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인산(修仁山 561.2m)을 이름그대로 직역하면 어짊(仁)을 닦는(修) 산이라는 뜻이다.
조선조 500여 년동안 전라도의 총지휘부로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병영성과 수인산성 등 유서깊은 유적지들을 품고 있다.
병영성은 또한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하멜(1630~ 1692)이 7년동안 머문 곳이다.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선원으로 일본으로 가다가 풍랑으로 좌초하여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13년 28일을 조선에서 보냈다.
1668년 하멜이 펴낸 ‘하멜 표류기’는 그가 조선에서 보낸 생활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소개하므로서 조선을 서양 사회에 최초로 알려준 기록이다.
병영성은 1417년(태종 17)에 남해지역 방어를 위하여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을 설치하고 전라도의 53주와 6현을 통할하였다.
그러나 이 병영도 1894년 동학혁명을 맞아 소실되고, 병영의 관문으로 배율천(背律川)에 건축된 홍교(虹橋)만 유총각과 김낭자에 대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채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병영성 홍교(兵營城虹橋)’는 ‘배율강다리’라고도 하는데,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무지개 모양의 홍예형으로 결구하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수인산성은 높이 5m, 너비 4m, 총길이 6km의 산성으로 3개의 성문(동 남 북)이 있으며 직사각형의 돌로 쌓은 백제 시대에 축성된 산성이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는 인근의 백성들이 이곳에 피란했다고 하며, 성안에는 봉수대와 절터, 창고터, 우물 흔적이 남아 있다.
필자는 지난날 강진에서 올라 수리봉을 지나 장흥 계관바위로 하산한 적이 있다. ※ 참고 산행기 ☞ http://blog.daum.net/bok-hyun/25
그래서 이번엔 그때 답사치 못한 ‘하멜기념관’과 ‘전라병영성’을 그친 후 내친 김에 ‘병영성 홍교’까지 답사하기로 했다.
산행코스: 하멜 기념관-전라 병영성-병영성 홍교-지로마을 주차장-홈골저수지-수인사-남근석 각자-홈골재 북문-(정상 생략)-홈골-지로마을 주차장
GPX
약 8km의 거리를 4시간 동안 걸은 셈.
<참고 개념도 국제신문> 홈골저수지 원점회귀.
<참고 개념도 부산일보> 강진 홈골제 → 장흥 계관암 자미마을 버스 정류장
들머리인 지로마을로 올라가는 버를 하멜 기념관 앞에서 세웠다.
주차장엔 네델란드의 상징인 풍차와 하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헨드릭 하멜 동상은 1998년 강진군과 네델란드 호르큼시가 자매결연한 것을 기념하여 호르큼시에서 강진군에 기증한 동상이다.
호르큼시에도 이와 똑같은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앙증스런 모습의 '하음'이가 우리를 반긴다. '하음'이는 하멜의 마음이라는 뜻의 캐릭터.
'병영 하멜길'을 소개하고 있다. 병영 하멜길은 3~400년 전 하멜이 남겼을 흔적을 좇는 길.
먼저 전라병영성 하멜기념관을 찾아든다.
탐방객이 없어 다소 썰렁한 기념관은 무료입장으로 하절기에는 18:00까지, 동절기에는 17:00까지이다.
1998년 하멜의 고향인 호르크룸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강진군은 2007년 하멜기념관을 세웠으며, 청자 수출을 모색하는 등 문화교류에 힘쓰고 있다.
끊임없이 조선을 탈출하려 했던 하멜이 탈출에 성공한 후에 조선과 직접 무역을 시도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좌절에 부딪혔다.
하멜일행이 탈출에 성공한 후 조선에 남아있던 8명의 네델란드인들도 송환교섭에 의해 1668년 일본 나카사키로 떠났다.
하멜일행은 한밤중에 나가사키 항구에 정박했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소속된 동인도회사에 억류된 기간의 임금을 받아내기 위하여 작성된 기록으로서 서양에 조선을 알린 최초의 기록이다.
