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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교육 훈련과 이세종의 영성
심중식 소장(귀일사상연구소),
차 례
1. 여는 말
2. 지나온 100년
3. 동광원의 직면 과제
4. 제자교육훈련의 필요성
5. 제자교육훈련 방법
1) 성령님의 임재
2) 신앙인의 기본 입장
3) 복음 선포와 구원의 공동체
4) 소공동체 활동
5) 기도와 경건 훈련
6) 인격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
7) 십자가와 부활의 새 생명
8) 일곱 가지 제자교육 훈련 과정에 대한 소고
6. 맺음말
1. 여는 말
인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해도 사람이 태어난 직후부터 짐승 무리 속에서 길들여진다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인간의 문화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본래 타고난 인간성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언어생활이 없이 사회적 존재가 될 수도 없고 이성적 행위도 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특성 가운데 종교적 삶이라는 영성생활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문화 전통 속에서 교육훈련을 통해 형성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5백 년 전에 조선에서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공자 맹자를 배우는 유교도가 되었을 것이다. 또 1천 년 전에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불교도가 되어 사월초파일이면 사찰을 찾고 불공을 드리며 살았을 것이다. 요즘에 태어난 한국인들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또는 무종교 등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지금부터 1백여 년 전에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조선은 왕과 외척과 사대부들의 다툼으로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힘을 잃고 일제의 강압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의 압제와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이때 조선인의 대부분은 글을 몰랐고 극히 일부 양반들만이 한문을 배우고 문자로 소통할 수 있었다.
화순 도암에서 태어난 이세종 역시 무학으로 한자나 한글도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러나 부지런히 일을 하여 동네 갑부가 되었다. 글은 모르지만 유교가 5백 년 동안 지배했기 때문에 삼강오륜의 행실은 몸에 배어있었다. 즉 임금과 부모와 스승에게 충성을 다하는 일이 삼강이었고, 나라에 대하여 충의를 지켜야 하고 부모와 나이 많은 어른을 섬겨야 되고 친구 간에 신의를 지켜야 되고 부부는 서로 떨어져 역할을 나누는 일이 오륜이었다. 체면치례라는 말이 있듯이 다분히 형식화된 겉치레 유교라서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그저 조상에게 제사 잘 지내면 자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이었고, 병이 나는 경우에는 유교에서 금하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빌었다.
이처럼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으로 가득했던 시절에 이세종은 성경을 읽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창세기는 만물을 새롭게 보는 경이의 눈을 주었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은 지금까지 생각하고 살아왔던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는 혁명이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셨고 우리를 구원하시려 주님께서 극진한 사랑을 보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복음은 실로 환희에 찬 기쁨을 주는 놀라운 소식이었다.
욕심 많고 머슴살이하던 까막눈이던 한 시골 농부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그 높고 깊은 영성으로 살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에게서 배운 이현필은 또 어떻게 그처럼 순결의 길 초월의 길을 걸으며 온몸으로 기도했을까. 두 분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동광원이 형성되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생을 동광원에서 그 힘든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살 수 있게 하였을까. 또 어떤 이유로 공동체가 활력을 잃고 젊은이가 끊어지고 쇠락하게 되었을까. 다시 공동체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후계자들이 줄을 잇는 그런 희망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과 생각을 가지고 이세종의 삶을 통해서 그의 제자교육훈련의 요소들을 추려보려고 한다. 동시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교육훈련의 흔적들을 찾아 정리해보려 한다. 먼저 지나온 동광원의 발자취를 간단하게 요약하여 일별한 다음에 이공의 생애에 나타난 제자 훈련의 요소들을 찾아보기로 한다.
2. 지나온 한 세기
동광원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 수도공동체이지만 그 역사와 특징을 살펴보면 그 속에 숨겨진 신앙의 보물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나 단체도 아니고 기독교에서 보기 드문 자생적 수도공동체라는 독특한 개성과 영성의 향기가 스며있다. 목회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조직도 없이 평신도들이 모여 날마다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다. 단체나 조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저절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모임이기에 그 기원도 특정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하다.
해방 후 이현필선생을 따르는 제자들이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이가 어떤 모임의 명칭이나 회칙을 제정하여 조직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핍박을 피하여 산중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농사짓고 살다가 해방이 되자 식구들이 광주로 나와서 해야 할 일을 찾은 것이다.
광복 직후 정국은 혼란하여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이현필은 졸지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0년 1월에 광주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동광원이라는 고아원을 만들었을 때 그 운영을 정인세 원장에게 맡겼다. 정인세 원장은 광주YMCA 총무로 있다가 이현필의 신앙을 존경하여 1948년부터 합류했던 분이다. 따라서 정인세 원장을 중심으로 이현필의 제자들이 모여서 동광원을 운영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이현필을 따르던 신앙인들의 모임을 자연스럽게 동광원 사람들이라 하게 된 것이다.
동광원 회원들은 한 때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2017년 현재 50여명의 공동체 식구들이 남원시 대산면에 있는 본원과 광주 귀일원 그리고 화순과 벽제 분원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들의 평균연령이 70세를 넘어설 만큼 모두가 연로하신 분들이라 찾아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수없이 많은 고아들을 돌보며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와 병든 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활발한 구제와 봉사활동을 하던 동광원, 우리나라 씨알들에게 무지와 절망의 어둠을 몰아내고 새로운 빛과 희망으로 꿈을 심어주었던 동광원, 그런데 언제부터 그만 생명력을 잃고 쇠퇴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동광원의 시작은 화순에서 태어난 이현필 선생의 신앙운동에서 출발했지만 이현필 신앙의 핵심이 그의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동광원의 원조는 이세종선생이라 하겠다. 이세종선생은 태어난 연대가 확실치 않지만 1877년 무렵 화순에서 태어나 1942년 65세 경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학교에 가본 적이 없고 어려서부터 남의 머슴살이를 했지만 부자가 되겠다는 꿈과 강한 의지를 가졌다. 그래서 부지런한 성격으로 열심히 일하고 아끼고 모으고 불려서 동네의 갑부가 되었다.
이세종의 어릴 적 이름은 영찬이라고 한다. 전주 이씨 족보에 이영찬으로 올렸다. 그런데 호적에 올릴 때는 이세종으로 하였다. 이세종은 40세 무렵에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을 불러다가 산당을 짓고 제상을 차려 기도하고 빌었다. 기도의 효험이 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로부터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전도의 소리를 듣고 성경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한글을 배워가며 성경을 읽었다. 이때가 아마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무렵의 일이라 생각된다.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이 온 나라 방방곡곡에 메아리친 삼일 독립만세 운동과 더불어 기독교 열풍이 머나먼 시골의 외진 마을 등광리까지 번져갔을 것이다. 이공은 성경을 보면서 글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겼으며 아울러 자기의 죄인 됨과 하나님의 자비를 아는 눈이 생겼다.
이세종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지나온 삶을 회개하고 새 삶을 시작하였다. 자기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모두 탕감해주고 재산을 팔아서 절반은 노회에 바치고 나머지는 굶주리는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정결한 몸과 가난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 성경을 보며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살았다. 이제 이세종, 아니 이영찬은 죽어 없어졌고,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그리스도 예수만이 주님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자기를 이공李空이라 했다. 자기를 텅 비워버리고 자기가 없어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은 후에 자기 족보에서 자기의 본명인 영찬이란 글자를 손가락에 먹을 찍어 문질러 버렸다. 자기 이름은 천국에 기록됐으니 이 세상 족보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의 호를 “이공”이라 하였다. 남들에게 앞으로는 자기의 본명을 부르지 말고 이공이라 불러 달라고 했다. 자기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공을 쳐버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공은 성령을 통해 성경의 말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노회에 재산을 바친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에서 최흥종 강순명 등 많은 목사들도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이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몇 사람들은 이공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이현필이라 했다. 그 밖에 오복희 수레기댁 이상복 등 여럿이 이세종을 따르고 성경을 배웠다.
이세종이 세상에 숨은 성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신학자 정경옥교수의 덕분이다. 정교수는 신앙적 위기를 맞아 고향 진도에 내려와 있다가 이세종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만나보았다. 그리고 그 소감을 신학 잡지 <새사람> 1937년 7월호에 실었다. 즉 ‘조선의 성자를 찾아’라는 제목으로 이세종을 소개하는 글을 실었는데 신학 박사의 눈에는 이세종이 예수를 닮은 숨은 성자요 고독한 성자로 보였다.
‘그는 학식도 지위도 없는 산골 농부이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인고를 즐겁게 받고 있다.’
신학교수 정경옥은 이세종을 만나고서 믿음의 심령을 되찾게 되었다. 성경을 보는 새로운 눈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숨은 성자 이세종을 통하여 재확인하고 다시금 새 힘을 얻게 되었다.
광주로 나가서 전도사가 된 이현필도 고향으로 돌아와 이세종을 만났다. 이세종은 이현필에게 독신으로 살 것을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현필은 결혼을 하고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스승은 결혼한 제자를 보고 적지 않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깨끗이 사시오’ 한 마디를 부탁했다. 그런데 자궁외 임신으로 부인이 사경을 헤매다 응급수술로 겨우 목숨을 살렸다. 사산된 태아를 보며 이현필은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를 계기로 이현필은 마음의 전기를 일으켜 그동안 자기의 믿음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부실했던 것인가를 깨닫고 스승 이세종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다. 부인에게는 몸이 약해서 홀로 지내야겠다며 별거했다. 그리고 홀로 화학산에 들어가 회개하고 반성하며 성경을 묵상하는 기도생활을 시작하였다.
1942년 이세종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그 제자들은 이현필을 중심으로 모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현필이 30세 무렵 남원을 방문하여 삼일목공소를 운영하던 오북환집사 등 남원에 있는 기독교 신도들을 만나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이세종과 이현필의 고향인 화순군 도암면과 더불어 남원의 지리산 자락이 공동체 운동의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
이현필은 남원에서 소녀 소년들을 모아서 갈보리산에 들어가 신앙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훈련을 받은 제자들은 광복과 더불어 광주로 진출하였다. 서리내에서 교육 훈련을 받았던 청소년들과 함께 1948년 봄에 광주로 이동하여 기독청년회관에 머물며 생활했다. 1948년 가을 여순사건으로 고아들이 발생하자 1949년에는 도암 청소골에서 고아 돌보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0년 광주 지역 고아들을 돌보기 위한 시설이 광주 유력인사들의 뜻에 따라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고 이현필을 따르던 정인세가 원장을 맡았다. 6.25전쟁으로 늘어난 고아들을 돌보면서 또한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와 식구들이 불어나게 되었다. 1954년 광주시의 정책에 따라 동광원이 폐쇄되자 불어난 동광원 식구들은 화순과 서울 능곡과 경기도 벽제 등까지 진출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1964년 지도적 스승이었던 이현필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새로운 활력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물론 스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스승의 유지에 따라 정인세 원장이 사회복지 법인 귀일원을 세우고 활동했다. 이현필 선생은 그 생애의 말년인 1960년쯤부터 새로운 공동체로 귀일원을 언급했다. 정인세 원장에게 ‘동광원이 아닙니다. 귀일원입니다. 귀일원을 하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정인세는 1965년 2월에 사회복집법인 귀일원을 세웠다.
이현필이 귀일원을 말하게 된 것은 유영모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 하겠다. 해방후 1946년부터 해마다 동광원 수양회 강사로 찾아왔던 유영모는 통일이 아니라 귀일이라야 된다고 했다. 나아가 예수의 뜻도 귀일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힘과 뜻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이라면 하나님의 뜻과 힘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귀일이다.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하는 요한복음 17장 예수의 기도 내용도 귀일이요 누가복음15장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도 귀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교파와 종파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서로 돕고 섬기며 한 몸의 공동체로 살자는 뜻이었다. 종교다원주의가 아니라 각자 절대자의 뜻에 귀의하여 서로 공감으로 소통하고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정인세원장이 귀일원을 세우고 활동할 때 오북환 장로는 1970년부터 벽제분원 계명산에서 성경공부반을 열고 제자교육을 시작했다. 10명씩 1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공부하며 훈련을 했다. 그렇게 성경공부반을 지도했고, 그 과정을 이수한 뒤에는 다시 광주 화순 등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차츰 구심력이 떨어져 공동체를 들어오기보다는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남성 청년들의 이탈이 심했다.
