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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 기차
송 영
객차의 승강대 위에 가까스로 발을 올려놓은 김환오(金煥吾)는 입구부터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통로가 꽉 막힌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방금 지하도를 황급히 빠져나온 뒤라서 몹시 숨을 헐떡였지만 그렇다고 승강대의 문턱에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여행용 손가방을 두 손으로 높이 받쳐 들고 무작정 사람들 틈을 비집고 층계를 올라갔다. 이때 열차는 두 번째로 발차의 경적을 울렸고 환오가 난간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는 열차는 스르르 미끄러져가기 시작했다.
일단 열차가 움직이자 입석객(立席客)들의 불편은 더욱 심해졌다. 더구나 열차가 역 구내의 교차선을 빠져나갈 때는 열차의 심한 동요 때문에 난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서로 이마를 부딪치거나 팔로 남의 가슴패기를 치곤 했다. 남에게 본의 아닌 피해를 준 사람은 그렇다고 변명할 계제도 못 되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가까이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실상 피해를 준 쪽이 누군지조차 분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꿀 먹은 벙어리처럼 숨을 씩씩거리며 상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환오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는 두 손을 교대해가며 가방을 어깨 위로 치켜든 채 한 무리의 횝쓸림에 그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제기랄 기차가 정각에만 와주었어도 자릴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연착할 바에야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기 전에 개찰만 끝내 줬던들 공평하게 자리다툼을 했을 것 아닌가.
중앙선에서는 연착이 상식으로 돼 있다는 것을, 특히 요즘 겨울철에 들어와서는 수도(首都)의 연료를 공급하는 화물열차의 왕래가 한층 빈번해진 까닭에 일반 여객차가 한두 시간 늦는 것은 예사라는 사실을 환오는 미처 몰랐다. 그는 19시 50분발 열차 시각에 알맞게 대어서 역 대합실에 나왔다가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았다. 안내양의 말인즉 기차가 언제 플랫폼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근처의 다방에서 삼십 분 가량 기다린 뒤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대합실은 여전히 한산했고 안내양의 대답은 역시 기차가 언제 플랫폼에 나
타날는지는 아직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그 다방으로 가서 삼십 분 가량 더 기다린 뒤 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사람들이 매표구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기차는 너무 빨리 오게 된 셈이고 환오는 그 임의의 시간을 불행히도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역원들은 또 무슨 이유에선지 열차가 홈에 들어올 때가 임박해서야 개찰을 시작했다. 장사진의 꼬리에 처져 있던 사람들이 개찰구를 빠져나왔을 때 기차는 벌써 플랫폼에 들어와서 첫 번째 발차의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그들은 흡사 장애물 경주에 나선 사람들처럼 부리나케 지하도의 계단을 뛰어 내려갔지만 자리를 잡기에는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하지만 열차의 연착이나 역원의 불공평한 처사 때문에 자릴 잡지 못했다는 불평은 한낱 잠꼬대나 다름없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의 변덕스런 관례에 잘 적응하고 있었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나 승객이 기차를 기다리는 법 이지 기차가 승객을 기다려주는 법은 없었던 것이다.
난간은 서로 얼굴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그들은 이따금 환등시설과 스팀 시설이 되어 있을 객차 속을 흘끔흘끔 기웃거렸지만 객차 속으로 통하는 통로에는 사람들이 잔뜩 막아 서 있기 때문에 객차 속이 보일 턱이 없었다. 환오는 비록 작은 손가방이지만 그걸 높이 치켜든 채 좁은 틈바구니에서 오래 버티고 서 있기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그는 혹시 객차 속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나 보려고 입구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면서 발돋움을 했다.
뭐야? 이건, 남의 발을 밟지 말라구.
이때 귓전에서 버럭 고함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그는 미처 통로 쪽을 기웃거릴 틈도 없이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당신 뭣 땜에 남의 발을 밟는 거요?
얼굴도 보이지 않는 곁의 사내는 역시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발을 밟힌 게 몹시 불쾌한 듯 연거푸 신경질적으로 윽박질러 왔다. 환오는 무슨 물건 홈치다 들킨 사람처럼 그의 질문에 대답할 바를 모르고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저 속으로 들어갔으면 하구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금방 허허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러고는 역시 신경질적인 어조로 쏘아붙였다.
당신 이 사람들이 눈에 안 보여서 그런 말 하는 거요? 발붙일 곳이나 겨우겨우 차지한 판에 차 속으로 들어가다니, 천하장사라도 이 사람 벽을 뚫고 거기까지 가겠나 생각 좀 해보슈.
그의 말이 너무 지당했으므로 환오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난간은 잠시 쥐 죽은 듯한 침묵에 빠졌는데 그 사내가 다시 그 침묵을 깨뜨렸다.
난 좀처럼 자릴 못 잡는 일은 없는데 오늘은 그만 실수했수다. 그놈의 딸내미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드는 바람에 그만……
그 사내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소리로 혼자서 떠들어댔다. 어쨌든 그의 말투로 미뤄봐서 그는 중앙선의 단골 고객임에 틀림없었고 이 삼등열차와는 이미 친분이 두터워져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떠드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 우리들은 되게 잘못 걸렸시다. 저놈의 유리창들이 죄다 부서져서 이따가 차가 들로 나가면 바람이 굉장할 거요. 여기 뒷구석 사람들은 꼼짝없이 동태 팔자가 되겠는데. 더구나 날씨가 싸아헌 게 눈도 오실 것 같고.
사내가 말하는 승강대의 양쪽 도어는 처음부터 굳게 닫혀 있기는 했지만 윗부분의 유리가 깡그리 빠져 있어 이쪽 난간은 외풍으로부터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아직 열차가 도시의 외각을 벗어나지 않았으므로 외풍이 그닥 심하지는 않았지만 이 단골손님의 한마디는 난간의 어두운 구석에 묵묵히 서 있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포심을 안겨줬다. 그들은 정말 걸렸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고 금방 그 들바람이 불어 닥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열차가 중랑천(中浪川)을 지난 뒤부터 아니나 다를까 양쪽 승강대 쪽에서는 뼈를 삭이는 듯한 외풍이 쉬익쉬익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열차의 속도로 더욱 가속된 정월 찬바람은 흡사 칼날처럼 에누리 없이 그들의 살갗을 맵게 때렸다. 졸지에 놀란 난간 사람들은 바람길에서 자기 몸을 피해보려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보고 움츠려도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 보라구.
자기 예언이 금방 맞아떨어진 걸 뽐내듯이 어둠 속에서 그 사내가 말했는데 바람소리에 흩어져서 이젠 잘 들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매운바람에 쫓기듯이 그리고 바람막이가 되지 않으려는 본능에 따라 자꾸 안쪽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난간에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났다. 비록 난간에서나마 좀 더 안전한 자리를 차지 하려는 쪽과 일단 차지한 자리를 뺏기지 않으려는 쪽 사이에 서루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가 벌어진 것이다. 손가방을 치켜든 채 그 틈바구니에 끼여 있던 환오는 몸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서 휩쓸리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그나마 발붙일 곳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바둥거렸다. 그는 이때 자기가 난간의 층계 입구로 밀려나 이윽고는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이 기차 밖으로 굴러 떨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다음 역에서 난간의 승객이 줄지 않고 더 늘기만 한다면 꼭 자기가 아니래도 누군가에게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되어도 역시 기차는 추락사의 원인 규명과 책임 소재를 밝히느라고 무한정 정차할 것이고 그는 언제 목적지에 닿게 될지 까마득해지는 것이다.
열차가 망우(忘憂) 역에 도착했을 때 환오의 불길한 상상은 더 굳어져 갔다. 입구가 막혀 있는 객차 속에서는 숫제 한 사람도 내리지 않았고 난간의 계단에 서 있던 승객 한 사람이 내린 대신 갑자기 플랫폼으로부터 세 사람이 밀어닥친 것이다.
빨리 문을 닫아버려! 빨리!
승강대의 도어가 열린 순간 머리에 허옇게 눈을 뒤집어쓴 세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안에서 누가 소리쳤지만 그들은 벌써 열린 문을 억척스럽게 붙잡고 계단에 기어오르고 있었다.
같이 갑시다. 우린 밖에서 얼어 죽으라는 거요?
다 같이 타고 가자구. 나도 차표는 끊었으니까.
