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 아래 푸른 평화, 스위스 / 김윤자
스위스에서는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모두 초지다. 흙이 보이지 않는 나라다. 초지 사이로 좁은 길을 내고 산다. 나라 자체가 해발 700m 고지에 형성되어 있어 모든 풍경들이 다른 국가와는 다르다. 알프스 산맥 준령이 신의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 평화롭다. 마을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언덕을 따라 줄지어 집을 지었거나, 초지 위에 홀로 주택이 있다. 고지의 초록 풀은 한껏 푸른빛을 발하고 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고산 설경이 비경이다. 설산과 초지가 공존하는 나라다. 작은 나라 스위스, 유럽 지도에 조그만 나뭇잎 하나 모양으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다. 면적은 한반도의 1/5, 남한의 절반도 안 되는 나라다. 한국 경기도의 인구보다 적은 나라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이 다섯 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산다. 유럽의 역사가 그렇듯이 스위스도 전쟁의 회오리바람에 말려든 슬픔을 안고 산다. 시저에 의해 정복된 후 로마로부터 점령당했다.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넘나들던 길이 오늘의 길이다. 영구 중립국을 선언한 스위스, 이제는 설산 위에서 푸른 평화가 넘실거리고 있다.
*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선
서유럽 독일 여행을 마치고 독일 티티제 마을을 떠나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선을 넘는다. 스위스는 EU 국가가 아니라서 국경선 사무실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한다. 운전기사가 독일령 국경선 출국신고를 하러 사무실로 갔다. 비가 오는데 국경선은 겨우 고속도로 톨게이트 하나의 몸체로 서서 오가는 길손을 배웅한다. 유럽 여행에서 EU국끼리는 신고 없이 그냥 넘어 다니던 국경선, 서로의 자국 국기 두 개만 꽂아 놓은 것이 전부일 뿐 경계선도 없는 국경선, 지금 독일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신고 절차가 오히려 껄끄러운 것은 어인 일일까. 우리는 이마저도 못하여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 유럽 여행 중, 동유럽과 서유럽 모두 국경선을 쉬이 넘는 모습이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지금 차 안에서 독일 사무국에 출국 신고를 하기 위해 들어간 운전기사를 기다리며, 다른 나라끼리의 국경선을 넘는 것보다 까다로운데도 행복한 기다림, 행복한 순간이다. 독일령을 지나 다시 스위스령에 진입하여 입국신고를 했다. 역시 운전기사가 대표로 나가 그 절차를 밟는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비도 아름답고, 넘어가는 국경선의 마디도 아름답다. 울음처럼 슬픈 비, 우리의 조국에서라면 그리 해석될 국경선의 비가 이곳에서는 낭만의 비, 평화의 비다. 국경선에 대한 축복의 비다.
유럽 들녘의 비는 아름답다./ 하나로 통합된 대륙에/ 하나의 비로 뭉쳐 내리는 모습이 그렇다./ 유로 버스를 타고 국경선을 넘나들어도/ 고속 열차를 타고 국경선을 넘나들어도/ 경계선이 없는 들녘이다./ 신고 절차만 거치면/ 경계선 너머 이웃 나라로 이사도 가능하다./ 스위스가 EU국이 아니라 하여/ 독일령에서 스위스령으로 넘는 마디에서/ 출입국 사무실에 신고하기 위해/ 머무르는 순간도 행복하다./ 빗줄기가 굵어져 차창을 가린다./ 울음처럼 슬픈 비/ 내 조국의 국경선에서라면 그리 해석될 비가/ 이곳에서는 가벼운 낭만/ 국경선에 대한 축복의 비, 평화의 비다.-김윤자 시 [국경선의 비] 전문
* 스위스 샤프하우젠 라인 폭포
독일에서 넘어온 최초의 스위스 령 도시다. 모두 푸른 물결의 아름다운 스위스 땅, 흙이 보이지 않는 초지 국가다. 더러 보이는 밭흙은 까맣다. 라인강 교역으로 번영한 샤프하우젠은 '선박의 집' 이란 뜻이다. 샹트요한 교회와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기사의 집 등 중세 건물이 구시가지가 남아 있으며 특히 이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라인 폭포가 있다. 라인강 1320km의 긴 흐름이 스위스에서 발원하여 독일로 흘러간다. 그 첫 줄기가 라인 폭포다. 독일과 스위스의 경계선을 이루며 폭포를 사이좋게 나누어 갖고 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미국과 캐나다가 나누어 공유하는 것과 같다. 내가 본 곳은 스위스 쪽에서다. 150m 폭에 23m 높이의 장엄한 폭포가 눈앞에 전개된다. 떨어지는 폭포는 스위스령, 떨어져 흐르는 라인강은 독일령이다. 보트를 타고 가까이 접근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이 바위 구멍을 뚫어 장관이다. 1600년 전에 생긴 폭포다. 보트를 타고 가 큰 바위를 돌아오는 것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안개 속의 숙녀호'를 본떠 만든 것이다. 초당 700㎤의 물이 쏟아지는 웅대한 폭포다. 점점 폭포 가까이로 내려가며 커다란 굉음과 하얀 물보라에 나의 영혼까지 요동치는 물살에 젖고 있다. 알프스 산맥이 탄생시킨 위대한 폭포다.
