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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반유신운동의 출발에 대한 토론문
김 상 윤(광주문화도시협의회 상임대표)
1. <함성>, <고발>지 사건과 나
저는 1972년 12월에 제대하였습니다.
1970년 2월에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원주에 있는 제1하사관학교에 차출되었고, 6개월의 훈련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3선 개헌으로 박정희대통령이 김대중후보를 물리치고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제1하사관학교는 ‘인간재생창’이라고 불릴 만큼 강도 높은 훈련으로 유명했는데, 조교들 중 목포 출신 고참 하사들의 활약과 수준 높은 후보생들(당시 대학에 재학중이던 후보생들이 많았다)이 많았던 때문이었던지, 여기에서는 다른 군대와 달리 김대중후보의 표가 매우 많이 나왔습니다. 학교에 돌아다니는 풍문에 의하면, 서울과 호남 출신들은 학교에 자충도 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떠돌아다녔고, 실제로 조교들은 완전군장을 하고 저녁마다 기합을 받고 있었습니다.
서울과 호남에서 김대중후보의 표가 많이 나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군대라지만 저는 그런 처사에 화가 났고, 군대에서까지 호남을 차별하는가 싶어 작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대령인 참모장에게 면담신청을 했고, “학교에 남아 후배들을 지도하고 싶다”고 학교에 남을 것을 자청하였습니다.
‘자기가 훈련받은 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싸지 않는다’는 군대 말이 있는데, 화가 나서 학교에 남겠다고 자원을 한 것입니다.
제1군사령관인 ‘한신’대장상을 받게 된 사람이 학교에 남아 후배들을 지도하겠다고 자원을 하니, 아무리 호남출신이라고 해도 물리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미련하게도 제대하는 날까지 후보생들과 매일 뛰는 날을 보내다가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하사들을 양성하는 곳에서 계속 후보생을 교육하다가 제대를 했으니, 저는 투철한 반공의식의 소유자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1973년 봄 학기에 돈이 없어 등록하지 못했습니다.
붕남학원이라는 곳에서 중학생을 상대로 수학을 가르쳤습니다.
여름방학 때는 전대 영문과에서 퇴학당했다가 복학하게 된 친구 송정민도 함께 강의를 하였습니다.
송정민은 대학 1학년 때부터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계속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친구였습니다.
-함성지 재판은 73년 5월부터 12월까지 10회 이상 공판이 열렸었는데 공판정에는 전남대법대 학생을 중심으로 대학생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으며 민주주의 학습장으로서 살아 있는 강의실 역할을 하였다.
김정길선생의 발제문 내용대로 많은 학생들이 <함성>과 <고발>지 사건 재판을 방청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김남주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입니다.
그는 22번이고 나는 28번이어서 바로 제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저는 내 친구가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청천벽력이었습니다.
송정민의 설명과 거듭되는 방청으로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기는 하였지만, ‘국가도 사기를 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였습니다.
참으로 순진한(?) 시절이었습니다.
송정민이 데모를 하고 다닐 때 집에 숨겨주기는 하였지만, 사회 현실보다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훨씬 앞서 있던 제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커졌습니다.
1973년 후학기에 복학하게 되었고, <함성>, <고발>지 사건의 상당부분이 날조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그들이 석방되면 당연히 복학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신체재에 대한 저항은 전남대 함성고발지 사건 이후 73년 4월 박형규 목사와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 남산 부활전 예배 사건을 거쳐, 10월 서울 문리대 사건을 계기로 전국 대학가와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 등 까지 확산된다.
그해 10월 서울 문리대 사건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유신체제의 강권통치에 짓눌려 있던 대학가가 드디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남대 문리대에서도 시위를 모의하였고, 당시 문리대 학생회장이었던 이학영과 국문과 윤보현, 김상윤 등이 지병철의 자취방에서 시위의 필요성에 공감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잠깐 눈을 부쳤는데, 후배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상윤이 형은 이제 막 복학을 했으니 빼야 한다’고 결정을 하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계획한 시위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석방된 학생들의 복학을 위한 서명 작업을 계획하고 있던 1973년 겨울방학 때, 윤한봉이라는 농대 다니는 선배가 찾아왔습니다.