승강대에 발을 디밀려고 숨을 씩씩거리면서 그들은 제각기 한마디씩 지껄였다.
얼어 죽긴 여기도 마찬가지야. 밀어내요. 밀어내. 거 왜 좀 못 밀어내고 야단이야.
아까 혼자서 떠들던 단골손님의 거쉰* 고함소리가 안에서 들렸고 이어서 승강대 입구에서
이 새끼가. 이 손 좀 못 비켜? 이 새끼가 누굴 죽이려고 환장했나? 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입구에서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기차는 발차의 기적을 울렸고 바퀴가 스르르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계단 입구에서도 도어의 손잡이에 매달려 질질 끌려오는 세 사람의 침입자들을 더 이상 배척하는 걸 단념 했다.
기차 좀 타느라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당신네들 인심이 이래가지고야 세상 살겠수?
새로 탄 사람이 이제 한 고비 넘겼다는 듯이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러자 단골손님이 참지 못하고 맞받았다.
이거 보쇼. 말을 하려거던 똑바루 하쇼. 그게 다 당신네들 위해서 하는 짓이요. 들어와 봤으니까 알겠지만 이제 여기서 누가 떨어져 죽건 말건 책임질 놈은 없으니깐 그걸 명심하고 계슈.
외풍이 심해지고 사람 틈에서 부대끼기 시작하자 침입자들은 그만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벌써 눈이 사태 나게 오시는군.
캄캄해진 바깥을 응시하고 있던 단골손님 이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환오는 그와 마주 서 있는 사내에게 불현듯
어디쯤 가면 손님이 많이 내리죠?
하고 물었다. 이 고역에서 빠져나는 길은 아무래도 손님들이 많이 내리는 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였다.
댁은 어디까지 가는데 그러우? 좌우간 이 기차는 묘한 기차가 돼놔서 종점까지 내리는 놈이 거의 없어요. 양평서부터 조금 내리긴 하지만 여기서 양평까지 가는 동안에 그만큼 보충할 테니깐 내리나 마나라구. 그러니깐 원주까지 내내 이 모양으로 갈 거요.
이렇게 말한 사내는 마치 환한 곳에서처럼 환오를 잠깐 넌지시 지켜보더니 곧 상대방의 정체를 알았다는 듯이 보아하니 댁은 초행이군 그래.
하고 말했다.
네네. 이쪽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정신 바짝 차리슈. 이따가 내릴 곳을 까먹지 않으려거든 잘 물어서 내리란 말요. 지금은 승무원이나 공안원들 내왕도 없으니까 아무에게나 물어서 내려요. 중앙선 정거장 건물들은 모두 비슷해서 혼동하기 십상이고, 지금 밖에 눈이 내리는 게 보이오? 이렇게 눈보라가 칠 때는 더더구나 눈에 뵈는 게 없거던.
사내는 아까 발을 밟히고 투덜거리던 때와는 달리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그의 너그러운 어조 속에는 중앙선에 관한 것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다는 자랑이 은근히 숨겨져 있었다.
그런데 댁이 어디까지 간다고 했죠? 당신 아까 내가 물었을 때 그걸 대답하지 않았지?
저 말입니까? 저 만종(萬鍾)까지 가는데요.
단골손님이 또 화를 낼까봐 환오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리고 자기 대답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자기가 지금 만종으로 가고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청량리역 개찰구를 빠져나온 뒤로 당장 발붙일 곳을 뺏기지 않으려고 허덕이다 보니 자기 행선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만종이라고?
단골손님은 뭣에 놀란 듯 반문하고는 혼자서 혀를 끌끌 찼다.
그렇다면 게까지 이 구석에 서서 어떻게 갈 거요. 난 말요. 난 팔당(八堂)서 내릴 거니깐 조금만 견뎌 배기면 되겠지만, 그렇게 멀리 갈 양반이 좀 일찍 일찍 서둘러 자리를 잡을 게지, 쯧쯧쯧……
그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듯이 큰소리로 너스레를 치는 바람에 환오는 자리를 못 잡은 게 무슨 범죄나 되는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하기야 너구리 잡이들이 설쳐대니까 초행이라면 자리 잡기도 힘들 테지.
그런 게 아직도 있습니까?
하, 무슨 소리. 여기서는 역 직원들 하고 짜고서 공공연히 해먹는다우. 좌우간 그러니까 웬만큼 빠르게 굴지 않고서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니까.
사내는 중앙선에서 발호하는* 너구리 잡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난간 사람들이 모두 들을 만큼 큰소리로 계속 떠들어댔다. 그들의 본거지는 어디고 그들이 수작을 걸어올 때의 가지가지 방법이 어떻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며 얘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원과 공모하는 매우 위험스럽고 비밀스런 과정까지 서슴없이 얘기했다. 그가 아는 사실들은 확실히 매우 자상하긴 했지만 그 사실들을 말할 때 사내는 조금도 홍분하거나 분개하는 기색이 없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횡포는 단골손님인 자기 힘으로도 이미 막을 수 없으니까 분개해봤자 소용없다는 투였다.
역차가 덕소(德沼) 역을 지났을 때 단골손님이 다시 환오에게 말했다.
난 다음 팔당에서 내려요. 그런데 당신은 그 꼴로 가다가는 만종에 닿기도 전에 동태가 된다 이 말씀야.
사내는 아무래도 상대방의 전도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동태가 되지 않으려거던!
하고 전제해놓고 무슨 대단한 기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갑자기 그의 입을 환오의 귀에 바싹 디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지금부터 어떻게든 이쪽 통로를 뚫고 들어가야 돼요. 갈수록 사람이 늘어났지 줄지 않을 테니깐. 만종까지 이렇게 가다간 정말 동태가 된다구.
그의 친절에 환오는 도리어 당황해서 다만 네네 소리만 간신히 흘리고 있었다.
이따가 양평에 가면 사람이 좀 내려요. 자릴 잡으려면 그때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양평에 닿기 전에 손님은 어떻게든 이쪽 입구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구.
저 통로를 막고 있는 사람 벽을 보느라면 도무지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환오는 단골손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아서는 객차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쪽 난간에서 오래오래 배겨낼 재간 또한 없을 것 같아 환오는 통로의 그 완강한 사람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럴까 저럴까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단골손님의 조언을 따르기로 작정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자. 조금 때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굴면 자릴 잡지 못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환오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마치 전쟁터에라도 나가는 무사처럼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고 통로의 사람 벽을 향해 조금씩 발돋움을 하기 시작했다.
스팀이 들어오는 객차 속은 난간을 휩쓸던 돌바람 대신 후덥지근하고 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고 서로 밀착되어 있는 사람들의 살갗에서 풍기는 땀 냄새는 호흡을 더욱 곤란하게 해줬다. 더구나 객차의 창이란 창은 모두 완전 밀폐상태이고 양쪽 통로마저 행여 침입자가 들어올세라 사람 벽으로 겹겹이 막혀 있기 때문에 환기가 될 데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말하자면 객차 속은 외부의 기류마저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토록 혼탁한 공기 속에서 수많은 입들이 귀청이 터지도록 요란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객차 속도 머물러 있기에 그닥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환오의 몸도 어느덧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는 앞이 꽉 막혀버릴 때마다 더욱 맹렬한 투지를 불태우며 그 사람 벽을 향해 돌진했다. 앞으로 나가려구 그가 한 발을 들어올렸다가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되돌아오면 그 자리는 벌써 다른 사람의 발이 차지한 뒤였다. 그는 발 디딜 곳을 찾으려고 이쪽저쪽 디뎌보다가 자주 남의 발을 밟고는 질겁해서 물러났다. 모든 땅이란 땅은 마치 사람의 발로 죄다 메워져버린 느낌이었다. 혹은 상체에 비해서 발만 유난히 비대해진 것이나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발 디딜 만한 빈자리가 없을 리가 없을 때는 땅을 먹어버리는 도둑놈의 발처럼 갑자기 비대해져버린 발들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럴 때 환오에게는 또 그 친구의 익살 섞인 주석이 떠올랐다. 어느 날 콩나물시루처럼 만원 된 버스 속에서 환오는 곁의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원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이상한 의문에 사로잡힌단 말야. 상반신이 차지하는 평면에 견주면 발이 차지하는 지면은 퍽 여유가 있을 법 한데 도리어 발붙일 자리가 더 비좁다는 건 이해할 수 없거든.
