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멸치 / 조은길
바다를 조립하고 남은 못 부스러기
고래들의 오랜 군것질거리
널 두고 사람들은 뼈골에 좋다며
첨벙첨벙 그물자루를 던지고
무심한 운명론자들은
운이 나쁜 것들
꽃밭의 잡초 같은 것
광야의 하루살이 같은 것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발가벗고 흘레붙는 어미아비를 보지 못했고
제가 찢고 나온 피 묻은 어미자궁을 기억하지 못하니
납득할 만한 과거도 미래도 없다
다만 살고 싶고
천장에 거꾸로 처박혀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엄연한 현재만 존재할 뿐
폭풍이 와장창 부숴놓고 간 바다기둥에
못 꾸러미를 쏟은 듯
촘촘히 밀려와 박히는 멸치들
바다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짱해진다
멸치 - 마트에서 / 허연
언젠가 하얀 눈보라처럼 바닷속을 휘저었을 멸치떼가 말라간다. 영혼은 빠져 나갔는데 하나같이 눈을 뜨고
있다. 죽기 싫었던 멸치가, 사랑의 정점에 있던 멸치가
눈도 못 감은 채 말라 간다.
말라서 누군가에게 국물이 되는 종말. 그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눈 뜬 놈들이 뒤엉켜 말라 가는 홀로
코스트의 현장에서 한 됫박의 미라와 한 됫박의 국물과
눈물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저렇게 단순하게 눈물이 되는 걸. 이제 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했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끔직한 결과들로 뒤덮인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 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生)의 전부라는 걸.
멸치는 가슴으로 똥을 싼다 / 윤선아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 개다리소반에 쏟으니 시월 바다 날 비린내 파란 물결로 퍼진다
혼자 살수록 뼈 부실해질까 검은 똥 빼며 먹어 본다 만만해서 똥이라 부르는 까맣게 말라붙은 내장 머리 향하여 꼬리 말린 모습 배곯다 잠든 새끼 고양이 같다
꼬리에 내장 있었다면 무거워 가라앉아 버렸겠지 근육만으로 물살 지피다 타 버렸다 쓴맛에 죽어서도 버려지는 또 하나의 생이다
흰 접시 위 수북이 똥처럼 쌓인 마른 바다 집 밖 화단 해당화 있던 자리에 묻는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하기를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운 것이다
*** 신인의 시에서 이처럼 사려 깊은 시심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를 다듬으며 시인이 느끼는
고향 바다의 푸근함 그것은 날 비린내를 풍기며 파란 물살로
퍼진다. 누가 알았으랴. 멸치가 제 가슴께에 끌어안고 있는
새까만 똥이 실은 그가 한 생을 헤엄치며 살아온 바다가 검게
말라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멸치에게도 생은 가파르고
험한 세파 속을 헤쳐 가는 것이다. 시인이 멸치를 맛보는 일
그것은 고향 바다에 풍덩 빠지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멸치의 배 안에 까맣게 굳어버린 바다를 해당화 진
화단에 깊이 파묻어 준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 하기를” 거기,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워 또 한생을 해당화 꽃으로
피워 올릴 것이다!
/ 김완하 시인
멸치론 / 장성호
성난 파도 넘실대는 그 바닷가 성긴 그물코에 걸려든 작은 용떼 은빛 비늘 자랑하자 뜨거운 태양빛에 그을려 천년의 화석이 되었구나
우두머리 없이 몰려다니는 색다른 엔초비떼 애 못나 쫓겨난 여인이 떨리는 두 손으로 네 황홀한 몸 애무한다 바다의 신이여, 자식 하나 점지해 주소서
성질 급한 네 영혼으로 키 작은 그물코에 걸려들자마자 바닷가 하얀 눈으로 염장하여 저 멀리 뭍으로 건너가 불멸의 삶 살게 되리라
네 뼈와 살이 불덩이 같은 물속에서 은빛가루 날리며 산산이 녹아버리지만 푸른 바다 속 네 분신들은 긍정의 용트림 무한히 반복하리라
멸치 / 김주영
사소한 어류인 멸치도 엄연히 척추동물이다 산란으로 번식하지만, 알을 밴 멸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고래가 멸치를 사냥하는데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고래보다 더욱 크고 의젓하다.