돌아서 가야지 하면/ 하얀 평화가 배꽃처럼 나부끼고/ 이제는 정말 돌아서야지 하면/ 하나로 융화되는 함성이 푸른 메아리로 울리고/ 내가 네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너의 자태가 아름답다거나/ 폭이 장대하여 웅혼이 깃들어서가 아니고/ 알프스 산맥에서 탄생하여/ 라인강의 첫줄기라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런 객관적인 사유는/ 나의 눈으로 느끼는 찬란한 감탄이고/ 가슴 속에서 솟구치는 붉은 갈망을/ 쉬이 접지 못함이다./ 나는 지금 스위스 샤프하우젠에서/ 전망대를 오르내리며 바라보는데/ 저 건너는 독일의 영토/ 폭포의 낙차까지는 스위스령/ 떨어져 흐르는 물줄기부터는 독일령/ 네가 그리는 고운 국경선에, 나는 목이 메인다.-김윤자 시 [라인 폭포] 전문
* 스위스 휴양도시 엥겔베르그
저녁 무렵 우리가 유숙할 엥겔베르그 마을에 다다랐다.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산중 마을이다. 로키산맥의 한 자락에 들어온 느낌이다. 스위스는 자체가 해발 700m 고도에 위치한 나라이고, 엥겔베르그는 해발 1000m 고지의 마을이다. 그래서 기압 차이가 난다. 또 호텔은 더 높은 산 중턱에 지어 있어 엥겔베르그 시가지에서 곤도라를 타고 레일을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오르는 길도 신기하고, 올라온 호텔도 신기하다. 사위의 설경과 침엽수림이 절경이다. 어스름 시린 빛이 밤을 부르고 있다. 추위 방지용 건축법으로 방 천정이 상당히 높다. 창문을 열고 바라본 바깥 풍경은 비경이다. 산 곳곳에 드리운 불빛과 눈앞에 선 침엽수림이 잠들지 못하도록 설렘으로 다가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 커튼을 제키고 본 바깥 풍경은 요정이 사는 마을이다. 어쩌면 저리도 아름다울까. 높은 알프스 산과 하얀 눈, 짙푸른 상록수가 하늘 닿을 듯 높아 신비롭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운 마을 엥겔베르그는 휴양도시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행복한 고을이다.
