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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행이라는 인생의 카드 덕분에 알았다. 그동안 나는 손에든 것만 사랑했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려놔 보고서야 알았다. 다 내려 놓아도 다 사라져도 나만 있으면 되겠구나. 달랑 책 한권들고 나무밑에 온 종일 있어도 괜찮은거구나.
운명을 재해석한다는 것은 그 숨겨진 카드의 뒷면을 보는 일이다. 카드의 앞면에만 속지 않고 뒷면이 있다는 것을 믿고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심오한 해석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자신이 볼 수 있는 만큼 보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재해석이면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카드의 앞면만 보고 판단하지 않을 지혜와 여유 그리고 그 카드를 뒤집을 수 있는 용기 아닐까. 운명의 카드를 넘기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전혀 다른 세상과 만나게 될 것이니.
---------------------------- 멀리 떨어질수록 잘 보인다----------------------------
지난 2013년 3월, 수많은 이들이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이메일로, 트윗으로, 직접 쓴 손 편지로.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많이 고마웠고 또 미안했다. 메시지들은 거의 다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2학년 한나의 메시지도 있었다. 한나는 마치 기도라도 하듯 매일 나에게 트윗으로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셨으니 이번 기회에 푹 쉬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요. 이 또한 지나갈 겁니다.’, ‘선생님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이제 더 단단해지셨으니 다음 강의가 너무 기대돼요.’
아이의 글을 읽으며 놀랐다. 어쩜, 이제 열여덟 살밖에 안 된 고등학생의 입에서 주지 스님 같은 말이 술술 나올까.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운명을 현명한 스승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걸까. 지난 20년간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했던 나도 내 문제를 해석하느라 이렇게 힘든데……. 내 운명의 분수령을 넘느라 온 힘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런데 며칠 동안 나를 들여다보면서 알게 됐다. 원래 사람은 사소한 것조차 자기 문제가 되면 순간적으로 짓눌린다는 것을. 돌멩이 만한 무게에도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과 나의 거리는 너무 가까우니까.
어렸을 때 우리 부모님은 양장점 문까지 닫아 걸은 채 2박3일씩 싸우곤 했다. 엄마의 레퍼토리는 돈을 갖다 주기는커녕 부지런히 써대기만 하는 아버지에 대한 푸념이었다.
“내가 미쳤지, 그 비싼 자동차를 당신한테 왜 사준겨! 그걸로 서울에 아파트를 샀으면 벌써 열 배는 올랐을 텐데 그걸 왜…….” 그래놓고는 가끔 아버지 옆에 타고 어딘가 갈 때면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얘, 네 아버지, 차 타고 내릴 때 보면 참 멋있지 않냐?”
우리 오남매는 어렸지만, 엄마가 왜 이렇게 앞뒤가 다른 말을 하는지 다 알았다. 왜 그렇게 평생 긴 억울함과 아주 가끔씩의 행복을 지치도록 오가면서도 아버지를 놓지 않았는지도. 엄마, 그건 엄마가 아버지를 훨씬 더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말해주고 싶었다. 물론, 엄마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설사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일이라도 30센티미터만 떨어지면 모든 상황이 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나이나 경험이 아니라 문제와 나 사이의 ‘거리’다. 그 거리를 두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 옆에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있으면 결국 숨통까지 조이게 된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한참 힘들었을 때, 나는 한동안 방안에만 있었다. 내 불행만 쳐다보느라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창가에 앉아 별을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떨어져서 나를 보는 연습을 했다. 1미터, 5미터, 10미터……. 어느 날은 하늘 꼭대기에서 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점점 멀어질수록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스승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많이 배우고 아니고를 떠나 내 운명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줄 수 있는 이라면 그는 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충고해줄 수 있다면 당연히, 나 역시 내 운명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남의 문제를 풀 때처럼 내 문제도 그렇게 떨어져서 볼 수 있다면……. 멀리 떨어질수록 잘 보인다.
-------------------- 다 내려놔도 괜찮아 --------------------
봄볕이 종일 내리쬐던 그날, 지방 강연을 갔다가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이메일을 확인하는데 ‘김미경 쇼’에서 하차한다는 보도자료가 와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첫 줄을 읽기도 전에 눈물이 터졌다. 공항의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아무 대책 없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이젠, 정말, 끝이구나 ……. 석 달 된 자식을 남의 집 앞에 놓고 오는 심정이 이럴까. 한번 터진 울음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평생 프리랜서로 살아온 내가 느낀 위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프리랜서에게 스케줄은 곧 사회에서 판단하는 나의 가치와 맞먹는다. 스케줄이 없어졌다는 것은 곧 사회에서 나의 쓸모가 사라졌다는 증거였다. 졸지에 지난 십여 년을 통틀어 나는 가장 ‘한가’해지고 있었다. 평생의 습관과도 같았던 강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내주기 싫은 것’을 억지로 내려놓고 있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내걸고 시작했던 방송, 강사로서 쌓아온 커리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목숨처럼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 이 중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상처받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모든 것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속절없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더 내려놓으라는 말인가.