하멜표류기.
우리나라에 소개된 하멜표류기는 역사학자 이병도가 번역하여 1939년 소개되었다.
이보다 먼저 1917년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 잡지'에 연재되었으며, 최남선이 이를 '청춘'이라는 잡지에 소개하였다.
1663년 억류된 지 10년이 다 되었을 때 강진지방의 가뭄으로 22명의 선원들이 흩어져 수용되었다.
하멜은 식량부족과 고달픈 노역으로 고생을 하다 탈출에 성공하여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멜이 탈출에 성공했던 건 조류와 바람이 거들어주어 가능했던 것.
네델란드의 나막신.
강진에서의 생활은 고달팠을 것.
하멜이 한양과 강진간을 이동한 이동경로.
17세기의 동아시아는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혼란스러웠고, 후금이 명나라와 충돌한다면 조선은 명나라를 도와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누루하치의 후금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운 후 조선으로 쳐들어와 병자호란(1636)을 일으켰다.
일본은 네델란드와 무역통상이 이루어지는 등 서양과학과 기술을 받아 들였지만 조선은 외국과의 통상을 받아들이지 않아 근대화의 길이 늦어졌다.
오늘날까지 강진에 남아있는 이국적인 흔적들은 아마도 하멜일행이 강진에 머물 때의 흔적들로 추정된다.
홍교의 석장승과 병영의 돌담, 그리고 특이한 형태의 관개수로와 이국적 모양의 공구와 생활도구 등이 그 연관성을 추정해볼 수 있다.
하멜일행은 효종을 알현하고 고국인 네델란드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돌아온 봉림대군은 즉위하자 효종이 된다.
효종은 청나라를 치기 위하여 조총과 화포를 개량하는 등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효종이 사망하고 청나라와 관계가 개선되면서 약화되었다.
이때 제작한 홍이포(紅夷砲, 1652년 제작)는 네델란드인이 사용했던 화포라고 하여 '붉은 오랑캐의 화포라고 하였다.
1654년 한양으로 올라온 하멜일행은 일본으로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청나라의 사신을 찾아가 본국송환을 호소하며 탈출을 감행하였다.
탈출사건이 실패하자 1656년 이곳 강진 병영으로 유배를 와 7년여 유배생활을 한 셈이다.
일명 박연(朴燕)·박연(朴延). 1626년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극동지방에 왔다가, 1627년(인조 5)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꾸어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동료인 히아베르츠, 피에테르츠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1628년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뒤 훈련도감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총포의 제작·조종에 종사하면서 조선 여자와 결혼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하여 싸웠으며, 이때 2명의 동료는 전사했다.
1653년(효종 4) 하멜 일행이 표착했을 때 직접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았다.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어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다음백과>
탈출에 실패하자 목에 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칼이 채워졌다.
17세기 제주도는 왜구의 침략과 뱃길에 표류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또한 국가에 말이나 특산물을 진상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죄인을 유배시키는 유배지이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제주도에서는 식량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하멜일행은 서울로 이송되었다.
난파선 도둑들에 대한 처벌은 상당히 엄격하였다.
1653년 타이완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하멜일행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같은 네델란드 출신 벨테브레(한국명 박연)의 통역을 받았다.
제주도에서의 힘든 생활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를 거듭하며 10개월을 머물다 다음해 서울로 이송되었다.
하멜일행이 타고온 배 '스페르베르호'는 산산조각이 나서 64명의 선원 중 36명만이 겨우 살아 남았다.
스페르베르호.
17세기 네델란드의 문화와 예술은 크게 번성하였으며, 훗날 '빈센트 반 고흐(1853~ 1890)'와 '피트 몬드리안(1872~ 1944)이 꽃을 피웠다.
네델란드의 상업과 금융자본의 발달로 엄청난 자금을 확보한 동인도회사는 세계무역 총액의 절반을 남을 정도로 막강하였다.