시린 빛에 젖어/ 영혼이 춤추는 행복이라 하면/ 이해가 되실런지요/ 조금 더 투명하게 그리라 하면/ 알프스의 요정이/ 밤을 접고, 은빛 소야곡으로/ 창문을 두드립니다./ 여기서 더 진하게 읊으라 하면/ 하루를 살다 가는 목숨이/ 불과 사랑하는 황홀한 투신/ 그 찰나의 고요가/ 해가 떠도 잠들지 않고/ 달이 떠도 잠들지 않고/ 시간을 이탈하여 흐른다 하면/ 이제 아시겠지요/ 스위스 알프스 산맥 아래/ 동그란 마을, 엥겔베르그의 시린 비경을 -김윤자 시 [엥겔베르그의 시린 비경] 전문
* 알프스 티틀리스 산정
알프스 산정에 오르는 케이블카는 하나의 교통수단이다. 승차장이 한국의 열차, 혹은 전철역처럼 단독 건물로 꾸며져 있다. 표를 사는 곳과 대기 홀이 넓은 공간에 구분되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고 내려온다. 360도 회전하는 케이블카로 환승하는 승차장이 높은 곳에 있다. 대단한 설치 건물이다. 케이블카도 명물이지만 케이블카 승차장도 크고 위대한 명물이다. 티틀리스 알프스 산정 해발 3020m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를 두 번 타고 오른다. 해발 2450m까지는 6인승 케이블카로 오르는데 중간 승차장은 스키 타는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내리지 않고 계속 올라간다. 그 다음 승차장에서 360도 회전 다인승 케이블카로 여럿이 함께 승차하여 산정에 올랐다. 티틀리스 알프스 산정은 말 그대로 알프스 산맥의 최고단 봉우리다. 눈과 하늘만이 가득 메운 해발 3020m의 고지에 오른 것이다. 사방에는 눈 절벽과 빙벽이 계곡을 이루고 푸른 기개로 자란 설중 나무들이 참으로 용감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람만이 숨 쉬고 사는 곳, 생명이 머물지 못하는 곳에 인간이 오른 것은 신의 따스한 손길로 이끌려 가능한 것이다. 돌아가면 무어라 전할까. 가슴이 멎을 만큼 황홀하더라고, 나의 혼을 하얗게 흔드는 환상의 영역이라고, 아니 나의 영과 육을 강하게 키우는 신의 눈물 고운 성역이더라고 전하리라. 영하 6도, 바람이 세차긴 하지만 눈 속 불멸의 고요다. 알프스의 눈도 뭉쳐서 만져보고, 산 아래로, 산 위로, 넓은 시선으로 고운 풍경을 담았다.
하얀 고혹의 정수리에/ 세상을 강하게 키우는 용기를 이고 서서/ 만져보라고, 쥐어보라고, 뒹굴어보라고/ 빙벽에 목숨을 매달고 사는/ 한 줌의 눈일지라도/ 끝없는 포용의 알프스를 닮아/ 바람과 구름이 훑고 간 아픔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이 어루만지는/ 해발 삼천이십 미터, 경계선 너머의 고지/ 눈 속 불멸의 고요/ 돌아가면 무어라 전할까/ 가슴이 멎도록 황홀하더라고/ 나의 혼을 뜨겁게 흔드는 환상의 영역이라고/ 아니, 나의 영과 육을 보석으로 제련하는/ 신의 눈물고운 성역이더라고 전하리라/ 고뇌를 하얗게 태운 융단을 깔아/ 알프스 영봉은 보드랍더라고/ 가슴으로 외치리라/ 찬란한 인내의 꽃이 살더라고 두고두고 외치리라 -김윤자 시[알프스 티틀리스 산정] 전문
* 알프스 빙하 동굴
스위스 산꼭대기의 날씨는 예측을 못한다. 땅 아래에서 해가 떠도 산정에는 비가 오기도 하고, 그 반대 현상도 있다. 내가 오른 그날의 날씨는 땅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졌는데 산정은 맑았다. 참 좋은 일기를 만난 것이다. 4월의 평지 기온은 영상인데 산정은 영하 6도, 온도 차이는 크다. 티틀리스 산정에서 빙하 동굴에 들어갔다. 빙산의 빙벽을 깎아 만든 길을 따라 들어갔다가 돌아 나오는 빙하 동굴 체험이다. 요술의 집을 연상케 한다. 도깨비가 나올 것 같은 깜깜한 미로, 휘어진 벽을 따라 돌 때 푸른 빛, 붉은 빛이 현란하여 놀라게 하기도 한다. 빙벽에 작업해 놓은 전깃불이며 조각상들이 대단히 아름답다. 산봉우리 빙하를 이용한 조각공간이다. 길도, 천정도, 벽도 모두 시리도록 아름다운 얼음이다.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집이다. 생명이 거하지 못하는 곳에 신은 가옥을 허락하고 얼음 조각상으로 목숨을 부활시킨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차갑고 무섭지만 그 곳에 들어가는 순간 빙벽을 타고 흐르는 시린 꽃빛이 휘휘 돌고 돌아 알프스의 요정이 된다.
