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보총각과 곰보 드므
김정배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부연 날이었습니다.
최 부자는 집 안팎을 휘돌아 나오다 뒤란에 있는 드므에 잠시 눈이 멎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바꿔버려야겠군.”
“헉! 나를?”
드므는 흠칫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최 부자 뒤를 따라다니며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던 덕보 총각도 드므를 흘긋 쳐다봤습니다.
“요거를 바꾼다구유?”
덕보가 놀란 표정으로 드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흠!”
덕보 총각의 물음에 최부자는 신음과도 같은 소리만 내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저건 안 되는디. 자영 아가씨가 좋아하는 건디.’
덕보 총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최 부자 뒤를 바삐 따라갔습니다.
최부잣집 뒤란의 드므는 덕보가 최 부자 집에 오고 나서 한 달쯤 후에 들여놓았습니다. 그때 자영 아가씨는 일곱 살이었고요.
최 부자는 온 식구를 불러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넓적하게 생긴 큰 독이었는데 덕보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뭐에 쓰는 물건인고 하믄 김치 담고, 된장 담고 하는 항아리가 아니라 ‘방화수통’이라는 것이여 이. 방화수통이 뭣인고 하믄 물을 담아뒀다가 불이 났을 때 이 물로다 불을 끄는 거란 말이여. 잘 알았자?”
최 부자가 드므의 용도를 설명하고 있을 때 서울댁이 동네 아주머니 둘을 데리고 구경하러 왔습니다.
“드므라는 거 들여놨다면서요? 우리도 구경 좀 해도 되지요?”
같이 온 두 아주머니는 좀 멀찍이 서 있는데 서울댁은 최 부자 집 식구들 사이를 비집고 드므 앞으로 바싹 다가섰습니다.
“오매, 그러니까 여기다 물을 그득 담아 두면 불귀신 화마가 왔다가 물에 비친 흉측한 자기 얼굴 보고 놀라 도망간다는 거로군요.”
“예? 그게 사실이어요? 서울댁이 지어낸 말 아니고요?”
최 부자 부인은 서울댁이 하도 허무맹랑한 말을 잘해서 선뜻 믿기지 않았습니다.
“내 말 못 믿으면 창덕궁 인정전에 가보시던가요. 월대 한쪽 귀퉁이에 커다란 화로 같은 것이 드므잖아요. 그곳에 놓은 이유가 불귀신을 내쫓기 위해서라네요."
이럴 때 서울댁은 아는 게 무척 많아 보입니다. 언제나 빗나가는 자기 생각을 덧 붙이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모여 섰던 사람들이 돌아가고 나자 덕보는 다른 일꾼들과 같이 드므에 물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최부자 외동딸 자영 아가씨는 두 살 위인 부엌일 보는 아줌마 딸과 이곳에서 숨바꼭질하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자영 아가씨가 며칠째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원도 다녀가는 것 같았습니다. 자영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모두 입을 잠가버렸는지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영 아가씨가 드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밖에 나다니지 않은 지 열흘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헉!”
덕보는 자영 아가씨를 보는 순간 너무 놀라 까무라칠 뻔했습니다.
마마를 앓고 나서 얼굴이 얽득얽득 해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바람보다도 앞서 서울댁 귀로 달려갔습니다.
“난, 진작 그럴 줄 알았다니까. 다 그 드므 때문이라고. 자네도 그때 나랑 같이 봤지. 드므 아래가 얽둑빼기인 거.”
서울댁은 같이 구경 갔던 아주머니들한테 떠벌려댔습니다. 그 말은 곧 최 부자 부인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최 부자 부인은 최 부자한테 드므를 없애버리자고 했지만, 최 부자는
“당치도 않은 소리!”
하며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그 후 드므는 잘못한 일도 없이 최부잣집 사람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영 아가씨는 드므를 친구처럼 생각했습니다.