그리고 동광원의 향후의 진로에 대한 입장에서도 이현필의 수제자로 알려진 김준호선생과 정인세 원장 간의 노선차이가 마찰을 드러낸 것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김준호 선생은 동광원의 순결사상에 따라 어린 신도들을 보호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가톨릭 수도원으로 가자는 것이고 정인세 원장은 기독교 개혁신앙에 따른 수도단체로 남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결국 김준호 선생을 따르던 식구들은 김준호가 세운 가톨릭 수녀원인 소화자매원으로 들어가 수녀가 되었고 남은 식구들은 귀일원에서 봉사하며 평신도로 살았다.
귀일원에서 환우들을 돌보며 헌신했던 언님들(동광원 수녀들에 대한 호칭)은 정년으로 갈 곳이 없게 되자 정인세 원장이 1980년대에 지금의 남원시 대산면에 터를 잡고 이주를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3. 동광원의 직면 과제
이상과 같이 화순군 등광리에서 이세종선생에 의해 시작된 신앙운동이 그 제자 이현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세종선생이 동광원 운동의 원조, 즉 제1대라면 이현필과 그 동역자들, 즉 오복희전도사와 수레기댁을 포함한 이세종 제자들과 오북환과 정인세 등이 2대라 할 것이다. 그리고 3대는 이현필을 중심으로 하는 2대 어른들의 제자라 할 수 있는데, 말하자면 김금남과 김준호 김춘일 이원희 한영우 박공순 복은순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4대 제자라 할 만한 그룹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왜 3대에서 전성기를 이루다가 그만 급격한 쇠퇴를 겪게 되었을까. 이공이나 이현필이 모두 자기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바랐던 때문일까.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자매로 하나가 되는 사랑의 세계가 되기를 바라며 동광원이 새로운 종파나 교파가 되면 안 된다는 믿음과 자기의 흔적이 조금도 남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까. 그 원인을 또한 우리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여러 외적인 객관적 환경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적인 문화의 흐름과 우리나라 기독교와 종교계 현황 정치적 경제적 상황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하면 수없이 많은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단체에서는 그 명맥이 계속 이어지고 부흥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바, 내부적인 원인을 찾아 반성해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특히 교육훈련부분이 가장 취약했다는 여러 지적들이 있기에 이를 좀 더 살펴보고자 한다. 즉 공동체의 기도 예배 노동수도 등의 종교활동과 구제 봉사 복지 선교 등의 사회활동은 비교적 활발했지만 후계자를 위한 교육훈련 과정은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동광원을 살펴보고 동광원과 기독교 전통 속에서 제자 양성을 위한 바람직한 교육훈련 과정을 모색하여본다.
어느 교회나 단체든지 영속성을 위해서는 신입회원을 모집하고 지도자를 선발하고 교육훈련 과정을 통해 양육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기독교는 각 교파별로 신학대학을 설립하고 목회자를 양성해왔다. 각 교단은 또 교회를 세워 전도하고 새로운 신도들을 모아 예배와 기도활동을 통해 양육해왔다. 교회는 이렇게 예배와 기도만 아니라 전도와 봉사 그리고 선교기관이다. 그리고 이런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가 목회자인데 그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이 각 교단에서 세운 신학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새삼 언급하는 것은 동광원이 지속 부흥되지 못하는 원인을 이런 기본 구조 속에서 살펴보자는 의도 때문이다. 동광원은 어느 교단에 속한 것도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교파를 초월하여 공동체를 이루자는 평신도 공동체를 지향해 왔다. 따라서 각 교단에서 양성한 목회자를 선뜻 동광원의 지도자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어느 교단의 목회자인가에 따라 동광원이 실질적으로 그 교단 소속으로 특징 지워지거나 그 교단의 신학으로 윤색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즉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켜가거나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래서 동광원에서는 늘 지도자를 세우는 문제가 발생한다. 또 단체가 되면 조직과 내부규칙이 있어서 지도자의 권위를 강제할 수 있지만 동광원에는 이렇다 할 규칙도 없고 조직도 없다.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 공동체의 권위와 지도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만일 어느 공동체를 이끄는 구심점이나 지도력이 상실되면 공동체의 방향성이나 활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생명력이 상실되면 새로운 회원들의 확보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회원이 찾아오더라도 활력이 상실된 공동체는 그를 수용할 능력이 없으며 나아가 기존의 회원들 간의 구심력이 약화되어 쉽게 이탈하거나 분열 분산되고 말 것이다.
이같은 이유로 새로운 단체가 형성되어 독립적으로 자생력을 갖고 발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뚜렷한 조직이나 지도자도 없고 교육훈련의 양육체계나 규율도 없이 동광원이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고 유지되어 왔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 마디로 신앙의 힘이라 할 것이다. 즉 인간이 이끄는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공동체라는 믿음이다. 지도자는 인간이 아니라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우리의 지도자가 된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반석에 동광원이라는 공동체를 세웠기 때문에 그나마 이처럼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4. 제자교육훈련의 필요성
모든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이요 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신앙의 공동체이다. 그런데 삶과 예배로 드러나는 신앙고백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같은 기독교라 해도 교회는 여러 교파로 나눠지고 각 교파마다 신학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각자 지도자를 훈련하고 양육해왔다. 하지만 기존의 이런 교단이라고 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고 또한 기독교 신자들의 증가세도 어느 종교보다 가파르게 늘어나 교회수가 증가하였다. 그에 따라 신학대학과 신학생 수도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2천 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의 입교 신도 증가세가 급격히 떨어지고 특히 젊은이들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교회와 신도가 줄어들면 신학생도 줄여야 되지만 한 번 늘어난 대학정원은 줄이기 어렵다. 그래서 매년 정부 인가 신학대학 졸업생만 해도 4천 명 이상씩 쏟아지는데 그 가운데 전임 전도사로 취임하는 숫자는 절반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이렇게 전반적인 신도수의 정체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나 선교단체는 부흥하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 가운데 제자교육훈련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회나 단체가 부흥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동안 교인들을 교육훈련 하는 특별한 시스템이 없이 주일 대예배와 매일의 새벽예배 그리고 수요예배와 기도회 등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여 신도들의 양육을 다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면서 보다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제자교육훈련 과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예배에 빠지지 않도록 독려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저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하고 교회 안에서 봉사한다고 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 성숙이나 인격적 변화 또는 성화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단순한 신자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을 좇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름 받아 헌신하며 성화의 길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 또한 이런 예수의 영성과 제자도를 가져야 신앙적 자발성과 선교적 열정이 솟아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제자교육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예배 때 목사님 설교는 주로 성경적 지식이나 이론, 말씀이나 신학이론과 관련하여 문화적 배경이나 교훈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고 깨닫고 적용해야 될 것들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고 전달해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제자교육훈련에서는 성경적 지식이나 이론을 통한 일반적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스스로 성경을 읽고 각자 구체적 상황 속에서 자기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을 가르치고 훈련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는 방법, 그리스도인으로서 요구되는 바람직한 가치관을 세우는 법, 믿음 안에서 인격적 변화와 함께 성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에게 요구하는 소명을 깨닫는 법,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며 살아야 될지를 성령과 소통하며 구하는 법 등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가지고 제자교육훈련을 하여 신실한 한 사람의 주님의 제자가 나오게 된다면 그는 또 자기와 같은 방법을 가지고 새로운 주님의 제자를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이런 제자교육훈련의 전도 방법은 부흥회를 통한 전도 방법에 비해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 현재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부흥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개척교회 목사라면 누구라도 10년 내에 수천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로 부흥하도록 기도하며 간구하고 노력하고 싶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권능을 얻어 한 번 설교할 때마다 수십 명씩 새신자가 등록하는 그런 기적을 얻을 수 있을까.
가끔 그런 부흥강사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모인 신도들은 뜨거운 감정이 북받쳐 열성적 믿음이 생기다가 금새 식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다시 다른 부흥사를 따라 다니기 십상이다. 요즘 우리나라 기독교 전체의 신도수는 변함이 없는데 어느 교회는 부흥하고 어느 교회는 줄어든다는데 그 이유는 새로 교회에 등록하는 신도들이 대부분 타 교회에서 이전해오는 신도들이지 새로 입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느 교회 목사님 설교가 은혜롭다 하여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것이다. 부흥사를 통한 전도방식은 이처럼 신속히 교인 숫자가 늘어나고 부흥하는 듯이 보이지만 감정에 머물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이 청중 이상으로 양육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부흥강사를 모시고 매달 1백 명의 신도를 늘인다 하면 매년 1천 2백 명이 늘어나게 된다. 그들이 모두 교회에 남아 있다 해도 10년이면 1만 2천명이다.
그런데 제자양육훈련을 통해 매년 1명의 제자를 길러낸다 하면 그 제자는 다시 또 다른 제자를 양육하게 되어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된다. 제자훈련방식이 초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하다. 3년이면 8명 5년이면 32명 10년이면 1024명뿐이다. 그러나 길게 보면 양상이 다르다. 20년 동안 부흥사는 전도한 숫자가 2만4천명에 불과하지만 제자교육훈련 시스템에 의한 전도자 수는 1백만 명을 넘게 된다. 따라서 전도의 방법은 한 사람의 부흥사에 의존하기보다는 제자교육훈련시스템에 의한 전도방식이 수십 년의 장기적으로 볼 때는 훨씬 안정적이고 실제적이며 효과적임을 알 수 있다.
이공이나 이현필 모두 순결과 초월의 길을 추구했지만 이공의 초월 방식과 이현필의 초월 형식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시대적으로도 서로 달랐다. 이공은 일제 강점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고 이현필은 조국의 해방을 맞아 광주로 진출하여 활동하다가 6.25를 겪으며 살았다. 이공의 제자들은 성경공부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이현필은 함께 생활하며 사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이공은 학습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데 비하여 이현필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이공의 제자들은 각각 자기 집에서 생활하면서 공부할 때와 예배할 때만 함께 모였다. 그리고 각자의 형편 속에서 순결의 길 초월의 길을 가도록 지도하였다. 그러나 이현필의 공동체는 집을 떠나서 신앙 공동체로 함께 모여 살 것을 권했다. 공동체는 남녀가 서로 분리되어 부부라 해도 남자는 남반으로 여자는 여반으로 들어가 생활하여야 했다. 이현필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았으면 집을 떠나고 세상을 떠나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이공은 각자의 가정에서 식색을 끊고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물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가능하면 결혼하지 않고 살기를 바랐다. 그러나 각자 주어진 환경과 받은 은혜의 분량에 따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초월의 길도 여러 가지가 있다. 이공은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을 초월하는 길을 인정하고 굳지 생활공동체를 이루려고 하지 않은 것 같다. 그에 비하여 이현필은 세속을 초월하는 길은 공동체의 식구가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던 것 같다.
초월의 길, 또는 자유의 길은 시대마다 환경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럼 우리 시대에 초월의 길은 무엇이 바람직할까요?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자본의 힘이 곳곳에 침투하여 그 누구도 그 엄청난 힘에 거역하기 어려운 시대인 듯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본의 물신주의가 팽배해 있는 것 같다.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그만큼 돈의 위력이 강하다는 뜻이다. 돈만 있으면 하지 못 할 것이 없다는 믿음이 너무나 강하다. 어떻게 돈을 벌었던지 상관없이 돈만 많이 있으면 존경받고 재산을 많이 갖고만 있으면 무조건 우러러보는 세상이 대한민국이라 한다.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세상이 대한민국인 것 같다. 장관 후보들의 청문회를 하다보면 모두가 자격미달 아닌 사람이 없는 그런 부패한 사회가 되었다.