이와 더불어 문화와 예슬에서도 네델란드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1648년 스페인에서 독립한 네델란드는 상인계층의 주도로 자본주의 형태의 국가를 이루었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자랑할 수 있게 된 데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한 몫을 한 셈이다.
네델란드는 유럽 북서부의 저지대 국가이다.
네델란드라는 나라 이름이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전 국토의 1/3이 해수면보다 낮다.
바닷물이 빠진 곳에다 간척사업을 하여 둑을 쌓고 풍차로 물을 퍼 올렸으니 풍차는 네델란드의 상징물이 되었다.
풍차의 활용과 간척지 개발, 또 운하와 수송운송 체계는 네델란드의 숙명적 사업으로 대역사였던 셈이다.
하멜의 출생기록과 하멜의 동상. 하멜이 왼팔에 끼고있는 책은 하멜보고서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조선을 떠올리는 동방.
조난당한 64명 중 살아서 네델란드로 돌아간 사람은 16명이다.
하멜기념관을 나와 도로를 건너 '전라병영성'으로 향한다.
지금 한창 보수 중인 병영성...
성곽을 들어가...
동문인 듯한 2층 누각을 오른다. 2층 누각엔 아무런 현판이 걸려있지 않았다.
내려다 보는 병영성.
조선조 600년 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다.
유적으로는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내려와서 올려다보는 동문의 2층누각.
4대문으로 둘러싸인 병영성과 노거수.
동문에서 좌측 성문으로 빠져나가 '병영성홍교'를 찾아간다.
담쟁이가 예쁜 옹성을 벗어나 뒤돌아보니 그 구조가 특이하다.
옹성(甕城)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으로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처럼 둥글게 2중으로 돌출되게 한 겹 더 쌓았다. 그러므로 성문으로 진입하려는 적을 사방에서 공격하기 쉽다.
이 문 2층 누각은 진남루(鎭南樓).
성밖으로 빠져나와 성곽을 바라보며 300여 미터 떨어진 '병영성홍교'를 찾아간다.
'병영성홍교'가 배율천에 걸쳐있다.
요즘과 달리 토목공법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의 ‘병영성 홍교(兵營城虹橋, 전라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9호)’는 ‘배율강다리’라고도 한다.
둥그스름하게 아치형을 그렸으니 무지개를 닮아 무지개 홍(虹)자를 넣어 홍교(虹橋,)라 이름하였을 것.
아치형 홍교 아래에 용두(龍頭)가 여의주를 물고 아래를 보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냥 해학적으로 꾸민 게 아니라 다리의 튼실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여의주를 문 용을 등장시켰으리라 짐작해 본다.
홍교를 지키는 수문장으로 두 석장승이 서있다. 그 우측에 선 석장승이 서양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멜일행의 영향인 듯하다고 한다.
우리의 오형님은 안내판 글자의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세세히 읽어본다.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제 129호 병영홍교.
병영성홍교의 안내판.
건축 연대는 숙종 무인년(1698년)에 가선동추(嘉善同樞), 경술년(1730년)에 숭록대부(崇綠大夫)가 된 유한계(劉漢啓)의 금의환향을 기념하여
양한조(梁漢祖)가 감독, 준공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병영에 부유한 양반집 출신인 김낭자와 머슴으로 살던 유총각이 서로 사랑하고 있었지만 시분의 차이때문에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한 두 사람이 산에 가서 소나기를 피하다 우연히 나무아래에서 만나게 된다.
둘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어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고, 백년가약을 맺은 후 낳은 자식이 정승까지 오른 유한계이다.
병영성홍교는 경술년(1730년)에 숭록대부(崇綠大夫)가 된 유한계(劉漢啓)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다리라고 한다.
유총각과 김낭자의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전설이 기록된 안내판.
홍교 뒤로 고개를 드니 하고(下古)저수지가 보인다. 하고저수지엔 수생식물이 아름답게 자생하고 있다.