고래는 너무 크고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을 감추는 은둔자의
삶이다
너구리는 대식가이면서 잡식성이기 때문에 구린내가 지독하고
해삼크기의 배설물을 내놓는다. 다래나 머루가 풍부한 산기슭이나
강가를 맴돌며 산다. 늪에서 들쥐나 도마뱀 같은 먹이를 포획하였거나
방금 강물에서 헤엄쳐 나온 물고기나 개구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물에 씻어 포식하는 습성 때문에 일생을 마감할 때까지
강가에 은신처를 둔다. 너구리는 의뭉스럽고 음흉하지만 경계심이
부족한 탓에 밀렵꾼의 올무나 덫에 쉽게 희생되기도 한다
종달새(한 여름밤)둥지 사냥 새의 몸통은 허공의 한 지점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다. 가녀린 날갯짓
으로 자신의 몸통을 허공에 정지시킬 수 있는 신기의 비밀. 정지라는
접점은 이상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세한 시간의 첨단과 만나고 있거나,
세상의 어떤 우두머리에 자리잡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멸치 / 이지담
냉장고에서 꺼낸 멸치를 다듬는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부터 떼어낸다 팔딱이는 바다를 휘저은 지느러미는 물결들에게 두고 왔는지 없구나 상어의 큰 입을 피해 다니며 배든 날렵함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뱃속에는 별똥별을 삼켰던 탓인지 까만 씨앗들이 슬퍼하지 않을 만큼 맺혀 있다 요 작은 몸으로 보시를 결심한 느낌표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
똥들이 모여 마침표 하나 찍는데 머릴 맞대고 궁리에 골똘해 있는 머리들을 비웃듯 몸뚱이는 몸뚱이끼리 나누어 머리 위쪽에 놓는다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온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
명태 / 김기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도 악쓰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명태는 덕대에 걸리고 / 엄기종
허옇게 바랜 눈을 부릅뜬 채 차라리 바람 에는 추위를 반겨라 떼지어 바닷길 몰려 다니듯 꿈꾸는 춤이 한창이다 강릉에서 오는 샛바람아 불어라
칼바람 서북풍도 몰려오고 부대끼는 육신은 싸리광택의 옛날을 그린다 송천에 하루 내 미역 감고 층층이 달린 12자 고랑대 위엔 속 잃은 황태의 허기를 채울 달빛이 찬란하다
영하 20도엔 백태, 얼지 않고 마르면 먹태 바닷가에서 바로 마르면 바닥태 많이 잡힌 날 바다에서 목을 잃은 무두태 20센티 미만 앵태, 소태, 중태, 50센티 이상 왕태 고랑대 네 칸엔 2500마리 한 축 또는 한 급에 20마리
황태 찜, 황태 국밥, 황태 구이 소주잔에 보름달을 띄우고 황태채 씹는 雪國엔 觀海記꽃이 핀다 영혼은 뱃속에서 고향 캄차카로 간다 40년 전에 잃은 한국해역 동해로 가거라.
