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쳔소설
혈우(血雨)
T.코라겟슨 보일[미국]
시작된 것은 3시 30분경이었다. 창을 두들기는 ‘토닥’하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빗소리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테레오의 볼륨을 최대로 해놓고 월터는 거기에 맞춰 베이스 기타를 치고 있었고 텔레비전도 켜놓고 있었다. 모두가 완전히 취해 있었다. 포도주와 희게 빛나는 대마초 파이프를 돌려가며 피워댔고, 레코드에 맞춰 함께 노래하고 트럼프를 즐기며 크래커를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레코드의 노래와 노래 사이에 그 짧은 ‘쏴아’하는, 침묵 저편에서의 그 소리가 들려 창을 쳐다보니 붉은 물방울이 여러개 모이고 다시 잇달아 내리고 있었다. 게슈와 스코트, 이자벨은 소리를 죽인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며 음악에 열중한 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손가락과 발을 흔들며 킥킥거리고 있었다. 낮은 테이블 위에는 치즈, 오렌지, 포도주, 반짝거리는 표지의 페이퍼북, 그리고 파이프가 있었다. 향의 연기가 단지에서 흐르고 있었다. 개 세 마리가 난로 옆의 카핏에 맥없이 누워 있었고, 샴고양이 두 마리가 난로 위와 벤치에서 각기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붉은 물방울이 또르르 떨고 있다가 계속해서 내려오는 다른 물방울에 맞아 그 위에 다시 큰 물방울이 떨어지자 구불구불 줄이 되어 창틀로 쏟아진다. 아리스가 부엌에서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그녀는 에이미와 함께 야채 껍질을 벗기고 파이를 구우며 오되브르용으로 훈제의 오이스터(굴)와 육류 통조림을 따고 올리브 열매를 도려냈다. 맑던 유리창이 붉은 빗줄기로 빈틈이 없어졌다. 음악이 너무 시끄러웠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평범한 하루였다.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서 문을 열자 세 마리의 개가 동시에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개들은 창가에 서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거칠게 몰아닥치는 폭풍우가 되어, 흘러내리는 물을 받게 되어 있는 홈통에서 붉은 물이 튕겨 내 바지자락까지 튀어왔다. 현관의 포치는 햄버거 냄새를 풍겼다. 붉은 물방울은 흰 바지에 번져갔다. 개들이 다가와서 목을 내밀어 계단에 놓인 물통을 혀로 핥았다. 곧 양다리와 코끝에 붉게 반들반들 광택이 났다. 나는 문을 세게 닫은 다음 거실로 돌아왔다. 게슈와 스코트가 파이프를 돌려가며 빨고 있었다. 텔레비전에는 굶주린 아이들이 비치고 있었다. 불룩 튀어나온 배, 뼈만 남은 머리와 같을 정도로 큰 눈알, 거미같이 가는 팔과 발. 부엌에서는 누군가가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이봐!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아나?” 나는 소리쳤다.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창은 붉게 물들어 있었으며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가고 있었다. 게슈가 파이프를 넘겨주려고 얼굴을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디 베기라도 했나?” 그가 말했다. “아니야, 혈우(血雨)가 내리고 있어.”