정말 드므와 자영 아가씨는 특별한 사이였습니다. 그런 드므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최 부자는 딸의 혼인을 앞두고 보니 언젠가 서울댁이 했던 말이 걸렸던 것입니다.
덕보의 예상대로 자영 아가씨는 몹시 슬퍼했습니다. 아버지한테 사정해 보았지만 한 번 마음먹은 것은 꼭 하고 마는 성격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덕보는 자영 아가씨가 좋아하는 드므를 어떻게든 못 버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마마 앓은 흔적이 있는 자영아가씨가 안 돼 보여서 무엇이든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내었지요.
“드므 말인디유, 석 달 품삯 안 받고 제가 가져가면 안 되유?”
“네가? 네가 가져가서 뭐하게?”
최 부자는 덕보의 엉뚱한 제안에 놀라는 듯했습니다.
“시골 우리 집에 갖다 놓으믄 빗물 받아 쓸 수 있으니께, 우리 엄니가 물 길러 안 다녀도 될 거구만유.”
“하긴, 네 말도 틀리지는 않구나. 그러렴.”
어차피 버리려던 물건인데 최 부자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흥정은 아니었습니다.
이틀 후 덕보 총각은 드므를 손수레에 싣고 시골집을 향해 떠났습니다. 우중충한 하늘이 곧 눈발이라도 내릴 것 같았습니다.
첫 번째 고개를 넘으면 옹기시장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옹기를 만드는 곳이니까요. 그곳에서 덕보를 최부잣집에 소개해준 먼 친척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니! 덕보 아니냐?”
그 아저씨는 시장에서 옹기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드므를 싣고 어디 가는 거냐?”
“우리 집에유. 주인 어르신이 버리려고 해서 우리 집에 보관해 두려구유. 아가씨가 아끼는 물건이라서유.”
“그래? 아가씨가 그러라고 했어?”
“아니유. 그냥 제 생각이여유.”
“그럼 팔아도 되겠구먼. 내게 팔아, 응.”
“싫구먼유. 이것은 팔구 사구 할 물건이 아니랑께유.”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런데 장가는 안 갈 거야? 열네 살 때 최부잣집에 들어갔으니까 장가갈 나이가 지났구먼.”
“색시가 있어야 가지유.”
“그럼, 내가 예쁜 색시 소개해 줄까?”
“참말로 유?”
덕보 총각은 넓적한 드므만큼이나 입이 쫙 벌어졌습니다.
“그럼, 그거 나한테 팔 거지?”
“싫구먼유. 나 그만 가 볼래유.”
덕보는 잠시 멈춰 섰던 손수레를 밀고 둘째 고개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회색빛 하늘에서 퍼뜰퍼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오는데도 몸에서는 땀이 났습니다. 둘째 고개를 막 넘으려는데 누가 뒤에서 덕보 총각 목덜미를 팍 잡았습니다.
“어무이유!”
덕보 총각은 놀라 부들부들 떨며 곁눈으로 보니 아무래도 도둑 같아 보였습니다.
“거 뭣에 쓰는 거야?”
도둑같이 보이는 그 사람은 드므가 무슨 용도에 쓰는 물건인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거유? 요물 항아리지유. 밤마다 이상한 요귀들이 나와서 주인 아가씨를 괴롭히지유. 그래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머얼리 갖다 버리라고 해서 버리러 가는 중이어유.”
도둑 같은 사람은 덕보 총각 말에 뒤로 물러서더니 아무 말도 안고 도망치듯 가버렸습니다.
“크크크.”
덕보 총각은 어디서 그런 말이 술술 나왔는지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웠습니다.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손수레가 자꾸만 옆으로 미끄러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드므가 손수레에서 떨어질 까봐 심장이 쿵 하고 놀라곤 했습니다.
셋째 고개를 오르려고 할 때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맨몸으로 걸어서도 고개를 넘어가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해도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져서 곧 어두워질 것 같았습니다. 손수레 바퀴도 눈으로 막혀 돌지 못했습니다.