명태 / 양영문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 이영옥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 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던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 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 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테지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 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 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 탕탕 두둘겨 북북 찢어 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 간다 처마 밑의 마른 명태는 먼지를 한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황태 / 양현근
종묘공원 지하보도 입구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른기침과
함께 장이야, 멍이야 불러내고 있다. 가로 세로로 얽혀 포진하고 있는
그물에 바짝 마른 무료가 굴러 떨어진다. 담쟁이덩굴이 싱싱했던 푸른
날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여기 저기 속 다 퍼주고 맑은 날 시린 날 견뎌
오며, 남은 건 휜 등뼈 불끈 드러나는 싱거운 몸뚱이 뿐
우리는 너무 건조해졌어. 건조하다는 것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말,
오래 되었다는 말, 가슴과 가슴사이에 더 이상 물기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지
배식시간을 기다리던 노인들이 무료급식소로 줄지어 몰려간다, 낡은
신발 밑창에서는 평생 질척거리던 길이 조금씩 삐져나오고, 굽은 어깨
위로 간기 빠져 나간 파도소리가 넘실댄다
붉게 끓는 한 낮, 제 몸의 물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잎들은 그늘을
만들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황태처럼 / 은기찬
두 눈 뜨고 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너울거리던 햇살이 울컥 붉어진다 하루의 끝에 매달려 버둥대는 맘 알까 알전구처럼 나는 포장마차 구석에 앉아 있다 바람을 맞으며 세상은 펄럭이고 나는 홀로 여위어가고, 보풀음 잘게 뜯어 속을 채우는 동안에도 떠밀려가는 무리들. 애당초 한 곳만 보며 몰려다닐 팔자였지 줄지어 다니다 줄지어 꿰이는 와중에도 소리소리 질러 봐도 나오는 건 없고 속만 퍽퍽해 지던 기억 나서지 말거라, 아침 햇살에도 눈을 감지 못하던 어머니는 그 말씀이셨다 아무리 파도가 희번뜩여도 생활만큼이야 뼛속을 파고들겠느냐고 뽀얗고 깊은 맛이 어금니께에 고일 즈음 뒤척이던 노을이 소주잔에서 멈춰 선다 속 비우고 산 지 오래 얼었다 녹았다, 얼었다 녹았다 썩을 것도 없지, 이젠 얼부풀어 말라가는 내 뼈를 추려 내일은 누구의 속을 풀어주고 그 다음은 누구의 허한 데를 채워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신물은 터져 나오려는 속을 긁었다 돌아 갈 길을 잃은 사람들 뒤에서 소줏잔을 내려놓는 소리 탁, 바다가 언뜩 비쳤다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 / 박후기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북한산 명태 / 정호승
하늘은 붉고 날은 흐리다 어머니는 오늘도 겨울산에 올라 북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너 무슨 그리움의 죄가 그리 많아서 원산 덕장 찬바람 속에 매달려 있었느냐 하늘 향해 겨우내 입을 딱 벌리고 두 눈 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었느냐 북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온몸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관령 눈보라에 황태가 되어 북녘 하늘 바라보다 온몸이 뜯기나니 네 가슴은 아직도 동해의 푸른 물결 이제는 죽음도 눈물도 아프지 않아 흰 새벽 찬바람에 눈이 시리다
똥이라 부르지 말자 그 넓은 바다에서 집채만한 고래와 상어와 때깔도 좋은 열대어들 사이에서 주눅들어 이리저리 눈치보며 똥 빠지게 피해다녔으니 똥인들 남아 있겠느냐 게다가 그물에 걸리어 세상 버틸 적에 똥마저 버텼을 터이니 못처럼 짧게 야윈 몸속에 딱히 이것을 똥이라 하지 말자 바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잡아먹은 적 없이 잡아먹혀서 어느 목숨에 빚진 적도 없으니 똥이라 해서 구리겠느냐 국물 우려낼 땐 이것을 발라내지도 않고 통째로 물어 넣으면서 멸치도 생선이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적마다 까맣게 타들어갔을 목숨 가진 것의 배알이다 배알도 없는 놈이라면 그 똥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뜯어낸 자리 길고 가느다란 한 줄기 뼈가 있겠느냐 밸도 없이 배알도 없이 속도 창시도 없이 똥만 그득한 세상을 향하여 그래도 멸치는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등뼈 곧추세우며 누누천년 지켜온 배알이다
멸치 / 이건청
내가 멸치였을 때, 바다 속 다시마 숲을 스쳐 다니며 멸치 떼로 사는 것이 좋았다. 멸치 옆에 멸치, 그 옆에 또 멸치, 세상은 멸치로 이룬 우주였다.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며 붉은 산호, 치밀한 뿌리 속을 스미는 바다 속 노을을 보는 게 좋았었다.