* 회전 케이블카에서 본 알프스
알프스 티틀리스 산정에서 둥근 케이블카를 운전기사가 내부 중앙에서 조정하며 내려간다. 알프스 산정을 오르내리는 360도 회전 케이블카는 수십 명을 태우고 빙그르 한 바퀴씩 돌며 알프스 산맥 곳곳을 관람시킨다. 설산의 계곡, 잘 보이지 않는 섬세한 부분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단애의 설벽, 두렵다기보다는 성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거룩한 저 고지에 무엇이 살까. 눈이 쌓이고, 얼음이 쌓여 하나의 곧은 생명처럼 뿌리를 박은 빙벽이 소슬하다. 산줄기를 타고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고운 풍경을 더해준다. 어른에서 아이까지 요정인양 줄줄이 내려온다. 눈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다시 수직과 수평 사이로 길게 늘인 직선의 줄을 타고 내려오는 케이블카로 바꿔 타고 내려올 때는 울창한 침엽수림과 하얀 설경이 장관이다. 지상 가까이로 오면서 더욱 우람한 상록수가 하늘 높이 오른다. 엥겔베르그 마을 풍경도 곱게 보인다. 케이블카에서 보는 알프스 산맥, 대단한 위용이다.
햇살까지 미끄러져 내리는 영토/ 원죄라도 탕감 받을/ 통곡의 빙벽에/ 예리한 칼날로 켜켜이 쌓인 시간을/ 목울대가 베이도록 마시면서/ 태고의 적멸로 초대하는 거룩한 산/ 동그란 기계의 틀에 수십 명이 들어앉아/ 소슬한 빙하 계곡을 빙그르르 돌고 돌 때/ 깊은 속살까지 드러내는 나신의 알프스/ 허물어진 가슴 벽에/ 생명처럼 키우는 얼음 뼈 기둥을 바라보며/ 누가 미물이 아니라 하겠는가/ 누가 목숨이라 하겠는가/ 다 버리고 가란다./ 차가운 두려움일랑 설벽에 사멸시키고/ 뜨거운 오만일랑 / 서걱이는 풀줄기에 태우고 가란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념의 마른 시공/ 그 하얀 우주, 고고한 성역-김윤자 시 [회전 케이블카에서 본 알프스] 전문
* 알프스 소녀 하이디
눈사태를 막기 위해 지은 뾰족한 지붕의 집 주위에는 반드시 창고가 있다. 스위스는 목축업 국가라서 그에 따른 기구가 많고 동물 먹이를 저장하는 곳간이다. 어떤 집은 창고가 집보다 더 크다. 무엇이 집이고, 무엇이 창고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주택도 있다. 스위스 여자들은 젖을 짜고 동물을 기르는 일을 모두 한다. 추울 때는 젖소를 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고, 더울 때는 산 위고 끌고 올라간다.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인데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손이 크고 거칠다. 그만큼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국가를 위해, 개인을 위해 충실한 삶이 아닌가. 그들의 순수한 삶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바로 스위스 여자의 대표적 인물임을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책 속의 그림에서는 아름다운 낭만으로 보았는데, 요들송을 부르며 선녀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먼먼 천상의 여인처럼 황홀하게 다가왔는데, 이곳에서 하이디는 알프스 거친 산줄기를 오르내리며 양치기 하는 보통의 스위스 여자다. 손이 거칠지만 고운 마음씨, 아름다운 눈과 가슴으로 사는 이슬 같은 여인이리라. 저 알프스 산자락 초원 어디쯤에 하이디가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하이디가 아름다웠던 것은/ 따로 있었다./ 긴 머리에 스카프를 매고/ 주름진 긴 원피스를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요들송을 부르며/ 알프스 산의 목동처럼 뛰어다닐 때/ 꿈길 낭만으로 보았는데/ 먼먼 천상의 여인처럼 황홀하게 다가왔는데/ 그것은 스위스 여자의 일상이었다./ 젖을 짜고, 동물을 기르는 일/ 추울 때는 젖소를 끌고 산 아래로 내려오고/ 더울 때는 산 위로 끌고 올라가고/ 그래서 손이 크고, 거칠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사랑 받는 것은/ 그의 크고, 거칠고, 옹이진 손가락 때문이었다./ 저 험악한 산, 알프스의 준령에/ 하이디를 세운 것은/ 바람처럼. 눈처럼 살다 가는/ 스위스 여자의 위대한 표상이다.-김윤자 시 [알프스 소녀 하이디] 전문
