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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13-19 아브라함의 터닝포인트 25. 2. 9 주일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아브라함의 터닝포인트”입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 터닝 포인트가 있습니다. 터닝 포인트는 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분기점이 됩니다. 전화위복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특별한 터닝 포인트를 통해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그 여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게도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의 신앙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대상16:16이하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하시고 그 아들 이삭에게 맹세하시고 야곱에게 율례, 곧 영원한 언약을 정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이는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대상16:16~18)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무엇입니까? 자손에 대한 복과 약속의 땅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손대는 것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는 그런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연합하는 모든 자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갈3:8,14). 우리도 이 복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브라함의 복이 우리 이방인에게도 흘러오게 한 것이 또한 복음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도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있었는데, 즉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게 된 특별한 명령과 순종이 세 번 있었습니다. 이 세 번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도 그를 자랑합니다. 사41:8에 보면 아브라함은 나의 친구, 나의 벗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명령들이 무엇입니까? 먼저 창12:1,2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 네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합니다.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75세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것이 그의 삶의 울타리요, 배경입니다. 그 배경을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자리 잡았는데 떠나라니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 땅을 떠나라고 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새로운 언약을 하기 위해서입니다만 또한 갈대아 우르는 너무도 우상을 섬기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온갖 우상과 죄악이 죽순처럼 자라나는 곳입니다. 그런 장소를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마치 그런 곳으로부터 구별해내신 것과 같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우리가 떠나야 할 곳, 머물러서는 안 될 곳이 많습니다. 만일 우리 자녀가 퇴폐적인 장소, 무슨 콜라방, 키스방, 유리방, 체험방등에 있다면 그곳에서 나오라, 다시는 가지 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게임방, 노래방 정도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때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다 정리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왔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는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평범한 아브람이 열국의 아비가 되는,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장 프랑수아 밀레는 어린 시절 뛰어난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으나 가난 때문에 파리에서 에로틱한 누드화를 그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나이 34살 때인 어느 날 밤, 가게에 걸려 있는 밀레의 그림을 본 한 청년이 “이런 좋은 실력으로 밀레는 누드화만 그리는 군” 하는 비아냥거렸는데 밀레는 그 말을 듣고 깊은 수치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충격을 받은 밀레는 한동안 말문을 닫고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파리에서의 지저분한 삶을 정리하여 근교인 바르비종으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서 소박한 농민들의 모습과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을 계속해서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한 청년의 조소를 듣고 파리에서 바르비종으로 떠난 것이 그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죄악의 자리, 하나님 보시기에 꺼림직 한 자리요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는 자리라면 우리도 기꺼이 떠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한 것은 단순히 장소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얽힌 관계와 생활, 그들의 문화에서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일과 죄악에 연루된 관계라면 심지어 아비 집과 고향이라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결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창21:10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내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떠나보내라, 즉 버리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떠나라'인데 어떤 장소, 즉 외적인 장소와 그들의 문화를 떠나라는 것이라면 몸종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집에서 보내라고 하는 것은 이제는 집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보내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왜 보내라고 합니까? 아브라함과 이들의 관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맺은 관계요 그 열매입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여 아내 사라가 머리를 써서 그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머리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후 10년이 지나 아내 사라에게서도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틈만 나면 이삭을 괴롭힙니다. 마치 내 안에서 육신이 영을 괴롭히듯이, 불신앙이 신앙을 괴롭히듯이 아브라함의 집 안에 불신앙의 자녀가 신앙의 자녀를 괴롭힌 것입니다.
이 문제로 근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쫓으라고 합니다. 이것도 순종하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아들입니다. 만일 믿음 없이 육신의 생각대로만 한다면 도리어 사라를 내쫓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때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을 포기합니다. 마음이 많이 쓰라렸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미련두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끊어낸 것입니다.
