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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마 5: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 바울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라고 말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누리는 것 중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받았고,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을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오직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가진 것이 우리의 능력과 노력으로 얻어진다고 한다면, 어쩌면, 삶의 고달픔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쓰고, 힘쓰고, 몸부림치는데도, 우리의 생각대로 안될 때가 많습니다. 힘들게 노력했는데,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똑같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원망과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며, 노래 부르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가 시작되었고, 어느덧, 여러 날들이 벌써 흘러갔습니다. 작년에는 이루지 못한 일들을 올해에는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그 결심을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올해는 작년보다는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팔복 가운데, “온유한 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시내를 가로질러 달릴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산 사이를 달리는 경우도 있고,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달릴 때도 있습니다. 가끔, “저 깊은 산도 누군가의 소유이고, 저 논과 밭도 누군가의 소유인데, 진정 내 땅은 한 평도 없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소유의 땅이 있습니까?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땅을 산다고 합니다.
부동산 투기의 목적으로 땅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훗날, 은퇴하게 되면, 시골에 내려가. 집 짓고, 농사일 하며, 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마음에 땅을 사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은퇴한 후에, 시골에 내려가, 농사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유가 있으면, 은행에 저축하기보다는 땅을 산다고 합니다.
가까운 곳에 땅을 사서 농사짓는 분이 계셔서, 그분이 와서 도와달라고 하면,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달려가 도와주곤 했는데, 그분이 은퇴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든, 욕심부리지 말고, 오늘 내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뒷부분에 나오는 “땅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 때문에, 앞부분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뒷부분만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동네 친구들과 함께 “땅 따 먹기” 게임을 즐겼습니다.
빈 공터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게임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누가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땅을 차지할 때마다, 얼마나 좋아했는지, 크게 소리 지르고,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땅을 빼앗길 때마다, 안타까워하고, 탄식하고, “어떻게 하면, 빼앗긴 땅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궁리했던 것 같습니다. 더 세게 돌멩이를 치고, 더 세게 줄을 그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고 보니, 내 땅도 아닌 남의 땅을 가지고, 땅 따 먹기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해가 지고, 게임이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미련없이, 집으로 돌아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남의 땅 위에서, 땅 따 먹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떻게 하면, 땅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한 번 얻은 땅, 영원히 내 땅으로 소유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유”가 무엇입니까? “온유”라고 하는 말은 “낮아진다. 머리를 숙인다. 고통을 견디다. 다툼없이 순종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세상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을 “비굴하고, 연약하고,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보았을 때,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매력없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회사 일이든, 정치적인 일이든, 강경하게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습니다.”라고 말하면, 과연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들은 “온유한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땅을 차지한다고, 온유한 사람이 공천권을 얻는다고, 온유라고 하는 것은 소심하고, 약하고, 비굴하고, 줏대 없는 사람들의 태도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싸우고, 강경하게 투쟁하는 사람이 승리하고, 쟁취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나의 권리를 챙겨주고, 나에게 공천권을 가져다주나.”라고 말할 것입니다.
강하게 싸워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하게 어필해야, 공천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연예계를 보면, 시청률에 따라, 출연 배우가 받는 대우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드라마를 보았느냐에 따라, 거기에 출연한 배우들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인기가 엄청났습니다.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예수님에게 힘이 있었고, 권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마치셨을 때,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다”(마 7:29)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힘과 권위와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묵묵히 그 고통을 견디셨고, 참으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낮아지셨고, 머리를 숙이셨고, 고통을 견디셨고, 순종하셨습니다.