철학과 위상복의 소개로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위상복은 광주고등학교 출신으로 나보다는 1년 선배가 되지만, 영문과의 송정민과 더불어 서로 말을 트고 지냈고, 다른 친구들은 이 세사람을 ‘문리대 삼총사’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위상복은 윤한봉선배와는 동기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국에 관한 일로 위상복이 나를 추천할 리가 없었을 터이니, 아마 누군가 다른 사람의 추천이 있었을 것입니다.
윤한봉선배는 그때부터 벌써 재판에 대비하여 보안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 같았고, 저 역시 추천한 자를 꼬치꼬치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윤한봉선배의 제안은 간단하고 명쾌했습니다.
‘내년 신학기에 전국대학이 동시에 궐기하여 박정희 유신독재에 강한 타격을 주자’는 말이었습니다.
저 자신은 솔직히 사회에 대하여 별 의식도 없었는데, 큰 망설임도 없이 바로 동의하였습니다.
윤선배는 ‘자기가 전남북 전체를 조직할 터이니 자네는 전남대를 책임져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윤선배의 부탁으로 흔쾌히 나라 일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함성><고발>지 사건의 영향이었습니다.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나의 경험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전체적인 시대 상황이나 큰 얼개는 김정길선생께서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저는 주로 전남대와 전국적인 연결고리 등에 대한 경험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맞추어 광주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전남지부장을 맡고 있었던 홍남순 변호사 궁동 사랑방에는 박민기 이기홍 등 야당 정치인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홍남순 변호사가 참여했던 지식인 15인 시국선언과 100만인 개헌 청원 서명운동의 실천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박석무 양성우 전홍준 등 선배 그룹들은 서울 조영래 장기표 등과 연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고 인혁계 인사였던 이기홍 김세원 등도 나름대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듯 74년 4월, 소위 민청학련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재야 지식인 종교인 등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반 유신투쟁의 깃발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73년 11월 20일, 전남대에서는 김세곤(법학과) 이철환(법학과) 등이 시국성토대회를 준비하다 서부경찰서에 연행되었으며 12월 3일에는 전영천(문리대)등이 교내 시위를 주도했다. 윤한봉은 농대를 중심으로 교양독서회 회원들과 만나고 있었고 문리대에서는 제대 후 복학한 김상윤과 윤강옥 등이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신학기 대규모 조직적 투쟁의 분위기가 모아지고 있었다.
김정길선생은 ‘민청학련으로 가는 길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움직임이 아니라 재야 지식인 종교인 등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반 유신투쟁의 깃발아래 뭉치기 시작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광주 학생들의 움직임은 이런 흐름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를 도와주던 분들이 몇 분 계시는데, 73년 서울대 문리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방위 소집되어 근무하고 있던 서울대 동양사학과 고아석군, 학생간첩단사건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고 석방되어 31사단에서 근무하고 계시던 서울대 사회학과 주영길선배(참여정부 지은희 여성부장관 남편, 작고), 사르트르 전공자이신 윤정렬선생 등이었습니다.
주영길선배는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외박을 나와 전국적 움직임에 대한 판단을 차분하게 내려주었고, 고아석 후배는 인맥의 연결과 약간씩의 자금을 수시로 조달해 주었습니다.
고아석 후배는 내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활동가들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운동권에서 매우 탁월한 경험을 가진 전남대 법대 고재득선배나 조선대 의대 전홍준선배 등을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적인 움직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이번 일에는 동참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김상윤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영길선배는 서울대 활동가들 중 특히 이아무개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였고, 심지어 ‘그는 행동대원격’이라면서 일하는 방식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들어나 있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런 조직적 원칙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다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런 뜻에서 고재득선배나 전홍준선배와 접촉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습니다.
주영길선배의 판단으로는 일을 이런 식으로 진행하다가는 사전에 모든 움직임이 드러나 일을 해보지도 못하고 피해만 입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아마 고재득선배나 전홍준선배의 경우도 그런 우려 때문에 이 일에 동참하는 것을 꺼려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부터 고아석 군이나 김정길 후배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자 하였습니다.
일은 윤한봉선배와 내가 하는 것이고 책임도 우리가 져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아석과 김정길에게는 필요한 부분의 도움만 받고 일체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는 보안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우리를 도와주는 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내 친구들인 송정민과 김남주까지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습니다.