내가 멸치였을 땐 은빛 비늘이 시리게 빛났었다. 파르르 꼬리를 치며 날쌔게 달리곤 하였다. 싱싱한 날들의 어느 한 끝에서 별이 되리라 믿었다. 핏빛 동백꽃이 되리라 믿었었다.
멸치가 그물에 걸려 뭍으로 올려지고, 끓는 물에 담겼다가 채반에 건저져 건조장에 놓이고 어느 날, 멸치는 말라 비틀어진 건어물로 쌓였다. 그리고, 멸치는 실존의 식탁에서
머리가 뜯긴 채 고추장에 찍히거나, 끓는 냄비 속에서 우려내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내가 멸치였을 때, 별이 되리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 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집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멸치 / 조은길
바다를 조립하고 남은 못 부스러기
고래들의 오랜 군것질거리
널 두고 사람들은 뼈골에 좋다며
첨벙첨벙 그물자루를 던지고
무심한 운명론자들은
운이 나쁜 것들
꽃밭의 잡초 같은 것
광야의 하루살이 같은 것
쯧쯧 혀를 차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발가벗고 흘레붙는 어미아비를 보지 못했고
제가 찢고 나온 피 묻은 어미자궁을 기억하지 못하니
납득할 만한 과거도 미래도 없다
다만 살고 싶고
천장에 거꾸로 처박혀서라도 살아남고 싶은
엄연한 현재만 존재할 뿐
폭풍이 와장창 부숴놓고 간 바다기둥에
못 꾸러미를 쏟은 듯
촘촘히 밀려와 박히는 멸치들
바다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짱해진다
멸치 - 마트에서 / 허연
언젠가 하얀 눈보라처럼 바닷속을 휘저었을 멸치떼가 말라간다. 영혼은 빠져 나갔는데 하나같이 눈을 뜨고
있다. 죽기 싫었던 멸치가, 사랑의 정점에 있던 멸치가
눈도 못 감은 채 말라 간다.
말라서 누군가에게 국물이 되는 종말. 그 종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눈 뜬 놈들이 뒤엉켜 말라 가는 홀로
코스트의 현장에서 한 됫박의 미라와 한 됫박의 국물과
눈물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저렇게 단순하게 눈물이 되는 걸. 이제 와서 후회한다 나의 사유가 늘 복잡했던 것을 내 사랑이 모두 음란했던 것을
끔직한 결과들로 뒤덮인 마트를 걸어 나오며 깨달았다.
말라 가는 것이 내가 아는 생(生)의 전부라는 걸.
멸치는 가슴으로 똥을 싼다 / 윤선아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 개다리소반에 쏟으니 시월 바다 날 비린내 파란 물결로 퍼진다
혼자 살수록 뼈 부실해질까 검은 똥 빼며 먹어 본다 만만해서 똥이라 부르는 까맣게 말라붙은 내장 머리 향하여 꼬리 말린 모습 배곯다 잠든 새끼 고양이 같다
꼬리에 내장 있었다면 무거워 가라앉아 버렸겠지 근육만으로 물살 지피다 타 버렸다 쓴맛에 죽어서도 버려지는 또 하나의 생이다
흰 접시 위 수북이 똥처럼 쌓인 마른 바다 집 밖 화단 해당화 있던 자리에 묻는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하기를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운 것이다
*** 신인의 시에서 이처럼 사려 깊은 시심을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고향에서 올라온 햇멸치를 다듬으며 시인이 느끼는
고향 바다의 푸근함 그것은 날 비린내를 풍기며 파란 물살로
퍼진다. 누가 알았으랴. 멸치가 제 가슴께에 끌어안고 있는
새까만 똥이 실은 그가 한 생을 헤엄치며 살아온 바다가 검게
말라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 멸치에게도 생은 가파르고
험한 세파 속을 헤쳐 가는 것이다. 시인이 멸치를 맛보는 일
그것은 고향 바다에 풍덩 빠지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멸치의 배 안에 까맣게 굳어버린 바다를 해당화 진
화단에 깊이 파묻어 준다.