우리 모두 자본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정직하게 일하며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이현필의 공동체 방식은 젊은 남녀들이 결혼 하지 않고 각자 독신 수도공동체를 이루어 농사로 자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 바른 농법을 지키며 단순한 농업으로 자립하는 수도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다. 독신 공동체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츰 노령화 되어 오늘의 동광원에서 보듯이 쇠태하게 된다. 결혼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마을 공동체를 이루게 되면 고령화로 인한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지만 자녀 양육과 교육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그리고 오늘 젊은이들 대부분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농촌으로 이끌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물론 소수의 용감한 사람들은 어느 시대나 있겠지만 대부분이 참여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지구촌 운동을 희망해 보는 것이다.
앞으로 자본의 힘에 짓눌려 사는 소외된 삶을 벗어나 참되고 건강하게 사는 진실한 삶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일부 소수의 용감한 사람만 아니라 누구라도 공감하여 따를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거꾸로 되돌릴 수는 없다. 전근대적 생활방식으로 복귀하려는 복고운동은 뜻을 이루기 어렵다.
공동체의 정의는 무엇일까? 우선 규모면에서 보면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이루는 소공동체에서부터 가족공동체 교회공동체 집단공동체 사회공동체 나라공동체 인류공동체 지구생명공동체 온생명공동체 우주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를 말할 때면 교회의 본질과 연결하여 공동체를 생각한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제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예수는 말씀하시길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했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에클레시아, 즉 모임이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하나님의 주권이 지배하는 모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모인 사람들의 집회와 모임이 하나님의 교회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사람들과 거룩함으로 성화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 했다.(고전1:2) 바울은 또 교회를 만물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든 충만함의 충만함이라 했다.(엡1:22-23)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두 세 사람의 모임에서부터 우주적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그 범위가 무제한적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제도적 교회들, 즉 로마가톨릭의 교회나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의 교회 또는 작은 공동체들이나 수도원들이나 모두 하나의 현실적 교회의 모습들이다. 모두 각자 결함이 많지만 그 다양성은 인정해야 될 것이다. 나아가 목회자나 성직자가 없다고 하여 교회가 아닌 것도 아니고 건물이나 조직이 없다고 교회가 아닌 것도 아니라 하겠다. 에클레시아 즉 교회의 본질은 영과 진리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생각하며 열린 교회관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세종의 성경공부 모임도 교회요 이현필의 수도 공동체도 교회라 하겠다. 교회의 모습은 무수히 다양한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세종은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린 하나의 씨알로서 말씀 공동체를 이루었던 것이고 이현필은 광복된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 독신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자아가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초월적 진리로 나아가려는 신앙운동의 본질이 이현필이나 이세종이나 모두 같은 것이지만 그 구체적 방법과 현실적 태도는 달랐던 것이다. 이세종은 개인적 수양에 치중한 반면에 이현필은 사회적 변혁에 관심이 많았다. 개인적 수양과 공동체 운동, 이 둘은 시대에 따라 비중이 달라지겠지만 항상 같이 있어야 하고 또한 실상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둘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믿음과 삶이 둘이 될 수 는 없는 일이고 아는 것과 실천이 둘이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수양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공동체운동은 역사와 문화의 시대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그 방법과 형태의 다양성 때문에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교회 혹은 공동체의 모습을 다양하게 열어놓고 서로 인정하고 서로 교류하며 서로 배우고 서로 연합해야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공동체의 모습, 또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을 섣불리 제시하거나 자기 방식만 고집하기보다는 좀더 깊은 숙고와 열린 마음으로 교회관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예수의 제자 교육 훈련의 요소들을 찾아보며 이공의 영성을 생각하기로 한다.
5. 제자교육훈련 방법
제자교육훈련의 모본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다. 즉 스승이 없이는 제자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스승을 가질 때 우리는 제자가 된다. 각자 우리는 자기를 신앙인으로 이끌어주신 스승이 있을 것이다. 자기의 스승으로 목사님이나 장로님 등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이 될 수도 있고 또는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성인이나 믿음의 선진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스승은 성령님이요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스승 중의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그 제자교육의 본을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복음서를 읽어보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교육훈련의 과정과 특징을 살펴보고 그것을 7가지로 간추려 설명해 본다.
1) 성령의 임재와 도우심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먼저 성령께서 임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고 한다.(막1,9-11)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과 늘 함께 하시며 동행하신 것이다.
공동체 지도자가 되고 영적 스승이나 안내자가 되려면 우선 이처럼 성령을 구하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은총을 간구해야 된다.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영적 권위와 지혜가 주어지고 이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올바른 지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입장에서는 영적 안내자를 만나서 함께 성령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이미 성령이 충만한 영적 안내자와 함께 기도할 때 보다 손쉽게 성령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무엇보다 성령을 구하라고 하셨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시다. 태초부터 말씀이 성령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이 곧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곧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나니 성령에서 비롯하여 성령으로 마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리스도를 알 수도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분이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임하시고 진리로 임하셔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영으로 알고 믿음의 은총에 들어가 살도록 인도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부활의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임하실 때만이 예수가 참으로 그리스도임을 알고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는 법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서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1-22)
이세종선생은 하나님의 성령과 은총에 대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육신으로는 예수님의 형상을 볼 수 없다. 다만 성령의 조명하시는 빛이 내 안에 비칠 때에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세도 하나님을 그대로 보았다가는 자신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므로 다만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고 성경에 말했다.”
이세종선생이 언제나 강조한 것은,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믿고 성령 받는 것이 목적이다. 성령을 못 받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기차 타는 사람이 차표가 있어야 하듯, 성령을 받아야 천국을 간다.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만 되면 성령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더러운 짓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정욕을 끊어야 성령을 받기 때문에 성령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 한다.”
이렇게 신앙인은 누구나 성령을 구할 것을 강조하며 가르쳤다.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전하겠는가.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임하여 함께 하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도 계속해서 성령이 충만 된 상태가 지속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기 안에 사욕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신다.(막14:38) 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다.(살전 5:17)
이세종은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세 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첫째,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것은 누구나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불신자나 살인자라도 감동은 받는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고 했다.
둘째는 성령을 보통으로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해야 받는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함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달렸다. 성령을 보통으로 받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이다. 이때는 성령께서 들어갔다 나왔다 한다.
셋째는 성령을 충만히 받는 일이다. 이것은 그릇에 물을 가득히 담으면 넘쳐흐르는 듯 한 것인데, 이것이 성령을 완전하게 받는 일이다. 회개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완전하게 받으면 그 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제3위로서, 그 본체는 하나이시지만 역사하실 때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1) 바람(사도행전 2:2) : 흔적이 없고 볼 수가 없다.
(2) 혀(사도행전 2:3, 사사기 6:21, 13:20) : 말씀을 잘한다.
(3) 불(열왕기상 15:38, 사사기 13:20) : 열, 따뜻하고 온화하다
(4) 비둘기(마태복음 3:13) : 순결하고 온유하다.
(5) 물(요한복음 3:3) : 시원하고 깨끗한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6) 칼(여호수아 5:13-15) : 옳고 그름을 날카롭게 분별한다.
(7) 화살(열왕기하 13:17) : 곧음, 정직, 주님의 뜻에 적중함이다.
(8) 비 (시편 68 : 9-10) : 축복하고 충만케 한다. 생기를 준다.
(9) 기름 ( 요일 2;27) : 부르시고 택하시며 축복하신다.
(10) 이슬 (호 14: 4-9) : 순결하고 정결의 상징, 맑은 기운을 주고 소생케 한다.
“참 믿는 사람에게 있어선 성령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이다. 그리고 한 역사 안에 있는 것이다.” 라고 이세종은 가르쳤다. 그러면서 그는 강조하기를, 말세에는 성령을 구하려면 “칼날 같은 성령”과 “불같은 성령”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칼 같은 성령은 참과 거짓을 분간하고 분별하는 은혜요, 불같은 성령은 모든 불순한 것을 태워 버리고 사랑의 뜨거운 은혜를 받는 일이라고 했다. 성령의 여러 역사를 잘 분별하여 말세에는 이 두 가지 은사를 구하라고 말했다.
성령 받기를 사모하는 일에 관하여 이세종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고 한다.
“구약에 엘리사를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니며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하나이다.’ 한 것처럼, 아직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고 또 잘 깨닫지 못하겠으면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만 따라가라. 나는 그를 따르고, 그는 그리스도를 따를 것이다. 인간이란 영과 육이 합한 동물이니 영의 인도뿐만 아니라 능력 있는 사람의 지도도 필요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을 주실 때, 베드로나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도 주셨던 것이니(행 8:15-17, 10:44, 11:24, 19:2-6), 잘 믿고 성령 충만한 사람과 동행하는 일이 필요하다.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의 발자국을 밟아가노라면, 나도 그를 닮아 그와 같이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믿으려는 이는 잘 믿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야 한다. 어디로 가든지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과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과 사귀고 그 속에서 듣고 배우노라면, 나 자신도 억지로라도 그처럼 되어간다. 그러나 얼마 동안 은혜 가운데 살다가도 죄가 들어가게 되면 그동안 듣고 배운 것도 빼앗겨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생이나 선배를 존경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제자도를 전하며 제자교육훈련의 길을 지도하는 지도자, 또는 안내자는 스스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동시에 믿음의 선배나 스승을 모시고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즉 선생이 되는 길은 선생을 가지고 스스로 제자가 되고 동시에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승의 제자이면서 남의 스승이 되는 것이 참 스승이 되는 길이다.
스승의 스승이 또한 성령이다. 그래서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구해야 되고 또한 성령과 동행하면서 걸어가는 앞선 스승을 모시고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야 된다. 제자도가 결국 스승이 되는 길이다. 예수님도 스스로 세례 요한에게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배웠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리만큼 겸손하시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셨을 것이라 여겨진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땅에서는 세례 요한을 세상의 스승으로 모시고 걸어가셨던 예수님이라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한 사람의 아들이라 하신 예수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자, 사람의 아들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자, 모든 사람을 자기의 스승으로 섬길 만큼 낮은 자리에 서는 겸손한 자가 아닐까. 그래서 동시에 또한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게 아닐까.
이상에서와 같이 성령을 구하는 일은 제자교육훈련을 준비하는 사람들, 즉 훈련의 지도자나 영적 안내자로서 준비하는 일이든 또는 훈련을 받는 자로서 준비하는 일이든 모두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다. 우리에게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라’(고전4:15)는 말씀처럼 우리의 참 스승은 그리스도의 영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늘 빈 마음으로,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을 모시고 제자교육훈련에 임해야 한다. 이것이 안내자 또는 지도자이거나 훈련생이거나 모두에게 꼭 필요한 최우선적 덕목이 된다.
2) 신앙인의 기본 입장
성령의 은총 안에서 신앙인으로 사는 인생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엇일까. 우선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믿음의 반석을 얻어야 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우선 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야 되는지 그 길을 알려주신다. 진리에 대하여, 의의 길에 대하여, 죄와 심판에 대하여 알려주신다. 진리란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아버지의 말씀을 아는 일은 아버지를 아는 일이요 아버지의 뜻을 아는 일이요 그것은 또한 곧 나를 아는 일이 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6:28-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4:3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요14:10)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하셨다. 나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의의 길은 아버지께로 올라감이다. 인생이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그래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영광을 바치는 길이다.
