음 봅니다.
배롱나무는 목백일홍이라도 부릅니다.
배롱나무 꽃은 한번 피기 시작하면 꽃다발 아래부터 위쪽으로 올라 가면서 오래도록 핍니다.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고지면서 백일동안 꽃이 핍니다.
지금은 개화전이지만 이 꽃이 지면 가을이 옵니다,
그래서 배롱나무 꽃말은 '떠나간 벗을 그리워 함'입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없습니다.
껍질이 없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아 '표리부동'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비들은 사당이나 서원 앞에 배롱나무를 심습니다.
마당의 나무 한그루에서 철학적 의미를 찾고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채찍으로 삼았습니다.
붉은 꽃을 보며 임금이 내리는 어사화를 생각하면서 일편단심을 떠올립니다.
또한 몸가짐을 돌보는 수신목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롱나무 꽃은 끈질깁니다.
한번 바람에 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새꽃이 돋아납니다.
불가에서 배롱나무는 무욕의 상징이며,베품의 상징입니다.
청백리와 같은 무욕이야 말로 불가에서 가르칠 부처의 제일 큰 덕목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특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현판이 대웅보전이면 비로자나,노사나,석가모니 삼불을 모시던가
비로자나,석가모니,아미타를 모시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는 주존에 비로자나,왼쪽에 약사여래,오른쪽에 아미타부처를 모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적광전이라고 현판을 달아야 맞는데 개심사처럼 여기도 주존과 현판이 달라져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갈수록 사찰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뒷면의 후불탱화는 천이나 판목에 그린 것이 아니고 벽에 직접 그린 것이 특이합니다.
참고로 절에는 모셔지는 부처에 따라 법당 이름이 달라집니다.
현세불인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면 `대웅전'이 되고,
삼불(비로자나,아미타,석가모니)을 모셨으면 '대웅보전'이 됩니다.
서방정토를 지배하는 아미타불을 모셨으면 '극락보전' 또는 '무량수전',
법을 지배하는 비로자나부처를 모시면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이라 합니다.
만병을 구원하는 약사여래는 `약사전" 또는 `만월보전'이라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양양 낙산사 같은 절은 `원통보전'이라 합니다.
이외에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절을 `적멸보궁'이라 하며
후세불인 미륵불을 모셨으면 법당에 `용화전' 또는 `미륵전'이라고 현판을 씁니다.
절에 있는 부속 건물에도 모셔지는 주인이 각각 다릅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칠성각은 치성광여래를,
독성각은 4반존자를 모신 전각이며,
산신들을 모셨으면 산신각이라 하며,
석가 삼존불과 오백나한을 모셨으면 오백나한전이라 합니다.
대웅보전의 양식은 다포계의 맞배지붕으로 앞면의 다포는 화려하나
뒷면의 다포는 멀리서 보면 익공포 같은 느낌을 줍니다.
조선의 특징 중 하나가 보이는 곳은 화려하고 보이지 않는 곳이나 뒤는 대충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형태를 여주 신륵사 조사당에서도 보았습니다.
조선의 건축양식으로 이해해야 할지,아니면 조선 건축물의 특징으로 이해해야 할지 헷갈립니다.
절 뒤의 동백꽃 숲입니다.
선운사 동백꽃 보기가 그렇게도 어렵다는데 다행이 만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강원도에도 동백꽃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입니다.
강원도에서는 생강나무를 산동백 또는 동박나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강원도 출신 김유정은 생강나무를 동백이라고 인지하여 소설 제목을 '동백꽃'이라 하였습니다.
선홍빛같은 붉은 꽃이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 모습이 사람의 목 떨어지는 모습 같다고 해,
동백꽃은 집안이나 담장안에 심지 않는다고 합니다.
비슷한 예로 유두화도 집안에 들이지 않는답니다.
물론 가시가 있는 선인장이나 꼬인나무(벤자민,개운죽...)도 선물하거나 방에 들이지 않습니다.
묘지의 부장품으로 나온 도자기는 더욱 안방 같은 곳에 두지 않는다는 속설이 존재합니다.
절 앞의 6층탑은 탑신과 상륜부가 서로 다른 색을 나타냅니다.
아마 후대에 수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선운사 산문 아래 부도탑에는 추사가 쓴 백파비문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다보니 비문이 망가져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원본이 보관되어 있고,
이곳에는 실물보다 조금 작은 모사품이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백파비문을 보고 있는 것은 추사 타계 1년전에 쓴 비문으로
사람들이 추사체의 진면목을 보고자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끝 두줄과 시호를
추사 제자인 우봉 조희룡이가 썼다고 한 것이 밝혀진 후 그 진위를 알기 위해 더욱 모여듭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추사체이든,우봉체이든 간에 글씨를 돌에 새긴 석공의 실력이야말로 당대 최고라 생각합니다.
차로 이동 하다 보니 일주문을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빠져 나오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일주문의 '도솔산선운사'라는 현판의 글씨가 일중 김충현 선생 글씨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일중의 글씨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건립 시기는 70년대나 80년대초 쯤으로 추정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은 부산 범어사 일주문을 최고로 칩니다.
미당시문학관에서 만났던 '선운사'라는 시가 여기에 시비로 세워져 있습니다.
<선운사>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은 다른 지역과 달리 4월에도 피고 5월에도 피어 그 때를 맞추기가 어렵다 합니다.
선운사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때맞추어 본다는 것은 여간 행운이 아니며,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미당은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으로 대신해 놓았습니다.
선운사 주차장 옆 개울가에 있는 송악이라는 천연기념물 365호 입니다.
안내판에 따르면
이 나무는 줄기의 둘레가 80cm에 이르고 높이가 15m나 된다고 한다.
내륙에 자생하는 송악 중에서 가장 큰 나무로 짧은 가지 끝에 여러개가 둥글게 모여서 잎을 형성한다.
약용으로 쓰이는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푸른 덩굴 식물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의 숲에서 주로 자라며,
동해는 울릉도까지,서해는 인천 앞바다 섬들까지 퍼져있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다.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소가 잘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 부른다.
이 나무 밑에 있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다.
재미 있는 것은 '소가 잘먹는 식물이라서 소밥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원래 소가 먹는 음식은 사람이 모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가 안먹는데도 사람이 먹는 것이 있습니다.
'깻입이 그렇습니다.'
몇년전에 돌아가신 현대산업개발의 정세영 회장은 평상시 깻잎을 안드셨다고 합니다.
이유는 '소가 안먹으니...안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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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회장님과 집행부가 계획하여 준 일정에 따라 답사를 마쳤습니다.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 대충 찍은 사진과 없는 글솜씨로 기록을 남겨 봅니다.
이것만이 제가 할수 있는 집행부에 대한 예의라 믿으며,
무재칠시 중 두번째인 언시(말로써 베풀 수 있는 것)를 실천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동행하신 모든분들과 불가피 참석 못한 분들의 참고 자료가 되었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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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편의 문화유산 답사기 입니다 . 30편 모아 책 내셔도 될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과 추가 설명이 압권이네요 스크랩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쩜 설명을...정태선님 말씀처럼 문화유산답사기를 읽는듯, 참석 못한 아쉬움을 대신합니다.고맙습니다.
아! 참석을 못하셨군요.
부족한 후기지만 읽어 주시고,다음에는 Run together 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이렇게 준비를 하셨는지. 많은 참고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확인 및 수정했습니다.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멋집니다.
감사합니다._()_
좋은글 답사후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멋진 모범생이세요^^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_()_ 그리고 쑥떡 정말 맛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