김정길은 마지막으로 전남대 의대 책임자로 심재삼을, 그리고 조선대 의대 책임자로 안상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심재삼과 안상선을 만나는 것도 김정길을 배제시킨 상태에서 만났습니다.
이강선배는 전혀 접촉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정길이 윤강옥만은 본인이 하도 원하니까 함께 해달라고 하여 보안 차원에서 승낙했으나, 이학영 등 이미 학교에서 운동권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아무도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이학영 군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도 사실은 우리와 상관없이 본인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에 사전에 잡혀 들어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성찬성과 박진 그리고 전영천은 나중에 민청학련 사건과 별개의 활동으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전남대 각 단과대학 조직은 윤한봉선배의 추천으로 박형선의 도움을 받아 조직을 만들어 갔습니다.
박형선도 사람을 추천만 했지 가급적 제가 모든 사람들을 개별 접촉을 하였습니다.
각 단과대학 책임자들도 자기 대학에서 함께 움직여줄 사람들을 나에게 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정용화선생의 발제문을 보면 그때 윤강옥의 부탁으로 문리대 학생 동원을 맡았다고 했으나, 나는 일체 그런 움직임을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 역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윤한봉선배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종의 ‘점조직’ 방식을 철저히 활용했기 때문에 긴급조치4호가 발동되고 마지막 자수기간으로 설정된 4월 8일까지 우리 조직의 윤곽은 정보기관에서 전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 인 4월 8일에 김상윤이라는 이름이 나왔지만, 생활기록부에 주소를 적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1974년 3월 9일, 윤한봉선배와 속리산 법주사에 갔습니다.
이곳은 관광지여서 통행금지가 없었고, 붐비는 관광객 때문에 위장하기가 좋았습니다.
서울대에서 황인성과 전홍표가 왔고, 경북대에서 임규영이가 왔습니다.
서울의 진행상황, 영남의 진행상황, 그리고 호남의 진척상황 등이 개괄적으로 이야기 되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은 3월 중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지방에서 속도를 좀더 내달라’ 이런 정도의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3월이 거의 다 갈 무렵, 우리의 조직도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3월 29일 부산 구포에 있는 둑(방천)에서 서울과 영남 그리고 호남의 대표들이 다시 만나 최종 점검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누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가슴에 상장(喪章)을 달고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경북대 이강철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는 아무도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서울에 비해 지방의 속도가 느려 서울은 안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조직이 탄로날 가능성이 많아 거사일을 연기하기가 어렵다는 소식이 자주 왔습니다.
이미 황인성이나 전홍표는 신분이 들어나 부산까지 올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강철과 저는 구포역 근처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습니다.
경북대 황철식군도 거기에서 만났습니다.
그곳에서 경북대 이강철에게서 인쇄물 한 뭉텅이를 받았습니다.
성명서였습니다.
성명서에 단체 이름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상의 없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을 부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미 서울에서 그렇게 해서 만들어 보냈다는 것입니다.
4 ‧ 4조로 쓰인 ‘민중의 소리’라는 유인물 50매도 받았습니다.
가급적 4월 초순에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자고 하였습니다.
4월3일 긴급조치4호가 발동되었는데, 주동자는 사형시킬 것이고 가담한 학교는 폐교조치한다는 무서운 내용이었습니다.
유신정권은 이미 전국적인 움직임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조치4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날 서울의 모대학(성심여대?)에서 시위가 일어나자 바로 긴급조치4호를 발동한 것입니다.
학교에 가니 윤강옥군이 달려왔습니다.
“형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긴급조치4호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큰 데모를 한번 하자는 정도였지 국가를 전복한다거나 내란을 획책하여 사형을 당한다거나 학교가 폐교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황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4월 6일, 윤한봉선배가 준비한 선언문 1500여매를 받아 집에 보관하였고, 부산에서 받아온 성명서의 내용을 선배에게 알렸습니다.
보안상 그 성명서까지도 우리집 다락에 숨겨놓고 마지막 각 단과대학 책임자들이 만날 때 나누어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날 4시경, 윤한봉, 김상윤, 박형선, 최철, 유선규 등이 처음으로 함께 만나 4월 3일 긴급조치4호에 8일까지 자수를 권하고 있으니, 그날까지 기다렸다가 4월 9일에 학교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하였고, 각 단과대학 책임자들은 4월 8일에 만나 모든 준비물을 배포하고 4월 9일에 거행할 것을 알리기로 하였습니다.