아버지의 영을 받아서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셨다.(눅4:1) 광야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믿음의 반석을 확고히 다짐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입장에 서서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뜻, 자기의 사명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마음이 거룩하고 깨끗한 성령으로 점유될 때 삿되고 거짓된 악의 영이 쫓겨난다. 거짓된 악의 영이 쫓겨났다고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탄은 늘 내 가까이 도사리고 있으며 굶주린 사자처럼 빈틈을 노리며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내 가장 깊은 곳에 숨어서 언제든지 나타나려 한다. 나에게 조그만 빈틈이라도 없는지 밤낮없이 살피며 어느 때고 침입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짐승이나 괴물처럼 무서운 모습으로 위협하거나 또는 천사처럼 가장하며 유혹하고 속인다. 빛의 천사처럼 가장하는 것이 사탄이다.(고후11:14)
사탄이 무엇인가. 알고 보면 사탄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다. 물은 본래 깨끗한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보면 오염된 물이 되기 쉽다. 순수하고 깨끗한 생명수에 무엇인가 끼어들어 오염이 되면 생명수가 아니라 마실 수 없는 더러운 물이 된다. 이처럼 우리의 영은 본래가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다. 그런데 정과 욕이라는 삿된 것에 오염이 되면 더러운 영이 되고 만다. 순수하고 밝은 영이라야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된다. 그렇지 못하고 더러운 영이 되면 사탄이 된다. 속이고 빼앗고 죽이는 영이 사탄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의 어버지다.(요8:44) 사람은 사탄이 될 수도 있고 천사가 될 수도 있다. 삿된 것에 오염이 되어 그리스도의 영이 떠나면 사탄이 된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서 본래의 순수하고 밝은 영을 되찾아가는 길이다. 그 믿음의 길은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다. 치우치고 미끄러지는 순간 죄악에 빠지는 것이다. 그 좁고 협착한 믿음의 길을 가는 동안에 온갖 유혹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유혹자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으로 변장한 거짓된 나라는 것이다. 참 나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은혜이다.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짓 자아로 나타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도 언제 다시 거짓 자아로 나타난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에 넘어갈지 모른다. 거짓 자아로 나타난다 했지만 참이 아니고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가 어렵다. 언제나 참 나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총을 구하는 것이다. 성령의 은총이 없이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령의 지혜로 사탄의 유혹을 꿰뚫어보는 눈을 가지고 늘 쉬지 말고 끊임없이 깨어서 기도해야 된다. 깨어 기도하라.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한 내용이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밤낮 쉬지 않고 심장이 움직여 피를 돌려야 하고 계속 숨을 쉬면서 호흡을 계속해야 된다. 우리 기도는 호흡처럼 쉬지 않아야 되고 우리의 정신은 심장처럼 늘 깨어있어 새로운 진리의 피를 돌려야 된다. 성령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자기 정체성의 확인과 기도훈련을 위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신 거처럼 우리를 또한 세상의 광야로 이끌고 가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자기가 누구이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묻고 또 물었다. 또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기고 되새기며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뜻을 물었다. 그렇게 기도에 몰두하다 40주야를 보내게 되었다. 기도에 몰두하느라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도 몰랐다. 세월도 잊고 먹는 것도 잊고 그저 아버지만 바라보며 기도에 몰두한 것이다. 문제는 다만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을 어떻게 좇아서 살아야 되는가, 그것이 문제였다. 이때 사탄이 찾아와서 물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여라.”(마4:3)
사탄이 질문한 의도는 무엇일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고 자기의 사명에 대하여 혼란을 주자는 것이다. 날마다 먹을 것을 위해서 밤낮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사는 가난한 동포들, 로마의 권력에 수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짓눌려 사는 불쌍한 겨레들, 이들을 위해서 사막에 널려 있는 돌들이 떡덩이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사람들의 분열과 다툼의 절반은 먹는 문제 때문이 아닌가. 모두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먹는 문제가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런 경제문제 정치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당신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 아닌가. 평화를 위해서 경제적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능력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척 그럴듯하고 솔깃한 유혹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많은 영웅들이 나와서 인민들을 배고프지 않게 모두가 다 같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잘 살 수 있게 하겠노라 큰소리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 어떤 영웅도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잘 살게 해 주지도 못했고 평화롭게 만들지도 못했다. 모두 거짓 선지자요 악한 독재자들일뿐이었다.
인생에서 빵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빵을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이유가 없다. 인간이 없는 자연 상태는 생태적으로 모두의 먹는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밀림의 정글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동물의 세계이지만 인간이 개입되지 않는 한 생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다양한 생물 종들이 함께 모여 균형과 조화의 자연의 상태를 이루고 산다.
그러나 인생은 자연과 다른 그 무엇이다. 인생은 자연을 넘어 더 높은 세계를 살아야 된다. 인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진리와 자유의 세계를 살아야 된다. 그것은 빵을 해결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자연이면서 자연을 넘어선 인생을 살아야 된다. 그래서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면 인간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 되지 못하면 동물의 자연 상태만도 못하게 된다.
사탄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부추기며 예수를 유혹 했다. 인간의 현실적 욕구는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것들이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을 모르면 사탄의 유혹에 빠지게 되어 있다. 사탄의 본질은 거짓이다. 속이고 빼앗고 죽이는 것이 사탄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허구를 진실로 속이고 정신을 빼앗아 생명을 죽이는 것이 사탄이다.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살펴서 조심해야 된다.(갈6:1)
예수님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이런 사탄의 유혹을 몸소 체험하시고 악의 본질이 거짓임을 뚜렷이 밝혀주셨다. 인간이라면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정신이란 나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를 말한다. 나 자신은 그 무엇이 아니다. 어떤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능력자나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 곧 나 자신은 아니다. 나는 나라는 것을 넘어선 것, 나 아닌 것이 나다. 나는 볼 수 있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고 알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진리의 나요 영원한 생명의 나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의 정신, 그것을 잃으면 주체성을 잃게 된다. 즉 자기의 주체성을 잃으면 정신이 나가게 된다.
나 자신의 형상을 어디서 보는가. 아버지에게서 본다. 아버지를 보는 자가 나를 보는 것이요 나를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10:30)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6:46)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요14:9) 동양에서는 이런 자각을 오도송이라는 시로 표현한다. 소강절의 시가 유명하다.
월도천심처月到天心處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 요득소인지料得少人知
(밝은 보름달이 하늘 복판에 이르렀으니 시원한 바람이 수면 위로 불어오는구나.
어디서나 깨끗하고 맑은 이 깊은 맛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
이같은 주체적 자각과 천지만물과 하나 되는 공동체적 깬 정신으로 사는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일어선 실존이요 성령과 함께 하는 생명의 창조적 약동이다. 참 자기가 되어 자기 사명을 자각한 사람은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관계 속에서 깬 정신이 되어 전체의 공동체적인 주체성을 갖고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일을 이루며 산다.(요 17:4)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믿음이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창조의 주체성이 되어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주 만물을 벗어난 빈탕의 허공 한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중심을 잡고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의 정신을 일깨워야 된다. 이같은 전일적 주체성과 살아있는 지혜, 즉 흔들리지 않는 진리의 중심을 잡고 영원히 자기의 궤도를 돌고 있는 천체의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입장이 무엇인지 밝히 알려주신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한 나신 아들이 나의 본 모습이다. 이런 정체성을 뚜렷이 가질 때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기의 입장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즉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입장을 갖게 되는 것이다.(요 14:6) 이런 입장이 믿음의 반석이다. 믿음의 반석에서 세상의 정욕과 사탄의 유혹을 끊고 시비와 선악과 미추를 넘어 영원한 진리의 바다에서 지혜의 파도를 일으키며 뭇 생명을 길러내는 것이다.
입장이란 철학적으로 말하여 인생관을 가지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계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자각하고 우주관을 가지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아니하고 어디에도 붙잡히지 않는 독립과 평등과 자유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이런 인생에 관한 기본적인 입장과 태도를 확실히 정하는 기간이 적막하고 고요한 사막에 들어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기도하며 성찰하며 묵상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세종은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였다. 지난날의 잘못된 태도를 반성하고 빚진자를 불러 탕감해주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리고 개천산에 올라가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성경을 들고 산에 올라가면 세월이 가는 줄 몰랐다 한다. 산골짝에 겨울의 잔설이 남아있는 초봄에 올라가서 성경에 몰두하다 내려오면 벌써 보리 이삭이 누렇게 익어있는 것을 보고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말씀에 몰두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마음을 닮고자 기도하였다.
이공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살기를 구하였다. 즉 이세종은 오직 예수님의 마음으로 진리를 따라 살기를 구하였다. 그래서 명예나 칭찬은 마귀의 대접으로 알고 똥처럼 피하였다. 칭찬으로 남이 자기를 높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다. 칭찬을 받고 조금이라도 자고한 마음이 들까 염려하고 두려웠다. 티끌만큼이라도 깨끗한 마음에 오염이 있어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교만해질까봐 상에서 음식을 먹는 것도 거절하셨다. 도움을 받은 이들이 감사의 사례라도 하면 “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저에게 감사하다고 하시오? 저를 시험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였다. 걸인에게 무엇이라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시오” 하고 가르쳤다.
또한 세상의 명리를 뜬구름처럼 생각하고 어디를 가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셨다. 꽃 한 송이를 볼 때도 탐을 내서 좇아가면 허방에 빠져 넘어지거나 다리가 부러질 것으로 생각했다. 남에게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얻는 것보다 주는 것이 즐겁다고 하셨다. 이공이 말하길 “이 몸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잠자리에서 차마 이불도 제대로 덮을 수 없고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자비와 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이 되었다. 산길을 가다가도 칡넝쿨이라도 밟을까 조심하여 거둬주면서 걸었고 우거진 초목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살생을 금하여 해충이나 동물들도 죽이지 않았고 잡초마저 뽑지 못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안빈낙도를 가르쳤다. 안빈낙도를 실천하는 제자 안회를 극구 칭찬하였다. “안회야말로 현자로구나. 하루 한번 도시락밥에 한 잔의 물로 배를 채우며 누추한 곳에 사는 안회여. 다른 사람 같으면 도저히 그 가난의 고통을 감당 못하고 뜻을 굽히고 말 터인데 그이는 흔들림 없이 진리의 길을 가며 즐거워하고 있으니 그이야말로 현자로구나.” 공자는 또한 자신의 삶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친 나물밥에 냉수 마시고 팔베개로 잠을 자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구나. 의롭지 못하고서 부귀함은 나에게 뜬 구름 같은 것이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차 한 잔도 못 마시고 냉수로 사는 가난한 처지요, 베개도 없어 팔을 굽혀 잠을 자야 하는 구차한 신세이지만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여기에 진정한 행복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이공도 평생 좋은 음식을 먹어보지도 않았고 먹으려 하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거친 음식을 먹고 그것도 배불리 먹어보지도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할 때 어떻게 좋은 음식이 들어가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음식 먹는 모양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간혹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여 공동으로 식사하게 되는 경우에도 이공은 무슨 핑계로든지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번은 광주의 노나복 선교사도 함께 앉은 음식 자리에서, 선교사의 서기로 있던 백전도사가 이공이 또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는 호기심이 나서 몰래 뒤쫓아 가서 무엇을 먹는지 보았다고 한다. 이공이 자기 방에 혼자 들어가서 먹는 것을 보고 “뭘 잡수시는지 어디 좀 봅시다.” 했더니, 이공은 쑥을 뜯어 만든 쑥버무리를 먹고 있었다. 백전도사는 그것을 입에 넣어 먹어 보았으나 도저히 맛이 없어서 먹을 수 없었다. 이공의 주식은 쑥을 찌어 만든 쑥버무리였던 모양이었다. 자기가 먹는 음식이 그런 것이어서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숨어서 먹은 것이다.
이공은 아무리 남들이 꺼리는 환자라도 추하고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의 악한 마음이 더 추한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악수하고 반가운듯하지만 속에는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것을 보고 한탄하셨다. 그는 오직 정직하고 진실하기만을 빌었다. 속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였고 언제나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정직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속을 숨기지 않았다.
다석 유영모는 말하길 ‘가죽을 몸, 속을 맘’이라 했다. 몸은 겉이요 마음은 속이다. 그런데 겉가죽에 불과한 몸은 가서는 결국 죽을 것이다. 그리고 속은 마음이라 하는데 속이고 속는 것이 마음이다. 언젠가 가서 죽을 몸이니 몸이라는 겉치장에 힘쓰지 말고 속을 살리자는 것이다. 속을 알차게 살려서 속알이 커져야 된다. 속알을 키우려면 속이지 않을 만큼 정직해야 되고 속지 않을 만큼 지혜로워야 된다.