* 유럽의 천국과 지옥
지어낸 말이겠지만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바람처럼 흐르는 말이 있다. 유럽의 천국은 이태리와 스위스의 정열적인 사랑이고, 유럽의 지옥은 영국의 날씨, 독일의 음식, 그리고 프랑스 기계, 스위스 여자란다. 이태리와 스위스의 정열적인 사랑이 천국이라는데 이탈리아의 정열은 이해가 가지만, 스위스는 눈의 나라에서 사랑이 정열적으로 이루어질까싶다. 하얀 눈처럼, 파란 초지처럼 순수하여서 사랑도 순수하게 이루어지는가보다. 영국의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독일의 음식은 맛이 없어서, 프랑스의 기계는 고장이 잦아서, 스위스 여자는 낙농업으로 손이 거칠어서 지옥이란다. 영국의 날씨는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있다. 실제로 런던에서 그런 하루를 보냈다. 해가 뜨기 전 얼음처럼 시리도록 차가운 시간도 있었고, 해가 뜨자 포근하여 옷을 벗기도 했고, 흐려서 기분이 찌푸려졌고, 비가 와서 질척거렸고, 어떤 곳에서는 우박이 내린다 했고, 영국에서는 하루의 날씨가 정말 변덕스러웠다. 독일의 음식은 맛이 없다. 국민성 그대로 강직하고 튼실하나 모양새와 맛에서는 퉁명스럽다. 프랑스 기계는 고장이 잘 나기로 유명하다. 스위스 여자는 거친 낙농업과 목축업 일을 하는 연유로 손이 거칠어 남자들이 싫어한다. 모두 사실이더냐고 내게 묻는다면 두 가지는 거꾸로 해석하라고 말하고 싶다. 스위스의 사랑이 천국이라는 것은 알프스 차가운 산맥에 대한 훈훈한 전설이고 프랑스의 기계가 지옥이라는 것은 에펠탑 강인한 철조물에 대한 긴 수명의 예찬이라고. 유럽의 천국과 지옥은 이런저런 사유로 재미있게 농담 삼아 세상에 내어 놓은 소문이리라. 듣고도 못 들은 체 그냥 흘리고 싶은 이야기다.
* 스위스 루체른 목조 다리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던 중 스위스 영토 끝자락에서 수면 위로 뜬 소중한 보물을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긴 루체른 목조 다리가 빙하 호수 한켠에 200m의 긴 몸을 소슬하게 버티고 있다. 이 다리는 특이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 다리다. 다리 위에는 비둘기가 목조 건물 벽에 집을 짓고 살고, 다리 아래에는 백조와 오리가 평화롭게 노닌다. 비가 오는데 사람들은 귀찮음도 아랑곳없이 애련한 명물을 거닐어 보고, 훑어보고, 만져본다. 호수에 뜬 루체른 목조 다리는 다리라기보다는 고전적 향기가 물씬 배인 하나의 명물이다.
* 스위스 빙하 호수
스위스에는 빙하 호수가 300여개나 있다. 그 중 루체른 호수는 스위스 남부 지방 낮은 지대에 있어 한가득 고인 물이 장엄한 물 잔치다. 화사한 날에는 물빛이 장관인데 오늘은 비가 내려 물방울이 여울지는 낭만의 호수다. 스위스의 산은 산맥을 이루고 물은 호수를 이룬다. 스위스의 모든 물은 1급수다. 모든 집에 정화조를 설치하여 수자원을 보호하고 있다. 얼핏 보면 모든 풍경이 다듬어지지 않는 자연의 조화로움이어서 물도 자연 그대로 흐를 것 같은데 아니다. 천연의 물도 좋을 나라에서 위생적인 정화조 설치까지 철저히 하여 좋은 물을 보존하는 노력이 대단하다. 단 한 채의 민가에도 정화조는 꼭 설치한다. 자연환경에 보답하는 철저한 국가다. 루체른 도심의 빙하 호수는 가장자리 도로변에 심어진 가로수가 상당히 크다. 곁에는 루체른 목조 다리가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비가 오는 거리에 전차와 버스가, 택시와 자가용이 연이어 달린다. 구분된 보도를 걸으며 우산 속에서 호수를 감상했다. 상당히 큰 호수다. 수많은 배가 정박해 있다. 차도에는 전차와 수많은 차량들이 호수를 예찬한다. 얼음이 제 살점 깎아 만든 빙하 호수에는 하늘과 땅의 사랑을 흡입하는 뜨거운 열정이 산다.