그러자 친구는 마치 그런 얘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환오의 부질없는 푸념에 즉각 주석을 붙여왔다.
이보게. 발이 땅을 먹어치우는 도둑놈이란 걸 모르나. 그건 언제나 자기가 차지한 지면에 만족할 줄 모르는 짐승이야. 늘 본능적으로 다른 땅을 넘보거든. 좁은 델수록 더 욕심을 내지. 좌우간 찻간에서 두 발을 마주 붙이고 서 있는 경우란 쉽게 상상도 안 된단 말야.
환오는 그때 그의 지론이 다소 비약한 느낌이어서 쉽사리 수긍하지 못하고 피식 웃으며 넘겨버렸지만 이런 때는 그 지론이 한층 그럴싸하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자기는 엄연히 객차 속에 들어와 있건만 발붙일 곳이 없어서 비록 잠시라도 몸이 허공에 뜨는 현상은 그런 식의 풀이로밖에는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수역에 도착했을 때 환오는 어느덧 객차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팔당에서 내렸을 단골손님의 말대로 양수역에서는 객차 속의 승객들에 아무런 변동도 없었다. 환오는 열차가 정차하고 있는 이 분 동안에도 두 사람을 밀쳐내고 객차의 중앙 쪽으로 더 이동했다. 이때 그의 진로 한가운데 육중한 장애물이 가로막고 나섰다. 마치 드럼통을 세워놓은 것처럼 비대한 여인의 등이 그의 코앞에 떡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서 있기가 남들보다 갑절은 더 피로하다는 듯이 옆 의자의 등받이에 그 비대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는데 그 꼴이 그녀의 체중을 더 육중하게 보이도록 했고 환오는 그를 정면에서 가로막고 서 있는 여인의 등이나 엉덩이를 도무지 밀쳐낼 엄두가 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그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입구 난간에서 그가 움직여온 거리가 고작 삼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데 깜짝 놀랐다. 그의 몸은 흡사 몇 킬로미터나 기어온 사람처럼 잔뜩 지쳐버렸던 것이다.
지금 굴을 지나고 있죠?
자리에 앉아 있던 행상 차림의 여인이 옆자리의 청년에게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청년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여인은 다시 몇 번째 굴이죠? 이게 몇 번째죠?
하고 역시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그걸 누가 세어보고 있는 줄 아우? 왜 그러는 거요?:
청년이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여인은 몸을 반쯤 일으키며 황급히 말했다.
양수에서 두 번째 굴이라면 난 일어나야지. 난 양평서 내려요.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선반 위에서 빈 광주리를 끌어내렸다.
아줌마, 이젠 늦었다구요. 저거 보쇼. 기적소리 안 들려요? 양평에 다 왔다는 소리라구요. 지금 어떻게 이 속을 빠져나가겠수?
청년이 딱하다는 듯이 말하자 광주리를 끌어안은 여인은 울상을 지으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열차는 마치 여인을 곯려주기나 하듯이 두 번째 기적을 길게 뽑아 올리면서 더욱 빨리 달리고 있었다. 그러자 여인은 어찌된 셈인지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환오는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양평에 가서 여인이 내리게 되건말건 어쨌든 그녀는 일단 그 자리를 떠나리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년과 여인이 앉아 있는 의자 쪽으로 바싹 다가서서 여인이 앉아 있는 가운데 좌석을 호시탐탐 넘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쇠바퀴의 무거운 신음소리를 내면서 열차가 양평역에 닿자 과연 그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먼저 내릴 테니 광주리를 넘겨줘요.
곁의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 그녀는 놀랍게도 굳게 닫혀 있는 객차의 창을 드르륵 열어젖히더니 서슴지 않고 한쪽 다리를 창턱에 걸쳤다. 그녀의 하반신은 곧 창밖으로 빠져나갔고 잠깐 창턱에 매달렸던 여인은 미끄러지듯 플랫폼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녀의 동작이 어찌나 민활했던지 그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좁다란 창구를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여인이 자리를 뜨자마자 환오는 부리나케 가운데 좌석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이때 통나무처럼 굵은 팔뚝이 그의 가슴패기를 가로막고 나섰다.
이러지 말라구요. 이건 누구 자린데.
기름지고 우렁찬 소리로 말하면서 그의 앞에 나선 그 팔뚝의 주인공은 아까 그의 진로를 가로막고 서 있던 뚱보 여자였다. 그녀는 여태 이쪽 좌석에 등을 돌리고 모르는 척 서 있었으므로 환오는 사뭇 의아스러웠다. 그는 뚱보 여자의 두꺼운 눈두덩을 겁먹은 눈으로 보면서 간신히
누구 자리라뇨? 제가 먼저 여기 왔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먼저 왔다고? 사람 꽤 웃기시는군. 내가 이걸 맞춰놓은 걸 모르오? 그녀는 대뜸 고함을 꽥 질렀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여인의 단호한 태도와 기름지고 우렁찬 목소리는 어떻든 상대방을 제압하는 위력이 있었다. 환오는 뚱보 여자의 살기등등한 기세에 벌써 한풀 꺾인데다 그녀가 주장하는 예약자의 우선권을 부정할 만한 증거도 없으므로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행상녀(行商女)가 떠나버린 지금 뚱보 여자도 자기의 우선권을 확인해볼 만한 증거는 없었다. 옆자리의 청년이 증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입을 떼지 않고 두 사람의 승강이를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여인은 더 지체할 것도 없다는 듯이 황금빛깔의 원피스 자락을 필럭이며 좌석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아줌마, 말씨나 좀 점잖게 쓰시우.
그녀가 앉자마자 옆자리의 청년이 갑자기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러자 뚱보 여인은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노기를 가득 띤 얼굴로 청년을 노려보며 꽥 고함을 쳤다.
뭐요? 당신 뭔데 콩나물처럼 나서는 거야?
듣기에 좀 거북하다 이겁니다.
흥, 별꼴이군. 점잖은 것 꽤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너무 좋아하시지 말라구. 지금이 어느 땐데.
지금이 어느 때건 아무튼 아줌마는 이분이 당연히 앉아야 할 자리에 지금 앉아 있는 거요. 그거나 알구 있어요. 이분이 아줌마보다 이 자릴 먼저 발견했다는 건 내가 보증하니까.
자기 옆에 엉거주춤 서 있는 환오를 가리키며 청년이 말하자, 뚱보여인은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숨이 막히는지 헉헉거리면서
하, 이 양반 보게. 이런 엉터리 같은, 내가 이 자릴 맞춰놨대두.
하고 간신히 말했다.
난 청량리역에서부터 내내 여기 앉았다구요. 아줌마가 저승에서나 예약했다면 모를까, 아무튼 그런 소린 못 들었으니까.
여인이 잇달아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청년은 할 말을 다했다는 듯이 그만 입을 닫고는 한동안 환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작업복을 단정히 입은 그 청년의 시선을 느끼자 환오는 자기가 자릴 잡지 못하고 그의 곁에 엉거주춤 서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나 지은 것처럼 곤혹스러웠다.
조금 자릴 좁혀 앉읍시다.
이때 작업복 청년이 뚱보 여인에게 말하면서 여자 쪽으로 엉덩이를 밀어갔다.
저분 좀 끼어 앉으시게.
글쎄, 두 사람 자리에 셋이 앉았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더 좁히라는 거요?
여인이 바락 언성을 높여 대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좁히면 되지요. 일루 와 앉으세요. 그렇게 서 계실 게 아니구.
작업복 청년이 환오에게 눈짓했으나 환오는 선뜻 앉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그가 청년의 호의에 도리어 당황하고 있을 때 뚱보 여인의 쇳소리같은 비명 이 얼어붙게 했다.
아이쿠, 내 허리 부러지겠네. 이거 생사람 잡지 말고 양보심 많은 당신이나 자릴 비켜주면 될 거 아뇨?
되도록 앉아 가자 이겁니다.
청년이 다시 말했지만 뚱보 여인은 밀려났던 자리를 쉽사리 다시 점령해버 렸다.
손님은 어디까지 가십니까?
자릴 만드는 데 실패한 작업복 청년이 면구스런 표정으로 환오에게 물었다.
만종입니다.
어이쿠, 먼 데까지 가시는군요. 실은 저도 동화(桐華)까지 가는데요. 저보다 한 정거장 더 가시는군.