그런데 여기까지 와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그래도 나에게는 한 가지 선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외부의 사건으로 내려앉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내려놓을 것인가. 겉으로 보기에는 둘 다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내 안으로 들어오면 이미 하늘과 땅 차이다. 스스로 내려놓으면 무엇을 어디까지 내려놓아야 할지 알 수 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도 있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끌려 내려가면 얘기가 아주 달라진다. 끝을 몰라 불안하고, 어디서 멈출지 가늠할 수 없어 두려움에 갇히게 된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려놓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손에 든 걸 다 내려놓아도 나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전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내가 서 있었다. 단지 내려놓았을 뿐 결코 내려앉은 것이 아니었다. ‘괜찮은 거였는데, 다 내려놔도 죽지 않는 거였는데 뺏기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구나. 그동안 들고 있느라 지치고 힘들었으면서 신념과 책임감이라고 우겼구나. 그렇게 집착을 합리화했구나…….’
덕분에 알았다. 그동안 나는 손에 든 것만 사랑했지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내려놔 보고서야 알았다. 다 내려놓아도, 다 사라져도 나만 있으면 되겠구나. 달랑 책 한 권 들고 나무 밑에 온종일 있어도 괜찮은 거구나.
이 단순한 진리를 알기 위해 나는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그러나 언젠가 인생에서 한번은 배워야 할 공부였다면 지금 하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이제는 나도 집착으로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괜찮아. 다 내려놔도 당신은 남아 있으니까.’
------------------------------------- 인생에는 카드를 넘기는 순간이 있다-------------------------------------
운명은 고약한 특징이 있다. 거부하거나 놀라거나 무서워하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뭘 어쨌길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겼냐고 울부짖을 때마다 바위는 점점 더 커진다. 나중에는 바위의 무게에 눌려 가느다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그게 너무 버거워 누군가는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내 의지로 거부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운명이 아니다. 이미 나에게 온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그 바윗돌 같은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너무 무거우면 같이 갈 수가 없다. 바위를 끌고서는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으니까. 방법은 하나 있다. 바윗돌을 조약돌로 잘게 쪼개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는 것이다. 운명과 함께 친구처럼.
집채만 한 바윗돌을 공깃돌로 만든 사람이 있다. 틴틴파이브의 전 멤버, 이동우 씨. 몇 년 전, 처음으로 그와 만난 곳은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녹음실에서 만난 그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가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아주 아팠다. 한창 무대에서 뛰어놀던 사람에게 실명은 사형선고와도 같을 테니까. 앞으로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가 망막색소변성증이라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4천 명 중에 한 명 걸린다는 유전병이 자신에게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가 결혼 한 지 삼 개월, 아내가 막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백 군데도 넘는 병원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뿐이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받아들일 수도 없고 헤쳐나갈 길도 몰라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아내마저 뇌종양에 걸려 수술대에 올랐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 누워서도 남편에게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했다. 아직 시력이 남아 있을 때 지금까지 살면서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광경들과 정말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용기 내서 보고 오라고……. 병원 밖으로 나와 그는 통곡했다. 그날 흘렸던 눈물로 굳게 닫혔던 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 이동우 씨는 연극 〈오픈 유어 아이즈〉로 무대에 오르는가 하면, 보통사람도 어렵다는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해 완주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딸에게 슈퍼맨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5개월간의 혹독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근에는 앨범을 내고 재즈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재즈 콘서트에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그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잘 어울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 이상 무거운 바윗돌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면서 살았을 때는 현혹되는 게 너무 많았어요. 이쪽도 보고 저쪽도 보느라 정신이 없었죠. 그런데 실명 후에는 내가 가려는 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아이러니하지만 보이지 않게 되니까 내 길이 더 분명해졌지요. 인간관계도 다 정리되고 제 곁에는 천사들만 남았습니다. 장애를 갖게 된 뒤부터 제 입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해요. 그만큼 사랑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굉장한 축복이고 선물이지요.”
그랬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바윗돌을 조약돌로 만들어냈다. 자신에게 온 실명이라는 불행을 스스로 자기답게 재해석해냈고, 볼 수 없게 된 불행을 ‘불필요한 것을 보지 않게 된 행운’으로, 실명 이후 주변 사람들이 대거 떠나간 불행을 ‘천사들만 곁에 남는 축복’으로 다시 보게 됐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마음으로 운명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과 감사로 바꾼 것이다.
인생에서 내게 오는 모든 것들은 양면의 카드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하나고, 행운과 불행이 하나의 사건에 공존한다. 다만 우리가 카드의 앞면에 놓인 것들만 보면서 울고 웃는 것뿐이다. 앞면에 불행이 적힌 카드가 오면 화가 나고 억울해서 뒷면을 보지 못하고, 행운이 적힌 카드가 오면 또 무서워서 일부러 뒷면을 외면한다. 그러나 인생에는 반드시 카드를 넘기는 순간이 온다.
앞면에서 뒷면으로, 다시 뒷면에서 앞면으로. 불행의 카드 뒤에는 고통의 크기만큼 행운과 축복이 숨겨져 있고, 마찬가지로 행운의 카드 뒷면에는 그만큼의 불행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글 김미경 스물아홉 살에 잘나가던 피아노 원장을 때려 치우고, 꿈이 시키는 대로 강사가 됐다. 20년간 수없이 헤매고, 주저앉고, 상처받으며 하루에 1센티미터씩 부지런히 자랐다. 오래된 잔소리들을 묶어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언니의 독설』 『드림온』 『살아있는 뜨거움』을 펴냈다. tvN 〈김미경쇼〉를 진행하며 오지랖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요즘에는 쭈그리고 앉아 거친 운명과 대화 중이다. 오늘도 그녀는 온몸으로 운명과 뜨겁게 화해하고 새로운 꿈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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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