게슈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는 이미 아무것도 방영되지 않고 있었다. 조금 전 모두가 문 밖으로 몰려가 처마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에 손을 뻗쳐 “와아”하고 소란을 피우고 있을 때 게슈는 용을 쓰다가 다리가 미끄러져 계단에서 단풍나무 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흰 바지와 셔츠, 구두가 핑크색으로 변하고 이윽고 붉디붉은 적색, 생명의 색으로 변했다. “대단한데! 이건!” 그가 소리쳤다. 우리는 덜컥 겁이 났다. 1,2분 후에 계단을 통해 올라왔으나 얼굴 전체가 피의 모르타르로 모자이크 무늬를 그린 듯했고, 머리가 이마 전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큰 사고를 당했거나 전쟁의 참화에 말려들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내 얼굴 어때?” 그는 입술에 묻은 끈끈한 피를 핥으면서 말했다. “붉은 귀신의 가면 같니? 어때?” 스코트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게슈가 올라왔을 때의 냄새로, 나는 옛날 3학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갔었던 여행을 상기했다. 학습여행이었다. 우리는 매주 주말이면 학습여행에 나섰다. 그때의 행선지는 도살장이었으며 게슈가 올라왔을 때에도 그런 냄새가 났다. 에이미는 어린이용 샴푸와 어린이용 비누를 가져다가 샤워를 시켰다. 그리고 흰 셔츠와 바지, 거기에다 흰 실내화를 준비했다. 스코트는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아래층 암실로 달려갔다. 평소에 그가 찍는 것은 흑백뿐이며 화사한 모자를 쓴 빈민가의 아이가 이쪽을 향해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것이나 빈민가의 노파가 관절이 굵은 손가락을 펴 보이는 장면, 또는 빈민가의 노인이 포켓의 포도주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는 이런 사진들을 액자에 넣어서 집안에 걸어두고 있었다. 지금도 한 장은 방구석의 토끼가죽을 입힌 의자 위에 걸려 있으며, 또 한 장은 식당의 수조관 위에 걸려 있다. 월터가 한참 동안 숨을 돌리더니 레코드를 바꾸고 음향을 조정해 보았다. 이어지는 불길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텔레비전이 ‘피익’하고 높은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면이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이건!” 이자벨이 말했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서 채널을 계속 돌렸다. 어디나 회색이며 어디에서나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자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라디오는 어떨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면 전화는!” 하고 소리쳤다. 전화는 그녀의 귀, 나의 귀, 월터의 귀, 에이미의 귀 속에서 부드럽게 ‘피잉’하고 소리치고 있었다. 안이 빈 소라껍질에서 나는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끊겼군.” 내가 말했다. 우리는 우두커니 서서 이상한 소리만을 내고 있는 코드에 달린 수화기를 응시했다. 우리는 추측해 보았다. 어쩌면 국가의 비상사태가. 어쩌면 핵의 대참사가. 어쩌면 D데이가. 어쩌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 어쩌면 로켓의 발사가.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추측의 근거를 의심했다. 이것은 아마도 단순한 신종 공해이며 전선 한두 가닥이 폭풍으로 날아가버린 것에 불과할 거다. 게슈가 캔디 냄새를 풍기면서 말쑥한 백색으로 몸을 감싸고 나타났다. 유유히 파이프로 다가가서 대마초를 엄지로 꾹꾹 눌러담더니 성냥불을 그어대고 빨아들였다. 이자벨은 재빨리 침착성을 되찾더니 앨범에서 몇 장의 사진을 가려내고 있었다. 월터는 베이스 기타의 벨트를 아무렇게나 어깨에 걸쳤다---음악의 폭풍이 방안에 가득차고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를 잠재웠다. 아리스가 오트볼을 가져오자 외국요리의 맛있는 냄새가 부엌에 감돌았다. 나는 걸터앉아 몇 대의 담배를 피우면서 먹었다.