조선 광해군 때, 하동군 어느 동네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양반집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아주 경사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가마꾼들이 신부가 탄 가마를 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산길을 가다가, 산길 고갯마루 턱에 올라갔는데, 공교롭게도, 맞은 편에서도 가마가 왔습니다. 아주 좁은 길에서, 가마가 마주쳤는데, 서로 비켜 주지 않았습니다. 두 집안이 오래전부터 원수처럼 지내왔던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비켜 주지 않았습니다. 비켜 주는 것은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일 동안을 그렇게, 서로 양보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렇다가, 가마의 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그리고, 양쪽 가마에서, 두 신부가 나왔고, 가슴에 돌을 안고, 물속에 빠져, 자결했습니다. 양쪽 집안의 두 신부는 자결함으로서, 길을 양보하지 않고, 가문을 더럽히지 않고, 가문을 높이겠다고 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쪽 가마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문을 지킨다고, 전통을 지킨다고, 결국은 이런 슬픈 비극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서로 양보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느 한쪽이라도, 머리를 숙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길을 비켜 준다고 하는 것이, 그리도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거기에 목숨까지 버려야 할 일입니까? 우리에게, 온유가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끄러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고, 모욕과 고통을 참으시고, 견디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약한 분이 아니시라,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만을 의지하던 자만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부드러운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대신 전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옆으로는 이웃에게 대드는 대신, 이웃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시고, “모세는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히브리서 3:5절을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신실함과 충성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모세는......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옛날 성경에는 “모세는......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하나님께 온유하게, 신실하게, 순종하고, 충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너는 애굽으로 가서 내 백성을 만나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하나님께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너는 애굽의 바로에게 가서 내 명령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향해 “너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모세는 하나님께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했을 때에도, 모세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너무 화가 나서, 하나님께 대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함으로, 실수한 일이 한 번 있었습니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가데스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를 비방하며,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며, 다투었을 때, 그만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을 못마땅히 여기며,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온유한 사람 모세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만함과 방자함의 큰 실수를 한번 범했습니다.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모세는 자기가 범한 오만함과 방자함의 실수를 즉시 깨닫고, 다시 겸손해지고, 다시 온유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을 데리고, 호르산으로 올라가서,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에게 입히라고 말씀하셨을 때,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치시되,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했을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중보 기도를 다시 드렸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 21:7-8).
모세는 그 이후부터 마지막까지, 온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지만, 그의 마음과 입술에는 하나님과 백성들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한번 실수를 했다고, 저를 이렇게 대우하십니까? 제가 그동안 하나님께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그런데, 저를 이렇게 버리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저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 아니면 누가 저들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모세는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기를 원망하고 대들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축복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신 4:22-23)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40).
얼마나,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권면입니까? 결국,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는 평가를 받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온유한 사람”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원망하지도 않으셨고, 사람들의 버림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불평하지도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온유하신 모습을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한 베드로나 돈 받고 자기를 판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원망이나 원한의 마음을 품지 않았고, 자기를 정죄한 빌라도에 대해서도, 원망이나 원한의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그들에게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요 13:26)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할 가룟 유다에게 떡 한 조각을 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1-32)
예수님께서는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자기를 부인할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중에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의 온유하심에 대하여,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라고 말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쓴 잔을 받으시면서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며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면서도,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욕하고, 조롱하며, 못을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원망이나 미움의 마음을 품는 대신,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겸손하고 온유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2-13)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1-1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3:2).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온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온유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착한 사람,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온유해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0:38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8-9)라고 말했습니다.
빛의 자녀가 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열매도 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라고 말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의 사욕을 채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 재물을 이용하여, 악한 일들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똑똑하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온유하고 착한 사람, 선한 사람입니다.
이것저것 무언가를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잘하고, 이웃에게 잘하는 온유하고 착한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온유하고 착한 사람이 손해를 보는 세상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리할지라도, 마지막 날에는, 예수님 말씀처럼, 온유하고 착한 사람이 복을 받게 되고, 그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근래, 북한이 계속해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의 땅을 차지하고자 하는 검은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강한 척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절대로 대한민국의 땅을 한 뼘이라도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을 받고,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우리는 온유하고,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어떤 형편에 있든지, 착하고 선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해놓으신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이 넘쳐날 수 있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불신앙과 불순종이 아니라, 믿음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온유함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아감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