돌아 나오면서 만난 '병영하멜길' 안내석. 여유롭게 여행을 한다면 '병영하멜길'은 안내석이 가리키는 대로 천천히 둘러볼 곳이다.
이제 수로를 따라 멀리 보이는 수인산을 올라야 한다.
이제 막 모내기를 마친 논둑을 따라...
올려다 보이는 수인산을 잡아보니 병풍바위가 가까이 온다.
병영성 성곽을 따라...
여유롭게 걸으며...
역시 옹성인 서문을 지나고...
유적 발굴이 진행되는 듯 북문 쪽은 어수선하다.
병영성을 벗어나...
초대병사마천목장군(初代兵使馬天牧將軍, 1359~1431)의 표석을 만난다.
마천목장군은 고려 말 장흥군에서 태어나 15세에 부모를 따라 곡성군 오지리 당산촌으로 이거함으로써 곡성사람이 되었다.
장군의 효성은 지극하여 이에 감동한 도깨비들이 돌로 강을 막고 어살을 만들어 고기를 잡아 부모를 봉양했다고 '마천목장군의 도깨비 살'로 통한다.
원래 신체가 강건해 힘과 무예가 출중하였고 경서(經書)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1394년 37세되던 해에 정7품인 사직의 자리에서 봉직하였는데 이때는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우고 태조가 된지 7년차로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여 왕자들끼리 골육상쟁의 피를 흘릴 때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공훈을 세워 상장군의 직위를 받았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에 방간의 편에선 박포를 사로잡아 난을 평정한 공로를 인정받아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면서 동지총제로 승진하였다.
태종때 노모봉양을 위하여 전라도 도 절제사로 보냈다가 4년후 59세되던 1416년에 초대 전라병마절도사로 부임하여 전라병영성을 축조하고 61세때부터
여러 벼슬로 승승장구하다가 1431년(세종 13)에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전라병사영지' 자연석 표석과...
그 뒤로 나란히 선 세 기의 비석은...
모두 한 사람의 비(碑)로 '전주사김지홍창선기념비(前主事金志弘彰善紀念碑.이다.
그 중 제일 선명한 좌측의 철비((鐵碑, 쇠로 만든 비)는 높이가 162cm이고, 비신의 넓이가 30cm, 두께가 3cm로 녹이 슬고 부식되었다.
비신에 사각형으로 홈을 판 후 양각으로 글자를 새겼고, 그 양 옆으로 송시가 새겨져 있으며 전라지방에서 많이 나타나는 철비의 형태이다.
뒷면엔 '병인삼월일(丙寅三月日) 유치면수(有治面竪)'라 새겨져 있어 히로히토가 즉위한 1926년(왜정 소화1년) 유치면에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수인산 안내판을 따라...
고목나무와 정자쉼터를 지난다.
정자의 현판은 지정각(枳亭閣). * 지(枳)자는 탱자나무를 말한다.
우리 버스가 주차 대기중인 곳을 지나...
수인산 병풍바위를 보고 곧장 향한다.
상림마을 표석이 있는 곳은 사거리 지점.
병풍바위와 남근석을 살짝 당겨도 보고...
안내판을 비교한다.
홈골저수지 제방위로 병풍바위가 위세를 뽐내고, 제방 우측으로 빙 두르며 오르는 능선이 보인다.
제방을 올라...
제방 끄트머리의 우측으로 수인산성 남문으로 향하는 능선길이 안내되어 있다.
우리는 수인사를 경유하여 병풍바위와 남근석으로 곧장 오르기로 하였다. (당긴사진)
수인사를 만나고...
수인사 절문을 바라본다. 수인사의 스님들과 하멜일행이 당시 친하게 지냈다고 하던데...
수인사 편액의 글씨는 서경보 서(徐京保 書)
서경보 스님(1914∼1996)은 승려이자 불교학자로 법호는 일붕(一鵬)이며 일붕선교종(一鵬禪敎宗)의 종정을 지냈다.