이른 아침에 나는 따뜻한 잠자리에서 빠져나왔다(시트는 아리스의 예쁜 몸매와 게슈의 털투성이 야만인같은 다리로 불룩한 산을 이루고 있었다). 흰 잠옷에 흰 로브를 걸치고 털이 부숭한 흰 슬리퍼를 끌고, 일요일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만화를 보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마음도 알콜과 약으로 말끔히 씻겨져 하얗게 되어 있었다. 꿈의 색깔도 차가운 색 계통으로, 숲은 녹색이며 여름의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거실로 들어서자 블라인드 사이로 핑크빛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창은 흡사 스테인드 글라스 같았다. 아침의 고요 속에서 붉은 물방울이 계속해서 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이렇게 이른 시각에 혼자 있다는 것이 어쩐지 무섭기만 했다. 얼마 후에 문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들이 밤새도록 밖에서 지낸 것이다. 무심코 문을 열자 개들이 뛰어들었다. 움직이는 고깃덩어리가, 되살아난 도살체가 피로 물든 채, 피로 배가 불룩해진 채 뛰어드는 것이다. 나는 질겁을 했다. “그만두지 못해! 저쪽으로 가라구! 나가버려!” 그러나 개들은 이미 뒷발로 서서 나에게 재롱을 피우면서 엉겨들고 있었다.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이빨에도 피가 묻었고 눈 주위에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만두지 못해! 개새끼들아!” 로브도 잠옷도 흰 슬리퍼도 못쓰게 되었다. 피는 물에 떨어진 염료처럼 곧 흰 무명으로 번져갔다. 개들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놈들은 뒤로 물러서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아름다운 피의 안개가 벽에, 현관의 흰 융단에, 화분으로 번져갔다. 개들은 킁킁거리더니 몸을 눕혀 자신들의 발을 핥기 시작했다. 피가 개들의 몸 아래에서 빨래를 짜듯이 서서히 흘러나왔다. 냄새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왠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분노와 절망의 눈물. 현관은 마치 산 동물을 바치는 희생의 제단이고, 나의 두 팔은 그 희생 위에 뻗쳐진 고승(高僧)의 피투성이 팔 같았다. 대충 씻어버리고 침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무엇인가 분명히 살아있는 것과 상대하고 싶었다. 욕실로 들어서자 욕실의 매트를 더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붉게 물든 슬리퍼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두 손과 얼굴을 로브의 뒷천으로 닦아내고 둘둘 말아서 세탁바구니에 쑤셔넣었다. 전동 치솔 일곱 개와 컵 일곱 개, 전열 빗 일곱 개가 세면대 위에 매달려 있었다. 전기 면도기도 일곱 개가 각각 휴대용 케이스에 든 채 깔끔하게 쌓여 있었다. 샤워기 밑으로 다가섰다. 목욕탕의 창을 내려치는 빗소리가 시끄럽기만 했다. 수도꼭지를 최대한 강하게 틀었다. 눈을 꼭 감고 물방울에다 얼굴을 대며 따뜻한 물의 분사에 온몸을 맡겼다. 샤워를 하거나 목욕을 하며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언제나 무상의 즐거움이었다---그렇게 하고 있으면 어머니에 관한 것, 어머니가 시켜주던 목욕에 관한 것들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내 몸을 스폰지로 씻고 나의 젖은 작은 발에 키스해 주었다...그러나 이상하다---이 냄새---아니 수도에까지! 등골이 오싹해져서 샤워기에서 물러났다. 수증기로 흐려진 거울 속의 나는 갓난아기 같았다. 피와 점액에 감싸인 자궁에서 갓 들어낸, 물기도 마르기 전의 신생아.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붉은 피가 몸을 따라 흘러 발치에 피의 웅덩이를 만들었다. 나는 변기 뚜껑을 열고 안에다 토했다. 머리를 숙이고 토했다. 토하고 소리질렀다. 이윽고 에이미가 내려와서 나를 발견했다.
