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증언하는 최초의 고고학 발굴
19세기 초만 해도 사람들은 땅 속을 파헤쳐 옛 유물을 찾는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고학자들이 옛 문헌에 비추어 심증이 가는 지역의 땅 속을 파보기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이렇게 성서에서 실마리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들 덕분에 발견됐다.
* 인류 최초의 고고학 발굴, 코르사바드 / 폴 에밀 보타
1840년 모술에 프랑스 영사관이 들어섰다. 영사로 폴 에밀 보타가 취임했다. 지금은 이라크 땅이 된 모술은 당시 교통의 요지였다. 모술 강 건너 마을에 높다란 둔덕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보타는 저녁마다 말을 타고 둔덕들을 둘러보며 집집마다 점토판이나 골동품을 수소문했다.
이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7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고대 유적에 익숙해진 보타는 모술 시장에서 골동품들을 사들였다. 그의 목적은 유물의 출처를 알아낸 후 유적지 자체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예언자 요나의 무덤 사원이 있는 네비 유누스 언덕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골동품을 캐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보타는 그곳을 발굴하려 했다. 하지만 예언자의 신성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쳤다. 보타는 할 수 없이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퀸지크(양떼) 언덕을 파 보기로 했다.
그는 본디 의사였다.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둔덕을 파 보려는 까닭은, 부친이 역사학자로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독일인 아시아학자 줄리우스 몰이 부탁한 말 때문이었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메소포타미아 벽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쐐기모양 문자가 새겨져 있소. 아마도 수천 년 간 땅 속에 묻혀 있는 엄청난 문명을 풀 실마리가 될 겁니다. 그러니 모술에 가거든 쐐기문자가 새겨진 벽돌을 찾아보고 가능하면 거기 널린 둔덕들을 파보시오.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거기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타는 일꾼을 모아 둔덕을 1년 가까이 팠으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비록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할 만한 보물들을 찾아낼 수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1842년의 니느웨 발굴은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술에서 16㎞ 떨어진 코르사바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우리 마을에는 당신이 찾고 있는 점토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보타는 일꾼 두세 명을 딸려 보냈다. 1주일쯤 지나 일꾼 한 사람이 헐레벌떡 돌아왔다. “삽질을 하자마자 벽이 나타났는데 이상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더군요.” 보타는 허겁지겁 말에 뛰어올라 그곳으로 달렸다.
* 최초의 발굴품,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
몇 시간 뒤 그는 그 때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유물들을 캐냈다. 턱수염이 무성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짐승의 몸뚱이였다. 그것은 이집트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조각 예술이었다. 보타의 가슴은 터질 듯했다. 그리고 발굴현장에 쪼그리고 앉아 조각품들을 모사했다.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며칠 후 탐사대 전체를 코르사바드로 불렀다. 성벽이 드러났다. 땅을 팔 때마다 새로운 성벽이 나타났다. 마침내 보타는 고대 아시리아 왕궁 가운에 하나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 사실을 얼른 파리로 알렸다. 1843년 5월24일이었다. 신문에 아시리아 유적이 발견됐다고 대서특필되었다. 현대 고고학 발굴의 효시가 된 에밀 보타의 ‘땅 파기’에 프랑스는 열광했다.
* 전설을 역사의 세계로 끌어내다
(백향목이라 불리는 레바논 삼나무를 배로 운반하고 있는 수메르인들)
그 무렵 이집트가 인류의 발상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에덴동산은 다만 전설일 뿐이었다. 성경에 무려 152차례나 언급된 아시리아 제국 또한 전설에 지나지 않았다. ‘니네베’라는 말은 성경에 20군데, ‘아시리아’라는 말은 132군데나 나온다. 그런데 그 아시리아가 정말 있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이집트보다 더 오래된 문명이 있었다. 학자들은 긴장했고, 기독교 신자들은 흥분했다.
* 니네베 근교의 여름궁전
(제사장과 사르곤 2세, 루브르 박물관)
프랑스 정부는 거금 14만 프랑을 모아 보내면서 발굴한 유물을 스케치할 화가까지 딸려 보냈다. 아직 사진기가 없을 때였다. 힘을 얻은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메마른 날씨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발굴에 모든 힘을 쏟았다. 보타가 코르사바드에서 찾아낸 것은 기원전 709년 니네베 근교에 세워진 여름 궁전이었다. 성벽이 잇따라 나오고, 방과 정원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돌을 깎아 만든 사람이나 짐승 모습의 ‘조상(彫像)’과 편평한 돌 따위에 어떤 모양을 반입체적으로 돋을새김 한 ‘부조(浮彫)’들도 쏟아져 나왔다.
*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다
(사르곤 왕의 청동 두상)
이 도시는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의 왕 사르곤 2세가 통치할 때의 수도였다. 도시 중심의 거대한 왕궁으로 700개의 방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궁전이었다. 여기 궁전 도서관에서 약 2만 여 개의 고문서를 발견함으로써 아시리아학이 탄생하였다. 왕궁 벽에는 수렵과 전쟁 모습이 채색타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부조로 장식된 성벽의 길이만 사방 1.6 킬로미터에 달하였다. 놀라운 것은 이런 거대 도시가 5년 만에 건설되었다는 사실이다. 3천 년 전 나라가 그토록 짧은 기간에 거대 도시를 완성할 만한 국력을 가졌던 것이다.
* 급류가 삼켜버린 인류 유산들
(축복하는 지니 신)
보타는 30여 톤에 달하는 거상을 4 조각으로 나누어 뗏목에 실었다. 그런데 뗏목이 티그리스 강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수천 년 만에 부활한 아시리아의 석조 신과 왕들은 또다시 현실세계로부터 사라졌다. 그러나 보타는 낙심하지 않았다. 새로운 배를 띄워 더 많은 유물을 파리로 실어 보냈다. 2500년 전 역사에서 사라졌던 대제국의 자취들은 이렇게 해서 루브르박물관에 자리 잡게 되었다.
보타는 1843년부터 4년 동안 발굴에 힘을 쏟았는데 이 유적지의 발굴은 후임자 빅토르 플라스(1858~65)와 미국의 시카고대학 탐험대(1928~35)에 의해 계속되었다. 성곽의 훌륭한 부조, 상아 조각품, 거대한 날개달린 황소상들이 발견되었지만, 가장 귀중한 발견은 BC 1700년경부터 BC 11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아시리아 왕들에 관한 기록인 '아시리아 왕 명부'이다. 보타의 후임인 빅토르 플라스는 톱질을 하지는 않았지만 강에서 마주치는 재앙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856년 루브르에 도착한 유물은 이때도 수백 점 가운데 불과 26점 만이었다.