청년은 무엇인가 더 말할 게 있지만 차마 나오지 않는다는 듯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어떻습니까? 이런 얘기는 좀 뭣하지마는, 찻간에서 초면이라도 서로 좀 더 친절하게 대해줬으면, 서로 폼을 잡을 것이 아니라 흉금을 털어놓고 말입니다. 그러면 여행 이 훨씬 즐거울 것 같은데요.
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동감입니다. 저도 동감예요.
얼떨결에 환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작업복 청년은 이제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한층 친절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릴 잡으셔얄 덴데. 조금 기다리셔야겠군요. 저는 말입니다. 한 달에 한 두어 번 과수원 일 때문에 동화역에서 청량리역까지 왕래하게 되는데 청량리서 동화까지 세 시간 반 동안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자니 꽤 지루해요. 그동안에 우연히 말벗을 구하면 한바탕 떠드는 사이에 동화역에 닿거든요. 저는 시골에서 지내니까 이렇게 나들이할 때나 겨우 말벗을 구하는데 그것도 재수가 좋을 때라야지, 다섯 번 왕래에 한 번 꼴도 힘들다니까요. 그런데 선생, 제가 그 도시에 가서 어떻게 하고 오는 줄 아세요? 저는 기껏해야 단지 몇 마디, 호리돌 두 포만 주세요.
얼마죠?
부삽 국산품 나왔어요?
포르마린 언제 가져오죠?
이따위 몇 마디 지껄이고 돌아오는 겁니다. 아무도 그 이상 내게 말을 시키거나 걸어오지 않아요. 참 냉정한 도시라구요. 이러다간 실어증*에 걸리기 십상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돌아올 땐 솔직히 말해서 고독하기 짝이 없어요. 괜히 위축되고. 그래 아까부터 난 선생을 유심히 지켜봤죠. 말벗을 삼으려고. 그건 그렇고 만종은 왜 가십니까?
환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믓거리는 사이 마침 객차 속으로 열차 판매원이 비집고 들어와서 사람 틈을 빠져나가느라고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자, 지나갑니다. 뜨끈뜨끈한 우유가 지나갑니다. 뜨끈뜨끈한……
이때 처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판매원의 소리를 가로막았다.
뜨끈뜨끈하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좀 안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가뜩이나 사람 틈에서 부대끼던 바지차림의 처녀가 판매원을 가로막고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죄송하구요. 그저 쪼끔쬐끔만, 그 아가씨 궁둥이를 살짝 십오 도 각도로만 비틀어주시면 지나가겠습니다.
못 지나가요. 도대체 이렇게 화물짝처럼 잔뜩 집어 처넣고 그렇게 밟고 다니면 어떡허라는 거죠?
제가 뭐 철도청장이신 줄 아나베, 그러지 말고 아가씨 시집 잘 가려거던 십오 도만.
흥, 누가 시집간데나. 하여튼 못 가요.
그럼 제가 가지요.
못 간다니까!
자, 그러지 마시고 살짝 이렇게 이렇게 지나가야만 저도 먹구 살지요.
판매원은 능청스럽게 장단을 치면서 뱀이 미끄러져 빠지듯이 악착같이 버티는 바지 처녀를 제치고 빠져나갔다. 주위 사람들은 처녀를 향해 낄낄거리며 웃어댔고 바지 처녀는 판매원의 뒤통수에 대고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이건 말이 여행이지. 어디…… 비행기루 갈 건데. 춘천서는 평창까지 찻길이 없어서 매양 이 고생이거든.
작업복 청년의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나이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양쪽 좌석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잠시 그 사내 쪽으로 쏠렸다. 가죽으로 만든 포수 재킷을 입고 머리에는 차양이 긴 붉은 캡을 쓴 사십 줄의 사나이가 이토록 너저분한 삼등객차의 풍경이 자기로서는 심히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서울서 원주로 직행하는 민간 항로가 아직 개설되지 않은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다시 말했다. 그의 얼굴은 과얻 비행기만 타고 다니는 사람답게 유들유들 기름기가 흘렀고 허여멀쑥했다.
평창으로 사냥 가시는군요.
이때 사내의 맞은편에서 뚱보 여자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말씨는 자리를 다틀 때와는 딴판으로 부드럽고 몹시 여자다웠다. 말 상대가 없어서 다시 말하면 자기를 알아주는 상대가 없어서 곤혹을 느끼던 포수는 눈이 번쩍 뜨이는지 얼른 여자 쪽을 쳐다봤다.
예. 예. 그렇죠. 그걸 어떻게 아시고?
뚱보 여자는 머리 위의 선반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라이플 케이스와 베이지 빛깔의 슬리핑 백을 힐끗 쳐다본 뒤에 살짝 눈웃음을 쳐 보이면서 말했다.
평창이 바루 제 고향이죠. 산돼지와 노루가 많으니까 사냥들을 많이 오거든요.
하,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쪽 양평, 여주 일대에도 꿩 이 많다지요?
모르는 일인데요 그건. 토끼가 많다는 얘긴 더러 들었지만.
그러자 사내는 토끼라는 말에 금방 모욕을 느꼈는지 목줄기까지 붉어지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까짓 토낄 잡아서 무엇합니까? 그런 걸 잡아가지구 들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쳐다보기가 쑥스러울 정도예요.
그의 어조가 어찌나 단호했던가 사람들은 몹시 의아스런 눈초리로 포수를 주목했고 그 낌새를 알고 있는 사내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토끼 같은 것은 나는 잡았다가도 놓아줘요. 난 그따위 직업적인 포수들과는 근본적으로……
여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자기 말이 너무 지나쳤다고 느꼈는지 얼른 말머릴 돌렸다.
원래 나는 사냥 같은 거 취미 없었다구요. 사업에 쫓기다 보니까 시간도 없었지만. 그런데 고혈압에 좋다는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게 그 재밀 붙이게 됐죠.
그러실 것 같앴어. 내 아무리 봐도 마구 살상하고 다니는 직업적 포수로는 안 봤어요. 어쩐지……
뚱보 여자의 비윗살 좋은 대꾸에 포수는 가려운 데가 긁어진 듯 아주 만족한 표점이 되었다. 그는 아까부터 혼자 맥주를 따라 마시던 종이컵을 여인에게 냉큼 내밀었다.
싫어요. 전 못해요.
여인은 살찐 두 손을 마구 내저으며 몇 차례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컵을 받아들었고 포수는 컵이 넘치도록 맥주를 가득 따라 부었다. 뚱보 여인은 갈중 난 사람처럼 컵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러고는 자기 행동이 스스로도 민망했던지 얼른 포수에게 빈 컵을 건네면서 한 손으론 입을 가리고 킬킬거리며 웃었다.
제가 따라 드리죠.
허허허. 이거 황송하게 됐군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포수는 허다한 주석에서 익힌 버릇으로 냉큼 잔을 역인의 가슴 앞에 내밀었다. 그런데 이때 병을 잡고 맥주를 따르는 뚱보 여자의 솜씨 또한 허다한 주석을 거쳐온 솜씨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제가 대접을 해드려야 하는 건데. 되레 대접을 받았군요. 제가 꼭 한번 모셔야겠어요.
무슨 의미에선지 여인이 이렇게 말했고 포수는 그녀의 너무 지나친 비약에 적이 당황한 눈초리루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한층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주에 자주 들르시겠는데요. 평창을 내왕하시자면.
그렇구 말구요. 오면가면 원주서 반드시 일박씩은 하게 되죠. 때론 사나흘씩 머물 때도 있고.
그러시담 저의 집에도 한번 들러주시겠어요? 제가 손수 모시고 싶은 걸요.
그녀는 주위의 시선 따위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댁이 어딥니까? 어디라고 말씀해주시면 제가·……
사내는 약간 열적은 듯 얼굴을 붉히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꼬리에는 야릇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찾기 쉽다구요. 도청 뒷골목으로 빠져서 일심(一心)만 찾으시면 돼요.
자기가 초대받은 장소가 술집이라는 게 판명되자, 포수는 자못 실망한 듯 손바닥으로 자기 볼따귀를 몇 차례 문지르더니 가까스로 표정을 꾸미면서 말했다.
가죠. 가구 말구요. 일심 내 꼭 기억해뒀다 가리다.
그거 보쇼. 내 그럴 것 같았어요.