게슈는 푹신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금빛 모노그램으로 짠 흰 로브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혈우는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전례를 뒤져볼 필요가 있겠는데.” 그는 말했다. 오븐에는 파이와 스플레가 들어 있었다. 모두가 거실에 모여 살구즙을 마시고 롤빵을 먹고 있었다. 아리스는 세제와 솔을 들고 현관에 서서 마치 맥베드 부인처럼 융단의 붉은 반점을 보고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전례라니?” 내가 물었다. “3천 5백여년 전의 이집트 일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는 거야. 그 일대에는 여러가지 잡다한 일들이 있었잖아.” 월터는 베이스 기타를 조율하고 있었다. 지지직, 지지직. 이런 소리를 한두 번 내더니 얼굴을 들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개구리겠지? 수백만 마리의 개구리. 침대 밑에도 개구리. 밀가루에도 개구리. 신발에도 개구리. 똥을 누려고 하면 써늘한 개구리의 살갗이 엉덩이를 탁탁 때려주는...” “그게 아니야. 아마도 피에 관해서 무언가가 있을 거야.” 월터가 말했다. “있지, 있어. 그리스도가 피를 물로 바꾸었지. 아니, 포도주였던가?” “이집트에 관해서라고 했지? 무엇이 있었는지 정말 알고 싶어?” 나의 목소리는 거칠어졌다. 신경질이 났던 것이다. 고양이 한 마리가 무릎에 뛰어올랐지만 나는 그놈을 어깨 너머로 던져 버렸다. 방 안은 모든 것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릴 적 입체만화를 읽을 때 사용했던 붉은 셀로판 안경을 낀 것만 같았다. 게슈가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뭐가 있었는데?” “그만두겠어.” 내가 말했다. 에이미가 지하실에서 소리쳤다. “이봐, 너희들, 여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 발목까지 차 있고 모든 게 못쓰게 되었어. 크로케 세트도 캠핑도구도, 인형의 집까지도!” 이 보고에 모두가 우울해졌다. 게슈도 마찬가지였다. “대마초를 듬뿍 태우며 잊어버리자구.” 그는 말했다. 월터가 말했다. “어쨌든 나무의 성장에는 좋지 않을까?” 그리고는 깊고 육중한 소리로 베이스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그러나...그 소리가 공중에서 맴돌고 있는 동안에 전기가 끊어지고 계속되는 연주는 약해져 가느다란 금속성의 속삭임처럼 변해 버렸다. “아니 이거!” 그는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부엌에서 “빌어먹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자벨이 두 손을 비비며 나타났다. “아아! 아침식사도 망쳤어! 파이는 반밖에 굽히지 않았고, 스플레는 납작한 그대로야. 믹서한 생계란 덩어리는 풀리지도 않고.” 이제 방안은 기묘한 색상이 되어버렸다. 비가 오는 날의 우울한 잿빛이 아니라 짙은 홍갈색. 포도주와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다지? 개들한테 줘버려?” 개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털이 피로 말라붙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는 것 같았다. 스코트가 불쑥 말했다. “나 배고픈데!”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창에서 최초의 물방울을 발견한 그때부터 나는 줄곧 무서웠다. 나는 우리의 리더인 게슈를 바라보았다. 그는 빨간 광선 속에서 능글능글 웃으며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파이프를 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마크와 내가 산책삼아 나가서 샌드위치를 사오지.” “밖에는 나가고 싶지 않아. 그랬다가는 점심도 얻어먹지 못하게 될 거야.” “야아, 겁낼 것 없어. 그렇게 하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는 일어섰다. “자아, 마크, 장화를 신으라구.”
밖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붉은 하늘, 붉은 나무, 붉은 지평선. 전세계가 지붕에서 들판, 산까지, 강의 저편까지 거대한 내장의 안쪽처럼 변해 있었다. 자신이 어쩐지 소화되지 않은 식품의 한 덩어리처럼 느껴졌다---고래 뱃속에 들어앉은 잡어처럼. 썩은 고기같은 이상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비는---혈우는---더욱 억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처마 밑에서, 포치에서 우리는 비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차까지 달려갈 힘을 내보려고 했다. 