4월8일 저녁 7시경, 불로동에 있는 블런디라는 주점에서 처음으로 모든 단과대학 책임자들이 모였습니다.
농대 - 윤한봉, 박형선, 최철, 문덕희(불참)
문리대 - 김상윤, 윤강옥, 하태수
사범대 - 유선규
공대 - 정환춘
상대 - 이훈우
일부러 소란스런 주점을 택하였습니다.
나는 학동에 있던 집에서 윤선배가 만든 선언문과 부산에서 받아온 성명서를 어떤 여학생의 도움을 받아 끙끙거리며 그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 여학생은 위장을 위하여 각 단과대학 책임자를 물색할 때나 모의를 할 때 참석하여 마치 데이트하는 분위기가 나도록 연출을 해주었습니다.
블런디 주점에서 모든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4월 9일 학교에서 시위를 하기로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설사 시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유인물이라도 나누어주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잡혀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월 9일 아침 8시경,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윤한봉, 김상윤, 윤강옥, 박형선, 최철 등이 모여 계림동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로 진입하기로 하고 대학 본부 앞에서 김상윤은 성명서를 낭독하고 가능한 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하기로 하였습니다.
계림동 스쿨버스에 타자마자 박형선은 유인물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일부 학생들은 놀라서 유인물을 받지 않으려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때의 분위기는 그처럼 험악하였습니다.
지금은 전대 후문이 되었지만, 교문으로 스쿨버스가 다가가자 모든 학생들은 차에서 내려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교문을 들어서는데, 학생과에 근무하는 김용우선배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김상윤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숨도 못잤더니 미치겄네.” 라고 하면서 나를 못 본 척 해주었습니다.
나는 잽싸게 본관을 향해 나아갔는데, 본관 앞에 도착하니 이미 박형선은 형사들에게 잡혀서 끌려가고 있었고, 나 역시 붙잡혀 정득규 학생처장실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장춘몽이었습니다.
전남대 의대 심재삼과 조선대 의대 안상선의 이름이 이후 나오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 시위대가 결국 도청 앞으로 나와야 되는데, 전남대에서 도청 앞까지 나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전남대 의대와 조선대 의대의 시위대가 도청 앞으로 나와야 하고, 간호대 학생들은 양 대학 의대 책임자들에게 동원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전남대 단과대학 책임자들과 그들을 단 한 번도 만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김정길선생께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에 대해 지나치게 개괄적으로 발제를 하였기 때문에 전남대 학생들의 움직임을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 사건의 파장이 매우 컸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는 단 한 번도 함께 모여 이를 개괄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도 우리는 숨가쁘게 운동 속에서 살아야 했고, 그 운동들이 분화되는 전 과정 속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들을 했습니다.
누구는 농민운동으로 누구는 노동운동으로 또 누구는 청년운동으로 그리고 종교운동 학생운동 문화운동 교육운동 조직운동 야학운동 등으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아마 그런 운동의 연속성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함께 모여 반추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80년 민청학련 세대들이 학교에 복학 했을 때, 그 학교와 학생들이 얼마나 낯설었는지 여러분은 모르실 것입니다.
불과 6년이 흘렀을 뿐인데도 이미 우리는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시 학보에 ‘사회정화의 횃불’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우리 복적생들은 이미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아니고, 다만 시대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어용교수 문제만은 우리가 맡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이 문제를 자임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지난 시대의 짐을 후배들에게 지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찬가지의 질문입니다.
함성지 사건이나 민청학련 사건 모두가 얼마간은 독재자들의 조작으로 과장되고 부풀려져 있습니다.
보다 소박한 자세로 후배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사실 그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당시 선배들의 활동들을 지나치게 확대 과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신 어떤 선배는 광주의 사회운동 대부분이 자신의 작업에 의해 진행된 것처럼 자신의 자서전에 쓴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강력히 반발하였습니다.
그런 낡은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시대에 적응할 수도 없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선배께서는 ‘자신이 소 영웅주의에 빠졌던 것 같다’고 스스로를 비판하셨습니다.
어디까지나 학생운동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점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청학련 사건도 여러 선배들의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그 실질적인 활동은 모두 학생 스스로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