이공은 정말 남을 속일 줄 몰랐다. 그는 말했다. “내가 주는 밥은 죄가 안 될 것이니 받아 잡수시오.” 이공 자신은 겉으로 주면서 속으로 아까워한다거나 미워하는 일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안심하고 먹으라는 것이다. 남은 물론이고 자기를 속이는 것 없이 늘 안과 밖이 전혀 다름이 없는 정직함이 그에게는 기쁨이요 즐거움이었다.
정직과 진실을 지키고 자기 속을 다스리기를 힘썼던 이공이다. 하루는 외출하면서 평소와 같이 주머니에 구제 헌금을 준비하고 길을 떠났다. 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앞에서 걸어오는 남루한 차림의 거지를 만나게 되었다. 옳다 이 사람에게 갖고 나온 돈을 줘야겠구나. 그런데 얼마를 줄까.
여느 때 같으면 가진 돈을 나눠서 여러 거지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지들을 만날 수 있으니 고루 나눠주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런 자신이 속이 좁게 느껴졌다. 가진 돈을 남겨서 조금 주는 것보다 지금 가진 것을 다 줘야 마음이 시원할 것 같았다. 다른 거지를 만날 것을 대비하여 남겨둔다는 것도 어쩌면 내가 나의 인색함을 속이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스치는 동안 거지가 다가왔다. 그러자 그만 가진 돈을 다 꺼내어 그 거지에게 주고 말았다. 상당히 큰돈이었다.
그런데 그 거지는 당연히 받을 것을 받은 것처럼 돈을 받고는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자 이세종의 마음속에서 ‘이런 괘씸한 놈이 있나, 그 돈이면 구걸하지 않고도 한 달은 넉넉히 살 수 있을 터인데, 어찌 감사하다는 한 마디 없이 그렇게 그냥 갈 수 있는가.’ 하는 비난과 섭섭한 감정이 일어났다.
그 순간 그와 동시에 또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나는 없다 하고 이름마저 이공으로 바꾸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직도 나 영찬이는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니. 주님 저는 아직도 이처럼 부끄러운 죄인입니다.’ 이런 회개가 일어났다. 영찬이란 이름은 어렸을 적 이름이었다. 이공은 이날 다시 큰 결심을 하고 산으로 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자아를 부정하고 오직 주님의 마음만으로 살기를 기원하며 기도했다.
이공은 남이 나를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하며 해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해치는 것은 남이 나를 해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의 거짓이 나를 해치는 원수다. 그러므로 남을 조심하기보다는 자기를 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활을 쏘아 과녁이 맞지 않으면 화살을 탓하기 전에 자기를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는 활을 잘 쏘았는데 화살이 잘 못 날아갔다고 아무리 그래봐야 과녁이 맞을 리 없지 않는가. 남이 나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치려 한다고 내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문제는 자기 속에 진실성이 없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나를 해롭게 하는 원수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에 삶의 터를 잡고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인격의 집을 지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에 믿음의 집을 짓는 자기 입장이 확실해야 된다. 인생을 사는 기본 원리는 이처럼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좇아서 진리를 위하여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진리와의 일치를 구하는 사랑이다.(고전13:13)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요17:17) 아버지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 예수의 마음을 구하여 얻는 참 길이다.
3) 복음 선포와 공동체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겨내신 다음에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셨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은 네 마디이다. 앞의 두 마디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뒤의 두 마디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 하고 제자들을 부르셨다.
따르던 제자들이 물었다. “스승님 어디에 머무르고 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요1: 35-39)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기쁜 소식을 말한다. 무엇이 기쁜 소식인가. 해방의 소식이요 통일의 이룸이요 독립과 자유의 소리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절망과 미망의 그물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사랑과 자유의 나라로 초대하신다는 소식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포로 된 자를 풀어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여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라.(눅4:18-19)
예수의 복음은 무엇인가. 노예로 살던 사람을 풀어주고 눈이 먼 사람에게 다시 볼 수 있게 해주고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죄악의 노예가 되어 분열과 미혹과 무지의 편견으로 진리를 보지 못하고 고통과 절망과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사는 인생에게 죄에서 풀려나는 참 빛을 보게 하여 사랑과 기쁨의 생명을 회복시켜주는 것이 복음이다. 지옥의 고통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을 구원하여 기쁨과 평화의 천국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은혜의 시대,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밝고 따뜻한 봄이 되었으니 이제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서 밝은 세상으로 나와 기쁨과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다.
우리는 동양인이요 한국인이라 서양의 기독교 전통에서 이어온 죄인이라는 말을 이해하고 수용하기 어렵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인가? 그런데 기독교에서 죄인이란 무슨 죄를 범했다는 사실만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죄라고 한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이성과 과학적 기술로 확인할 수 없는 신이란 존재는 심리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의 상상적 허구에 불과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질과 에너지뿐이다.”
이처럼 유물론과 과학적 합리주의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만 생명의 신비, 나아가 인간의 의식현상에 대하여 과학적 탐구나 합리적 설명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또한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필멸의 존재로서 겪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대답도 과학이나 철학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은 과학과 철학을 넘어 종교라는 영성의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종교와 자기초월적 형이상의 세계, 영성의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현대인들을 초대하고 어떻게 알려줄 수 있을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충만 된 세계, 자기초월적 능력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자각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득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서 ‘우리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그들을 초대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공동체는 소수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소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정체성에 맞도록 알맞은 사람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단합하여 단단한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실 때 선택과 집중의 방법으로 하셨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을 불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세상 떠날 때가지 함께 사시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많은 제자들이 따랐지만 특별히 12제자를 택하시고 그 가운데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특별히 아끼신 듯하다.
예수님은 그 세 사람의 제자들만 택하여 특별한 경험들을 공유하셨다. 변화 산의 체험(마 17:1)과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막 5:37)에도 함께 하셨고 또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실 때도(마 26:37)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가셨다. 이렇게 선택과 집중 훈련이 제자교육훈련의 한 방법인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 10여명 내외의 소공동체를 이루고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소공동체 활동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함께 있겠다.”(마18:20)고 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작은 모임이 소공동체라 하겠다. 초대교회 모습을 전하는 바울 서신을 보면 소공동체들이 가정집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었다. 가정집에 모이는 가정교회가 소공동체요 작은 교회라 하겠다. 예수님께서도 12제자들과 함께 소공동체를 이루고 집을 방문하면서 말씀을 전하셨다. 우리도 이와 같이 10명 내외의 성도들이 함께 모여 소공동체를 이루고 각 가정을 돌며 말씀과 기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데서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소공동체는 어느 목회자나 지도자가 이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이끄시는 교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 즉 모든 구성원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평등하고 자유롭게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친교를 나누는 모임이다. 이런 친교 모임에는 남녀노소 구별이 없이,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이나 지향이 분명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소공동체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생활공동체, 직장공동체, 교육훈련 공동체, 조합공동체, 지역공동체, 가족공동체, 마을공동체 등 상황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다. 교육훈련공동체는 주기적인 만남이 될 수도 있고 일정기간 함께 생활하고 노동하는 생활공동체가 될 수도 있고 일정한 지역에 함께 거주하는 마을 공동체로 형성될 수도 있다.
일단 교육훈련공동체가 형성되면 구성원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거처를 방문하고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며 함께 복음의 말씀을 나누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일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모임을 가질 때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나눔으로써 각자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응답을 받는 은혜가 충만토록 하여야 한다.
소공동체의 작은 교회는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말씀을 나누고 섬기며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는 살아계신 주님의 몸이요 하나님의 교회이다. 공동체 안에 현존해 계시고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소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각자 믿음의 성숙을 이루게 되고 또한 자기의 달란트를 발휘하여 봉사와 섬김과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큰 기쁨과 은총을 누리게 된다.
소공동체 모임에서 여러 활동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경공부요, 둘째는 기도훈련이요, 셋째는 코이노니아의 친교와 노동을 포함한 봉사활동이다.
성경을 공부하는 일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며 동력을 얻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성경공부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나 지도자가 성경을 읽고 그 본문이 알려주는 일반 메시지, 주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성경을 미리 공부해서 그 본문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역사적 신학적 내용이나 의미를 풀이하고 설명하여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이 주로 이뤄지며 거기에 더하여 이 시대 우리에게 적용되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각자가 삶에 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대부분 일요일 교회에서 대중 설교를 통하여 이뤄지는 말씀 선포의 방식이다.
또 다른 성경 공부의 방법은 각자에게 성경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본문을 통하여 지금 각자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 또는 훈련 중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성경을 읽고 함께 읽은 그 성경 본문을 통하여 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다. 즉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인격적 만남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또한 은혜 나누기를 통하여 이런 체험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이런 후자의 방식은 소공동체에서만 가능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이런 방법을 통하여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총을 누릴 수 있고 각자 신앙이 성숙되어 주체로서 제자의 길을 따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성경을 보고 본문 말씀을 통하여 늘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성숙되고 깊은 신앙인이 되면 별도의 소공동체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공동체 구성원이 전파자가 되어 또 다른 소공동체가 형성됨으로써 자꾸 번식이 이뤄진다. 이런 방식이 말하자면 진정한 주체로 참여하는 제자교육훈련이요 이를 통하여 스승과 제자가 평등한 관계에서 상호 발전하게 되고 또한 독립적 유대와 연대로 협력하게 된다. 유대란 모체가 되는 공동체 내에서 사제로서의 친밀관계요 연대는 각기 독립된 소공동체 지도자로서 친구요 동지관계이다. 제자교육훈련의 이런 조직과 관계를 유대-연대 방식, 줄여서 ‘유연방식’이라는 명칭으로 불러보면 어떨까.
이런 ‘유연방식’ 소공동체 운동의 장점을 살펴보면 우선 신자들의 자발적 능동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형교회의 부흥강사 방식의 설교를 위주로 하는 복음 선포는 교인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를 조장하기 쉽다. 어미가 가져다주는 먹이만 받아먹는 새끼처럼 계속 수동적인 유아상태에 머물며 안주한다. 그러나 유연방식 소공동체 제자교육훈련은 물고기를 잡아다 먹여주는 방식을 지양하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전수하는데 더욱 노력한다. 그래서 스스로 성경을 보고 스스로 기도하며 직접 성령의 은총을 경험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능력을 길러가는 것이다.
이세종 선생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성령께서 말씀을 깨우쳐주시고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을 열어주셨다. 이세종은 밤이면 성경을 암송하고, 낮에는 인근 마을의 처녀총각들을 모아놓고 성경공부를 시켰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는 말로 그들을 격려했다. “예수를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선 안 된다.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성경공부반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지만 이현필이 가장 잘 알아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가 성경을 공부할 때 남들이 엿들어보면, 그는 혼잣말로 자문자답하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까?” “예”하고 그랬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이공은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공이 말씀을 전할 때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듣고자 하는 사람만 있으면 밤이고 낮이고 구별이 없었다. 성경을 공부하고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는 음식이 들어와도 중단하지 않았다. “식사는 나중이고 공사부터 먼저 하자.” 하면서 끝마칠 때까지 계속했다. 먹는 것은 사사로운 일이요 공부는 공적인 일이니 사보다는 공을 앞세워야 된다는 것이다. 이공의 고백하길 “성령이 임하면 몸도 새 몸이요, 눈도 새 눈이요, 모든 지체가 새로워진다.”고 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성경을 보면서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피곤하거나 지치지도 않는다 했다.
성경을 읽는 방법에 관하여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읽은 방법이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성경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과 마음을 느껴보는 것이다.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서나 묵상을 위해서나 주의 깊게 자세히 읽어야 된다. 단어나 문구, 또는 용어를 주의해서 읽어보고 모르는 단어나 용어에 관해 사전을 찾아본다.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나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성서학자들의 역사비평 또는 문헌비평 연구 결과들이 반영되어 많은 성서 주석서 또는 성서강해들이 나와 있다. 따라서 성서강해들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성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성서 연구만으로는 믿음이 성숙되는 성화의 과정으로 인도하기 어렵다. 성서는 객관적 연구 대상만이 아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어있는 책이다. 내가 누구이며 왜 내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장차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 내 인생의 근원과 의미와 궁극 목적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존재론적 깊이에서 회개가 일어나 인격적 변화를 이루며 새로운 제자도의 길을 가는 결단과 실천으로 이끄는 성령의 능력에 접하게 한다.