“꼬리 아닌 가슴만으로 遊泳 하기를” 거기, 멸치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바다, 하나의 까만 섬으로 누워 또 한생을 해당화 꽃으로
피워 올릴 것이다!
/ 김완하 시인
멸치론 / 장성호
성난 파도 넘실대는 그 바닷가 성긴 그물코에 걸려든 작은 용떼 은빛 비늘 자랑하자 뜨거운 태양빛에 그을려 천년의 화석이 되었구나
우두머리 없이 몰려다니는 색다른 엔초비떼 애 못나 쫓겨난 여인이 떨리는 두 손으로 네 황홀한 몸 애무한다 바다의 신이여, 자식 하나 점지해 주소서
성질 급한 네 영혼으로 키 작은 그물코에 걸려들자마자 바닷가 하얀 눈으로 염장하여 저 멀리 뭍으로 건너가 불멸의 삶 살게 되리라
네 뼈와 살이 불덩이 같은 물속에서 은빛가루 날리며 산산이 녹아버리지만 푸른 바다 속 네 분신들은 긍정의 용트림 무한히 반복하리라
멸치 / 김주영
사소한 어류인 멸치도 엄연히 척추동물이다 산란으로 번식하지만, 알을 밴 멸치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고래가 멸치를 사냥하는데 고래를 만난 멸치 떼는 질주를
멈추고 폭죽처럼 흩어졌다가 전열을 가다듬고 의연히 수중발레를
벌인다 그리고 물결을 이룬다. 목숨이 담보되고 말았는데도 비굴하거나 추악하지 않고 포식자를
향하여 매혹적인 군무를 보여주는 어류는 멸치뿐이다.
물결을 이룬 춤사위에 매료된 고래는 더욱 충동적으로 멸치를
사냥한다. 그러므로 멸치는 고래보다 더욱 크고 의젓하다.
고래는 너무 크고 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 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생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을 감추는 은둔자의
삶이다
너구리는 대식가이면서 잡식성이기 때문에 구린내가 지독하고
해삼크기의 배설물을 내놓는다. 다래나 머루가 풍부한 산기슭이나
강가를 맴돌며 산다. 늪에서 들쥐나 도마뱀 같은 먹이를 포획하였거나
방금 강물에서 헤엄쳐 나온 물고기나 개구리를 잡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물에 씻어 포식하는 습성 때문에 일생을 마감할 때까지
강가에 은신처를 둔다. 너구리는 의뭉스럽고 음흉하지만 경계심이
부족한 탓에 밀렵꾼의 올무나 덫에 쉽게 희생되기도 한다
종달새(한 여름밤)둥지 사냥 새의 몸통은 허공의 한 지점에 온전하게 머물러 있다. 가녀린 날갯짓
으로 자신의 몸통을 허공에 정지시킬 수 있는 신기의 비밀. 정지라는
접점은 이상하게도 우리로 하여금 미세한 시간의 첨단과 만나고 있거나,
세상의 어떤 우두머리에 자리잡고 있다는 착각을 가지게 한다
멸치 / 이지담
냉장고에서 꺼낸 멸치를 다듬는다
온몸을 쥐락펴락했을 머리부터 떼어낸다 팔딱이는 바다를 휘저은 지느러미는 물결들에게 두고 왔는지 없구나 상어의 큰 입을 피해 다니며 배든 날렵함이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뱃속에는 별똥별을 삼켰던 탓인지 까만 씨앗들이 슬퍼하지 않을 만큼 맺혀 있다 요 작은 몸으로 보시를 결심한 느낌표들! 바다를 놓아주고 열반에 드는가
똥들이 모여 마침표 하나 찍는데 머릴 맞대고 궁리에 골똘해 있는 머리들을 비웃듯 몸뚱이는 몸뚱이끼리 나누어 머리 위쪽에 놓는다 한 몸이었던 내 몸이 부위별로 쑤셔온다
귀가를 서두른 노을과 함께 몸이 프라이팬에서 볶아진다
명태 / 김기택
모두가 입을 벌리고 있다 모두가 머리보다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벌어진 입으로 쉬지 않고 공기가 들어가지만 명태들은 공기를 마시지 않고 입만 벌리고 있다 모두가 악쓰고 있는 것 같은데 다만 입만 벌리고 있다
그물에 걸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려고 입을 벌렸을 때 공기는 오히려 밧줄처럼 명태의 목을 졸랐을 것이다 헐떡거리는 목구멍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숨구멍 막는 공기를 마시려고 입은 더욱 벌어졌을 것이고 입이 벌어질수록 공기는 더 세게 목구멍을 막았을 것이다