우리 역사에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도 터닝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그는 15세부터 화랑이 되어 힘든 훈련을 마치고 하루 일을 끝내면 동료들과 함께 기생집을 드나들었습니다.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았습니다. 어느 새 천관이라는 기생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 그곳에 가는 것도 일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아들의 그런 행동을 알게 된 어머니가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효심이 남달랐던 유신은 어머니의 마음을 슬프게 해드린 것을 뉘우치며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피곤한 나머지 말 등에서 잠이 들었는데, 말이 습관처럼 갔던 천관의 집으로 그를 안내하고 말았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웃음소리에 놀라 깨어 상황을 알아차린 유신은 칼을 뽑아 말의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마의 목을 잘라 버리고 과감히 돌아섰던 것입니다. 끊을 것은 과감히 끊어버렸습니다. 김유신에게는 이때가 터닝 포인트였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도 내 안에서 끊어내야 할 것, 쫓아내야 할 것, 버려야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은 없습니까? 죄의 길로 나아가려는 마음,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우리 내면에 일어나는 의심과 염려도, 불신앙과 불평도 내쫓아야 합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우리 마음에 거짓과 불의와 탐욕과 음행과 같은 육신의 생각을 통해 끝없이 유혹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과감히 끊어내고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거짓과 불의로 둘러있다면, 탐욕과 음행을 버리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그 삶 속에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잘못된 것은 과감히 버리고 끊을 것은 과감히 끊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드리라'는 명령입니다. 창22:2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다른 것도 아니고 백세에 얻은 가장 아끼는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를 말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아이의 어머니 사라와 의논했을까요? 만일 의논했다면 어떤 결과를 유추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사라의 행적을 보았을 때 아내가 감동을 받아 같이 가서 제사하겠다고 나섰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영감이 노망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네. 차라리 아들 대신 나를 제물로 바쳐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심하면 욥의 아내처럼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욥2:9).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전혀 말하지 않고 길을 떠났습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했을 때 함께 간 사환은 산에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누구와도 타협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엘리사도 엘리야가 부를 때 밭을 가는 소를 잡아 동네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어주고 쟁기를 불태우고 따라버렸습니다. 사무엘은 잠자리에 누웠어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바울도 주님이 부르실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위해 달려갔다고 했습니다(갈1:16). 아브라함도 누구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변함이 없고 한결같습니다. 삼일 길을 가는데 조금도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해도 하나님이 다 예비해 놓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잘 변합니까? 또 변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깁니까? 처음 믿음이 변하고 처음 결심이 변하고 처음 서약이 변하고 처음 마음이 변하고 처음 사랑이 변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처음처럼 한결같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신앙생활도 점점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랑도 식어버리고 변합니다. 더 좋게 변하여 성숙하고 성장하면 얼마나 좋습니까마는... 그러나 아브라함은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같습니다. 신앙도, 생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드릴 때에 본문 17절에 보시면 '믿음으로' 드렸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19절의 말씀처럼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했습니다. 롬4:17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산 자처럼 부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의 정석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의 삶이 곧 축복의 해법입니다.
록펠러는 지금의 환율로 따졌을 때 빌 게이츠보다 3배가 넘는 대부호였습니다. 그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의 최고 부자가 되었으며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지만, 56세 때 그는 불치병으로 1년 이상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최종 검진을 위해 휠체어를 타고 가면서 병원로비에 걸린 액자의 성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행20:35)”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지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나눔의 삶을 작정했습니다.
그 뒤 그는 1년 밖에 살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98세까지 살며 자선사업을 했습니다. 그는 의학연구소와 재단을 포함하여 시카고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의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바쳤고 UN본부 건립 시 자신의 토지를 국가에 헌납했습니다. 지금도 뉴욕시의 수돗물은 공짜입니다. 록펠러 가문에서 뉴욕시민의 수도세를 대신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했습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쫒기며 살았지만 후반기 43년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성공만 보고 달려가다 질병이라는 고난을 얻었지만 그 질병이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그 후에는 드리고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이런 구호를 많이 외쳤습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로마의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을 마치고 돌아와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에 ‘떠나라, 버리라, 드리라’가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이 세 번의 하나님 명령에 잘 순종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떠날 것에서 떠나고 버릴 것을 버리고 드릴 것은 드려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을 함께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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