나는 보이는 육체와 보이지 않는 영체로 이뤄진 영적 존재이다. 육체의 나는 잠시 있다가 사라지겠지만 영체는 없이 있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런 영체가 나의 본모습이지 육체의 나는 진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나의 본 모습을 볼 수 있게 하시고 본 모습을 회복하여 장차 부활의 영체로서 사는 생명의 비밀이 성경에 들어있다.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내가 나로서 참되게 사는 그런 비결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묵상방법이 도움이 된다.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의 수단으로 읽는 것이다. 이것은 혼자서 할 수도 있고 소그룹이 모여서 할 수도 있다. 소그룹에서 권하는 묵상기도의 방법은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로 알려진 말씀묵상이다.
이공이나 이현필은 모두 렉시오 디비나로 알려진 특별한 말씀묵상 훈련을 받음 적은 없지만 저절로 말씀묵상을 실천한 듯하다. 날마다 성경을 읽고 한 말씀이라도 가슴에 다가오면 그것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성령의 은총으로 그 말씀이 자기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깨우침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이런 실천력을 얻는 것이 성경공부와 말씀 묵상의 목적이다. 그래서 이공의 유명한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옅게 파면 네가 죽는다.’는 말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성경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우물을 팔 때 샘물이 나올 때까지 파고들어가야 되듯이 성경말씀을 파고들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고 실천할 힘을 얻을 때까지 말씀에 집중하고 몰두해야 된다는 것이다. 말씀 묵상의 핵심도 또한 이것이라 하겠다.
5) 기도와 경건훈련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9-13)
예수님은 날마다 기도하시고 때를 정하여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다.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다. 매순간 숨을 쉬듯 우리의 기도 또한 끊어질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이 기도요 그래서 기도는 우리에게 생명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태아가 발생하는 과정처럼 맨 처음에 어머니와 관계가 실 날처럼 가는 맥박으로 시작하여 점차 뚜렷한 탯줄로 이어지듯 그 관계가 발전한다. 기도는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가면 저절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길러주시는 은혜라 하겠다. 그래서 기도는 내 힘으로 기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생명운동이다. 이런 은혜에 그저 잠겨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내 맡기는 수동적 기도를 신비신학에서는 주부적관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차츰 스스로 자라서 말을 배우게 된다. 어머니의 말을 통해 말을 배우고 차츰 어머니와 말이 통하게 된다. 이런 언어습득 과정과 기도 훈련이 또한 유사한 것이라 하겠다. 말을 통하여 어머니의 뜻을 알아듣게 되고 말을 통하여 어린이는 자기의 욕구를 전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기도는 이처럼 말을 통하여 대화가 이뤄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이런 기도라고 하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길 ‘너희는 남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곳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기도문이라고 알려진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은 그저 뜻도 모르면서 중얼중얼 주문처럼 외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되는지 알려주신 글이다. 이 기도문에는 온 우주와 세상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다 들어있다. 우리 인생이 갖는 어떤 문제든지 아버지 앞에 풀어놓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원리가 주기도문에 들어있다. 그 핵심과 원리와 방법을 적용하여 기도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이 기도훈련이다.
기도는 장소에 따라 광야기도, 산중 기도, 골방기도, 회중기도 등이 있을 수 있고, 자세에 따라 서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기도 하고 무릎을 굴하고 앉아서, 또는 편하게 앉아서 기도하기도 하고, 혹은 엎드리거나 누워서도 기도할 수도 있다. 장소와 자세는 상황과 형편에 맞춰 알맞게 택할 것이다. 기도의 습관을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훈련에는 먼저 매일 기도하는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훈련을 가져야 한다. 이는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스스로의 노력과 훈련으로 가능하다. 훈련기간 매일 점검하는 표를 만들어 습관을 길들이도록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핵심과 그 원리 및 방법에 관해서는 별도의 교육 자료를 준비하여 주기적이고 집중적인 교육 및 훈련이 필요하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십계명이 이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주기도문이 된 것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두 가지이다. 기도에 대한 별도의 교육은 성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교육,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원리 및 방법을 가지고 하는 여러 기도의 방법들이 소개될 것이다. 즉 성찰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향심기도 등의 현대적 기도방법들을 소개하고 훈련하여 제자도의 교육훈련에 사용될 수 있다.
성찰기도는 일상의 삶 안에서 나의 모습과 형편을 살펴보고 나의 의식의 흐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묵상기도는 마음에 남는 인상적인 사건이나 잊어지지 않는 사건, 또는 성서의 사건을 곰곰 되새기며 하나님을 만나고 그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성찰 반성 회개 위로 치유 결단 격려 등을 겪는 과정이다. 관상 기도는 묵상 기도 후에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나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깊이 잠겨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듯이 그 뜻이 더욱 뚜렷해지고 분명해지고 깊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지금 이 순간에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안에서 활동하심을 믿고 나 자신을 사랑이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개방하고 온전히 맡기는 훈련이다. 그리하여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만나 우주적 주체로 거듭나는 기도이다. 이 모든 기도는 사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한 마디에 다 들어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는 숨질 때 마지막 한 마디로 ‘아바디’라 했다.
이공 이세종과 이현필은 혼자 산에 들어가 기도하기를 좋아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면 이현필이나 이세종은 산으로 들어가 몇 달이고 하루 한 끼를 먹는 둥 마는 둥하면서 기도했다. 이공 자신을 자주 금식을 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무엇이나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하거나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산에 들어가 기도하던 이공의 본을 받아 이현필도 화학산과 지리산에서 홀로 기도했다. 그래서 이현필은 제자들을 훈련할 때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지내며 기도하게 하였다. 김금남도 갈보리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이현필의 지도에 따라 화순 도구박골 산에 들어가 홀로 지내면서 몇 달씩 기도를 했다. 김준호도 마찬가지로 훈련을 받았다. 금식과 산중기도훈련이 초창기 이공과 이현필 선생의 훈련 방식이었다.
현재 90세가 되신 동광원의 김금남 원장(1928~)이 이현필을 처음 만난 때가 18세였다고 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기도하던 중에 ‘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이 되라.’는 말씀을 듣고 수도생활을 결심했다. 그래서 이현필 선생을 따라서 지리산 갈보리에서 화순 화학산 자락에 있는 도구박골로 맨발로 걸어갔다. 누군가 수양을 위해 지었다는 빈 움막이 있었다. 이 움막에서 지내라 하고 전도여행을 떠난 선생님 말씀을 따라 김금남은 거기서 거의 1년여를 홀로 기거하며 회개와 기도로 훈련했다. 김금남은 홀로 지내면서 마음속에 그동안의 죄가 비쳐오기 시작했고 깊은 통회와 눈물로 회개했다. 그리고 죄를 씻겨주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경험했다고 한다.
다석 유영모는 생각하고 생각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이르는 것을 기도라고 하였다. 그는 주기도문을 누구보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날마다 실천코자 하였다. 그는 주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순 우리말로 다시 풀어서 썼다.
하늘에 계신 아바께 이름만 거룩 길 참 말씀이니이다.
이에 숨 쉬는 우리 밝은 속알에 더욱 나라 찾음 이어지이다.
우리 삶이 힘씀으로 새 힘 솟는 샘이 되옵고
진 짐에 짓눌림은 되지 말아지이다.
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시고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님께서 하나이 되사 늘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성언을 가지고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뜻이 위에서 되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아멘.
순 우리말로 풀어 쓴 주기도문이다. 여기서 ‘성언’이란 온전하고 싱싱한 인격적 사랑을 말한다. 성하다는 것은 온전하고 싱싱하다는 뜻이다. 병이 없고 시들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싱싱하게 자라는 모습이 성한 것이다. 그리고 ‘언’이란 어진이, 즉 사랑과 지혜가 성숙된 인격을 말한다. 이처럼 모두 순 우리말로 주기도문을 고쳐서 새로 풀어본 것이다. 이렇게 하기까지 다석은 얼마나 주기도문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하여 성령께서 그 뜻을 풀어주시면 그것을 내 속으로 받아서 실천하고 살 수가 있다. 이같이 성령께서 말씀을 풀어주시기까지 깊이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받은 말씀을 가지고 그대로 사는 것, 즉 말씀의 경지까지 도달하는 것이 기도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다. 모세가 민족과 나라의 비전의 제시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류의 비전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제 민족도 아니고 나라도 아니고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원리는 같은 것이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웃이 이제는 남의 나라로 확장된 것이다. 이웃 사랑이 더 넓고 깊어진 것이다.
다음은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김흥호 목사님의 글이다.
십계명과 주기도문은 어떻게 다른가? 십계명이 소극적인데 대하여 주기도문은 적극적인 것이 곧 눈에 뜨인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부르지 말라 하는 데 비하여 주기도문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하고 기도한다.
아버지를 망신시키지 말라는 표현과 아버지를 빛나게 하라는 표현은 마치 부족한 아들과 우수한 아들의 차이 같기도 하다. 아들이 좀 모자라서 아버지를 망신시키지 말라는 권유와 아들이 똑똑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빛내라는 것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모세의 눈에 비친 유대민족은 어딘지 모자라게 보인 것 같고, 예수의 눈에 비친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은 어딘지 똑똑하게 보인 모양이다. 못난 아들은 아버지를 망신만 시키고, 잘난 아들은 아버지를 빛내기만 한다. 그것이 사실이요 현실이다. 그런고로 주기도문은 못난 아들이 되지 말고 똑똑한 아들이 되라는 한마디의 권유인지도 모른다. 권유라기보다는 사실일 것이다. 주기도는 기도라기보다 사실이요, 실천이다. 모자라는 아들은 망신시키지 말라고 해도 망신시키는 것이고, 똑똑한 아들은 빛내지 말라고 해도 빛을 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기도企圖요 사실이요 현실의 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둘째로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과 나라가 임한다는 복음도 상당히 소극적이요 적극적인 차이가 있다. 많은 신 가운데서 나만 섬기라고 하는 것 같은 어감이 드는 것이 계명이지만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복음에는 다신적인 사상의 흔적도 없거니와 태양이 밝으면 천지만물이 기뻐 뛰듯이 나라의 임재에 태양이 비치는 천지만물 가운데에서 우리의 마음이 뛰는 듯하다. 십계명이 아직도 하늘을 문제 삼고 있는 데 비해 복음은 태양에 비추인 만물을 문제 삼고 있다. 십계명이 어두운 밤의 북극성 같은 하나님이라면 복음은 밝은 낮에 기쁨이 넘치는 밝은 태양과 같다. 더욱이 십계명의 하나님은 위에 계신 하나님인데 주기도의 나라는 아래 있는 나라이다. 위에 있는 하나님이 이상적인 하나님임에 비하여 아래 있는 나라는 현실적인 나라다. 이상의 꿈이 부푼 어린 시절의 십계명과 현실의 착실한 살림을 해내는 성숙한 시대가 대조되는 듯하다.
셋째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는 십계명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주기도문은 더욱 소극과 적극을 들어낸다고 할 수가 있다. 하나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정도이고, 하나는 뜻을 이루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진이나 무덤 앞에서 절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는 어리석은 자식들과, 입신행도立身行道, 부지런히 공부해서 아버지의 이상을 현실화해가는 똑똑한 자식들의 대조이기도 하다. 하나는 바보요, 다른 하나는 철이 든 아들이다.