이때 작업복 청년이 환오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서 속삭였다.
저 여잔 술집 마담이라구요. 그런데 선생은 왜 양평서 자릴 양보하셨죠? 저는 이해가 안 되던데.
제가 양보했다구? 그건 오햅니다. 저건 그, 여자가 맞춰놓았기 때문에……
하, 딱하신 분, 맞춰놨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구요. 그렇게 남의 말을 죄다 믿습니까? 지금 같은 시대에. 저거 보쇼. 뻔뻔하고 주접스런* 게 내가 언제 거짓말했느냐 하는 얼굴이죠.
청년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쪽을 잔뜩 흘겨봤다.
이젠 자리 나기 좀처럼 힘들 거요. 양평 이후에는 힘들다구요. 아무튼 잘 지켜보쇼. 일어서는 사람 있으면 다짜고짜 가서 앉는 겁니다.
이때 열차의 기적소리가 길게 두 번 울렸다. 환오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자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주위는 빽빽이 들어찬 사람 벽으로 완전히 막혀 있기 때문에¡ 사람 외의 어떤 다른 풍경이 눈에 보일 턱이 없었다.
만종은 아직 멀었나요?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작업복 청년에게 물었다.
지금 겨우 지평 (砥平)에 들어가고 있어요. 지루하죠? 그럴 거예요. 이 기차는 영락없이 굼벵이처럼 기어가니깐. 다른 곳은 죄다 디젤로 바꾼 지 오랜데 이쪽 중앙선만 아직까지 유독 늙어빠진 증기기관차를 굴리는 까닭을 모르겠어요. 저기 보쇼. 평지를 달리는데도 늙어빠진 개처럼 쉭쉭거리며 헐떡거리고 있죠. 좌우간 만종까지는 한참 걸립니다.
피로와 짜증이 겹친 환오는 그 소리에 몹시 실망했다. 그는 지금 좌석은 고사하고 객차 안의 탁한 공기라도 환기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기대도 헛된 망상인 것이다. 그는 만약 만종서 차를 내린다면 맨 먼저 만종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는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환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살핀 작업복 청년이 다시 물었다.
만종은 초행이신가요?
네. 처음이죠.
어쩐지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만일 선생께서 초행이 아니시고 자주 이 기차를 이용하신 분이라면 틀림없이 이미 자릴 잡았을 겁니다. 초행이니깐 그다지 서투르죠.
이렇게 만원인데 그런 게 통합니까? 도무지 설 자리도 없는데 말이죠.
환오는 청년에게 항의 조로 말했다.
자리가 왜 없습니까? 저 여자처럼 사기라도 친다면 자리는 얼마든지 있어요. 자릴 못 잡는 사람들은 대개 초행이거나 아주 아둔한 사람뿐이라구요. 선생께서 이 기차의 풍속에 서투르니까 자릴 얻기가 힘들다는 거죠. 여기 단골 승객들은 의외에도 아주 약빨라요. 말하자면 최소한도의 요령은 갖춘 셈이죠. 선생께서 앉을까말까 하고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단골들이 재빨리 앞질러 가서 자리란 자리는 죄다 차지해버리거든요. 일단 점령이 끝난 뒤에 어슬렁어슬렁 다가서 봐야 때는 이미 늦은 거죠. 스피드의 시대 아닙니까?
느림보 기차에 약삭빠른 승객이라…… 이렇게 되면 스피드의 시대라는 것은 누굴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요. 난 좌석은 고사하고 이 객차 속으로 들어오는 데노 천신만고를 겪었초. 승강대 난간에서 꼼짝없이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도무지 빠져나갈 틈조차 없었으니까. 이제 겨우 동태 팔자를 면했지요.
정말 동태가 되실 뻔했군.
환오의 표현을 흉내 낸 작업복 청년은 한바탕 너털웃음을 웃었고 환오는 난간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라 겁먹은 눈초리로 그가 떠나온 난간 쪽을 다시 한 번 뒤돌아봤다.
열차가 지평 역을 떠나면서부터 승객들은 조금씩 침묵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떠들기에도 싫증나고 지쳤는지 그만 입을 닫고 눈을 감은 채 등받이에 기대고 잠시 동안 잠자는 시늉들을 했다. 통로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으로 옆 의자 모서리나 다른 사람에게 염치없이 기대고 슬그머니 조는 척 했다.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객차 속의 모든 입들이 한동안 침묵에 잠겼지만 그 시간은 그닥 길지 않았다. 불과 오 분도 채 못 되어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다시 눈을 뜨기 시작했고 몸을 부스럭 거리며 모기떼들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눈을 감고 침묵을 지키는 사이에 갑자기 부풀어버린 차바퀴 소리와 차창을 두드리는 들바람 소리가 그들의 안면을 오 분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 침묵의 순간에 그들이 비상구조차 마련되지 않은, 따라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한 객차 속에 갇혔다는 불안이 그들을 엄습했을 것은 틀림없었다. 아까부터 객차 한쪽 구석에서 화투판을 벌여왔던 칠팔 명의 부녀들이 다시 화투짝을 꺼내들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쪽 좌석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그녀들은 마치 자기네들 집 안방에서 모여 노는 양 멋대로 깔깔거렸고 기성을 올렸고 요란하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참말 좋은 세상이라구요. 돈만 있으면.
화투판의 부녀들을 몹시 부러운 눈초리로 건너다보던 뚱보 여자가 자기도 지지 않을세라 포수를 향해 말했다.
그렇구 말구요. 돈만 있다면 참으로 살기 편한 세상이지.
너무나도 지당한 말씀이라는 듯 포수가 금방 맞장구를 쳤다.
뚱보 여자는 그 참말 좋은 세상의 요모조모에 관해서 자기 나름으로 궁리해보는 듯 잠깐 눈을 끔벅거리고 있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집 안에서 헌다하는 배우다 가수다 뭐 못 볼 게 있나요. 음식도 마음만 내키면 사시사철 신선한 걸루 먹을 수 있으니깐. 참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어디 상상이나 하던 일이냐구요, 글쎄.
아주머니, 그게 다 이십 세기 과학의 진보 덕택 아닙니까? 시방 과학은 이십 세기는 옛말이고 이십일 세기까지 나가고 있다구.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구요, 글쎄.
포수도 자기 체신을 세우겠다는 듯 한층 거드름을 빼면서 말했다.
봤어요. 나두 봤다구요. 아폴로가 달에 착륙하는 걸 봤다구요. 뚱보 여자가 매우 성급하게 말했다.
저희 텔레비에 똑똑하게 비치던데요. 원주에도 작년에 수신 안테나가 섰다구요. 그런데 우리 집 텔레비는 실은 아들이 월남서 보내준 거라구요. 우리 집 아들놈은 애가 외톨로 어리광만 피우고 자라서 영 철이 없었는데 글쎄 걔가 지금 군대로 월남 가서 매달 꼬박꼬박 한 푼도 쓰지 않고 제 월급을 부쳐오지 뭡니까? 나 원 하두나 기특해서……
뚱보 여인은 살기 좋은 세상 얘기에서 갑자기 아들 자랑으로 돌변했는데 그녀가 어찌나 크게 떠드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은 이 주점의 마담이 지극한 효자를 두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마담의 말이 끝나자마자 포수의 뒷자리에서 얼굴에 술기운이 벌겋게 오른 청년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자기 단짝과 나란히 앉아서 양평서부터 소주잔을 권커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월남요? 아줌마, 월남에 댁의 아드님이 갔다고? 그렇담 내 좋은 수 알켜드릴까, 그 녀석 전사하라고 빌어요, 빌어. 어서 죽어달라고 말요. 그럼 목돈이 나온다구요, 아줌마.
청년은 뚱보 여자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마담은 금방 얼굴빛이 노기로 시뻘개졌다.
저런 육시럴 양반 보게, 뭣이 어쩌고 어쩐다구?
하, 내 진정으로 허는 말인데 화내실 건 없다구. 내가 철모 쓰고 월남 갈 적에 우리 자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발 돈벌어서 너도 효도 좀 하래므나.