게슈도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제는 이상한 일로 웃어넘겨 버렸지만 오늘처럼 되어버린다면 이미 전염병인 것이다. “마크, 어떻게 생각해...달려볼까?” 그가 말했다. 우리는 달렸다....계단을, 피의 진흙 속을. 나는 미끄러져 뒹굴었으나 게슈는 앞도 보이지 않는 억수같은 피의 비 속을 무작정 달렸다. 내가 넘어진 곳은 더욱 깊이 파여 그 일대가 검붉은 피의 웅덩이로 변했다. 피가 장화 속으로 자꾸만 스며들어 다리 위로 끈끈하게 흘러내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나쁘게 따끈했으며 뜨거울 정도였다. 피비린내로 속이 뒤집혀질 지경이었다. 살구즙과 비스켓이 되넘어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겨우 일어서서 차를 향해 달렸다. 차에 도달하자 게슈가 문 옆에 서서 혈우를 그대로 맞고 있었다. “시트를 어떻게 한다지? 얼룩이 지면 절대 빠지지 않는다구.”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빨리 가자구.” “나는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겨우 이 BMW를 구입했단 말야.” 바람과 함께 몰아치는 피의 빗방울이 우리의 노란 우의를 두드리고 노란 비모자의 펄럭이는 챙으로 토닥토닥 떨어져내렸다. 우리는 기어오르듯이 차에 올랐다. 엔진은 청소기처럼 가볍게 시동이 걸렸다. 와이퍼가 움직이고 앞유리가 순식간에 끈끈해졌다. “사막에라도 가자구... 아리조나나 어디라도. 이런 곳에서, 이런 거지같은 곳에서 벗어나자구.” 내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창으로 손을 뻗쳤다. “이봐, 너 뭘하고 있어?” 게슈가 말했다. 이미 피는 유리 속으로 흘러들어와 도어의 불룩한 내장(內裝) 위로 뻗어와 팔걸이의 재떨이에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창을 닫았다. “기분이 좋지 않단 말이야.” 나는 말했다. “부탁이야. 제발 밖에다 토하라구!” 그러나 불가능했다. 미친 듯이 퍼붓는 피 속에 머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메슥거려 토해버렸다. 밀폐된 차 안에서 토해낸 음식의 냄새와 장화 속으로 타고들어온 피, 진흙의 악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두 차례 토했다. 세번째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야단났군.” 게슈가 말했다. “난 돌아가겠어.” 내가 말했다.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5분 후에 게슈는 중얼거리며 돌아왔다. 스코트가 문을 나가려고 하고 있을 때였다. 목에 카메라를 세 대나 걸고 있었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나무의 칼라 슬라이드를 찍을 생각인 듯 했다. “어떻게 된 거지? 빠르군!”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 마당 밖에까지 나갔다가 돌담에 부딪치고 말았어. 와이퍼는 전혀 쓸 수가 없고 앞유리는 끈적거리기만 한다구. 핑거 페인팅 그림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 같아.” “그래서 차는?” “별로 상한 데는 없어. 어쨌든 시속 2마일 정도였으니까.” 아리스가 부엌에서 나왔다. 불이 켜진 초 두 자루를 손에 들고 있었다. 뜨거운 촛물을 쏟지 않으려고 살며시 걷고 있었다. “게슈! 그 우의는 벗는 게 어때? 바닥에 또닥또닥 떨어지고 있잖아...그래, 결국은 해내지 못했군!” “그래.” “그럼 우릴 뭘 먹는다지?” “거기에 있는 걸 몽땅 모아오라구! 한데 모아서 피죽이라도 끓이는 거지 뭐!” 월터가 거실에서 소리쳤다.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완전히 지쳤고, 숨만 헐떡이고 있었다. 피가 두 손의 손금 사이에서 응고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먹었어. 이층에서 자야겠어.” 내가 말했다. “그게 좋겠군. 나도 그렇게 하겠어.” 게슈가 동의했다. “나도야. 여기에 있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책도 읽을 수 없고, 음악도 들을 수 없고.” 아리스의 말이었다. “그렇겠군. 그게 좋을지 모르지. 내 베개도 준비해 놓으라구.” 월터도 말했다. “나도 그래야겠어.” 에이미가 말했다. 스코트는 카메라를 목에서 벗겨내더니 내가 앉은 의자 등에다 걸었다. 모두가 자는 것이 좋겠다고 이자벨이 말했다. 그 말에는 모두가 낮잠이라도 자고 있으면, 모두가 눈을 감고 있으면 모든 것이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다.