그 다음 후반부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십계명과 주기도문도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차이가 여전히 드러난다. 살인하지 말라 하는 말에 대하여 미워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주기도문에서는 ‘악에서 구해 달라’고 했지만 ‘악惡’을 ‘미워할 오惡’ 자로 보는 것이 더욱 좋을지도 모른다. ‘간음하지 말라’ 하는 데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란 여자나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이요, 또는 이성에 빠지는 것이 죄의 제일 근원이다. ‘도적질하지 말라’ 하는 데 대하여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 주기도문이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 데 대하여 ‘시험에 걸리지 말라’는 것이 주기도문이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5장에서 십계명과 복음을 대조하고 있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지도 말라.’ 이것이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이다.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벌써 간음을 했다. 남녀의 색을 초월하지 못하면서 무엇이 믿는 자냐 하는 것이다. ‘모세는 도적질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희들은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에는 도적도 없고 좀도 못 먹는 것이다. 마치 돈을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비슷하다. 도적질 안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부지런히 일해서 저금까지 하라는 것이 예수의 심정이다. ‘모세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너희는 예는 예라고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여 언제나 사실에 입각하라’는 것이다. 말에 끌려 다니지 말고 사실에 입각하라는 것이 예수의 생각이요, 그것이 시험받지 말라는 것일 것이다.
이처럼 후반부도 소극과 적극이 너무도 대조적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과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대조적이며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과 저금하라는 말이 얼마나 대조적인가. 간음하지 말라는 것과 성을 초월하라는 것이 얼마나 대조적이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과 사실에 입각하라는 말이 얼마나 대조적인지 모른다. 예수는 십계명의 구약을 이어받으면서 십계명을 더욱 순화하고 그의 사상을 달성하고 그의 본질을 깊이 파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핵심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이 나오고, 모세가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예수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아버지요, 모세가 율법의 아버지요, 다윗이 시의 아버지라면 예수는 복음의 아버지이다. 아브라함은 가족의 시작이요, 모세는 민족의 시작이요, 다윗은 국가의 시작이요, 예수는 세계의 시작이다. 예수에게는 세계와 인류가 그 대상이다. 아브라함의 가족도 모세의 민족도 다윗의 국가도 다 초월한 온 인류와 세계의 주인공이 예수이다. 시대가 지난 것이다. 모세가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은 고작 자기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 당시 다른 민족에게도 모두 그들의 신이 있었다. 모세도 자기의 신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가족시대에 대대로 섬겨온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요, 참 하나님이라고 다시 한 번 재확인한다.
그것이 모세가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그의 신앙의 재확인이었을 것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요, 모세를 인도하여 유대민족을 가혹한 애굽의 학대에서 구원해주신 야웨의 하나님, 어버이의 하나님, 민족의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모시고, 이 하나님의 권위 밑에 그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팔레스틴 전역에 걸쳐서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유대민족의 꿈을 성취하게 한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다. 들에서 양을 먹이던 시인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오랜 세월 사울의 핍박을 받다가 결국 유대나라라고 하는 그의 꿈을 성취시키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도 그만 남녀에 빠지고 말았다. 남녀에 빠진 그는 그만 사람을 죽이는 악을 범하게 된다. 그는 생사에 모두 빠지게 된 것이다. 다윗이 살아있을 때에 자식이 반란을 일으키고 다윗이 죽은 후에는 그 아들 솔로몬 대에 이르러 나라는 두 동강으로 깨어지고 만다. 죄악의 씨에서 멸망이 초래된 것이다. 나라의 맛을 본 유대사람들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깨어지지 않는 나라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의 통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꿈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똑같이 앞날에 반드시 세계의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 이사야 같은 사람은 그때에 가서만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고 독사의 구멍에 어린애들이 손을 넣고 사자와 양이 같이 살 수 있게 된다는 약육강식의 동물성을 초월한 순 정신적이요 인간적인 세계를 대담하게 그려놓았다. 이러한 나라를 그들은 하늘나라라고 했다.
하늘나라란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철든 사람들이 모인 그런 종류의 세계이다. 칸트는 이것을 인격이 수단으로 취급되지 않고, 목적으로 취급되는 목적의 왕국이라고 하였다. 이 목적의 왕국을 시작한 사람이 예수이다. 이 예수의 삶이 그대로 주기도문이었다.
6) 인격적인 사랑과 섬김의 본을 실천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뒤에, 옷을 입고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13:12-15)
제자교육훈련의 기본이요 기초가 되는 것은 인격이요 인격은 인간관계속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성품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 변혁시키자는 것이 제자교육훈련의 교육목표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행위와 말씀을 통하여 그 뜻, 하나님의 뜻을 얻자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기본 태도와 입장을 이해하고 깨닫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하는 삶의 기본 태도와 입장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이로써 우리가 목표하는 삶, 인생의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지와 그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지를 알고 그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홀로 가는 길은 힘들고 위험하다. 목적지를 향하여 올라갈 때 안내자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산행을 할 때 올라갈 산이 정해져 있고 그 산을 오르는 길에 대한 지도가 있으면 혼자서도 갈 수 있다. 그렇지만 등산을 할 때 목적지를 향하여 지도만 들고 가는 것보다 안내자와 함께 등반을 한다면 얼마나 안심이 될 것이며 또한 위험성 없이 얼마나 즐겁고 쉽게 도달하겠는가.
물론 안내자의 역할과 한계도 알아야 된다. 안내자가 등반하는 사람을 대신하여 걸어갈 수도 없고 짐을 대신 지고 갈 수도 없다. 어린이라면 업고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는 큰 산을 올라갈 수가 없다. 설령 어머니 품에 안겨 올라간다 해도 그것은 어머니의 체험이지 애기의 체험이 아니다. 사랑의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실존적 믿음을 갖자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믿음의 길이다. 하늘에 솟아있는 히말라야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길이 어린이에게는 허용이 안 된다. 주체적 결단과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또한 건강해야 된다. 그래도 처음에는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서 올라가야 된다. 그리고 마지막 최후의 등반은 혼자 가야 된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을 의지하고 홀로 올라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생사를 내건 마지막 등반 코스를 거치지 않으면 히말라야에 올라 에베레스트 최고봉에 깃발을 꽂을 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산이 되시고 동시에 길이 되시며 또한 안내자가 되신다. 이제 안내자가 되어 예수님께 이르는 길을 갈 때 어떻게 해야 될까.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본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다. 영적인 길을 가는 안내자는 또한 본이 되어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배우기보다는 부모의 흉내를 내는 것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다. 즉 아이들이 처음에는 모방을 통해 배우는 것이지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부모가 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으로 변명한다면 아이들은 정직을 배울 수가 없다. 인격의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지식위주의 교육은 책이나 이론을 통해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실현욕구를 충족시켜 무한한 창조력과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고 원만한 품성을 지니도록 이끄는 인격이나 신앙교육은 지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인격이나 품성은 하나의 문화와 사회적 관계성 속에서 이뤄지고 발전하기 때문에 이성적 사변을 통해서 홀로 얻겠다는 것은 불가능 할뿐만 아니라 위험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선생님을 찾아야 되고 선생님께 배워야 된다. 그래야 안전하고 올바르며 쉬운 길을 갈 수가 있다. 신앙이라면 성령을 따라 올바른 지도를 할 수 있는 영적 안내자로서 목사나 전도자에게 성경 말씀을 배워야 된다.
이때 영적 안내자에게 필요한 것이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의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여라. 이런 거룩함과 온전함을 실천하는 신앙의 본은 무엇인가? 사랑과 지혜와 창조의 인격이다. 섬김의 사랑과 나눔의 지혜와 창조적 변혁으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함께 동행 하는 친구들도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존재적 변혁을 경험하고 새 사람이 되어 사랑과 지혜의 인격적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겨주라고 일러주셨다. 우리 몸에서 발은 맨 밑바닥에 있다. 그리고 머리는 맨 꼭대기에 있다. 사람은 발을 땅에 대고 머리는 하늘에 대고 산다. 머리를 하늘에 두기 위해서 발은 맨 밑에서 땅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발이 없으면 머리도 없다. 발이나 머리나 꼭 같이 중요한 몸이다. 그런데 흙을 딛고 서 있는 발이기에 우리 몸에서 가장 더럽혀지기 쉽다. 그래서 자주 씻어주어야 한다. 머리는 높고 귀하며 발은 낮고 천한 것이 아니다. 꼭 같이 소중하고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다리가 머리보다 더 높다는 것을 알아야 평등을 아는 평등각이다. 머리는 내려와야 되고 발은 올라가야 된다. 그래서 머리와 다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지와 행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와 행이 하나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흙먼지 묻어 있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과 섬김과 새로운 가치창조의 본을 우리는 본받고 실천해야 된다.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겼다고 한다. 왕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이 종이 되어 섬긴 것이다. 그래서 서로 섬김의 종이 되어 발을 씻겨주라고 하신다. 우리의 흙먼지와 때를 씻어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서로 형제의 잘못이나 부족을 책잡지 말고, 더러운 것들을 볼 때마다 얼른 닦아주라는 것이 아닐까.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잘못을 너그럽게 용납하며 어머니가 아이를 품듯 품어서 씻어주고 닦아주고 먹여주는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이것이 영적 안내자의 기본적인 태도라는 것이다.이세종은 어느 때 광주에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가 열린다 하여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각자 자기의 먹을 것을 도시락으로 싸가지고 와서 지냈다고 한다. 이세종이 광주에 이르러 교회를 찾아가다 보니 큰 개울가 좌우로 많은 거지들이 움막을 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인데 그들이 지내는 모양은 보기에도 측은했다. 이세종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거지들의 천막으로 찾아다니면서 자기가 가지고 온 음식을 죄다 나눠 주었다. 이세종은 사경회기간동안 완전히 굶다가 돌아왔다. 광주에서 등광리로 80리 길을 돌아오는데 너무나 허기져서 그만 길가에 누워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있노라니까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일어나면서 마치 자기 몸이 바람처럼 가볍게 느껴져 어느 틈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이현필은 성탄절이라고 누군가 찰떡을 했다면서 떡을 가져왔다. 그 순간 그는 산중 추운 움막에서 기도하며 지내고 있는 제자 김광석 집사가 생각이 났다. 따뜻하고 맛있는 떡을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자에게 갖다 주자 하고 바로 일어섰다. 이현필은 좋은 생각이 나면 즉시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 길을 떠나 눈길을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제자가 있는 산중의 움막까지는 산길로 수 십리 되는 길이다. 밤새 눈길을 헤치며 걸어가서 마침내 움막에서 기도중인 제자를 만나 떡을 전하고는 바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훗날 김광석은 그 일을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이현필이 유화례선교사를 모시고 화학산에서 피란 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9.28 서울이 수복이 되고 연합군이 북으로 진격하던 때라 지리산과 화학산에 남아있던 빨치산들은 무척 예민해진 때였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바로 죽음이었다. 날마다 긴장 속에 숨어서 그들을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오두막에서 김금남이 밥을 짓다가 그만 불을 내고 말았다. 순식간에 움막이 타고 말았다. 문제는 빨치산들이었다. 그들이 산에서 연기를 보고 불이 난 것을 알면 즉시 달려올 것이다. 그래서 모두 쏜살같이 다른 골짜기로 피신했다. 한 숨을 돌리고 앉아 있을 때 김금남은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때 이현필이 말하길 ‘어제 그 자리를 떠났어야 했는데 이놈이 게을러서 그만 고생을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유화례는 ‘아니요, 제가 괜히 음식을 준비한다고 하다가 그만 불을 내서 죄송하다’고 했다. 김금남이 회고하기를 ‘정작 불을 낸 사람은 자기인데 선생님들이 저렇게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을 보고 큰 위로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7) 십자가와 부활의 새 생명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영적 여정으로서 인생의 신앙 행로는 인격적 성숙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즉 유아기 시절에는 전적으로 어머니에 의존하여 성장하다가 청소년이 되면 차츰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자율성과 책임을 지고 사는 독립된 인격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인간 성숙의 단계가 유아기 청소년기 장년기로 올라가듯이 신앙의 단계도 초심자의 입교단계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결단하는 세례신자를 거쳐 소명을 자각하고 십자가라는 제자도의 길을 가는 사도적 성숙자로 올라간다.