“이놈을 어쩐 디야. 밀고 갈 수도 없고, 놔두고 갈 수도 없고.”
덕보 총각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어무이야! 해가 떨어지려고 하나뵈. 이러다가 길에서 얼어 죽겠구먼.”
덕보는 손수레에서 조심조심 드므를 길바닥으로 내려놓았습니다. 발로 눈을 툭툭 밟아 평평한 곳을 골라 잘 세웠습니다.
셋째 고개 입구에 드므와 손수레를 놓아두고 덕보 총각은 고개를 넘어 집으로 갔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와서 밀고 갈 생각이었습니다. 한참 걸어가던 덕보 총각이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아유! 내 정신 좀 봐. 드므를 엎질러 놨어야 하는디. 눈이 녹아서 물이 고이면 큰일이잖여.”
한참 망설이던 덕보 총각은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한 대 쿵 쥐어박고는 ‘할 수 없지’ 하며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덕보 총각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몸이 고드름 같았습니다.
놀란 식구들이 따듯한 방으로 데려다 눕히자, 열이 펄펄 끓었습니다.
3일 동안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습니다. 덕보 총각이 그러고 있는 동안도 눈은 왔다 그치기를 반복했습니다.
4일째 되는 날 덕보 총각은 정신이 들자 드므를 가지러 갔습니다.
“분명 여기가 맞는디. 그새 드므에 발이 달렸나?”
셋째 고개 입구에 놓아둔 드므와 손수레가 감쪽같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둘째 고개와 첫째 고개까지 가보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보 총각은 힘없이 최 부자네 집으로 갔습니다.
대문 안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분명히 셋째 고개 입구에 놓아둔 곰보 드므가 최 부자네 집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왜 여기 있어유? 얼매나 찾았는데유?”
“말도 말어. 어젯밤 도둑 들어서 자영 아가씨 혼인날 입을 한복이랑 폐물이든 보자기를 통째로 가져가 버린 거여.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지.”
부엌일 보는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그래서유?”
덕호 총각이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습니다.
“눈이 다 녹지 않아서 발자국이 나 있는 거야. 그 발자국을 따라 쫓아갔지. 덕보 총각네 집 가는고개라드만. 그 셋째 고개 입구에 도둑놈이 드므에 얼굴을 드리밀어 기절해 있고, 훔쳐가던 보따리는 밑에 떨어져 있었대. 얼매나 다행이여. 못 찾았으면 자영 아가씨 혼인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
덕보 총각은 부엌일 보는 아주머니 말을 듣고도 무슨 말인지 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덩그러니 있는 드므를 쳐다보았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제 알겠구먼유. 그 도둑이구먼유. 둘째 고개에서 만났던 도둑놈이유.”
“그 도둑이라니?”
부엌일 보는 아주머니가 재빨리 물었습니다.
“제가 유, 둘째 고개를 넘어가려는디유 도둑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게 뭐냐고 묻는 거예유. 그래서 꾀를 좀 냈구먼유. 요물 항아린 디 밤마다 요귀들이 나와서 괴롭힌다고 겁을 줬지유. 잽싸게 내빼더니만 해필 자영 아가씨 결혼 준비물을 가져 갔었네유.”
“아유, 답답아. 그것하고 도둑이 드므에서 기절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냐고?”
“있지유. 아가씨 혼수품을 훔쳐 달아나다, 항아리에 물을 보고 마시려는데 문득 제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났겠지유. 요물 항아린데 요귀들이 나타난다고 했던 말유. 그래서 자기 얼굴이 요귀로 보여서 까므러쳤을 거예유.”
덕보는 드므를 쳐다보았습니다. 드므는 맞는다는 듯이 빙긋 웃었습니다.
며칠 후 자영 아가씨가 결혼하는 날 혼수품을 실은 수레에 드므는 당당하게 앉아있었습니다.
< 원고지 31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