마른 계곡의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
산길로 접어든다.
이정표엔 병풍바위가 2km라 적혀있다.
전주 이씨 묘지를 지나고 암반지대를 오르면...
오른쪽 능선(수인산성 남문으로 가는 길)으로 전망이 열린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점심 보따리를 풀었다.
헬기장을 지나고...
(헬기장의 이정표.)
평이한 산길을 이어가면...
정면으로 커다란 바위와 맞닥뜨린다.
병풍바위다.
샘터가 있는 이 지점의 이정표.
여기서 보니 임금이 쓰던 익선관을 닮았다. 두 바위의 중간으로 올라가 거대한 병풍바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지만...
그 좌측 바위의 반듯한 면에 빼곡히 글자가 박혀있어 가까이 가 보았다.
절도사 아무개 등등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고...
'광양현감 민영조'와 갑오(甲午), 중춘(仲春), 주승(主僧), 청악(淸岳), 입각(立刻)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절도사 이문영'과 '학사 이정식' * 절도사(節度使)는 조선 시대에 각 지방의 군대를 통솔하고 경비를 담당하던 종이품 무관직(武官職)을 말한다.
학사(學士)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왕의 측근에서 왕명을 대필하는 등 문신(文臣)의 관직을 말한다.
'갑오 맹하 주승 청악'이니 갑오년에 청악스님이 봄과 여름 두 번을 왔다.
병상국김공태욱불망석((兵相國金公泰郁不忘石) * 병상국은 병마절도사의 이칭(異稱)으로 아부성 용어.
'절도사이정규' 각자 아래에 '청악'이 또 보인다. 불공은 드리지 않고 유람만 하시남?
이곳 제법 너른 암반에 깊게 홈이 파여져 있는 건 한 칸 정자라도 세웠던 모양이다.
성곽이 남아있는 풀숲으로 들면...
절구통과 기와조각을 모아 놓았다. 이곳이 사람이 기거한 흔적일 터.
각자(刻字)바위에서 올라와 'ㅓ'자 갈림길에서 좌측 대숲으로 향하다 되내려와 직진방향으로 50m만 가면...
별장터로 알려진 너른 장소가 나온다.
원형이 보존된 우물안을 들여다 보니...
깨끗이 청소만 하면 지금이라도 사용가능할 수가 있겠다.
이 거대한 멧돌과 기와조각.
산아래가 희미하게 보이고...
수인산 정상인 노적봉의 모습도 보인다.
허물어진 성곽을 따라...
안내판이 있는 홈골재 북문에 닿았다.
홈골재의 안내판을 뒤로하고, 정상 등정은 생략이다.
홈골로 내려가는 등로는 너덜과 급경사로 상당히 거친 편.
절터인 듯 석축과 대숲을 이룬 곳.
이끼 낀 계곡에 가야금 12줄인가?
목교를 지나...
오솔길을 걸어서...
감나무 농장 앞으로 나왔다.
농장 앞에 선 이정표.
돌아보니 오른쪽 위로 병풍바위가 보이고...
코 앞엔 이미 홈골저수지가 보인다.
저수지에서 돌아본 수인산의...
병풍바위와 남근석을 당겨 보았다.
홈골저수지 너머로 보이는 노적봉과 병풍바위.
저수지 제방을 내려서...
우리 버스가 대기중인 주차장에 닿았다.
이 지점에 차를 주차시키라는 친절한 안내판.
병영마을 돌담길은 등록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안내판.
버스가 대기 중인 곳 쉼터는...
수도시설이 되어있어 머리를 처박고 땀을 씻을 수도 있는 곳이다.
버스 옆에 '열렬한 사랑, 다산, 풍요'라는 꽃말을 가진 하얀 접시꽃이 곱다.
접시꽃으로 출세한 사람이 있다.
접시꽃만큼 곱고 바른 행정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