* 루체른 무제크 성벽
고요한 나라에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 소슬하다. 보기 드문 단단한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 있다. 로마 지배 당시 쌓은 성벽이다. 성문 높은 곳에 쌍독수리가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오스트리아 명가문 합스부르크가의 상징이다. 사방을 다스려온 흔적이 아직도 역력하게 남아 있다. 영구 중립국을 선언한 나라, 스위스에도 군인이 있을까 싶은데 군인이 있다. 20세 남자는 의무이고 여자는 지원이다. 유사시 48시간 이내에 집결하도록 되어 있다. 전쟁 발발 위험이 있는 지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이토록 고요한 나라 스위스에서 듣는 군인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선대로부터 짓밟혀온 잔혹상을 떠올리며 이 땅에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엄습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리라. 루체른 무제크 성벽 언덕 길 아래로는 저층의 아파트가 단단하게 들어서 있다. 결코 높이 올라가지 않는 유럽의 대표적인 아파트 모형이다. 성벽은 참으로 우람하고 높은데 현대식 도심 건물은 잔잔한 향연이다. 아픈 생채기만 빼면 과거와 현실의 아름다운 조화다. 내 조국의 시린 한마디를 이국에서 만나고 있다.
* 빈사의 사자상
성벽을 관람하고 조금 내려오니 낮은 동산에 사자상이 있다. 호수가 있어 건너갈 수 없는 자락에 사자상이 앉아 있다. 사자상은 거대하다. 로마 병사들이 돌로 사람을 죽일 때 스위스 군사 760명이 그것을 막다가 돌에 맞아 죽었는데 그 영혼을 위로하는 동상이다. 그런 의미로 바라보니 사자의 거친 상징보다 사자의 고독한 내면의 상징이 부각된다. 꽃은 아름답게 피었는데 햇살은 따스한데 비참하게 죽어간, 죄 없는 군사들이 빈사의 사자로 눈물겹다. 병사들의 영혼이 고요한 터에서 위로받고 있다.
* 스위스 특식 퐁뒤
루체른 시내 음식점에서 먹은 점심 식사다. 식탁에서 기름 냄비를 불로 끓여 그 안에 생고기를 넣어 익혀 먹는다. 생으로 나온 닭고기와 쇠고기를 긴 포크에 꿰어 넣어두고는 익는대로 꺼내어 먹는다. 상당히 비싼 요리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음식이다. 국물도 없고 빠짝빠짝 익혀 나온 고기를 계속 빼어 먹어야 하는데 나중에는 질려서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스프와 포도주를 곁들여 먹었기에 소화를 시키지, 참으로 위에 부담을 주는 식사다. 고기도 기름진데, 그 고기를 끓는 기름에 익혀서 먹는다. 그런데 이 음식이 스위스 특식 퐁뒤다. 추운 지방에서 높은 열량을 내야 살 수 있기에 만들어낸 음식이다. 맛이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별식을 먹은 셈이다.
우리는 오늘 스위스인이다./ 알프스 산맥에서 거친 호흡으로/ 젖소를 따라, 양떼를 따라/ 질주하다가 넘어지고, 젖통에 고인 젖을 짜고/ 고단한 하루를 마친 충실한 목부다./ 그들이 먹어야 하는/ 기름진 식탁에서 값진 체험을 하고 있다./ 지글지글 끓는 기름 냄비에/ 닭고기와 쇠고기를, 긴 포크에 생으로 꿰어 넣고 익혀/ 무제한으로 먹는 스위스 정통 특식 퐁뒤/ 상당히 비싼 요리인데/ 국물도 없이, 고기만을 계속 빼어 먹어야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겐 고통인 것을/ 그러나 우리는 지금 스위스인이다./ 추운 지방에서 높은 열량을 내야 살 수 있고/ 알프스 산 데드라인까지/ 야생의 가축과 동행해야 하는, 무거운 생을 위해/ 역겨워도 참고 먹어야 한다./ 기름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인들의 값비싼 인내를 먹고 있다.-김윤자 시 [스위스 특식 퐁뒤] 전문
스위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프스의 영봉들, 보석처럼 아름다운 호수, 수천만 년의 웅대한 빙하 등 그 대자연적인 환경만으로도 자손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켈트민족이 살던 선사시대부터 오늘까지 유럽의 교차점에 자리하며 키워온 역사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개발한 부가의 산업이 낙농업이며, 기후 조건으로 섬세해진 손으로 발달시킨 것이 기계정밀산업이다. 작은 나라가 부강한 것은 천연의 요소와 국민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피와 땀의 소산이리라. 스위스 여행 중 아름다운 자연과 평화로운 정서 등 부러운 것도 많았지만, 설산의 날카로운 환경 속에서 국가를 빛내는 그 힘이 큰 교훈으로 다가왔다.
설산 아래 푸른 평화, 스위스-작가와 문학 2013년 제5호 공간테마 스위스 탐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