이러셨다구요. 그런데 아무래도 크게 효도하려면 죽어야겠다구 생각하고선 일부러 죽으려고 파열되는 송유관 곁으로 뛰어들었다구요. 빌어먹을 효자가 못 될 팔자니깐 죽지 않고 경상만 입었지 뭐유? 그런데 죽으면 말요, 일단 죽으면 전사금 백이십만 원, 소대 조위금, 중대 조위금, 하사관 단위 조위금 이렇게 목돈이 나온다구요. 하하하.
술이 취한 청년은 한바탕 떠들고 나서 도루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이없게 봉변을 당한 뚱보 여인은 돌부처처럼 꽁꽁 얼어 있더니 돌연 단호한 어조로
그런 에미가 있을 턱이 없어.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기로서니 제 자식을 돈과 바꿀 에미란 없다구.
하고 내뱉었다. 좌석 주변이 이렇게 수란한 동안에도 내내 감았던 눈을 뜨지 않고 꿈쩍도 하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마흔을 갓 넘었을까 말까 한 그녀는 포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죽 눈을 내리감고 아주 초연한 자세로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여인은 짙은 보랏빛 통치마와 하얀 저고리를 단정히 입었고 가지런히 세운 무릎 위에는 자그맣고 검은 가죽가방이 놓여 있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는 그녀의 초연한 자세도 그러하지만 무언가 못마땅한 찌꺼기들이 있다는 듯이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여인의 창백하다 못해 푸르둥둥한 살갗의 강파른* 인상이 뭇사람들 가운데서 그녀를 더 돋보이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이따금 힐끗힐끗 곁눈질로 쳐다봤지만 그녀가 내리 돌부처 모양으로 있었기에 더 이상 주목하지는 않았다.
이때 건너편 좌석에서는 자리다툼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었다. 빠이루 외투를 입은 몸집 좋은 장년의 사내가 방금 좌석으로 다가와서 자리에 앉아 있는 잠바차림의 청년에게 아주 당당한 태도로 자리를 내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잠바가 빨끈하고 대들었다.
아니, 이거 보쇼 이게 당신 개인 자립니까?
내가 변소에 소변보러 갔지 아주 내린 줄 아우? 비켜주쇼.
변소에 간 건 당신 일이구.
하여튼 비켜주쇼.
이보쇼 당신이 이 자릴 전세 냈수?
순 엉터리로 말하지 마슈. 그럼 자릴 지키려구 변소에도 가지 말란 말이군 그래.
당신이 잠자코 일어섰지 언제 변소에 가겠다고 말했수? 난 다리 아파 못 일어나요.
글쎄, 그건 댁의 사정 아뇨? 비켜주쇼.
빠이로 외투는 아주 추근추근하게 얼러댔고 잠바 역시 호락호락 자리를 내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쪽 자리다툼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작업복 청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중앙선의 승객들 가운데 제대로 생겨먹은 놈은 한 놈도 없다구.
환오는 그의 어조가 너무 노골적이고 격한 데에 불안을 느끼면서 행여 누가 들을까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청년은 주위의 귀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이 계속 격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중앙선 찻간은 유난히 떠들썩하거든요. 영락없는 돗대기시장* 입니다. 보세요. 저 사람들 떠들어대는 소리 가운데 한마디라도 쓸만한 게 있나. 큰소리로 떠들어봐야 죄다 하나 마나 한 소리들뿐이라구요. 게다가 저 얼굴하며 표정들 좀 보라구요. 남자, 여자, 늙은이, 처녀애들까지 모두 얼간이 표정이 아닌가요? 기껏 약다고 하는 게 저 따위 표정이죠.
형 씨는 왜 그렇게 생각하죠? 피곤해서들 그러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구요. 그쪽 지방에는 먹을 게 없다 이겁니다. 먹지 못하니까 광대모양 비쩍 마르구 생각도 자연 얕아지지 뭡니까.
그건 생각 나름이겠죠. 난 이 사람들 아주 활기 있고 재미있게 보이는 데요.
글쎄 그거라니까요. 바루 그거라구요. 처음 타셨으니까 그게 재미있을 수밖에 없지요.
작업복 청년은 그런 무리 속에 지금 자기가 끼어 앉아 있고 그리고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그 무리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위를 노려봤다. 그러고는 눈을 내리감고 한참 동안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선생, 나도 이젠 싫증 났어요. 이 느림보 기차에 타고서 무한정 기다린다는 게 말이죠. 정말 지쳤어요. 매양 이 꼴 이 모양이니깐 정말 미칠 것 같다구요. 어떤 때는 이놈의 기차에서 그만 뛰어내려 죽어버릴까 하고 생각할 때도 있죠. 제가 별안간 이렇게 말하면 무슨 얘긴지 잘 모르실 테죠. 저는 요즘 기로에 서 있는 셈이죠. 마음 둘 데가 없고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시골에서 자극도 못 받고 젊은 나이에 무의미한 세월 보내는 데 싫증 나서요. 그래 도시로 나갈까보다 했죠. 하지만 막상 도시로 나가 보면 도시는 더 나를 실망시켜요. 허탕치고 그냥 돌아오죠, 돌아올 땐 하는 수 없이 배나무나 사과나무를 친구삼고 살자 이렇게 맘먹죠. 하지만 얼마 지나면 못 견디겠어요. 그러니까 이 기차를 타고 있을 때 제일 견디기 힘들다구요. 이렇게 느리게 느리게 기어가는 기차를 타고 드디어 동화역에 내려봐야 뾰족한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방황하는 동안 당신의 마음은 이 기차에 매달려 있다는 얘긴가요. 그래서 벗어나고 싶어도 도무지 이 기차를 탈출할 수가 없다는……
그런 거죠. 바루 그겁니다. 지긋지긋해도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앉아 기다리는 겁니다. 갈 데가 따루 없으니까. 지금 제 눈에 과일나무가 보여요. 캄캄한 데 우두커니 서 있는 과일나무가요. 그 옆에 가서 또 몇 달이고 서성거릴 겁니다. 그게 싫어서 도시로 가보면, 이건 거기서는 날마다 밤마다 축제가 벌어지는 것처럼 보이죠. 첨엔 그랬어요. 자세히 보느라면 참 우스운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더군요. 요란하게 되풀이되는 드럼 소리. 그건 마치 모든 도시 사람들이 지옥으로 바쁘게 걸어가는 행진에 맞춰 두드리는 소리 같죠. 그리고 무대와 화면에는 매양 같은 얼굴들이 나타나서 매양 같은 복장으로 매양 같은 표정으로 세리프를 반복하고, 수돗물로 잘 씻은 어떤 새하얀 손가락은 전화의 같은 다이알을 자꾸 되풀이 돌려대고, 어두운 살롱 구석에 처박힌 젊은 남녀는 드럼과 기타 소리에 맞추어 머리와 팔다리를 같은 모양으로 자꾸 흔들어대고, 노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인사말은 늘 그게 그거고, 술집에서는 날마다 대폿잔이 부딪치고. 뮤직 박스 속에서는 흡사 디스크가 바늘에 걸려 제자리걸음이나 하는 듯이 자꾸 비슷한 소절이 되풀이되고, 사랑하고 있어요, 사랑해요, 사랑한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게 현대의 리듬이란 것일까요? 통 모를 일이라구요. 난 그래서 그만 실망하고 말았어요.
그렇지만 하나하나 행동에 의미를 붙인다는 것처럼 피곤한 고역도 없겠지요. 그들은 약아서 그걸 깨닫고 있어요.
그건 나도 알지요. 실상 그들이 어떻게 하건 말건 나하고 무슨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선생, 내 말은 그게 아니라구요, 내 말은……
그러나 작업복 청년이 그의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저쪽 객차 모퉁이에서 화투판을 벌이고 있던 여인들 사이에서 요란한 아우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환오와 작업복 청년은 물론 모든 승객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함성이 터진 쪽으로 쏠렸다. 하나같이 요란한 빛깔의 나들이옷으로 곱게 단장한 칠팔 명의 여인들이 화투짝을 팽개치고 드디어 좌석에서 몸을 일으켜 둥실둥실 춤을 추면서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놀자, 놀자 하고 선동하면서 손뼉을 치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공연히 혼자 좋은지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고 낄낄거리는 여인도 있었고, 자기 흥에 취해서 스르르 눈을 감고 흘러간 옛 노래를 읊조리는 여인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들의 손뼉 치기는 서서히 박자를 맞추기 시작했고 누군가가 선창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손뼉에 맞추어 합창이 시작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피었다가 시들으면 다시 못 올 내 청춘˙
마시고 또 마시어 취하고 또 취해서
이 밤이 새기 전에 춤을 춥시다.
