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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께 중국 중경에서 활동하던 이화림의 모습 ⓒ 충남연구원 책임연구원 박경철
이화림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은 독립운동가인 오빠 이춘성, 이춘식의 영향을 받아 1919년 14세의 나이에 친구들을 이끌고 3.1운동에 가담했다. 이를 시작으로 평양 학생 조직인 역사 문화 연구회에 참가하여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고, 이를 계기로 1927년 조선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학생운동을 전개했으나, 극심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0년 중국 상해로 떠났다.
이화림은 상해에서 한글학자인 김두봉을 통해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났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가 그토록 원하고 바랬던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죠. 그는 이름을 이동해로 바꿔 사격과 무술을 익히며 친일파 밀정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화림은 한인애국단 내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김구는 그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독립을 향한 열망을 높이 사 이화림에게 비서 역할을 맡길 정도였다..
“그때 윤봉길이가 도시락 폭탄을 던졌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일본 놈들이 마치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었지.”
한인애국단원 이화림의 구술이다. 이화림(1905~1999)은 그 유명한 윤봉길 의사의 거사를 지켜본 같은 조직원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한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행사에 폭탄을 던져 일제 고관들을 죽여서 대내외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거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이화림은 윤봉길과 함께 행사 전날 사전 답사를 했고, 당일에도 같은 조직원으로서 거사를 지켜봤던 것이다.
이화림은 같은 해 1월 8일에 있었던 이봉창 의사의 거사에도 참여했다. 한인애국단의 첫 번째 거사인 히로히토 천황 제거 작전이었다. 이봉창이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지만 실패했다. 불발이었다. 이때 이봉창이 폭탄을 숨기고 천황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도운 게 이화림이었다.
한인애국단의 핵심 3인방은 이봉창과 윤봉길 그리고 이화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화림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이화림은 한인애국단 조직원의 역할에 충실했으나 임시정부나 독립운동사 관련 기록 그 어디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자료가 제한적이지만 저간의 사정을 정리하면 코뮤니즘을 달가와 하지 않는 김구가 이화림이 코뮤니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호히 인연을 끊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화림이 해방 이후 중국에 남아서 생활하다 사망했기 때문에 더더욱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화림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이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 대동강 근처에서 태어났다. 집에서 이름은 이춘실이었다. 어머니는 김인봉, 아버지는 이지봉. 그리고 오빠가 두 명, 언니가 한 명 있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숭실중학을 다니던 큰오빠 춘성은 2학년때 자퇴하였다. 작은오빠 춘길이와 언니는 학교에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고정 수입이 없는 일용직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미국인 선교사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으며, 세 남매는 양말 짜는 일을 하면서 근근이 끼니를 해결했다. 도저히 빈곤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큰오빠가 결혼하고 목공일을 하면서 집안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화림은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강력한 의지로 큰오빠가 건넨 거금 1원으로 기독교 학교인 숭현소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자상하고 의로운 기독교 신자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화림에게 역사와 위인 얘기를 들려준 민족의식이 투철한 여성이었다. 세 남매가 나라 잃은 슬픔과 나라의 소중함 그리고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매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당연했다. 이화림은 어머니, 오빠와 함께 전단지 제작과 배포를 담당했다. 영어 공부 못지않은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추적과 감시가 점차 강화되었다. 이화림의 두 오빠와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다.
국내에 남은 이화림은 중학교 1학년 때 극심한 가난으로 어쩔 수 없이 자퇴했다. 그리고 숭의여중 유아교육반에 들어갔다. 유아원 교사가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이 무렵 평양고등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는 <역사문학연구회>에 가입했는데, 여기서 사회주의를 학습했다고 한다.
이화림은 1927년 3월 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군산의 기독교 유아원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함경북도 청진의 기독교 유아원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역사문학연구회>에서 활동했던 평양 숭실대학 학생 김문국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김문국의 소개로 1927년 11월에 조선공산당에 가입한다. 그 후 유아원 교사 일을 하면서 하지만 비합법 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은 내부 분열과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하고 말았다. 당의 해체로 전망이 불투명한 이화림은 고민 끝에 중국행을 선택한다. 당시 이화림의 어머니는 딸과 함께 평양의 보통강 강둑을 걸으면서 정몽주의 시 ‘단심가’를 들려주면서 크게 격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1930년 3월 이화림은 상하이에 도착해서 김문국으로부터 소개받은 독립운동가 김두봉을 만났고, 다시 김두봉의 소개로 임시정부 김구 주석을 만났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에 참여했던 것이다. 상하이에서는 춘실이라는 이름을 이동해로 바꿔서 활동했다.