명태들은 필사적으로 벌렸다가 끝내 다물지 못한 입을 다시는 다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끝끝내 다물지 않기 위해 입들은 시멘트처럼 단단하고 단호하게 굳어져 있다 억지로 다물게 하려면 입을 부숴 버리거나 아예 머리를 통째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말린 명태들은 간신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보다는 막대기에 더 가까운 몸이 되어 있다 모두가 아직도 악쓰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입은 단지 그 막대기에 남아있는 커다란 옹이일 뿐이다 그 옹이 주변에서 나이테는 유난히 심하게 뒤틀려 있다
명태는 덕대에 걸리고 / 엄기종
허옇게 바랜 눈을 부릅뜬 채 차라리 바람 에는 추위를 반겨라 떼지어 바닷길 몰려 다니듯 꿈꾸는 춤이 한창이다 강릉에서 오는 샛바람아 불어라
칼바람 서북풍도 몰려오고 부대끼는 육신은 싸리광택의 옛날을 그린다 송천에 하루 내 미역 감고 층층이 달린 12자 고랑대 위엔 속 잃은 황태의 허기를 채울 달빛이 찬란하다
영하 20도엔 백태, 얼지 않고 마르면 먹태 바닷가에서 바로 마르면 바닥태 많이 잡힌 날 바다에서 목을 잃은 무두태 20센티 미만 앵태, 소태, 중태, 50센티 이상 왕태 고랑대 네 칸엔 2500마리 한 축 또는 한 급에 20마리
황태 찜, 황태 국밥, 황태 구이 소주잔에 보름달을 띄우고 황태채 씹는 雪國엔 觀海記꽃이 핀다 영혼은 뱃속에서 고향 캄차카로 간다 40년 전에 잃은 한국해역 동해로 가거라.
명태 / 양영문
감푸른 바다 바닷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프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쇠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고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짝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 이영옥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 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던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 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 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테지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 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 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 탕탕 두둘겨 북북 찢어 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 간다 처마 밑의 마른 명태는 먼지를 한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황태 / 양현근
종묘공원 지하보도 입구에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마른기침과
함께 장이야, 멍이야 불러내고 있다. 가로 세로로 얽혀 포진하고 있는
그물에 바짝 마른 무료가 굴러 떨어진다. 담쟁이덩굴이 싱싱했던 푸른
날을 살짝 들여다보는데, 여기 저기 속 다 퍼주고 맑은 날 시린 날 견뎌
오며, 남은 건 휜 등뼈 불끈 드러나는 싱거운 몸뚱이 뿐
우리는 너무 건조해졌어. 건조하다는 것은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말,
오래 되었다는 말, 가슴과 가슴사이에 더 이상 물기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이지
배식시간을 기다리던 노인들이 무료급식소로 줄지어 몰려간다, 낡은
신발 밑창에서는 평생 질척거리던 길이 조금씩 삐져나오고, 굽은 어깨
위로 간기 빠져 나간 파도소리가 넘실댄다
붉게 끓는 한 낮, 제 몸의 물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잎들은 그늘을