꿈 속에서 나는 흥분하여 눈을 떴다. (열대우가 쏟아지는 숲 속에서 나는 승마용 바지와 해를 가리는 모자를 쓰고---당장에라도 토할 것만 같은 표정으로---수목처럼 키가 큰 마사이족의 전사들과 따뜻한 소의 피와 우유가 든 큰 잔을 들고 있었다.) 주변은 뿌옇게 붉은 기가 감도는 어둠 속에서 동료들의 편안한 숨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모두가 한가한 잠옷 차림으로 침대마다 각자 편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나의 귀는 민감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여전히 들려왔으며, 수조에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계단 아래의 어디에선가 흐르는 물소리가, 계곡의 물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수(浸水)일까? 에이미의 슬리퍼를 신고 초를 켠 다음 소리없이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현관을 보고 거실, 식당, 부엌, 목욕탕을 점검했다. 이상은 없었다. 어딘가에서 고양이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이다! 문을 열자 고양이가 뛰쳐나왔다. 어두운 계단을 들여다보았다. 피의 홍수가 다섯번째 계단까지 밀려왔고, 보아하니 약 4피트 깊이인데 갈수록 물이, 아니 피가 흘러드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피비린내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세게 닫았다. 그제서야 나는 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물이 아니라 피다! 제대로 될까? 지금 이 시간에도 이미 집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가 밖에서 씩씩거리며 흙이 든 자루를 쌓아올리고, 바람을 맞아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피의 홍수의 수량을 측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코와 입과 눈으로 뜨거운 혈액이 날아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순간 속이 메슥거렸다. 게슈가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 잠에 취한 듯 온몸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어때?” 그가 말했다. 지하실을 들여다보라고 내가 말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건 뭐야 대체! 어떻게 손을 써야겠는걸.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뜨는 건 뭐든지 처마에 매달고 여자들을 피난시켜야겠어. 그리고 개들도!” 그는 여기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배가 출출한데.” 그가 덧붙였다. “뭐가 남아 있는지 봐야겠군.” 부엌에서 남은 음식을 조사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지근한 콜라 여섯 개 들이가 두 개. 스키피 땅콩버터가 한 병. 딱딱한 빵은 없음. 토마토 시튜 깡통 열 개. 그라노라가 상자에 반. 현미가 한 봉지. 훈제된 귤이 한 깡통. 요컨대 별볼일 없는 것들이군. 이봐 마크, 간식 같이 먹지 않을래?” “필요없어. 배고프지 않아.”
그날 밤 우리는 어두운 거실에 모여앉았다. 초 하나가 힘없이 타고 있었다. 창에서는 토닥토닥 빗방울 소리가 들리고 집의 외벽에서는 물이 흘러가며 격돌하는 소리가, 지하실에서는 기분나쁘게 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수는 현관에서도 시작되었고, 이자벨은 조금이라도 수분을 흡수하도록 고양이가 쓰던 50파운드짜리 짚이불을 문틈에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다 방수벽이 되도록 흡수력이 좋은 것부터 쌓아올렸다. 전기담요와 이탈리아어 사전까지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쌓아놓았다. 비슷한 바리케이드가 지하실 문 앞에도 만들어졌다. 게슈가 조금 전 창을 열고 동태를 살펴보러 갔을 때는 집을 감돌면서 다가오던 붉은 물줄기가 창틀까지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을 하면서도 배도 고프고 지쳐 있었다. “이젠 지쳤어!” 에이미가 말했다. “배가 고프단 말야. 콜라는 이제 질렸고 뜨거운 차라도 한 잔 하고 싶어.” 이자벨이 불평을 했다. “정말 냄새가 지독해. 열다섯 살 때 A&R식육부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일이 생각나.” 아리스가 거들었다. “이빨이 와삭거린단 말야. 물과 칫솔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까?” 방의 맨 가장자리 창틀로 피가 새어들기 시작했고, 그곳의 36인치 피셔 스피커 위에 피가 모였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것을 핥기 시작했다. 월터가 방안을 쏘다니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린 사나이. 베이스 기타를 빼앗기자 그는 맨손이었다. 생기도 성질도 없어진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 대한 우리의 중요한 대화에도 이미 참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게슈는 우리를 웃기고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냐. 늙은 어머니인 대지(大地)가 멘스를 했을 뿐이야. 내일이라도 틀림없이 멎는다구.” 그는 5분의 1쯤 남은 포도주와 가늘게 만 모르핀을 모두에게 돌렸다. 도어 아래쪽에 생긴 피의 웅덩이가 바닥 쪽으로 뻗어와 그것이 자꾸만 커져 부채꼴을 이루면서 우리가 둥글게 모여 앉아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우리의 코를 비추고 있던 촛불이 피를 비추었다. 경악과 충격으로 입을 다문 채 모두들 피의 가차없는 전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피는 바리케이드를 소리도 없이 빠져나와 지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 흘러오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은 가죽을 덮은 소파의 쿠션 아래쪽으로, 그 위에는 내 엉덩이가 얹혀 있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피의 둥근 손가락 끝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 붉은 손가락이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1피트 남았을 때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말했다. “자야겠어. 수면제 두 알을 먹을 테니 깨우지 말라구.”