부기 부기 키타 부기 부기 부기 부기 키타 부우기
여인들은 마치 이 기차의 굼벵이처럼 느린 속도와 환기조차 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폐쇄된 억압적 분위기에 반항이라도 하듯이 보기 거북할 정도로 마구 팔다리를 휘둘러댔고 악을 바락바락 질러댔다. 째지는 듯한 여인들의 아우성과 손뼉 치는 소리는 금방 객차 안을 완전히 압도해버리고 말았다. 어떤 승객은 지루한 여행 중에 드디어 구경 거리가 났다고 침을 삼키며 그쪽에 주목했고, 어떤 승객은 귀청이 터지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그러나 그따위 반응이 그녀들의 안중에 있을 턱 이 없었다.
조용히 합시다. 떠들드래도 좀 조용히 떠들자구요.
이때 근처의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승객들의 불만을 대변하는 양 자못 점잖게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그러자 여인들 가운데서
뭐야, 떠드는데도 조용히 떠들고 자시 고가 있나.
하고 발칵 대드는 소리가 들렸고, 연달은 다른 여자가 상대방 사내를 조롱하는 말투로
이봐요, 난 척하려거든 말이나 똑바루 하라구요.
하고 빈정거렸고, 여인들은 그걸 기화로 또 한바탕 손뼉을 치면서 깔깔거렸다. 멋모르고 나섰다가 여자들에게 코를 물린 사내는 사나이의 체통으로 보아 도무지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던지 다소 기가 죽은 목소리로 간신히
그럼 어떻게 떠들어도 좋다 이 말입니까?
하고 대들었지만 여인들은 이미 그를 상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들은 눈에 뵈지 않는 그 무엇에 반발하듯 한층 자유스럽게 한창 기승을 부리며 자기네들이 마흔은 족히 넘은 여염집 아낙들이라는 사실마저 한층 뿌리쳐버리겠다는 아주 대담한 자세로 그녀들의 가무를 다시 펼쳐가고 있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만화방창* 젊은 날에
아니 놀지를 못 하리이라아 차차차
그녀들은 자기들이 청춘이건 말건 또는 이곳이 놀이터건 지옥이건 그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오직 만사를 제쳐놓고 정말 아니 놀지 못하리만큼 순식 간에 도취해버리고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승객들은 괜히 남의 장단에 발맞출 것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슬슬 그쪽에서 시선을 거두고 말았다.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요?
뭐 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죠?
환오가 묻자, 작업복 청년은 소음 때문에 미처 듣지 못했는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지금 어디쯤 가는 거냐고 물었죠.
글쎄요. 나도 넋 없이 앉았다 보니까 잘 모르겠군요.
청년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환오는 더럭 겁이 났다. 단골 승객인 청년도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을 모르다니 워낙 난장판 속이라 깜박 그걸 까먹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승무원의 내왕도 거의 불가능한 상태여서 누구 하나 책임지고 그걸 대답해줄 사람도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미 만종을 지났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평을 지난 뒤로 그는 아직 한 번도 정거장 플랫폼의 불빛을 보지 못했는데 정말 만종을 그냥 지나쳐버렸다면 큰일이었다. 환오의 이런 조바심과는 달리 여타 승객들의 표정은 너무 태평스럽고 여유작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 부르고 지껄이고 끼들거리며 웃고 있었다.
환오의 기억에 따르면 그 사이 열차가 몇 차례 정차했던 것 같고 기적소리를 몇 번 들었고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난 것 같았다. 하지만 터널은 이 중앙선 역 구간의 어디에나 빠뜨리지 않고 골고루 끼어 있기 때문에 그 기억으로는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이미 만종이 지난 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어요. 하, 손님.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건 없다구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이 기차는 굼벵이라구. 지가 기껏 달렸어야 구둔(丸屯) 아니면 양동(楊東)일 거요.
이렇게 말한 작업복 청년은 차창 밖을 내다보려고 차창 쪽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한참 동안 창 밖을 들여다보던 청년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제 자리로 돌아섰다.
안 뵈는데요.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이따가 차가 서보면 곧 알겠죠. 걱정할 건 없다구요.
객차 구석의 여인들이 아직도 그녀들의 흥겨운 가무를 계속하는 바람에 바로 옆에서 하는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찻간은 소란했다. 그녀들의 노래라는 것은 고작해야 인생이란 무엇인지 청춘은 즐거워, 혹은 얼씨구 절씨구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따위를 개미 쳇바퀴 돌듯이 되풀이하는 것이었지만 여인들은 조금도 싫증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난 차라리 이놈의 기차가 영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줬으면 좋겠다구요. 가는 데까지 가보면 끝장이 나는 때가 있겠죠.
춤추는 여자들을 흘겨보던 작업복 청년이 몹시 부아가 치미는 듯 말했다.
형씨는 왜 차중에서 그런 불길한 소릴 하죠?
아뇨. 정말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이 기차를 타고서 그런 생각 한번쯤 안 해보는 게 도리어 이상하죠. 난 암담해서 그래요. 아까도 말했지만 동화에 가봐야 빤하다구요. 웬일 인지 재작년부터 과수들이 하나둘씩 말라서 죽어가요. 시골 공기가 탁해서 그러는지 농약을 잘못 사용해서 그러는지 아무튼 아무리 애써도 농원이 점점 황폐해가구 있다 이겁니다. 그런 황무지에서 오래 견뎌봐야 남는 것은 썩은 대가리에 빈주먹뿐이다 이겁니다. 그런데 도시에 가보면 이건 더해요. 몽유병자들이 골목골목마다 득실거리는 통에 발붙일 곳도 물론 없지만 그보다도 숨이 막힌다 이거요. 내가 아까부터 선생을 주목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 기로에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고 싶었던 거라구요.
작업복 청년이 이렇게 나오자, 환오는 사뭇 입장이 난처했다. 그는 우선 청년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무리하게 기대하고 있다는 데 당황했고 청년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얼핏 포착할 수 없어서 쩔쩔맸다. 잠시 후 환오는 곧 그것을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이처럼 발붙일 곳이 없도록 초만원을 이룬 혼잡한 차중에서, 거주지 선택에 관한 일가견을 피력한다는 게 도무지 우스꽝스런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좌석 하나 차지하지 못한 자기 주제로는 더욱 그런 느낌이 앞섰다. 하지만 환오의 이런 기분에는 아랑곳없이 작업복 청년은 환오의 입을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엉뚱한 얘기겠지만 난 이 기차가 만종까지 무사히 가줬으면 해요. 환오는 얼떨결에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일자리를 구하려고 형씨가 말하는 그토록 황폐한 지방으로 가고 있죠. 하필 왜 그런 곳이냐고요? 지난 초봄부터 일 년 내내 구해봤지만 결국 그곳에 가보라는 소개장 하나밖에 구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니까 난 만종까지 무사히 가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작업복 청년은 깜짝 놀란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환오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난 단언해요. 틀림없이 환멸 끝에 돌아오고 말 거요. 그쪽에 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면 오산이죠. 아무것도 없으니까.
청년은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마구 흥분해서 부르짖었다.
난 보물 찾으러 가는 건 아니라구요.
그렇다면 뭡니까? 어떤 사명감 때문입니까?
그런 건 더욱 아니죠.
그렇다면 더욱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고 나더러 이 기차 속에서 살라는 겁니까?
그럴 수는 없죠. 더구나 이렇게 돗대기시장처럼 너저분한 삼등 열차에선 말이죠.
이때 열차는 쇠바퀴의 무거운 신음소릴 토하면서 벌써 정차하고 있었다. 환오와 작업복 청년은 얘기를 하느라고 미처 열차가 정차를 위해 속도를 줄여가고 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차창 옆에 앉은 승객들은 기차가 멈춘 곳이 어떤 곳인가 알려고 재빨리 차창 밖을 들여다봤다. 하나 시야에는 아무것도 드러나는 것이 없었다. 플랫폼의 수은등도 플랫폼을 오가는 승무원이나 역직원의 모습도, 그리고 역사(驛舍)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 눈이 믿어지지 않아 다시 차창에 바싹 다가가 들여다보았지만 시야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사고다!