만들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황태처럼 / 은기찬
두 눈 뜨고 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너울거리던 햇살이 울컥 붉어진다 하루의 끝에 매달려 버둥대는 맘 알까 알전구처럼 나는 포장마차 구석에 앉아 있다 바람을 맞으며 세상은 펄럭이고 나는 홀로 여위어가고, 보풀음 잘게 뜯어 속을 채우는 동안에도 떠밀려가는 무리들. 애당초 한 곳만 보며 몰려다닐 팔자였지 줄지어 다니다 줄지어 꿰이는 와중에도 소리소리 질러 봐도 나오는 건 없고 속만 퍽퍽해 지던 기억 나서지 말거라, 아침 햇살에도 눈을 감지 못하던 어머니는 그 말씀이셨다 아무리 파도가 희번뜩여도 생활만큼이야 뼛속을 파고들겠느냐고 뽀얗고 깊은 맛이 어금니께에 고일 즈음 뒤척이던 노을이 소주잔에서 멈춰 선다 속 비우고 산 지 오래 얼었다 녹았다, 얼었다 녹았다 썩을 것도 없지, 이젠 얼부풀어 말라가는 내 뼈를 추려 내일은 누구의 속을 풀어주고 그 다음은 누구의 허한 데를 채워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신물은 터져 나오려는 속을 긁었다 돌아 갈 길을 잃은 사람들 뒤에서 소줏잔을 내려놓는 소리 탁, 바다가 언뜩 비쳤다
北魚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북어 / 박후기
퇴직금으로 구입한 1톤 트럭 조수석에 나를 태우고, 비쩍 마른 북어 한 마리 이리저리 물살을 가르며 강변북로를 빠져나간다 작정이라도 한 듯 꼬인 실타래로 칭칭 트럭 운전대에 제 몸을 묶고 강바람 거슬러 거친 바다를 향해 헤엄쳐 나간다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죽어도 눈 감지 않겠노라고, 안구건조증에 걸린 북어 한 마리 희멀건 두 눈 부릅뜨고 가속페달을 밟는다
북한산 명태 / 정호승
하늘은 붉고 날은 흐리다 어머니는 오늘도 겨울산에 올라 북으로 간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너 무슨 그리움의 죄가 그리 많아서 원산 덕장 찬바람 속에 매달려 있었느냐 하늘 향해 겨우내 입을 딱 벌리고 두 눈 부릅뜬 채 기다리고 있었느냐 북으로 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온몸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대관령 눈보라에 황태가 되어 북녘 하늘 바라보다 온몸이 뜯기나니 네 가슴은 아직도 동해의 푸른 물결 이제는 죽음도 눈물도 아프지 않아 흰 새벽 찬바람에 눈이 시리다
첫댓글 1차 멸치와 동태 시를 내리 다 읽고, 2차로는 결론만 따로 읽고 마지막으로 그림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덕장에 매달린 동태들은 알까요, 모를까요. 자기들이 살던 곳이 극락인 것을...그러나 거기서는 몰랐음을.....!!
가슴 찡한 글이 많았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어 올려봤습니다.... 동태가 아니라 명태유, 시인님, ㅋㅋㅋ
'동태가 아니라 명태유. '동산 시인님의 재미있는 꼬리글에 파안대소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명태 형!' 고맙시유. 나가 아직은, 낙태 보다 동태구나....ㅎㅎㅎ
멸치의 시가 가슴에 유독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몇해 전에 돌아가신 비비추의 막내오빠 멸치사업 한다고 배 세척 사들여 골몰했던 기억...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습니다 바닷가 한 구석에....멸치에 대한 시들을 읽으며 지난날을 회상해 보는 좋은 시간이였습니다
맨 밑의 사진...여그는 미시령 넘어 덕장인데 해그름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사진을 찍었구나....지금까지 본 명태사진 중 최고의 걸작입니다.
맞는 것 같아요. 지난번 백담사 다녀 오던 길에 본 그 덕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