기존 교회조직에서는 입교자 세례교인 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위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신앙적 단계나 직분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오히려 조직적 위계질서를 위한 회사조직에서 보는 것과 같은 직위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조직적 체제를 갖추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일 것이다.
초대교회의 모습은 이런 체계를 갖춘 조직체가 아니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가진 것을 서로 나누는 인격적 평등과 사랑의 공동체였다.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의 인격을 존중받는 평등이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같은 인격으로 존중받듯이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사람도 있고 어른의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인격적으로 누구나 평등이다. 또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첫째가 꼴찌가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한다. 교만은 어떤 경우에도 좋지 않아 멸망의 선봉이라 했다. 특히 영적 교만은 치유받기 힘든 병이요 타락의 징표가 되니 속히 돌이켜 자신의 무지와 죄악을 회개하고 반성해야 된다.
영적 안내자는 산파와 같은 것이다. 초심자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을 가면서 차츰 자기 자신의 영성을 회복하여 거듭나는 사건을 겪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되는 것이지 영적 안내자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자녀가 부모보다 얼마든지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듯이 거듭난 영혼이 영적 안내자보다 얼마든지 더 큰 사명을 받고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고,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요14:12)
히말라야를 등반할 때 마지막 캠프에서 함께 갔던 동료는 다 남고 정상에는 홀로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 태극기를 꽂는 사람은 다만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최후의 등반자로 선택되면 동반자와 모두 결별을 하고 이제 생사를 건 마지막 관문은 홀로 돌파해야 된다.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
땅 먼지 더러움 멀리 벗어나는 일 비상시가 아닌가.
밧줄 머리 꽉 붙잡고 한바탕 온 힘을 쏟는구나.
뼈 속에 사무치지는 이런 차가운 눈보라를 겪지 않고서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의 봄 향기 즐길 수 있으리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다. 이제 모두와 결별하고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일은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16:7)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니다.
(요17:24)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위한 최후의 기도를 마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당신의 영광을 우리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제자들이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광을 바라본 이후 제자들의 삶은 십자가의 삶으로 변화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갈 때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자 즉시 두려움은 사라지고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예수를 만나 사울이 변화되어 사도바울이 되었다. 바울은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도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 , 훌륭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2:1-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비밀이다. 이것은 글로 전하거나 말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안내자는 떠나가고 오직 홀로 남아서 그 비밀을 풀어야 된다. 십자가라는 비밀의 문을 뚫기 위해서는 마지막 관문을 놓고 생사를 거는 결단과 모험을 해야 된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서 될 일도 아니다. 하나님,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이처럼 가혹한 고독과 죽음의 문턱에 홀로 버려두고 계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믿음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자는 예수의 제자로서 제자도를 실천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바울은 이런 제자의 제자성을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4:16)
제자도를 걷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모든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체험은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나 사랑으로 드러난다.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모든 행위가 사랑의 표현으로 드러난다. 존재 자체가 사랑에 미치지 못하면 행위가 제아무리 그럴 듯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행위 없는 사랑은 공허한 것이요 사랑이 없는 의무나 도덕적 행위는 위선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 부모의 마음은 가장 못난 자식에게 먼저 가듯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내려오실 때 가장 낮고 천한 곳으로 오셨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시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곳, 골고다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는 또 이처럼 가장 억울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인간, 사람의 아들이었다.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오르셨다. 사람의 아들이 곧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실상이요 사람의 아들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요 또한 그리스도가 예수다.
이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의 과정에서 예수의 친구가 된다. 예수의 사랑과 연민이 이끄는 대로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일과 사건과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 안에서 예수의 얼굴을 발견하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위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을 제자도라 한다.
이런 제자도는 늘 공동체적인 주체성과 성찰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존재적 사랑의 깊이는 온 우주 만물과 더불어 유기체적 일체를 이루는 것이기에 역동적 관계성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창조적 활동이다. 따라서 시공을 초월한 자발적 주체로서 참여하는 공동체 활동이요 또한 천상천하에서 유일한 독립된 인격으로서 자기실현이다. 이런 공동체적 활동, 즉 상호 협력과 연대활동을 위해서 긴밀한 소통과 깊은 공감이 필요한데 이런 능력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을 통해서 계발되는 것이다.
동광원의 이현필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접촉되는 믿음을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촉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 설명을 들어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물속에 잠기듯 사랑에 잠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일입니다.’ (순결의 길 초월의 길)
이런 사랑의 믿음을 지닌 동광원 식구들은 환우들을 주님 대하 듯 보살폈다. 그런 분 중의 하나로 복은남 수녀가 있었다. 복은남 수녀는 전신마비로 움직이지 못하는 환우의 침대 밑에서 생활하며 그 환우를 십 수 년 동안 돌보았다. 한시도 중환자와 같은 그 환우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식사시중은 물론 대소변과 목욕시키기, 욕창방지를 위한 관리 등 눈코 뜰 새 없이 날마다 바쁘게 지내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생활했다. 그렇게 사랑으로 보살핀 덕분에 환우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이 났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환우의 별명을 귀일원의 천사라고 불렀다. 환우의 얼굴이 천사의 모습처럼 빛나도록 밤낮으로 보살펴준 복은남 수녀의 정성 덕분이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렇게 어려운 일을 그 오랜 시간 동안 감당할 수 있느냐? 그러자 복은남 수녀는 대답했다. ‘이분은 나에게 오신 예수님이에요. 주님을 섬기는데 무슨 힘이 들겠습니까. 저에게는 기쁨이요 영광이랍니다.’ 그렇게 두 분이 함께 생활하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현필은 귀일원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우리 사회를 복음화 하고 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십시일반과 일작운동을 통해 세계 선교의 꿈을 가졌다. 십시일반이란 열사람이 모여 한 사람의 굶주린 사람을 도와주어 함께 살자는 운동이요 일작운동은 수많은 사람이 힘을 합하면 사회 공동체에 필요한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현필은 또 선언하기를 ‘만물은 내 지체요 이웃은 나와 한 몸이다. 나의 완성이 곧 우주완성이다.’ 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연과 인간이 모두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자는 영적이요 생태적인 세계관이요 동시에 독립된 주체로서 온 세계를 책임지는 인격완성을 통한 자기실현의 목적을 갖는 인생관이었다. 인류는 모두 한 몸이라 느낌으로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으면 나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인류 가운데 한 생명이라도 아픔과 고통이 있으면 내가 평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랑이 인류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에게까지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미물의 아픔과 고통이라도 함께 느끼며 한 생명으로 살자는 것이다. 이런 존재적 사랑의 실천이 이현필의 삶이요 믿음이었다.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촉된 결과로 자연히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의 역사였다.
8) 일곱 가지 제자교육훈련 과정에 대한 소고
제자교육훈련과정의 요소로서 7가지를 대강으로 소개했다. 앞부분인 첫째와 둘째 셋째는 영적 안내자로서 갖춰야 될 기본이며 넷째 다섯째 여섯째는 제자도를 훈련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일곱째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을 이루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요 과정이다. 이 일곱 가지 요소는 성장의 단계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마다 모두 독립적인 방법이라 할 수도 있다.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들어 있다. 따라서 이 단계들은 계속 순환하면서 훈련할 수 있는 과정이다.
우선 초심자라면 영적 지도자를 만나고 소공동체 활동을 통해서 신앙의 세계를 배우며 훈련을 하게 될 것이다. 즉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과정을 배워갈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영적 지도자의 기본적인 태도인 첫째 둘째 셋째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알게 될 것이다.
고등교육을 이수한 초심자가 영적 지도자를 만나서 소공동체 훈련을 받는 기간은 약 3년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기본 신앙 태도와 성경을 배우고 기도훈련을 알게 되면 졸업이다.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다. 이제는 안내자 없이 홀로 신앙의 여정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홀로 다시 3년여 기간을 보내면서 첫째와 둘째와 셋째의 내용을 포함하여 일곱째까지 모두를 다지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영적 안내자로 독립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 탄생한 영적 안내자는 자기를 인도했던 안내자와 연대를 갖고 독립적 소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다. 즉 영적 안내자는 자기만의 소공동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구성원들과 함께 자기가 받았던 넷째 다섯째 여섯째 교육훈련과정을 수련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됨으로 우리의 복음화는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제자교육훈련의 방법이나 형식이 고정될 수는 없다. 진리는 틀이나 형식에 넣어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방법이라는 틀이 초월적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언어라는 수단도 방법이 될 수 없기에 불립문자라고 한다. 가르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 해서 교외별전이다. 모든 방법이나 수단은 결국 하나의 안내 표지가 될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았다고 달을 본 것은 아니다. 수단이나 방법을 알았다고 종교의 세계, 참의 세계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강을 건너가려면 지혜의 뗏목을 타고 건너가야 된다. 지혜의 뗏목이 안내자라 할 수 있다. 강을 건너간 다음에는 미련 없이 뗏목을 버리고 잊어야 한다.
6. 맺음말
1) 한국의 자생적 기독교 수도운동의 시초인 동광원의 기원과 역사를 간단히 요약하였으며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인 후계자 양육시스템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2)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과 제자교육훈련 방식들을 모색하여 이세종/이현필의 신앙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드러났는지 대조하며 살펴보았다.
3)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제자교육훈련 과정을 다음과 같이 7단계로 설정하여 구성할 수 있다.
- 첫째,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 초심자는 영적 안내자를 만나서 함께 배우며 기도한다.
- 둘째, 신앙인으로서 지켜야 될 삶의 기본 태도와 입장을 확립한다.
- 셋째, 복음 선포와 함께 소공동체로 초청한다.
- 넷째, 소공동체 활동으로 성경공부와 말씀묵상을 실천하며 나눔과 섬김을 훈련한다.
- 다섯째, 성령과 함께 기도하는 방법을 교육하고 훈련한다.
- 여섯째, 거룩하고 온전함을 추구하는 인격적 사랑의 본을 보여준다.
- 일곱째, 십자가와 부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다.
전반부인 첫째와 둘째 셋째는 영적 안내자로서 갖춰야 될 기본이며 후반부 넷째 다섯째 여섯째는 제자도를 훈련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일곱째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을 이루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요 성화의 과정이다. 이 일곱 가지 요소는 성장의 단계로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마다 모두 각각의 독립적인 방법이라 할 수도 있다.
4) 제자교육훈련을 위한 소공동체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자발적이고 능동적 참여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없이는 신앙의 성숙과 전 존재적 변혁으로 거듭난 참 제자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5) 소공동체 안에서의 유대관계와 독립된 소공동체들 간의 연대는 서로 유기적인 협력과 일체감을 형성하여 가장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하나님 나라 확장 운동이 된다.
6) 소공동체 내에서 이뤄지는 성경공부 말씀 묵상 기도훈련 등은 지식전달 위주의 교육활동이 아니라 방법론을 전하여 스스로 체험하고 성장하여 성화되고 성숙된 인격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활동이다. 이로써 각자는 독립과 평등한 인격으로 자유의 관계를 이루는 민주적 활동이요 자발적 활동이요 주체적 활동이 된다.
7) 그리스도인의 궁극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평화의 영생이다. 이런 영생의 길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안에 감춰져 있다. 이 신비에 접함으로써 성숙된 인격의 그리스도인은 온 우주와 교감하는 생태학적 삶을 살 것이요 또한 심층적 존재론적 변혁을 경험하는 주체적 삶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지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실천적 사랑의 영성이 될 것이다.
8) 이세종을 통해서 나타난 한국적 기독교 영성이 계승되고 발전되려면 예수의 제자교육훈련 과정을 현대적으로 도입하여 실천함이 요구된다. 동광원의 영성이 소공동체 제자교육훈련 과정의 도입과 실천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세대를 넘어 길이길이 전승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그리하여 온 땅이 그리스도의 높은 영봉에서 흐르는 생명의 강이 넘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충되며 생명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한다.
2017. 8. 21. 평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