누군가 경솔하게 소리치는 바람에 승객들은 멋모르고 겁에 질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차창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고 난데없이 살을 에는 듯한 매운 들바람이 한꺼번에 객차 속으로 밀어닥쳤다. 이제 열차가 정차한 지점 이 정거장의 구내가 아닌 것은 명백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장애물이 나타났나?
사람을 치었는지 알우?
누가 뛰어내렸나? 죽으려고.
알게 뭐야. 그런데 승무원은 왜 얼씬도 않지? 아까 석불역에서는 봤는데. 이 새끼들, 이렇게 손님들을 방치해놓고 종적을 감추고 소식이 없다니.
이렇게 제각기 떠들었지만 막상 공안승무원이나 열차원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나타난대도 지금 형편으로는 이 객차 속에 뚫고 들어올 틈도 없었다.
승객들은 자기들이 완전히 방치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열차는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배회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치 겨울 추위에 동태가 되고 오래 주려 허기진 나머지 제 길을 찾아갈 기력조차 없으리만큼 지친 망아지새끼 모양으로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있었다. 승객을 화물짝처럼 가득 실은 채로, 대관절 손님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달나라로 끌고 가는 것일까. 아니 갑자기 엄청난 열차 충돌을 일으켜 천당에라도 데려다주려는 것일까. 혹은 그 이름조차 모르는 전혀 자유스럽고 개방되었고 풍족해서 굶주린 개떼들이나 늑대들이 으르렁거리지 않는, 말하자면 흉포스런 짐승이라곤 없는 전혀 새로운 오색의 별천지에라도 인도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 기차가 멈춘 곳은 그렇게 별난 장소는 아니었다.
승무원이 보이지 않자, 승객들은 갖가지 불안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투신자살이 발생할 수도 있고 뜻밖의 장애물이 열차의 진로를 막고 있는지도 몰랐다. 또 정비 불량으로 이쪽 객차만 도중 분리되었을 가능성도 있었고, 누가 장난삼아 비상변*의 로프를 잡아당겨 버린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승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열차 충돌이었다. 이렇게 무작정 오래 정차하고 있을 경우 서로 통신이 두절되어 열차 왕래의 통할에 차질이 생긴다면 갑자기 엄청난 충돌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더구나 요즘은 석탄 화물차의 왕래가 매우 빈번
하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좌석의 승객들조차 하나둘씩 통로로 밀려나와 무작정 통로의 사람 물결에 휩쓸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팔 하나 조차 움직이기 힘들었던 통로의 혼잡은 형편이 아니었다.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렸고 사람의 상반신은 밀고 밀리면서 물결처럼 자꾸 휩쓸렸다. 이 격심한 동요 속에서도 그들은 막상 비상구를 찾거나 승강대 쪽으로 나가 보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장님들처럼 어떤 쪽으로 움직여야 할 줄도 모르면서 단지 객차 속에서만 몸부림쳤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비록 위험이 목전에 다가왔을지라도 일단 밖으로 나간 다음에 다시 승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설마 여기서 내려서 모두들 걸어가라는 건 아니겠지.
걸어가래면 걸어갑시다. 까지꺼 원주까지 이틀이면 갈 테니깐.
제법 태평스런 태도로 이렇게 지껄이는 패들도 있었지만 이건 어디 까지나 공포심을 은폐하는 허세에 불과했다.
야, 술이나 마셔. 까지꺼 잊어버리구.
아까부터 소주를 대작하던 건너편 좌석의 사내들은 까지꺼 눈 하나 까딱 않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서 연거푸 잔을 비우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이미 만취해서 실상 자기들이 지금 기차를 타고 있는 것도 잊고 있는지 몰랐다.
이렇게 모든 승객들이 비명을 올리고 낄낄거리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여태까지 포수 옆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내리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던 그 창백한 여인이 별안간 눈을 뜨고 벌떡 일어섰다. 살빛이 유독 창백한 그 여인은 흡사 신들린 사람처럼 눈을 흡뜨고 주위의 혼란을 한바퀴 살펴본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결연한 표정으로 갑자기 손뻑을 치면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빛 되신 주 저 본향집*을 향해
가는 길 비추소서.
내 가는 길 다 알지 못하나
한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삼 절까지 계속된 여인의 노랫소리는 약간 목이 쉬긴 했지만 뜻밖에도 찌렁찌렁하게 울려서 객차 속을 가득 채웠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그녀는 박자를 맞춰서 계속 손바닥이 부르틀 정도로 힘껏 손뼉을 쳐댔고 끝판에 가서는 전신을 흔들어대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시끄러워요. 이게 뭐 예배당이요?
옆자리의 포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짜증을 부렸고 마담이 맞장구를 쳤다.
아유, 난 골치가 다 지근거려요. 아유, 골치.
아줌마, 이 좀 봐요.
건너편에서 소주를 마시던 사내들이 좋은 일. 났다고 이쪽을 넘겨다봤다. 거의 곤죽이 된 한 사내가 두 홉들이 소주병을 든 채 이쪽을 보면서 자꾸 여인을 불렀으나 여인은 미처 듣지 못했는지 계속 손뼉을 치면서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아줌마, 이 좀 봐요.
노래를 끝낸 여인이 힐끗 뒤를 돌아봤다.
왜 그러우?
여인은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미소마저 흘리며 취객을 바라보았다.
아줌마, 내게도 진실은 있다 이거요. 나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 못지않게 진실해진다 이거요. 난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한 번도 잊어버린 일은 없다구요. 그러니까 말인데 난 아줌마가 두 홉들이 소주 한 병만 사준다면 믿겠어. 맹세코 믿겠어.
그 바람에 이 시온성의 여인에게 짜증 부렸던 사람들은 까르르까르르 웃어 제 쳤다.
이 새꺄. 믿긴 뭘 믿는다고 그래. 술맛 떨어지게.
뒤에서 사내의 패거리가 핀잔을 주자 소주병을 든 사내는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지만 여인을 야유하는 패거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짧게 깎은 한 건장한 사내가 꽤 먼 거리에서 사람을 헤치면서 열심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를 쓰고 여인 앞으로 다가온 사내는 대뜸 노오란 오렌지주스 병을 여인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게 뭡니까?
마시셔요. 제가 전도하는 셈이 되니까요.
사내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더니 다시 말했다.
아주머니, 저는 오늘 많은 감격 받았어요. 목이 쉬셨군요. 좀 쉬어가며 하세요.
목이 쉬었지만 주님이 같이하시니까 괜찮죠. 예수님은 사십 일 금식 기도까지 하셨는데 뭘. 직함이 뭡니까?
평신도예요.
은혜 받으러 오신 일 있어요?
전 농사로 바빠서 그런 기횔 못 가졌죠.
이번에 원주 전도관에서 대심령부흥회가 있어요. 저도 지금 거기 가는 길이죠. 오세요. 함께 은혜 받으시게. 자 찬송가 백구십일 장 함께 부릅시다. 내 사명만 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죠. 참사명을 하시느라고.
두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해서 이번에는 혼성 이중창이 시작되었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사뭇 경청을 강요해오는 이토록 간절한 억양의 후렴이 손뼉 박자에 맞춰 네 번씩 이나 되풀이되는 동안 승객들은 그만 넋이 달아나고 만사가 귀찮아서 될 대로 되라는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이제 이 찻간에서 누가 무슨 짓을 하건 그걸 제지할 권리도 없다는 것. 그걸 제지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만사가 귀찮아졌던 것이다. 거기다 노래의 옥타브가 높아졌을 때 객차 속의 분위기는 꼭 피란민을 만재한 객차처럼 유독 살벌하고 각박하게 느껴졌고, 그 분위기에 억눌린 승객들의 기분은 그 노래의 가사처럼 자기들이 마치 죄를 짓고 어디엔가 유형지로 호송되어가는 죄수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노래의 네 번째 소절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차는 거짓말처럼 다시 미끄러져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승객들의 기분은 금방 돌변해버렸다.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갓 깨어난 맹수들처럼 방금 지나간 불유쾌한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무엇보다 잃어버렸던 좌석의 질서를 되찾기 위해 맹렬하게 다투고 욕지거리를 퍼부어대고 상대방을 사정없이 밀어붙이곤 했다. 추저하고 망설이던 환오조차 이제 그 다툼에 한몫 거들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창작과비평』 22호(1971 년 가을); 『선생과 황태자』 (창비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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