눈을 뜬 것은 아침이었다. 게슈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은 자고 있었다. “그쳤어.” 그가 말했다. 사실이었다. 들리는 것은 창 너머에서 산발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태풍이 스쳐간 후의 물방울 소리였다. 하늘의 동맥절개수술은 끝났다. “그거 잘 됐군.” 이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뻤다. 기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젠 안심이다!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봐, 식품점에 가서 샌드위치랑 도우넛, 커피를 한아름 사와가지고 이 녀석들을 놀라게 해주자구.” 게슈가 말했다. 호기심이 발동했고, 배도 꼬르륵 소리를 냈다. 그러나 위장은 피냄새와 황폐화된 전장과도 같은 뜰을 생각한 순간 위축되었다. 나는 내 잠옷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에이미의 잠들어 있는 손목이 거기에 얹혀 있었다. 그녀의 흰 손목과 내 잠옷의 핑크와 갈색의 반점들을 비교해 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게슈가 재촉했다. “가야지.”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골덴 바지에, 흰 고무장화를 신고 앙고라 스웨터를 입었다. 아래층의 피는 말라서 응고되기 시작한 상태였다. 현관은 여기저기가 끈적거렸으나 대부분 말라서 피막이 생겨 있었다. 밖에서는 검은 갈색의 하늘 아래 대규모의 섬유소 생성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엷은 얼음같은 피막이 피 웅덩이 위에 생기고 있었다. 진흙은 발에 밟히자 와삭와삭 소리를 냈다. 새로 생긴 피가 작은 시내를 이루고 웅덩이로 흘러든다. 나무들은 마치 고드름처럼 검붉은 핏덩어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이봐! 하늘을 보라구. 갈색이야.” 게슈가 말했다. “그렇군. 이상한 느낌인데. 그러나 피가 멎은 건 정말 고마운 일이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게슈가 차에 시동을 걸고 있는 동안 나는 앞유리에 말라붙은 피를 긁어냈다. 그것은 흡사 오래된 먼지덩어리 같았다. 간신히 차에 올라타고 바닥에 쌓인 하루 지난 진흙 위에 신문지를 깔아 악취를 견뎌내려고 몸을 잔뜩 도사렸다. 게슈는 돌담에서 후진하려고 액셀을 밟았다. 바퀴가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목을 내밀었다. 바퀴의 휠캡 부분까지 피가 섞인 진흙 속에 푹 파묻혀 있었다. “빌어먹을!” 게슈가 내뱉았다. “스코트의 차로 가자구!” 우리는 뜰에 있는 또 한 대의 차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핏덩어리가 우박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포치 안으로 허겁지겁 몸을 피하자 계속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묵직하고 끈끈한, 반고체의 피우박들이. 이층에서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얌전히 스웨터를 개어놓았다. 흰 잠옷을 도로 주워 입었다. 그리고 나서 모두가 한데 몰려 자고 있는 어느 쪽이 따뜻할까 하고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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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찍 17세기 초엽, 프랑스에서 처음 내렸다는 혈우... 대서양의 방대한 기류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미혹생&적갈색 진토를 휩쓸어와 빗방울과 섞여서 생긴 현상이라고 분석되어 있습니다만... 소설은 소위 인류문명으로 인한 끔찍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몸서리치면서도 끝까지 다 읽었네요.. ㅎㅎ
용케 완독을 했네유......ㅎㅎ......
이미지들을 배합하려했는데, 죄다 잠가놓아서리, 펌이 불가해서
아쉬웠지유....ㅠㅠ....
인류 "최고의 지성"들은 과학문명과 "개발과 성장"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질서와 틀속에서 무한정, 벼랑끝으로
내닫고있는 인류의 미래에 대한 심한 우려와 위기감을 표출하고있음과 아울러 엄정한 경고와 절규를 하고 있지요.
간디거나 사파타같은 "지성"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런 테마들을 작가들이 다루게 되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소설로 얼핏 멕시코작가 호세 아레올라의 미니픽션--
<원숭이>를 들 수가 있지요.......인류 력사발전 행정의 어떤 "대안'에 대한 "탐구"는 문학도 외면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