두 의사의 의거 후 이화림은 김구의 코뮤니스트에 대한 거부감과 항일 투쟁 방식에 회의를 느꼈다. 테러가 아닌 조직적인 무장 투쟁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광동성의 광저우에 조선 혁명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상하이를 떠나 광저우로 갔다.
그녀는 광저우에 도착한 직후에 또다시 동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명했다. 그 이름이 바로 이화림이다. 그리고 중산대학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실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일과 학습을 병행하게 된다. 이때 예전에 김두봉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던 김창국을 만나게 된다. 김창국은 당시 중산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사랑을 느낀 두 사람은 1933년 봄에 결혼한다. 하지만 가사노동과 육아를 둘러싸고 가부장적인 김창국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게다가 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1935년 7월 조선의열단을 포함한 좌익 계열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는데, 이화림이 여기에 가입한 것이다. 당 가입을 둘러싸고 남편과의 갈등은 더욱 커져만 가는데, 거기에 당으로부터 난징본부로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김창국이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이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화림은 1936년 1월 광저우를 떠나 난징으로 갔다. 난징으로 간 후 이화림은 간부들의 소개로 이집중(본명 이종희)과 결혼하였다. 이집중은 조선총독부의 밀정이며 김활란의 형부인 김달하를 중국에서 처단한 인물이다. 하지만 이집중 역시 이화림의 여성 혁명가로서의 삶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아 다시 이혼하고 말았다.
1938년 10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다. 부녀부대도 설립했는데, 대장은 박차정, 부대장은 이화림이 맡았다. 조선의용대는 좌파 연합인 조선민족전선 산하의 한인 군사조직이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에 배속된 선전대여서 대원들은 국민당의 소극적인 항일 투쟁에 불만이 많았다. 이에 1939년 10월 조선의용대는 화베이행을 결정한다. 그리고 국민당의 통제를 벗어나 화베이의 태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베이지대를 결성하였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가열차게 전개했다.
1943년 12월 무정이 조선의용군 각 지대는 일부만 타이항산에 남고 옌안으로 가서 훈련받으라는 공산당의 결정을 전하였다. 물론 옌안으로 가는 명단에는 이화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화림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1월에 중국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의대 재학 중에 종전이 됐고 이화림은 학업을 계속해 의대를 마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제6군단 위생소 소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폭격으로 부상을 당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양의사학교 부교장, 중국 교통부 위생기술과 간부, 옌볜 조선족 자치주 위생국 부국장 등 주로 만주의 공공 의료 분야에서 조선족을 위해 일했다.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분자로 몰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78년에 복권되어 다롄 시찰실의 시찰원과 조선족노년협회 명예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화림은 쉬지 않고 ‘일’했다. 1988년 9월에는 창춘시 조선족 사회과학종사자협회의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요양하다가 1999년 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불굴의 여성 혁명가요, 숭고한 항일투사 또 한 명이 이렇게 사라졌네.
1932년 일왕 암살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이화림은 이봉창의 속옷 안쪽에 수류탄 주머니를 만들어 폭탄을 일본으로 몰래 옮기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해 4월에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또 한 번 폭탄을 던지기 위해 윤봉길과 미리 정찰하여 거사 지점까지 계획하는 등의 주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도시락 폭탄 또한 같이 던지기로 돼 있었으나 둘은 발각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작전을 바꿨다. 이화림은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부로 가장해 동행했고, 윤봉길의 거사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다.
그 이후 이화림은 개인 희생에 의존해서는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고 생각했고, 김구의 만류에도 그는 사회주의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인지 <백범일지>에는 이화림의 이름이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1932년,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이화림은 광저우로 건너갔다.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해 부녀국 의료보건사업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36년엔 민혁당에 가입해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부녀대의 부대장을 맡았다. 1945년 중국의과대학에 입학해 그해 8월 옌안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학업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대학을 마치고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하얼빈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 제 6군단 소속으로 참전했고, 위생소장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사회주의자이자 인민군으로서 6·25 참전은 후에 독립운동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조차 이화림을 포함한 조선의용군은 인정받지 못했다.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것이다.
“나의 마음은 희망으로 충만해 있다. 나는 우리들의 국가가 번영하길 희망한다. 나는 머지 않는 날에 조선이 평화적으로 통일 되길 희망한다. 나는 미래가 찬란하길 희망한다. 나는 미래가 더욱 아름답길 희망한다.” -<이화림 회고록>의 마지막 글 중에서
그는 문화대혁명 때 반혁명 분자로 몰려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1987년 대련시 조선족 노인 협회의 명예 회장, 1988년 장춘시 조선족 사회 과학 일군협회의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1999년 2월 10일 전재산 5만원을 조선족학교에 전액기부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